"김근태 가둔 6.29선언은 기만이다"


1987년 6월 29일 아침 일찍 중대발표가 있다는 예고가 있었다.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가 나와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했다. 정권의 유화조치가 있을 것을 예감하기는 했지만 6.29선언은 그 기대 이상이었다. 6월항쟁에 참여한 국민들에게는 전두환 정권의 항복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위)6·29선언을 기뻐하는 뜻으로 찻값을 무료로 하여 화제가 된 시내 찻집. (아래)6·29선언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양 김씨
 (위)6·29선언을 기뻐하는 뜻으로 찻값을 무료로 하여 화제가 된 시내 찻집. (아래)6·29선언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양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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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은 환호하고 감격했다. 서울 시내 각 언론사들이 일제히 호외를 뿌려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호외를 받아든 시민과 학생들의 표정에는 '이제는 끝났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이제 어떻게 되지?'하는 막연한 불안감도 함께 보였다.

정치권에서도 일제히 6.29선언을 환영하는 발표가 나왔다. 양 김씨는 6.29선언이 나오자 즉각 환영 성명을 냈다. 김영삼 총재는 "국민의 뜻을 받아들인 중요한 결심으로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했고, 김대중 민추협 의장도 "이 나라 정치가 새로운 장을 실현해나갈 조짐을 보게"됐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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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재야의 반응은 많이 달랐다. 민통련에서는 6.29선언은 "군사독재의 부분적 후퇴"로서 "당초 약속과는 달리 많은 민주인사들을 여전히 감옥에 가두고 있다. 따라서 정권의 유화술책이 갖는 기만성을 폭로하는 즉각적인 투쟁을 재개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야당을 향해 "민중이 배제되고 양심수 전원 석방 수배해제가 전제되지 않는 정치 일정은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청련도 기관지 <민중신문>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전두환, 노태우 일파의 직선제 개헌 수용은 "군사독재와 민중 사이에 형성된 비타협적 대치선을 변질시키고자 하는... 고도의 기만술책이며 따라서 군사독재의 완전한 종식을 이룰 때까지 비타협적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정권은 김대중의 사면과 복권을 발표하면서도 민통련, 민청련의 핵심 활동가인 김근태, 이부영, 장기표 등 민주화 운동가들의 석방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6.29선언의 기만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대통령 직선제 수용은 노태우의 구상이 아니라 6월 중순부터 전두환에 의해 검토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나중에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전두환이 오히려 여러 차례 노태우 대표를 설득했고, 노태우는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결국 수용하는 과정을 밟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국민들 앞에는 노태우가 전두환을 압박하여 직선제를 수용하게 한 것처럼 '정치쇼'를 한 것이다.

전두환이 이렇게 한 것은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하더라도 김영삼과 김대중이 분열하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 김씨 동시 출마를 유도하기 위해 김대중을 사면, 복권시켰던 것이다.

  6·29 이후 민청련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양심수 전원석방에 대한 선전전에 나섰다.
 6·29 이후 민청련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양심수 전원석방에 대한 선전전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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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본이 개헌에 무관심했던 이유

6.29선언의 후속 작업으로 7월부터 민정당과 민주당이 개헌을 위한 정치협상을 시작했다. 개헌협상이 진행되면서부터 정국은 급속도로 대선국면으로 바뀌어간다. 국민들의 투쟁 열기는 식어갔고, 국민의 기대와 관심이 급속히 연말 대선으로 옮겨갔다.

개헌협상은 여야 8인 정치협상을 거쳐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8월 말까지 거의 중요한 쟁점에 합의했고, 9월 2일 열린 노태우 김영삼 회담에서는 10월 말까지 국회 통과와 국민투표를 마무리 짓고 12월 20일 전에 대통령선거를 실시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이러한 개헌협상은 민정당과 민주당이 주도했고, 6월항쟁의 주도세력이었던 재야는 개헌문제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국민운동본부에서 헌법개정특위를 설치하고 '헌법개정요강'이라는 자료를 발간하고 8월 24일 '개헌안 쟁점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일부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그 정도에 그쳤고, 주요 관심사는 연말에 있을 대통령 선거 쪽으로 기울었다.

이렇듯 향후 정국에 엄청나게 영향을 미칠 중차대한 개헌협상에서 재야가 소외된 이유는 무엇일까? 정해구 교수는 그 이유를 "우선 제도정치권이 협상의 주도권을 선점하고 있었던 것도 이유였겠으나 재야세력 자체에서도 개헌협상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식이 거의 없었고 스스로 개헌협상은 제도정치권의 몫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투쟁해온 민통련과 민청련이 개헌협상을 소홀히 했던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7~8월에 발행된 민통련의 <민중의 소리>나 민청련의 <민중신문>에도 여야 개헌협상에 대한 비판이나 구체적 개헌 내용에 관한 제언이나 주장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국본 지도부가 스스로를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 근본 원인이었다. 그래서 개헌협상 과정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국민들도 재야를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러한 한계는 바로 이어진 양 김의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6.29선언에 대한 민청련의 입장과 대응

6.29선언 발표가 있던 다음 날 오전, 민청련 중앙집행위원회가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 맞은편 골목길 안에 있는 조직위 사무실에서 소집됐다. 6.29선언의 의미와 향후 정국 변화를 분석하고 민청련의 활동방향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청련 집행부의 인식도 민통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따로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이때 논의된 내용들이 당시 지하에서 선전부가 발행한 <민중신문>에 반영돼 있다.

<민중신문>은 6.29선언의 기만적 본질을 지적하고, "군사독재의 완전한 종식과 민주 헌법과 민주정부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 비타협적 투쟁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기만적, 형식적인 민주화 조치에 의해서나마 어느 정도의 정치적 공간이 열릴 것이며, 이를 이용해 각 부분, 부문, 지역별로 대중조직과 대중투쟁을 활발히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투쟁은 기층 민중의 생존권 요구에 기반 해야 하고, 이 대중투쟁을 통한 기층민중의 조직화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정국이 여야 개헌협상 국면으로 전환하면서 공개활동 영역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지하에서 활동하던 민청련도 변화된 정세에 맞춰 활동 패턴을 바꿀 필요가 생겼다. 무엇보다 공개지도부가 새로 구성돼야 했다.

 (위) 흥사단에서 개최한 석방청년학생 환영 및 양심수 전원 석방?수배자 전원해제 쟁취 결의대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민청련 간부 남근우. (아래) 명동성당에서 개최한 ‘구속청년학생협의회 창립대회 및 양심수 전원·즉각 석방 결의대회’에서 사회를 보는 김병곤 민청련 부의장
 (위) 흥사단에서 개최한 석방청년학생 환영 및 양심수 전원 석방?수배자 전원해제 쟁취 결의대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민청련 간부 남근우. (아래) 명동성당에서 개최한 ‘구속청년학생협의회 창립대회 및 양심수 전원·즉각 석방 결의대회’에서 사회를 보는 김병곤 민청련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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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7월 김병곤 상임위원장 구속으로 시작된 민청련에 대한 탄압은 김근태 전 의장 등 주요 집행 간부 전체의 구속과 수배로 이어져 민청련의 공개활동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민청련은 지하로 들어가 김희택, 장준영, 이범영 등 수배 간부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유지하고 [민중신문]과 선전물을 통한 선전활동을 꾸준히 지속했다. 그러나 공개활동이 중단된 상태에서 활동력은 저하되고, 대외적 영향력이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공개정치투쟁단체로 출범한 민청련으로서는 비정상적 상황이었고, 정상상태로 하루빨리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1986년 가을 7차 총회 이후 권형택, 김종복 등 석방된 간부 중심으로 공개활동을 일부 복원했으나 창립 초기와 같은 대외적인 정치력을 발휘하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고, 주로 민통련 중심의 재야 상층연대와 비공개 노학청 연대를 유지하는 정도였다.

6.29선언 당시에는 구속된 간부들 중에서 김근태 전 의장과 김병곤 전 상임위원장을 제외하면 대체로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어 있었다. 1985년 9월 말 구속되었던 최민화 전 상임위원장은 1년 반 형기를 만기를 채우고 1987년 4월에 석방됐다. 그러나 부인 박혜숙이 위암이 발병하여 집안을 돌보느라 운동으로의 복귀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6월항쟁 당시에는 을지로 인쇄 골목에서 인쇄업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 같은 시기에 구속되었던 전 대변인 김희상도 최민화와 비슷한 시기에 대구교도소에서 석방됐다. 그러나 석방 후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서 요양 중이었다.

수배된 간부들 중에는 박우섭이 가장 먼저 체포돼 징역을 살고 나왔다. 1986년 3월에 체포돼 1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8월에 석방됐다. 석방 후 활동반경을 민청련보다는 민통련 쪽으로 두고 1987년 2.7투쟁, 3.3투쟁, 6월항쟁 초기에는 민통련 간부로 역할을 했다.

김희택은 민청련 언더지도부로 쭉 활동하다가 1987년 초 체포됐지만 4개월만인 4월 3일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고향에서 당분간 몸을 추스르고 요양하며 지내고 있었다. <민중신문>을 만들다 1986년 체포됐던 연성만도 4월 22일 1년 징역을 다 채우고 출소했다. 장준영은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집안 사정으로 1987년 초부터 민청련 활동을 잠시 접고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1987년 7월 1일 정부가 6.29 선언의 후속조치로 대규모 사면 복권과 구속인사 석방을 단행했다. 그 결과 7월 10일 김대중을 비롯한 2355명에 대한 사면 복권이 이루어졌고, 357명의 시국사범이 석방됐으며, 270명의 수배가 해제됐다. 민청련 출신으로는 최민화, 홍성엽, 강구철 등이 복권됐고, 장영달, 김병곤 등이 석방됐다.

김근태 석방 투쟁

그러나 김근태, 이부영, 장기표 등 재야의 핵심인물 3인은 여기에서 제외됐다. 수배자 중에서도 민통련 민청련 출신자 상당수가 여전히 수배가 해제되지 않고 있었다. 민청련 출신으로는 이범영, 박계동, 송병춘, 유기홍, 양재원 등이 여전히 수배상태였다.

따라서 선별이 아닌 무조건 전원 석방과 전원 수배해제는 6.29 직후 가장 당면하고 긴급한 과제였다. 그래서 민청련은 7월 16일 '민주화에 선별은 있을 수 없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고, 7월 22일 흥사단에서 민청련 등 6개 청년단체 공동주최로 열린 석방자 환영회를 열었다. 환영회 제목에 '석방청년학생 환영 및 양심수 전원 석방·수배자 전원해제 쟁취 결의대회'라는 긴 명칭을 사용했는데, 당시 민청련의 문제의식을 보여준 것이었다.

  (왼쪽) 선별 석방을 비판하는 민청련 성명서. (오른쪽) ‘6.29선언’에 대한 민청련의 입장을 밝힌 [민중신문] 기사.
 (왼쪽) 선별 석방을 비판하는 민청련 성명서. (오른쪽) ‘6.29선언’에 대한 민청련의 입장을 밝힌 [민중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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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2년 형기를 다 채우고 만기가 얼마 남지 않았던 김병곤이 춘천교도소에서 출소했다. 김병곤은 거듭되는 감옥살이로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을 본인이 느끼기 시작했지만 석방되자마자 몸을 돌볼 겨를 없이 즉시 운동 일선에 뛰어들었다. 석방된 청년 학생 중심으로 서울지역출옥자동지회(약칭 서출동)가 결성됐는데, 김병곤은 여기에서도 지도적 역할을 맡게 된다.

김병곤은  출옥한 다음날부터 민주화의 계속 추진과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를 조직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동분서주했다. 그의 건강상태를 염려한 가족과 친구들이 얼마간이라도 요양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의 강한 투지를 꺾을 수 없었다.

이때 김병곤과 같은 날 석방돼 서출동에서 활동한 학생운동가들이 후에 민청련으로 대거 가입했다. 물론 김병곤의 영향이 컸다. 신기동, 김민석, 고진화, 김택수, 윤태일, 이종주, 홍용기, 고훈, 박희승, 남상기, 공병훈, 공영운, 최영림  등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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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횃불, 분노한 민중을 막을 순 없었다


전두환 정권의 '호헌' 선언은 국민 대중에게 좌절감과 분노를 가져다주었다. 민심이 소용돌이쳤다. 그 소용돌이를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더 한층 격화시켰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돌았다.

'국민운동본부로 집결하라'

속으로 끓고 있던 긴장감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밖으로 터트렸다. 국본은 5월 27일 정식으로 결성됐다.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해온 운동권, 종교계, 야당 정치세력의 3자가 군사독재 정권의 '호헌'을 철폐시키기 위해서 단결한 반독재 연합전선 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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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본 임원진은 이 3대 세력의 대표자들로 구성됐다. 공동대표 65인은 민통련 8인, 민가협 5인, 정치인 8인, 개신교 6인, 언론출판 5인 대표 등으로 이뤄졌다. 민청련은 민통련 가입단체 자격으로 국본에 참여했다. 공동대표 중에는 청년대표로 김근태가 선임됐고, 상임집행위원 30명 가운데에는 김희택 의장이 청년 몫으로 참여했다.

한편 국본은 각 단체에 상근자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민청련에서는 최성웅 홍보부장을 보냈다. 최성웅은 6월항쟁 내내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있는 국민운동 본부 상황실에서 전국 상황을 집계하며 본부 실무를 담당했다. 필요하다면 지방에 내려가 지방 상황을 체크하기도 하고 본부 상황도 알려주곤 했다.

민청련은 6월민주항쟁 내내 투쟁의 중심은 국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청련의 기관지 가운데 하나인 <민중신문> 논설을 통해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모든 민주세력이 하나로 뭉친 '본부'의 결성은 그 자체가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동시에 경계심도 표명했다. "언제 타협할지 모르는 민주당 등 여러 세력이 모여 있으므로 아직은 투쟁의 강력한 중심을 이루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독재타도를 위해 하나의 세력으로 강철같이 결집하여 싸울 필요가 있으며, 그를 위한 구심점이 바로 '국본'이라고 천명했다.

 (왼쪽)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창립선언문과 함께 만든 결의문. 이 결의문 내용은 이후 6월항쟁 당시 행동지침의 기초가 되었다. (가운데) 3쪽에 달하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명단 중 집행위원 청년부문에(밑줄 그은 곳) 민청련 집행부가 포함되어 있다. (오른쪽) 이른바 6·10대회를 알리는 전단지 앞면
 (왼쪽)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창립선언문과 함께 만든 결의문. 이 결의문 내용은 이후 6월항쟁 당시 행동지침의 기초가 되었다. (가운데) 3쪽에 달하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명단 중 집행위원 청년부문에(밑줄 그은 곳) 민청련 집행부가 포함되어 있다. (오른쪽) 이른바 6·10대회를 알리는 전단지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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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본, 6월항쟁의 횃불을 들다

국본은 요구 조건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내걸었다. 국본의 선언문은 "직선제 개헌은 단순히 헌법상의 조문 개정을 뛰어넘어 유신독재 이래 빼앗겨온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생활 영역에서 기본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며, 무엇보다도 '정부선택권'을 국민이 되찾음으로써 정통성 있는 민주정부의 수립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국본은 대중시위를 주도했다.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사건을 규탄하는 시위를 개최하겠다고 선포했다. 우연하게도 6월 10일은 집권당인 민정당이 전당대회를 열어 차기 대통령 후보를 뽑는 날이었다. 그날, 잠실체육관에서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개회가 열렸고,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자로 선출됐다. 잠실에서 전두환과 노태우가 두 손 맞잡고 환히 웃은 그 날 오후에 국본이 주도한 '고문살인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개최됐다.

국민대회는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규모로 전개됐다. 서울에서만 수십만 군중이 규탄대회에 호응하고 나섰다. 분노의 민심이 분출했다.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마산, 대구, 울산, 경주, 안동, 광주, 전주, 군산, 대전, 인천 등 전국 22개 도시에서 백만이 넘는 군중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대한민국 전체에 독재타도를 향한 거대한 물결이 일어났다.

전두환 정권은 당황했다. 탄압의 고삐를 조이기로 결정했다. 먼저 6.10 대회를 이끈 국본을 겨냥했다. 시위를 주도한 국본 핵심간부 13명(박형규, 양순직, 김명윤, 계훈제, 지선스님, 제정구, 오충일, 박용오, 김병오, 이규택, 유시춘, 배영균, 송석찬) 전원을 구속시켰다. 그리고 시위 현장에서 연행한 141명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위) 이른바 6·10대회가 열릴 예정이던 시청앞 성공회대성당을 봉쇄한 경찰 병력과 국민운동본부 측에서 성당 안에 내걸은 현수막. (아래) 6월 10일 성공회성당에서 제공한 버스를 탑승한 국본 대표들이 버스째로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김병오 국회의원, 국본 상임위원장 박형규 목사, 계훈제 민통련 부의장
 (위) 이른바 6·10대회가 열릴 예정이던 시청앞 성공회대성당을 봉쇄한 경찰 병력과 국민운동본부 측에서 성당 안에 내걸은 현수막. (아래) 6월 10일 성공회성당에서 제공한 버스를 탑승한 국본 대표들이 버스째로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김병오 국회의원, 국본 상임위원장 박형규 목사, 계훈제 민통련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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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민중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전국 6만 명의 경찰병력으로는 수백만의 분노한 시위 군중을 막아낼 수 없었다. 시위군중은 한밤중까지도 흩어질 줄을 몰랐다.

결국 시위 군중은 농성 투쟁으로 들어갔다. 6월 11일부터 16일까지 서울 시내 한 가운데에 위치한 명동성당에서 6백여 시민들의 농성투쟁이 전개됐다. 명동을 둘러싼 도심 곳곳에서 경찰의 삼엄한 경비를 무릅쓰고 농성을 지지하는 시위운동이 시도됐다. 6백여 명의 용기 있는 시민들이 참여한 명동성당 농성 투쟁은 6월 민주항쟁의 횃불을 보존하고 확산하는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

가두 군중시위가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소강상태로 접어들 것인가, 명동성당 농성은 국면의 귀추를 결정하는 정국의 초점이 됐다. 온 국민의 시선이 명동에 몰렸다. 그곳엔 민청련 사무국장 김성환이 민청련을 대표해 참가하고 있었다. 그는 농성자들에게 외부 국본의 논의 상황 등을 전달하고, 또 한편으로 민청련 지도부에 농성 현장의 분위기를 알려주었다. 

명동이 버텨주는 바람에 전국에서 대중 시위가 그치지 않고 계속됐다. 경찰의 집계에 따르면, "6월 10일부터 26일까지 17일 동안 전국에서 2145회의 시위에 83만 명 참가, 최루탄 발사 35만1200여발에 연행자 1만7244명, 경찰관서 262개소 공공기관과 민정당사 35개소 피습"이 있었다. 하지만 경찰의 통계치는 의도적으로 축소한 것이었다. "실제 시위 참가자 수는 경찰 집계보다 최소한 5~10배에 달했다"는 게 중평이었다. 대중의 진출은 혁명적 시기를 방불케 했다. 민청련 내부에서는 "대중의 진출은 신식민지 지배체제 전체를 위협하는 '위험수위'에 육박했다"는 관측까지 나왔다.

이와 같이 국민의 대중투쟁이 분출한 데에는 그 분노를 결집 계기를 제공한 국본의 기여가 컸다. 국본은 6월 18일의 '최루탄 추방의 날' 시위, 6월 26일의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 등을 연이어 계속 주관했다.

 1.6월 10일 도심지에서 명동까지 쫓겨들어간 시위대가 성당 앞길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 2.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시작한 농성은 6월항쟁의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3.명동성당 농성을 응원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 4. 명동성당에서 나와 명동으로 진출하는 시위대
 1.6월 10일 도심지에서 명동까지 쫓겨들어간 시위대가 성당 앞길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 2.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시작한 농성은 6월항쟁의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3.명동성당 농성을 응원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 4. 명동성당에서 나와 명동으로 진출하는 시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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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퇴론과 전진론의 갈등

그러나 국본 구성원들이 일사분란하게 행동했던 것은 아니다. 국민대회의 계속 주최 여부를 둘러싸고 후퇴론과 전진론이 갈등을 겪었다.

시위가 한창 중에 한남동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은밀하게 개최된 국본 상임집행위원회 회의에서 갈등이 표면화됐다. 먼저 야당 정치세력이 대중 시위운동으로부터 철수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기독교 측에서도 그에 동조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자 운동권 대표자들이 적극 나섰다. 민가협을 대표하여 국본 상임집행위원회에 참여한 인재근은 이렇게 회고했다.

"6월 26일 집회에 대해 논의하는데, 기독교하고 정치권이 빠지려고 슬슬 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독기를 품고 난리를 쳤어요. 황인성씨가 기독교 대표로 나왔는데, 자기 개인은 계속하고 싶은데 자기네 편 눈치를 보면서 의견 표명을 안 하고 기권을 하는 거예요. 내가 나서서 목숨을 걸 각오로 악을 썼어요. 그래서 겨우 26일 집회가 성사됐어요."

후퇴론이 나온 데에는 나름대로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전두환 정권 측에서 야당 정치세력과 타협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에게 그를 해제할 수도 있다는 유화책이 제시됐고, 김영삼에게도 정치활동의 여지를 확장할 수 있는 타협안이 주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영삼 계열과 김대중 계열에서 파견되어 나온 대표자들이 더 이상의 국민대회 개최를 망설인 데에는 이러한 곡절이 놓여 있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군사독재 정권의 내부 동향을 감안해야 한다는 현실론 때문이었다. 4.13 호헌 조치 이후 정권 내부에서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장세동 안전기획부장을 필두로 하는 강경파가 수세에 몰렸다는 것이다.

4.13 조치가 국민적 반대에 부닥친 데다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조작 사건이 폭로됨에 따라 강경파의 입지는 불리하게 됐고, 그 대신에 노태우를 필두로 하는 온건파가 미세하나마 우위를 점하게 됐다는 관측이 돌았다. 시위 진압을 위해 전두환이 소집한 전군지휘관 회의가 성원 미달로 무산됐다가 간신히 재소집됐다는 소문도 있었다. 임기 말의 통치권 누수 현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정세판단이 국본 내부에서 전면적인 공세를 망설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망설임을 저지하고 '6.26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을 관철한 것은 민주화운동권 대표자들의 분투 덕분이었다. 이날 전국의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특히 광주에서는 약 30만의 시민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서울에서만도 67곳에서 연인원 25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해방 이후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인 대규모 시위라는 평가마저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서울에만 2만5천 명의 경찰 병력을 배치했고, 전국에 5만6천여 명의 경찰을 동원해 원천봉쇄에 들어갔다. 도심지는 최루탄 연기로 뒤덮였고, 화염병이 아스팔트에 날아들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는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1.6월항쟁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사진은 대구은행 본점 앞. 2.6월 26일 평화대행진 당시 부산시. 3.6월 26일 전주 중앙성당 앞. 4.6월 10일 광주시 동구 중앙로 중앙대교 부근
 1.6월항쟁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사진은 대구은행 본점 앞. 2.6월 26일 평화대행진 당시 부산시. 3.6월 26일 전주 중앙성당 앞. 4.6월 10일 광주시 동구 중앙로 중앙대교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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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선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전두환 정권 앞에는 두 가지 갈림길이 놓였다. 하나는 군 병력을 투입하여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수용하여 선거전을 통해 정권을 재창출하는 길이었다.

전자는 강경파의 구미에 맞는 방안이었지만 대규모 사상자를 낼 수밖에 없는 유혈의 길이었다. 미국 정부의 동의도 얻어야 한다는 점에서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후자는 온건파가 선호하는 방안이었다. 민중의 요구를 일부 수용함으로써 첨예한 투쟁을 희석시키고, 야당 정치세력과 종교계를 투쟁 대열에서 이탈시킴으로써 반독재 연합전선을 와해시킬 수 있는 방안이었다.

마침내 6월 29일,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직선제 수용 카드를 제시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시행하고, 김대중의 사면 복권을 단행하며, 양심수를 석방하고 언론 자유를 보장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른바 6.29 선언이었다. 이로 인해 한편으로는 현행 헌법에 의한 대통령선거는 불가능하게 됐고, 다른 한편으로는 집권 세력이 대중 투쟁을 잠재우고 계속 통치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6.29 선언은 2중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6월민주항쟁이 승리를 거뒀다는 표시였다. 이른바 '호헌'을 통해서 군사독재 정권을 연장하려고 했던 저들의 기도를 파탄시켰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6.29 선언은 군사독재 정권을 뒷받침해 온 지배체제의 유지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독재자와 그 지지자들이 대통령선거 경쟁을 통해서 기득권을 연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했던 것이다.

민청련은 지도부는 국본에의 참여를 통해, 회원들은 연일 계속된 가두시위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시민들의 선두에 서서 6월 민주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민청련 회원들에게 6월항쟁의 승리에 기여와 헌신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항쟁의 시작부터 종결까지를 현장에서 똑똑하게 목격한 그들은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

 1.7월 9일 이한열 장례식 상여 행렬이 연세대학교에서 시청으로 출발하고 있다. 2.장례식에 참석한 문익한 목사가 길이 기억될 추도사를 하고 있다. 3.석방된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7월 17일 명동성당에서 구속청년학생협의회 창립대회를 열고 있다. 왼쪽부터 김병곤 민청련 부의장, 지선, 진관, 목우 스님. 4.6월항쟁에서 가두시위에 참가한 양경숙 민청련 회원
 1.7월 9일 이한열 장례식 상여 행렬이 연세대학교에서 시청으로 출발하고 있다. 2.장례식에 참석한 문익한 목사가 길이 기억될 추도사를 하고 있다. 3.석방된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7월 17일 명동성당에서 구속청년학생협의회 창립대회를 열고 있다. 왼쪽부터 김병곤 민청련 부의장, 지선, 진관, 목우 스님. 4.6월항쟁에서 가두시위에 참가한 양경숙 민청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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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의 6월항쟁에 대한 반성

6월 민주항쟁을 되돌아보는 내부 회합에서 민청련은 심각한 반성의 뜻을 표명했다. 항쟁의 한가운데에서 과연 적절하게 행동했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 민청련은 부끄러워했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민중의 진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고 고백했다.

민청련은 스스로 물었다. "전국적 규모로 광범하게 전개된 6월 대중투쟁 속에서 과연 우리 민청련이 대중의 선두에 서서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수행하였는가", "군부독재에 저항하여 끓어오른 대중의 역동성에 적확한 투쟁의 방향을 제시하였는가", "투쟁의 공간 속에서 대중과의 강고한 결합을 획득하였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어느 것 하나 뼈저린 반성을 요하지 않은 게 없었다. 민청련은 6월 투쟁 속에서 스스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 가에 관해서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다고 느꼈다. 시위 대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 대중에 대한 지도적 역할을 명확하게 설정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7월 9일, 6월 9일 연세대 교내 시위 도중 경찰의 최루탄 직격탄에 맞아 사망한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 및 추도대회'가 열렸다. 모교인 연세대를 떠나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이른 장례행렬에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백만 군중으로 가득 찼다.

이날 장례식장에는 6.29 조치를 계기로 석방된 민주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민통련의 문익환 목사, 민청련의 김병곤을 비롯한 투옥 인사들이 석방되자마자 이한열의 장례식장에 찾아온 것이었다. 장례식에서는 그렇게 이제 막 출소한 사람들을 각 교도소 별로 소개했다. 시청 앞 광장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그것은 새로운 조건 속에서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새로운 사명이 이들에게 부과되고 있음을 뜻하는 상징의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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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선 도로 장악, 6월항쟁의 막이 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구호가 있다. 혁명적 시기에 특히 그렇다. 3.1운동 때에는 '조선독립만세!'가 그랬고, 광주민중항쟁 때에는 '전두환은 물러가라!'가 그랬다. 1987년 6월항쟁 때에도 수백만 군중이 소리 높여 외치던 구호가 있었다. 바로 '호헌철폐, 독재타도!'. 그러나 이 구호가 대중들의 합창이 돼 울려 퍼지기까지 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필요했다.

이범영 집행부의 성립

그해 1987년 3월이었다. 폭풍전야라고나 할까. 민청련은 다가올 격변을 앞두고 신발 끈을 고쳐 맸다. 8차 총회가 열렸다. 합정동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비공개로 개최된 이 총회는 6개월 전에 있었던 7차 총회의 정책과 기구를 별다른 변모없이 승계하는 역할을 했다. 지난 총회가 대대적인 구조 개편을 수행한 데 비하면, 이 총회는 기존 체계와 정책을 그대로 이으면서 미비점을 보완했다.

전혀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목할 만한 집행부의 변화가 있었다. 최상층 집행기구인 중앙집행위원회는 그대로 존속하고 약간의 인원만 교체됐지만, 3인 공동의장 가운데 두 사람이 직무를 담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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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영 의장은 개인사정으로 부득이 자리를 비워야 했다. 개인사정이란 그의 고향 집이 댐 공사로 인해 수몰 지경에 이른 것. 이를 해결할 시간이 필요했다. 연성수 의장은 문화운동 쪽으로 활동 방향을 바꿨다. 한국문화운동연구소와 신명문화연구소 설립이 그의 기여를 거쳐 이뤄졌다. 생활문화운동연구소를 토대로 생활문화운동단체 질경이를 만들고, 후자를 토대로 전국 규모의 단체 노동자문화운동연합을 결성했다. 그 때문에 8차 총회에서 공동의장체제는 사실상 이범영 의장 단독체제와 다름없었다.

중앙집행위원회에는 권형택, 남근우, 김종복, 이승환, 임태숙, 윤형기, 유기홍, 김성환이 선출됐고, 운영위원회는 위원장 권형택, 사무국장 겸 사업부장 김성환, 총무부장 이난현, 홍보부장 최성웅, 여성부장 이선희, 빈민부장 남근우로 짜여졌다.

 8차 총회에서 구성된 공동의장 1.이범영, 중앙집행위원 2.권형택 3.김종복 4.유기홍 5.남근우 6.김성환 7.임태숙 8.이승환
 8차 총회에서 구성된 공동의장 1.이범영, 중앙집행위원 2.권형택 3.김종복 4.유기홍 5.남근우 6.김성환 7.임태숙 8.이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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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다지고, 밖으로 뻗어나가고

정책 노선도 이전에 비해 차이가 적었다. 8차 총회의 기치는 '대중노선의 관철과 그를 통한 조직운동의 발전'이었다. 7차 총회에 뒤이어 대중노선을 좀 더 강조했다.

이의 실현을 위해서 몇 가지 활동 목표가 설정됐다. 지역위원회와 직장인 조직을 확장하고, 대중투쟁을 이끌 수 있는 전술을 개발하는 데에 힘을 쓰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안으로는 정회원 제도를 강화하고, 민주집중제를 시행하며, 정책 노선을 더욱 명백히 하기로 했다.

이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맨 첫 번째 항목이었다. 민청련의 조직 기반을 지역과 직장으로 확장하려는 노력을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설정했다. 종래와 같이 학생운동 출신자들만으로 회원이 충원되는 것을 피하고, 독자적인 재생산 시스템을 갖추려는 시도였다.

이범영 집행부는 독재정권을 패퇴시킬 수 있는 무기는 대중투쟁이라고 생각했다. 광범한 대중을 반독재 투쟁으로 이끄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서 상층연대와 하층연대, 두 가지 코스의 연대활동을 병행하기로 했다. 상층연대란 재야 민주화운동과 종교권과 야당 정치세력을 결속하는 사업이고, 하층연대란 노동자, 학생, 청년 운동을 결속하는 사업을 가리켰다.

민청련은 상층, 하층 연대를 동시에 추진하기 위해 각각 대표자를 파견했다. 민통련 등을 파트너로 하는 상층 연대 테이블에는 주로 권형택 운영위원장이 나갔다. 그는 민청련을 대표하여 민통련과 종교권을 묶고 더 나아가 야당 정치세력과 연결하는 일에 종사했다.

노학청 연대 테이블은 최성웅 홍보부장이 담당했다. 노동운동과 학생운동과의 연계는 물론이고, 기독교, 불교, 가톨릭 청년단체 등과의 청년 연대 테이블에도 나갔다. 이렇게 민청련은 연대 운동을 현실화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매개자 역할을 했다.

민청련 집행부가 중시한 또 하나의 당면 사업은 '전국적 청년 조직을 위한 기초 마련'이었다. 민청련을 전국 단체로 발전시킨 전국적 범위의 청년대중단체 결성을 전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나중에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 한국청년단체협의회 등과 같은 전국 규모의 청년단체를 발족시키는 디딤돌이 됐다.

전두환 정권의 강경책, 4.13 호헌 선언

8차 총회가 끝난 뒤였다. 정치정세에 심각한 변동이 일어났다. 4월 13일, 전두환은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개헌 논의를 지양"하겠으며, "현행 헌법에 따라 임기만료와 더불어 내년(1988년) 2월 25일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호헌 선언'이었다.

'호헌 선언'은 군사독재 정권이 야당 정치세력과 더 이상 타협을 모색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또 지난 2년간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추구되어 온 개헌운동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을 의미했다.

전두환의 선언은 큰 충격을 몰고 왔다. 이것은 여태껏 저질러온 것보다도 훨씬 더 혹독한 탄압을 가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민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헌 선언'은 국민대중에게 심각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4.13 호헌조치에 대해 호헌 철폐를 위한 천주교 사제들의 단식이 광주교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위는 4월 28일 광주가톨릭센터에서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7일째 단식중인 18명의 신부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수녀들. 아래는 5월 1일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호헌철폐와 민주개혁을 간구하는 단식기도를 벌이는 명동성당 교육관 모습
 4.13 호헌조치에 대해 호헌 철폐를 위한 천주교 사제들의 단식이 광주교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위는 4월 28일 광주가톨릭센터에서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7일째 단식중인 18명의 신부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수녀들. 아래는 5월 1일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호헌철폐와 민주개혁을 간구하는 단식기도를 벌이는 명동성당 교육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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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4.19에서 5.18로 이어지는 기간에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시위운동에 나섰다. 4월 19일 수유리 묘지에서 민통련 주최로 개최된 4.19혁명 27주년 기념식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4천여 명의 군중이 참가했다. 여기에 참여한 민청련은 '4월혁명 메시지'를 발표했다.

거기에서 호헌철폐 투쟁에 임하는 민청련의 태도를 표명했다. 민청련은 "호헌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과 힘을 합쳐 광범위한 대중투쟁을 조직해 내면서 군부독재의 장기집권음모를 분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야당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그들의 타협성을 비판하면서 "보수야당 세력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자"고 제안했다.

4월 투쟁에 이어 5월 광주항쟁 계승투쟁으로 이어졌다. 민청련의 투쟁에 호응해서 각계 각층에서 저항의 움직임이 꿈틀거렸다. 함석헌을 비롯한 민주인사 28명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개헌 관철을 위한 국민운동협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천주교에서는 각 교구 별로 수십 명의 신부들이 '호헌철폐와 민주개헌'을 요구하며 단식에 나섰다.

각 대학교 교수들도 호헌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명서에 서명했다. 고려대, 광주가톨릭대, 서강대, 성균관대, 서울대 교수들이 행동에 나섰다. 또 소설가와 시인 등 문인 206명의 서명과 선언도 나왔다. 한 마디로 민심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위) 1987년 이화여대에서 경찰의 감시 아래 열린 4월혁명 기념 마라톤. (아래) 수유리에서 민통련이 개최한 4월혁명 27주년 기념식
 (위) 1987년 이화여대에서 경찰의 감시 아래 열린 4월혁명 기념 마라톤. (아래) 수유리에서 민통련이 개최한 4월혁명 27주년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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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

다시 5월 18일이 왔다. 그 날,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는 그날 새벽에 서울 향린교회에서 비공개적으로 진행됐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는 발기모임이 열린 것이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는 민주세력의 광범한 공동 행동기구를 결성하려는 시도였다. 1985년 민청련 탄압에 맞서 형성된 고문공대위,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대책위원회에 뒤이어 다시 한 번 반독재 연합전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날 발기모임에 은밀히 참가한, 민청련 여성들의 맏이 인재근은 이렇게 회고했다.


"릴레이 성명과 농성이 이어져서, 5월 18일 새벽에 향린교회에서 국민운동본부가 탄생됐다. 그 준비모임을 수유리 개나리 산장에서 자주 했었다. 그런데 이전과는 달리 비밀이 전혀 안 새어 나갔다. 그날 새벽에 을지로 지하도를 걸어 향린교회로 가는데,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꼭 레지스탕스가 된 기분이었다.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몇 차례 준비 모임이 있었는데도 비밀이 새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정권의 정보요원이 추적했다면, 이 발기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인재근은 신새벽에 인적 드문 을지로 지하도를 걸으면서 고조된 긴장감 때문에 뒷골이 서늘했던 것이다.

  비밀리에 결성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현판식을 하는 모습
 비밀리에 결성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현판식을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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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공공연하게 이뤄졌다. 박종철 고문사 진상이 조작됐음이 이날 폭로된 것이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상이 축소·조작됐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독재정권이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가리기 위해서 어떻게 거짓을 자행하고 있는지를 생생히 드러냈다.

이 폭로는 5월 투쟁에 기름을 부었다. 이 발표가 나온 후 폭넓은 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민추협을 비롯한 야당 세력에서부터 범 종교계 그리고 사회운동 단체까지 광범하게 참가한 공동행동기구였다. 반독재 연합전선의 맥락을 잇는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5월 23일, 서울시내에서 민통련 주최로 광주항쟁 추모제가 열릴 예정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그것을 허용할 리 없었다. '광주민중항쟁 7주년 범국민 민주영령추모제'는 경찰의 저지로 봉쇄됐다. 하지만 종로 3가를 중심으로 쫓고 쫓기는 끈질긴 가두시위가 계속됐다. 거리에 대량의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2천여 명의 시위대가 형성됐고, 그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소리 높여 외쳤다.

삼엄한 경찰의 봉쇄망을 뚫고 상당한 규모의 군중시위가 진행됐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독재정권의 호헌 조치에 대해서 국민적 반감이 폭넓게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민청련 회원들은 이 시위에 직접 참여했고, 시민들에게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와 조작을 폭로하는 전단을 살포했다.

민청련의 역할은 또 다른 데서도 발휘됐다. 그동안 역점을 두고 추진해 온 상하층 연대사업의 성과가 그것이었다. 당시 대중적 시위운동을 조직할 수 있는 전투적 역량은 오직 학생운동만이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연대 테이블에 참가하는 사회운동과 종교단체 대표자들은 시위에 앞장 설 학생운동을 누가 동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할 때에는 민청련 대표자만 쳐다보았다. 알아서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노학청 연대 테이블에 파견된 민청련 대표 최성웅이 수행한 역할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민청련의 공식 입장을 최대한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이 잘 먹혀들지는 않을 때도 많았다.

왜냐하면 연대 테이블에 나오는 대표자는 실무자이지 정책 결정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성웅은 정보의 소통에 역점을 두었다. 그것이 상층 연대와 노학청 연대를 결합시키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를테면 재야 쪽에서 국민대회를 어떻게 개최할 예정이니, 학생운동 쪽에서는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의논했다. 시위와 집회를 성공적으로 치룰 수 있는 전술적 계획에 관한 정보를 서로 교환했고, 사후에는 공동으로 평가하는 논의를 가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항의 집회부터 6월 항쟁에 이르는 시기에 있었던 크고 작은 대부분의 연합 집회가 이런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민청련은 1987년 5월, 광주항쟁 7주년을 맞아 책자발간, 집회, 시위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왼쪽) 민청련에서 1987년에 제작한 5월 광주항쟁 전단지 (가운데) 1987년 5월에 광주항쟁을 기록한 101쪽 분량의 ‘항쟁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표지 (오른쪽) 광주민중항쟁 7주년 범국민 민주영령추모제 안내 전단지
 민청련은 1987년 5월, 광주항쟁 7주년을 맞아 책자발간, 집회, 시위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왼쪽) 민청련에서 1987년에 제작한 5월 광주항쟁 전단지 (가운데) 1987년 5월에 광주항쟁을 기록한 101쪽 분량의 ‘항쟁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표지 (오른쪽) 광주민중항쟁 7주년 범국민 민주영령추모제 안내 전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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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된 시위가 착착 진행되는 가운데 국민의 분노가 고조되고 있었다. 특히 5월 24일 광주에서 10만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터졌다. 시위 군중은 광주 도심인 금남로 1,2가를 가득 메웠다. 숫자상으로 열세에 놓인 경찰은 밀리게 됐고, 3시 30분 경에는 시위대 저지를 포기하고 도청 방어를 위해 퇴각했다. 시위 군중이 8차선 도로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함성이 치솟았다. "그야말로 7년 전 해방 광주 그대로였다"는 평이 나돌았다.

이렇게 1987년 6월항쟁의 막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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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아시안게임을 왜 반대하는가

민청련 7차 총회가 끝난 뒤 1986년 9∼10월의 가장 큰 이슈는 아시안게임 반대운동이었다. 아시안게임은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됐다. 민청련의 입장은 아시안 게임 저지투쟁이 아니라 반대투쟁이었다. 경기 진행 자체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안 게임이 수반하는 부정적 본질을 폭로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1986년 9월 23일 이화여대 학생들이 아시안게임개최 결사반대 교내 시위를 하고 있다. 아래는 민청련에서 제작한 아시안게임 반대를 담은 여러 가지 전단지와 신문들
 1986년 9월 23일 이화여대 학생들이 아시안게임개최 결사반대 교내 시위를 하고 있다. 아래는 민청련에서 제작한 아시안게임 반대를 담은 여러 가지 전단지와 신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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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에서 발간한 전단지에는 아시안게임이 군사독재정권의 장기집권 획책에 이용되고 있는 점, 국민의 세금 부담을 가중시키는 빚더미 행사라는 점, 기생관광을 조장하는 부도덕한 성격을 갖는다는 점 등이 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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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시안게임 반대운동은 폭넓게 전개되지 못했다. 정부의 떠들썩한 선전이 국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86은 디딤돌, 88은 도약대"라는 표어에서도 보듯이 한국경제와 국위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으로 인해 선양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또 야당 세력이 반대운동에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은 "아시안게임 기간 중에는 정쟁을 멈추자"고 제안했고, 신민당 이민우 총재와 김영삼 고문은 아시안게임 반대투쟁이 옳지 않다고 까지 발언했다.

민청련은 나중에 아시안게임 반대투쟁에 대해 반성했다. 아시안게임이 끝난 지 2주일 뒤에 발표된 창립 3주년 기념대회 결의문에서 "의미 있는 공동투쟁을 성사시키는데 실패했고, 그나마 각 개별 운동체들의 대응도 대체로 소극적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와 대중 앞에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라고 평했다.

잔치가 끝난 뒤 탈을 벗은 전두환 정권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전두환 정권은 자신의 폭압적 본성을 숨김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탄압의 광풍이 불었다. 10월 10일, 서울대 대자보 사건이 터졌다. 서울대 인문대 담벽에 북한의 [민주조선] 기사 내용을 옮긴 대자보가 부착되자, 치안본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에 착수했다.

 10월 10일 서울대 인문관 담벽에 붙은 [민주조선] 대자보
 10월 10일 서울대 인문관 담벽에 붙은 [민주조선]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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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일에는 유성환의원 사건을 일으켰다. 신민당 국회의원 유성환이 회기 중에 "우리나라 국시는 반공이 아닌 통일이어야 한다."고 한 발언을 문제 삼아 체포동의안을 가결시켰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그는 결국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10월 말에는 건국대 사건이 터졌다. 10월 28일부터 4일간 전국 26개 대학생 2천여 명이 건국대학교에서 농성을 벌이다 1289명이 구속된 사건이다. '전국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결성식 도중에 경찰이 대거 교내에 진입하자 건물 안으로 밀려간 학생들이 예상에 없던 농성에 들어갔던 것이다. 농성 4일째 되던 10월 31일에 2대의 헬리콥터까지 동원한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펼쳐졌다.

 1.10월 28일 약칭 애학투련 결성식에 참석한 학생들. 어깨동무를 한 채 행진곡을 부르는 모습에서 비폭력 평화시위였음을 알 수 있다. 2.10월 31일 작전명 '황소30'으로 경찰이 교내로 진입하고 있다 3.토끼몰이식으로 학교 안으로 쫓겨 들어간 학생들이 흩어져 5개 건물에 나뉘어 농성하고 있다 4.헬기와 소방차까지 동원하여 차례차례 학생들을 진압하고 있는 경찰 5.연행된 학생 1,520여 명 중 1,288명을 구속했다. 이는 역사상 최대 구속자 숫자다. 6.경향신문에 실린 당시 상황도. 이는 정권에서 미리 짜놓은 좌경 척결 시나리오대로 연출된 사건이었다
 1.10월 28일 약칭 애학투련 결성식에 참석한 학생들. 어깨동무를 한 채 행진곡을 부르는 모습에서 비폭력 평화시위였음을 알 수 있다. 2.10월 31일 작전명 '황소30'으로 경찰이 교내로 진입하고 있다 3.토끼몰이식으로 학교 안으로 쫓겨 들어간 학생들이 흩어져 5개 건물에 나뉘어 농성하고 있다 4.헬기와 소방차까지 동원하여 차례차례 학생들을 진압하고 있는 경찰 5.연행된 학생 1,520여 명 중 1,288명을 구속했다. 이는 역사상 최대 구속자 숫자다. 6.경향신문에 실린 당시 상황도. 이는 정권에서 미리 짜놓은 좌경 척결 시나리오대로 연출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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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인가. 10월 30일에는 금강산댐 사건을 일으켰다. 건설부 장관이 성명서를 내, 북한이 착공한 금강산댐은 군사전략적 저의에서 건설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방부 장관은 "상류로부터 떠밀려올 200억 톤에 달하는 물이 초당 230여 만 톤의 엄청난 폭류로 돌변해 핵무기에 버금가는 위력으로 한강 유역을 휩쓸"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강산댐에서 내려온 물이 12시간 만에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를 빌미로 삼아 11월 한 달 동안 전국에서 금강산댐 건설에 반대하는 규탄대회가 열렸다. 정권은 방어용 댐으로서 이른바 '평화의 댐' 건설을 표방했고, 대대적인 모금 캠페인을 전개했다. 뒷날 이 캠페인은 거짓말에 기반한 부도덕한 사기극이었음이 드러났다. 1993년 감사원은 이 문제를 감사한 결과 북한의 수공 위협은 거짓이었음을 밝혔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탄압 공세는 그치지 않았다. 11월 11일에는 민통련 해산 명령을 내렸고, 그를 집행하기 위해서 경찰이 사무실에 난입했다. 민청련 회원들은 민통련 사무실 강제 폐쇄 조치를 예상했었다. 그래서 장충동 분도회관 4층에 있는 사무실 사수를 위한 철야 농성에 합류했다. 하지만 쇠망치와 산소용접기를 앞세워 사무실에 난입하는 경찰 폭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11월 12일 새벽 5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 2시간 동안이나 바리케이트를 치고 저항하던 20여명의 민통련과 민청련 회원들은 역부족을 느껴야 했다.


한편으로 비밀결사 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그해 10월 17일부터 이듬해 2월 24일까지 구국학련 사건, 전국노동자연맹추진위 사건, 엠엘당 결성 기도 사건, 반제동맹당 사건, 제헌의회 그룹 사건,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 등을 적발했다는 경찰의 수사결과가 신문 지면을 꺼멓게 물들였다.

민청련은 군사독재의 격렬한 탄압 공세에 결연하게 맞섰다. 민통련 해산명령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민통련 해산 명령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이른바 '해산명령'이란 것은 당시의 악법들에서조차 그 근거가 없었다. 경찰이 들먹이는 '경찰관 직무집행법'에는 사회단체 해산에 관한 규정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폭로했다.

민청련은 각오를 굳건히 했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은 우리에게 가해지는 어떠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임을 다짐했다. "우리는 때릴수록 강해지는 강철이 될 것이다"고 되뇌었다.

 5.3인천사태를 계기로 삼아 시작된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은 민통련 폐쇄를 정점으로 극에 달했다
 5.3인천사태를 계기로 삼아 시작된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은 민통련 폐쇄를 정점으로 극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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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축되는 민주화운동

하지만 거센 탄압은 운동을 위축시켰다. 탄압이 점점 강도가 높아짐에 따라 민주화운동의 활력은 점차 낮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선전력과 대중 동원력이 미약했는데, 강화되는 탄압은 그를 더욱 약화시켰다.

민청련만이 아니었다. 민주화운동 전체가 위축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를테면 1987년 1월 [민중신문]을 만들던 민청련 선전국은 고민에 싸였다. 통상 1면에는 각종 투쟁이나 집회 기사를 배치했었다. 그런데 집회든 시위든 간에 1백 명만 모여도 1면에 실어줄 텐데 그런 일이 없었다. 그만큼 민주화운동 진영은 위축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위축되어 있는 터에 악재가 겹쳤다. 11월 1일 수배 중이던 윤여연 전 사무국장이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은신 거주지이던 방배동에서 체포돼 남영동 치안본부로 이송됐다. 부인 최경자와 민청련 가족들은 윤여연 구속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면회 요구투쟁에 나섰다. 작년에 김근태 의장에게 저질렀던 고문수사를 또다시 되풀이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아! 박종철

힘들었던 86년이 가고 새해가 밝았다. 정권의 강경한 탄압 드라이브는 변함이 없었고,  결국 파탄을 불렀다. 폭압으로 일관하던 철권통치가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던 것이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돼 조사받던 서울대 3학년 박종철이 고문수사 끝에 사망했다. 독재정권은 진실을 은폐하려고 했다. 박종철의 죽음을 32시간이나 숨기고 있던 치안본부는 16일에서야 뒤늦게 "심문 도중에 일어난 단순 쇼크사"라고 발표했다. 수사관의 큰 소리 몇 마디에 놀라 쇼크사 했다는 주장이었다.

사람들은 그 억울한 죽음에 연민을 느꼈다. 또한 진실을 은폐하려는 정권의 거짓말과 파렴치에 분노를 느꼈다. 그리하여 2월 7일에 개최된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추도회가 열릴 예정인 명동성당과 그 일대 시가지는 전투경찰과 사복형사들이 촘촘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리본을 단 추모 군중이 모여들었다. "종철아 잘 가거레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 없데이", "종철이를 살려내라", "고문살인 자행하는 군사독재 타도하자"라는 슬로건이 길거리에 나붙었다. 그날 오후 내내 명동, 종로, 을지로, 광교, 남대문 일대에서 시위대와 전투경찰대가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였다.

오후 2시에 명동성당에서 21번 추모 타종을 울리자, 시내 곳곳에서 자동차들이 추도 경적을 울렸다. 무차별 최루탄 난사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시위대에게 밀리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종로3가에서는 시위대에게 파출소가 점거당하고, 무전기를 피탈당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세운상가 근처에서는 전경이 시위대에 포위되기도 했다.

서울만이 아니었다. 광주에서는 1만여 명의 군중이 추도회 저지 규탄대회를 열었고, 부산에서는 5천여 명의 군중이 남포동과 광복동 등지에서 시위를 벌였다.

대중시위운동은 3월 3일에도 다시 재연됐다. 박종철군 49재를 맞이하여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 대행진」이 개최됐다. 2.7투쟁보다는 못하지만 삼엄한 경찰병력의 그물을 뚫고 시위대열이 형성되었다. 종로 3가와 4가의 길거리, 세운상가 근처, 국도극장 앞 길거리 등지에서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밀고 밀리는 접전이 벌어졌다.

 1.1987년 2월 7일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가 열린 명동성당 모습. 경찰의 봉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민들이 모였다  2.고 박종철군 49재인 3월 3일 조계종을 비롯하여 시내 곳곳이 경찰에 의해 봉쇄가 되었으나 청계천에서 수많은 시민과 학생이 모여 스크럼을 짜고 ‘정권타도’ 구호를 외치며 시내로 진출하고 있다. 3.2월 7일 추도회 전단지 4.3월 3일 49재 전단지 5.3.3 국민평화대행진 전단지
 1.1987년 2월 7일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가 열린 명동성당 모습. 경찰의 봉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민들이 모였다 2.고 박종철군 49재인 3월 3일 조계종을 비롯하여 시내 곳곳이 경찰에 의해 봉쇄가 되었으나 청계천에서 수많은 시민과 학생이 모여 스크럼을 짜고 ‘정권타도’ 구호를 외치며 시내로 진출하고 있다. 3.2월 7일 추도회 전단지 4.3월 3일 49재 전단지 5.3.3 국민평화대행진 전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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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두 차례 대중시위운동이 "민통련, 가톨릭, 개신교, 노동자, 청년, 학생, 기타 지방의 운동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신민당, 민추협까지 포함시킨 광범위한 공동투쟁전선을 형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았다. 이 기조는 1년 전, 5.3인천시위 때와는 다른 것이었다.

5.3인천시위 때에는 대중이 폭발적인 민주화 열망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운동 세력이 그것을 수용하는 데에 실패했었다. 선도투쟁 일변도의 좌편향적 노선 탓이었다. 또 분파의 난립도 원인이었다.

그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민청련의 입장이었다. 2.7추도회와 3.3대행진은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투쟁한다는 대중투쟁의 원칙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민청련은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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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1986년 9월에 7차 총회를 열었다. 7차 총회에서는 조직 문제가 주요 이슈였다. 그 결과 '대폭적 구조 개편'이 단행됐다. 총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가 관심을 모았다.

"운동을 하려면 3차원의 헌신을!"

하나는 정회원 제도를 도입하는 문제였다. 정회원이란 탄압 상황에서 적으로부터 조직을 보위하고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활동하는 기간 활동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3차원의 헌신성을 결심하고 그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이었다. 3차원의 헌신성이란 신체와 정신, 경제능력 세 방면에서 운동에 기여하는 것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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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 총회에 앞서 충북 매포에서 열린 비공개 대의원 총회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토의했다. 그 회의에 참석했던 김성환의 증언에 따르면, 집행부를 대표하여 중앙위원 이범영이 이 사안을 역설했다.

"2박3일 동안 꼬박 회의와 논쟁만 한 대단한 총회였는데, 그때 이범영 선배가 그 유명한 '3차원 헌신론'을 주장했다. 운동의 대의에 찬성한다면 그냥 설렁설렁해서는 안 되며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3차원에 걸쳐 운동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걸 역설할 때 참 분위기가 숙연해졌었다."

이 안건은 대의원 총회에서 의결되었다. 정회원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정회원은 '기간 활동가', 줄여서 '기활가'라고 불렸다. 전업적으로 민청련 활동에 참여하는 회원으로서 민청련 조직에 뼈를 묻을 것을 선서한 사람들이었다. 정회원 체계는 민청련의 일반적 조직 체계 내부에 존재하는 별도의 결사체였다고 할 수 있다.

정회원 제도가 민청련 대의원 총회의 의결을 거쳐 도입된 배경에는 회원들의 내면 의식에 내재하는 심리적 공통성이 있었다. 회원들은 그해 봄에 있었던 AB논쟁의 뜻밖의 귀결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탄압 하에서 조직이 위기를 겪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조직을 떠나갔다. 엊그제까지 이마를 맞대고 정세와 전술을 논의하던 사람들이었다.

떠나간 사람들은 온갖 화려한 논리를 내세웠지만, 뒤에 남은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마음뿐이랴, 다수 회원들의 이탈로 인해 민청련 각 조직 체계는 인력 결손으로 인한 활동 부진에 시달려야 했다. 와해의 위기에 처했을 때 조직을 사수하겠다고 결연한 태도를 보이는 동료가 그리웠다. 민청련 소속의식이 강렬한 전업적 활동가의 굳은 유대가 필요했다. 따라서 정회원 제도는 민청련의 역사적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민청련 7차총회의 결의에 따라 공개사무실을 복원한 네 사람. 1.남근우 2.김성환 3.이난현 4.최성웅
 민청련 7차총회의 결의에 따라 공개사무실을 복원한 네 사람. 1.남근우 2.김성환 3.이난현 4.최성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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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영역을 복원한 네 상근자: 김성환, 남근우, 이난현, 최성웅

정회원 제도의 도입과 더불어 조직문제의 또 하나의 이슈는 공개 활동영역을 회복하는 문제였다. 민청련은 1985년 9월 탄압 이래로 근 1년간 비공개 활동에 주력해 왔다. 공개 활동 영역은 매우 한정된 범위에서만 활용되었다. 민청련 사무실은 민가협 상근자들이 이용하고 있었고, 공개 영역은 간판만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대해 비공개 대의원 총회에서 문제가 제기됐다. 과거 집행부처럼 공개 활동의 여지가 넓지는 못하겠지만, 민청련 사무실을 근거로 하여 상근체계가 운영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제언이었다.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하고 활동에 대한 책임감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범위의 공개 활동이 요청됐던 것이다.

이 문제는 주로 복역 후 출소한 구 간부 측에서 제기했다. 민청련 탄압으로 구속돼 재판을 받던 구 집행부 성원들 가운데 일부가 운동 일선으로 속속 복귀하고 있었다. 권형택 전 사회부장, 김종복 전 청년부장이 되돌아왔다. 두 사람은 1986년 4월 3일 민청련 5인 간부 제6차 공판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고 석방됐던 것이다.

공개 사무실의 회복 필요성에 관해서 폭넓은 공감과 합의가 이뤄졌다. 총회준비위원회는 물론이고 대의원 총회에서도 이 제안은 통과됐다. 인선 문제가 남았다. 민청련의 논의체계에는 일종의 관습이 있었다. 어떤 정책이 채택되면 결정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그 사안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서도 책임을 지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총회준비위원회가 그러한 역할을 맡았다. 공개 사무실을 중심으로 활동할 네 사람의 상근자가 선정되었다. 총회준비위원이던 김성환, 남근우, 이난현, 최성웅이 그들이었다.

개헌투쟁의 대중화를 표방하다

7차 총회에서 조직문제 만이 중시되었던 것은 아니다. 개헌투쟁의 전술과 슬로건 문제에 관해서도 주목할 만한 방향 전환이 이뤄졌다. 먼저 '제헌의회 소집' 슬로건에 반대한다는 뜻을 명백히 했다. 제헌의회의 영어 약자는 CA(Constitutional Assembly)여서 이 주장을 펴는 정파를 CA그룹으로 불렀다. 그해 5월투쟁 때까지만 해도 민청련은 헌법제정회의, 헌법제정민중회의 등의 개헌투쟁 슬로건을 표방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와 유사한 의미의 '제헌의회 소집' 슬로건을 반대한다고 명시하는가.

<민주화의 길> 14호 논설이 이에 대해 해명했다. 그에 따르면, 민청련이 표방한 '헌법제정회의 소집'론은 선전적 슬로건이었다. 헌법 문제에 대한 민중적 입장을 명백히 하고 군부독재를 타도하기 위한 비타협적 투쟁의 정당성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의의를 담았다. 그에 반해서 '제헌의회 소집'론은 현 시기 투쟁을 지도하는 전술적 슬로건으로서 제기되어 왔다. 이는 민청련의 입장과는 달랐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했다. 첫째, 제헌의회 소집론은 현재의 시기를 혁명적 시기 혹은 그에 임박한 시기로 설정하고 있는데 이는 주관주의적 오류였다. 현 시기는 혁명적 시기가 아니라는 게 민청련의 입장이었다. 둘째, 야당은 물론이고 민주제 개헌을 주장하는 모든 세력을 기회주의로 매도하고 있는 게 문제였다. 오직 전술적 슬로건에 대한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공동전선을 구축하고자 하는데, 이는 대중의 이반과 고립을 자초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민청련은 그해 상반기의 개헌투쟁을 반성한다고 고백했다. 선전적 슬로건인 헌법제정회의 소집론과 전술적 슬로건인 제헌의회 소집론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서 투쟁 방침에 일정한 혼선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슬로건의 표면적 일치에 집착했고, 그에 의거해서만 연대를 추구한 점을 반성했다. 앞으로는 피상적인 차이점 보다는 기본 목표의 동일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겠다고 천명했다.

이러한 언급은 6차총회에서 채택한 '헌법제정회의 소집' 슬로건을 사실상 폐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또 6차총회 이후 추구해오던 상층연대 경시론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했다. 민통련을 매개로 하는 상층연대의 중요성을 다시 인정하고, 당면한 개헌투쟁을 대중노선에 입각해서 전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73학번 공동의장을 비롯한 새 집행부 면면

 7차총회에서 선출된 공동의장들. 왼쪽부터 장준영, 이범영, 연성수
 7차총회에서 선출된 공동의장들. 왼쪽부터 장준영, 이범영, 연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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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차 총회에서 선출된 새 집행부는 세대교체의 결과였다. 최상층 지도부에는 73학번에 해당하는 3인 공동의장이 취임했다. 이범영(서울대 73학번), 장준영(성균관대 73학번), 연성수(서울대 73학번)가 그들이다. 이들은 7차 총회의 변화를 이끌어낸 주역이었다.

정회원 체계와 개헌투쟁 전술 전환이 바로 이들의 주도하에 이뤄졌던 것이다. 그에 뒤이어 비공개 각 부문과 기구를 관장하는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권형택, 진영효, 박선숙, 유기홍, 김성환이 그 위원이 되었다. 그에 더하여 공개 영역 활동을 책임지는 운영위원회 직제가 신설되었다. 권형택 위원장과 김성환 사무국장을 비롯하여 이난현 총무국장, 김병태 사업부장, 신덕자 여성부장, 최성웅 홍보부장 등이 취임했다.

면모가 일신되었다. 7차총회를 통해 새 진용을 갖춘 민청련은 공개 영역을 회복하고 사무실 중심체제를 다시 확립했다. 운영위 간부들은 7차 총회가 끝난 뒤 민청련 사무실에 매일 출근했다. 공개 활동을 하면서도 신원이 경찰에게 쉽사리 파악되지 않게끔 가명을 사용했다. 이를테면 최성웅의 가명은 차영일이었다. 차영일은 월 급여로 10만 원 가량을 받았는데, 그는 훗날 급여가 좀 적어서 문제였지만 미혼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궁핍함을 느끼지는 않았다고 회상했다.

비공개 부서들의 활동력 복원

공개 영역의 활성화와 더불어 비공개 각 부서 활동도 강화되었다. 예컨대 여성부 조직체계는 이원화되었다. 공개 부문인 운영위원회에는 여성부장 1인이 취임하여 연대사업을 담당했다. 여성부장은 민청련을 대표하여 여성단체 상층 연대 활동과 여성단체연합의 창립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편 비공개부문인 중앙집행위 내부에는 여성국이 설치되었다. 여성국은 교육과 선전을 담당했는데, 그를 수행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각 3인으로 구성된 교육사업 팀과 선전사업 팀을 조직했다.

교육사업 팀은 신입회원 교육을 담당했다. 신입회원에게 2차례에 걸쳐서 여성문제의 본질과 여성운동론에 관한 프로그램을 운용했다. 여성운동론 교육을 위해서 교안도 작성했는데, 이 원고는 기관지 <민주화의 길> 16호에 실렸다.

기성 회원을 대상으로 내부 정치학습도 수행했다. 그즈음 외신보도를 달구던 니카라과혁명론, 필리핀혁명론 등이 논의되었다. 선전사업 팀은 전단을 작성하고 여성운동의 이슈를 개발하는 일을 담당했다. 아시안게임 반대 전단을 제작하고, <또 하나의 성>이라는 제목으로 성고문 자료집을 발간했다.

 민중신문 22호와 23호 1면. 보름에 한 호씩 발행되던 민중신문이 5개월 만에 23호로 복간됐다.
 민중신문 22호와 23호 1면. 보름에 한 호씩 발행되던 민중신문이 5개월 만에 23호로 복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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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됐던 <민중신문>도 다시 발간하기 시작했다. <민중신문>은 1986년 4월 17일 사무실 침탈 사건 이후 5개월간 휴간 중이었다. 지령 22호가 4월 30일에 나온 뒤에 후속 신문을 내지 못했다.

그 원인은 침탈 사건으로 인해 사무실 공간과 유력한 간부 역량을 상실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편집부 내부 사정도 있었다. 정체성의 위기 때문이었다. 안팎에서 쏟아지는 "이미 아는 사실을 나열하는 신문, 방향없이 표류하는 신문" 등등의 비판이 편집부를 혼란하게 했다. 편집부는 이 문제를 놓고 치열한 내부 토론을 거듭했다. 그 결과 7차총회를 계기로 하여 편집부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9월 30일에 <민중신문>은 제23호로 복간됐다. <민중신문>의 성격은 제호에 표시된 것처럼 "민중의 해방투쟁을 위한 길잡이"라고 규정했다. 민중이란 "노동자, 농민, 근로지식인 등 모든 근로대중"을 가리키는데, <민중신문>은 그들의 정치적 시야를 확대시키는 것을 임무로 삼겠다고 했다.

아울러 편집부는 두 가지 경향을 극복하겠다고 다짐했다. 하나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에 몰두하여 협소한 계급이기주의에 빠지는 것"이오, 다른 하나는 민중의 '무원칙한 통일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지면이 늘어난 ‘민청련 구속자 소식 7호’ 앞면(왼쪽)은 구속된 김병곤 부의장의 가족 편지를 전했다. 오른쪽은 민청련 회원들에게 제공하던 ‘주간소식’으로 당시 신문들이 보도하지 않은 학생 시위를 비롯한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여러 소식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회원들에게 제공했다
 지면이 늘어난 ‘민청련 구속자 소식 7호’ 앞면(왼쪽)은 구속된 김병곤 부의장의 가족 편지를 전했다. 오른쪽은 민청련 회원들에게 제공하던 ‘주간소식’으로 당시 신문들이 보도하지 않은 학생 시위를 비롯한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여러 소식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회원들에게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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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부서의 활동성도 강화됐다. <주간일지>라는 이름의, 각 분야 민주화운동 소식지는 매주 빠짐없이 발간됐다. 마치 군대 참모부의 주간 상황판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탄압 이후 나오기 시작한 <민청련구속자소식>이라는 제목의 소식지는 그해 11월에 지령 13호가 나오기까지 매월 1∼2회씩 꼬박꼬박 얼굴을 내밀었다. 7호부터는 지면이 16면으로 늘었고, '논설'란이 신설되는 등 옥중투쟁 기관지의 성격을 강화했다.

민청련의 기관지인 <민주화의 길>도 꾸준히 발간했다. 발간 초창기에 비하면 발행의 정기성과 대외 영향력이 하락했음을 부인할 수 없었지만, 탄압을 겪은 뒤인 1986년에도 여전히 연간 4회 발행을 지속했고, 매호에 실린 '논설'은 뭇 민주화운동권 사람들에게 필독의 대상이었다.

모진 탄압을 이겨내고 다시 힘겹게 일어서는 민청련의 모습은 다른 단체들에게도 하나의 모범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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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했던 1986년 5월 투쟁 이후에 갑자기 정치 정세가 바뀌었다. 전두환 정권과 야당 정치세력 사이에 타협 정국이 조성된 것이다. 이른바 '헌법특위 국면'이 도래했다.

발단은 미국이었다. 1986년 5월 8일 미 국무장관 슐츠가 방한하여, 국회 내 3당 대표들과 담화하는 자리에서 타협을 통한 시국 수습을 희망한다고 발언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에 호응해서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하면 조기 개헌을 고려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야당 정치세력도 이를 받아들였다. 장외에서 추진해 오던 직선제개헌 서명운동을 중단하고 원내 협의에 임했다. 그리하여 7월 30일에 국회 안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헌법특위)가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군사독재와 타협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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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 정국의 도래는 민주화운동 탄압을 수반했다. 전두환 정권은 5·3 인천 시위를 빌미로 하여 또 한 번 가혹한 탄압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대검찰청은 '5.3인천사태'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시위 주동세력은 학생단체 민민투와 재야단체 민통련, 노동단체 서노련과 인노련 등이었다. 이들이 조직적으로 인원을 동원하여 소요를 선동했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149명을 구속하고 55명에 수배를 내렸다. 민통련 의장 문익환을 비롯한 간부들은 체포, 수배, 연금을 당했다. 특히 시위 주동 단체로 지목된 서노련은 군대 내 수사기관인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살인적인 탄압을 받았다. 서노련 관련자 20여 명이 무차별 구타와 전기고문, 물고문을 겪어야 했다.

 1. 인천시민회관 앞은 5·3인천시위의 중심점이었다. 2. 당시 인천시위에 대하여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 정부와 언론이 혈안이 되었다. 경향신문은 이에 호응하여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 약도까지 상세히 그려 설명하고 있다. 3. 각종 구호가 적힌 플랜카드를 들고 행진하는 시위대 모습. 4. 5·3시위 주동자로 수배당한 (왼쪽부터) 여익구, 민청련 출신 안희대와 박계동 등 민통련 임원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하고 있다
 1. 인천시민회관 앞은 5·3인천시위의 중심점이었다. 2. 당시 인천시위에 대하여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 정부와 언론이 혈안이 되었다. 경향신문은 이에 호응하여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 약도까지 상세히 그려 설명하고 있다. 3. 각종 구호가 적힌 플랜카드를 들고 행진하는 시위대 모습. 4. 5·3시위 주동자로 수배당한 (왼쪽부터) 여익구, 민청련 출신 안희대와 박계동 등 민통련 임원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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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민청련의 입장이었다. 민청련은 당면 투쟁의 방향을 헌법특위 반대운동으로 전환했다. 민청련은 6개 청년단체들을 묶어서 '청년운동 연대 테이블'을 구성했다. 그리하여 6월 13일에는 헌법특위 음모를 폭로하는 가두시위를 조직했다. 봉천동에서 이뤄진 이 시위는 소규모였지만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

이튿날에는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있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군사독재와 타협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제시했다.

헌법특위는 "미국의 배후 조종에 의한 보수 대타협 음모"의 소산이며, 군사독재 정권은 그를 통하여 '이원집정부제라는 기만적인 헌법개정'을 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는 '군사독재의 변형된 형태'일 뿐이었다. 민청련은 신민당 이민우 총재를 비롯한 일부 야당 정치세력이 그에 장단을 맞추고 있음을 비판했다.

결국, 헌법특위 구성은 '예방 혁명적 기만책의 일환'일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헌법 문제는 민중이 결정해야 한다. "헌법은 군사독재와 매판세력을 철저히 배제하고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인 민중에 의해 새로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천명했다.

6개 청년단체는 민주화운동 탄압을 규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민통련 파괴공작을 즉각 중단하고 서노련을 비롯한 노동, 학생, 청년운동에 대한 탄압을 멈추라고 요구했다. 나아가 살인적인 고문수사를 자행하는 보안사령부 등을 해체하라고 주장했다.

또다시 남영동 대공분실로

탄압의 불똥은 민청련에도 튀었다. 거의 1년 동안 장기간 지명 수배 중이던 김희택 의장이 6월 17일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아침 시흥 인근 길거리에서 안양경찰서 소속 형사들에게 강제 연행됐다. 그는 악명 높은 남영동 치안본부로 이첩됐다. 고문수사가 또다시 자행되지 않을까 우려와 긴장감이 돌았다. 민청련에서는 긴급 모임을 갖고 대책을 협의했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하고 있다는 것은 현 정권이 아직도 민청련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하겠다는 저의를 끝내 버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6월 19일부터 민청련 사무실에서 항의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에는 민청련 회원들 외에도 계훈제, 김승균, 성유보, 김종철 등과 같은 영향력 있는 재야인사들도 민청련 지도위원 자격으로 합류했다. 이날 배포된 성명서는 김희택 의장을 비롯한 민청련 구속자 8명의 즉각 석방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 중단을 요구했다.

 민청련 사무실에서 항의농성 중인 재야 원로들. (왼쪽부터) 어른들에게 상황을 설명 중인 박우섭 민청련 중앙위원, 백기완, 문익환, 계훈제, 임채정
 민청련 사무실에서 항의농성 중인 재야 원로들. (왼쪽부터) 어른들에게 상황을 설명 중인 박우섭 민청련 중앙위원, 백기완, 문익환, 계훈제, 임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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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은 활기를 띠었다. 경찰의 출입구 봉쇄, 음식물 공급 차단 등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농성투쟁의 현장으로서 제 기능을 다 했다. 항의 농성과 함께 가족들의 면회요구 투쟁도 세차게 진행됐다. 김희택 의장의 부인으로 노동운동가 출신인 조명자씨가 김병곤의 부인 박문숙씨와 함께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을 항의 방문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남편이 남영동으로 연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문숙이와 함께 갔어요. 그 살벌한 대공분실 문을 두드리고 흔들며 바닥에 누워 몸부림을 치다 잠깐 기절을 했던 것 같아요. 요원들이 나와선 병원으로 끌고 갔어요. 이동 중에 의식은 돌아왔지만, 문숙이가 계속 기절한 척하라고 하더군요. 전 결국 병원에서 처방한 독한 신경안정제를 맞고 정말 기절을 했어요. 좀 있다 깨자마자 다시 남영동으로 갔죠. 가서 난리를 치니까 그 사람들도 기가 막혔던지 문을 열고 면회를 시켜 주데요. 대공분실 안에 들어가서 누구를 면회한 건 그게 아마 전무후무한 일일 거예요."

 조명자(왼쪽)와 박문숙(오른쪽)
 조명자(왼쪽)와 박문숙(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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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자씨는 이 일로 민가협 어머니들에게서 농성장에서 인사를 많이 받았다. 한 구속자 어머니가 걱정을 가득 담아서 묻더란다. 조명자가 진짜 뇌전증 환자인 줄로 알고 '치료는 받았느냐, 괜찮으냐'고. 주위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가족들의 면회요구 투쟁은 이처럼 치열했다. 효과가 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구속자에게 가해질 우려가 있는 고문 수사와 가혹 행위를 조금이라도 경감시킬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랐던 것이다.

탄압 정국 하에서 계속된 시위, 또 시위

탄압 정국 하에서도 민청련의 투쟁은 계속됐다. 그해 7월에는 성고문 규탄 운동이 이슈의 초점이 됐다. 여성 노동운동가 권인숙을 연행한 부천경찰서 문귀동 형사가 밀실에서 이틀에 걸쳐 추악한 성고문을 자행한 사실이 폭로됐고, 그를 규탄하는 항의 행동이 고조됐다. 민청련은 청년, 학생, 종교, 여성 등 10개 단체와 연대하여 부천서 성고문 규탄 운동에 참여했다.

이 투쟁 중에서도 군사독재와 타협하는 야당 정치세력을 비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살인과 고문을 저질러놓고도 조금의 반성의 빛도 없이 딱 잡아떼는 놈들과 무슨 협상을 벌인단 말인가?"라고 되물었다. 군사독재와 타협하는 것은 민중을 배신하는 일임을 분명히 했다.

 1. 1986년 당시 재판정에 출석하는 조영래 변호사와 권인숙 2. 7월 27일 권인숙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에서 항의하는 인재근 3. 88년 5월 17일에 구속된 문귀동이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 4. 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피의자 문귀동의 재판에 가위를 들고 온 시민
 1. 1986년 당시 재판정에 출석하는 조영래 변호사와 권인숙 2. 7월 27일 권인숙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에서 항의하는 인재근 3. 88년 5월 17일에 구속된 문귀동이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 4. 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피의자 문귀동의 재판에 가위를 들고 온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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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은 제헌절이 든 달이었다. 민청련은 7개 청년단체와 연대하여 '민주헌법 쟁취는 민중의 손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서 8월 15일에는 광복절에 즈음하여 청년·학생 연대에 기반한 시위운동을 조직했다. '헌법특위 분쇄 및 조국통일 촉진을 위한 범국민 실천대회'라는 긴 명칭의 가두시위였다.

삼엄한 경찰의 경계망 속에서도 시청 앞, 신당동 전철 입구 등지에서 시위 대열을 형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10분 혹은 5분밖에 지속되지 않은 시위였지만 수천 명의 정·사복 경찰이 배치된 상황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시위 대열이 일시적이나마 형성된다는 것은 진정 놀라운 일이었다. 시위 참가자들의 헌신성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헌법특위 국면' 하에서 시위운동을 조직하는 데에는 내부적인 어려움이 컸다. 민주화운동 전체의 힘이 약화되어 있었다. 군사독재의 탄압이 격렬했고, 운동 진영 내부는 이중 삼중의 분열이 진행 중에 있었다. 이 때문에 전반적으로 동원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어떤 시위운동도 큰 규모로 전개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민청련은 어려운 국면을 힘겹게 버텨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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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 영업부, 산악부라고 부른 세 가지 조직

AB논쟁의 결과 조직이 반 토막 났다. 문제가 심각했다. 단지 구성원 숫자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은 회원들이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1986년 3월, 제6차 총회를 통해 등장한 김희택 새 집행부가 그 일을 단행했다.

먼저 조직체계에 손을 대 근본적인 변화를 도모했다. '규율과 헌신'을 전제로 하는 회원의 '정예화'가 목표였다. 그 결과 기존의 비공개 계반 조직은 세 종류의 새로운 조직 형태로 재편됐다. '동창회' '영업부' '산악부'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조직은 민청련 조직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기간 조직'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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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란 기존의 계반과 동일한 조직이었다. 학생운동 출신자로서 회사원 등으로 생계를 위해 일상생활을 하는 이들을 조직원으로 삼았다. 이들은 1주일에 1회 이상 정기적으로 회합하여, 회비를 거두고, 정세와 전술에 관해서 토론하고, 거리와 주택 밀집 지역에 유인물을 살포하고, 시위 현장에 참여하는 등 기존 계반에서 수행하던 활동을 그대로 계승했다.

영업부는 제6차 총회에서 처음 출현한 조직형태였다. 기존에 해오던 계반 활동에 더하여 노동 현장에 대한 지원 역할을 함께 수행하는 조직이었다. 그 당시에는 노동자 대중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민지투'라고 불렀는데, '민중운동지원투쟁'이라는 말의 줄임말이었다. 이 조직은 민청련의 기간 조직을 확장하고 다양화하려는 의도에서 고안된 것이었다. 그 성패 여부가 민청련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이 조직의 총책임은 고려대 76학번 출신 이승환이 맡았다.

산악부는 민중운동 현장으로의 이전을 준비하는 조직이었다. 공장이나 빈민운동 현장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회원들을 묶었다. 현장으로 이전하려는 학생운동 출신자들의 이탈을 막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민청련이 직접 적극적으로 그 과정을 조직하고자 했던 것이다. 회원들 내부에 팽배해 있는 노동현장 지향 열기를 조직 내부에 담아내려는 시도였다.  

기간 조직과 함께 '스텝 조직'이 편성됐다. 종래 상임위원회 산하에 분과 형태로 조직됐던 비공개 기구들을 이 개념으로 새로이 재편했다. 기간 조직이 민청련의 뼈대를 구성하는 종적 조직이라고 한다면, 스텝 조직은 집행부의 각 기능을 확장하는 횡적 조직이었다. 정책실, 민중신문팀, 유인물을 제작하는 홍보위원회 등이 이 범주에 속했다.

  민청련 6차총회에서 채택한 성명서(왼쪽)와 6차 총회 보고서(오른쪽)
 민청련 6차총회에서 채택한 성명서(왼쪽)와 6차 총회 보고서(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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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잘해서 '노(가리) 선생'이라고 불리운 이범영

정책실은 장기 수배중이던 이범영 부의장이 맡았다. 그는 경찰의 집요한 수배망에 쫓기면서도 쉼없이 민청련 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내부 구성원들 사이에 '노선생'이라고 불렸다. 수배중이기 때문에 실명이 아닌 가명으로 불려야 했기 때문이다.

여러 성씨 중에서도 하필이면 '노' 선생이라고 불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노가리'가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노가리란 말을 막힘없이 조리 있게 풀어놓는 사람을 가리키는 속어였는데, 그는 조성된 정세의 성격과 당면 투쟁의 전략⋅전술에 관하여 토론하기를 즐겼으며, 논리를 갖춰서 설득력 있게 발언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책실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제1분과는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을 간행하는 팀이었다. 진재학 상임집행위원이 그를 관장했다. 노동진, 윤석인, 박일환, 임경석, 김용민, 노남기 등이 구성원이었다. 이들은 객관정세 분석팀과 주체정세 분석팀으로 나뉘어서 정례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모임은 통상 1주일에 한번 씩 개최했으며, 회합 장소로는 신촌 일대의 경양식 집이나 카페를 선호했다. 그 당시 경양식 레스토랑은 값이 비싸지 않은데다 테이블 별로 칸막이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대여섯 사람이 돈까스 하나씩 주문하고서 두세 시간씩 은밀한 얘기를 나누는 데에 안성맞춤이었다.

정책실 제2분과는 유기홍 상임집행위원이 이끌었다. 김영현, 윤형기, 한홍구 등이 그 주요 멤버였으며, 번잡한 재래시장 허름한 건물의 한 귀퉁이에 사무실을 임대해 사용했다. 시장통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다수의 낯선 사람들이 출입하기에 적당했다. 이 팀은 정책 관련 자료를 생산하여 교육 및 홍보에 활용하는 것이 그 임무였다. 이따금 제1,2 분과의 합동 모임도 갖곤 했다.

 정책실 제1분과에서 [민주화의 길]을 만든 1.노동진 2.박일환 3.윤석인 4.임경석.  정책실 제2분과에서 [민중신문]과 각종 자료를 만든 5.김영현 6.한홍구
 정책실 제1분과에서 [민주화의 길]을 만든 1.노동진 2.박일환 3.윤석인 4.임경석. 정책실 제2분과에서 [민중신문]과 각종 자료를 만든 5.김영현 6.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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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층연대보다 하층연대를 중시하다

새 집행부의 또 하나 역점 사업은 대외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었는데, 김희택 집행부는 특히 기층 민중과의 연대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즉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연합기관인 민통련이나 야당 정치세력과의 상층 연대보다는, 노동운동과 학생운동과의 연대를 중시했다. 상층 연대를 사실상 폐기하고 하층 연대를 강화한다는 민청련의 이 입장은 1986년 상반기 투쟁 노선에 반영됐다.

당시는 개헌 투쟁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였다. 제1야당인 신한민주당이 국회 밖으로 나와 장외 대중운동으로 진출한 것이 그 기폭제가 됐다. 3월 11일 개헌추진위원회 서울지부 결성대회를 개최한 데 뒤이어, 5월 말까지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인천, 마산, 전주 등의 순서로 개헌 현판식을 주최했다. 야당 정치세력의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은 대규모 대중 동원력을 과시했다. 현판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동안 억눌려 온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을 모처럼 생긴 합법적인 공간을 통해 뜨겁게 분출했다.

특히 3월 30일 신민당 개헌추진 광주지부 결성대회가 큰 역할을 했다. 대회가 끝난 뒤 광주 시내에서는 30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군중이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1980년 5월항쟁 이후 처음 보는 가장 큰 규모의 시위운동이었다. 이날 시위에서 민통련은 '3.30 선언'을 발표했다. 그 요지는 군사독재를 물리친 다음에 반외세 문제를 해결하며, 당면 투쟁의 슬로건은 군사독재 퇴진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통일시키고, 그를 위해 신민당과의 적극적 제휴를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민청련은 기관지 [민주화의 길] 제13호 논설을 통해, 세 가지 점을 들어서 민통련의 입장을 비판했다. 첫째, 반독재 단독구호를 반대한다고 천명했다. 반독재 민주화의 과제와 반외세 자주화의 과제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목표이므로 반독재 슬로건만을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둘째, 야당 정치세력과의 제휴를 비판했다. 신민당은 독재자 일 개인이나 일부 그룹과는 이익이 상반되지만, 외세와 군부 전체와는 결국 유착될 세력이라고 평가했다. 따라서 신민당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개헌집회의 목표는 전략적 공세기가 아니라 수세기를 전제로 하는 관점에서 설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독재 타도를 직접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바른 정치적 방향을 제시하는 훈련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학청연대의 이상과 현실

민청련은 민통련을 비판하면서 그 대신에 민주혁명의 핵심역량으로 간주되고 있는 노동운동 및 강력한 대중 동원력을 갖고 있는 학생운동과의 연대를 추구했다. 민청련은 이것을 '노학청연대'라고 불렀다. 광범한 대중을 결집시킬 수 있는 하층 연대였다. 민청련은 이 연대를 중시했고, 그에 책임 있게 참여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민청련의 의도와는 달리 노학청연대는 순조롭게 진전되지 않았다. 그 원인은 운동 진영이 분열되어 있는 사정과 연관돼 있었다.

당시 노동운동 진영은 [노동자신문]과 [선봉]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노동자신문] 그룹은 투쟁성과 강고한 규율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운동의 방향을 선도하는 정치노선의 제시에 소홀하며, 운동 진영의 동료 단체들에 대해서 폐쇄적이고 패권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선봉] 그룹은 운동 진영의 연대에 대해서는 훨씬 유연했다. 하지만 이 그룹은 '반제반파쇼노동자투쟁위원회(반반노투)'라는 공개 투쟁기구를 내세웠으나 투쟁성과 규율의 측면에서는 실력을 의심받고 있었다.

학생운동 진영도 나뉘어 있었다. 1986년 4월 28일, 서울대 학생들이 전방입소 훈련을 반대하며 신림사거리에서 시위하던 중 건물 옥상에서 시위를 이끌던 김세진, 이재호 두 학생이 몸에 신나를 뿌린 뒤 "반전반핵 야키 고 홈"을 외치며 분신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운동 안에 반외세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하는 흐름이 형성됐다. 이들이 주장하는 반외세직접투쟁론은 외세 문제에 대한 일대 비판과 자성을 불러일으킨 점에서는 큰 역할을 했지만, 개헌투쟁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었다.

연대가 가능한 파트너는 헌법제정회의 소집 슬로건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민청련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전국반제반파쇼민족민주학생연맹(민민학련)'이었다.

 민민학련 창립선언문(위). 1986년 4월 29일 서울시내 2천여 명 학생들이 연세대에서 개최한 민민학련 창립결성대회 중 경찰 진입에 맞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장면(아래)
 민민학련 창립선언문(위). 1986년 4월 29일 서울시내 2천여 명 학생들이 연세대에서 개최한 민민학련 창립결성대회 중 경찰 진입에 맞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장면(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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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민청련은 개헌투쟁의 슬로건이 일치하고 연대가 실제로 가능한 파트너들과의 협력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노동운동의 반반노투와 학생운동의 민민학련, 그리고 민청련 세 행위 주체가 연대해 5월투쟁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몇몇 청년들을 더하여 5월 15일, 6개 단체 연합으로 '반외세반독재 민족민주헌법제정민중회의 쟁취투쟁본부'를 결성하고, 성명서와 메시지를 발표했다.

5월투쟁의 꽃은 5월 17일 서울 시내 중심가에서 수행한 시위운동이었다. 이 시위운동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노학청 연대에 참여한 세력은 공동의 논의 테이블을 조직했다. 시위운동을 준비하는 테이블에서 중시된 것은 특히 '초동의 강고함'이었다. 시위 최초 주동자들이 확실히 자기 역할을 수행해야만 시위 대열이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민청련 회원들은 무언가 주장을 하려면 실천을 담보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노학청 연대로 시위를 조직하려면 민청련에서도 대학생들처럼 시위를 주동하는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탄압 국면이 도래하기 전에는 시위를 주동해도 구류 처분을 감수하는 정도만 각오하면 됐으나, 이제는 달랐다.

앞서 5월 3일 신민당이 주최하는 개헌현판식 인천대회에 학생운동이 대거 참여하면서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격돌이 벌어졌다. '5.3인천사태'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3백 명이 넘게 구속됐고 정부의 시위에 대한 대응은 초강경으로 돌아섰다. 이제는 구속될 게 뻔했다. 민청련의 임원과 회원들은 이 문제로 깊이 고민했다. 결국 비공개 집행부에 속한 상임집행위원 두 사람이 희생을 무릅쓴 결심을 내렸다. 진재학과 최경환이었다.

대회 명칭은 「광주학살원흉처단과 민족민주헌법제정민중회의 쟁취를 위한 민중대회」로 정해졌고, 시위 현장에 뿌려진 전단에는 '5월 17일 오후 4시 파고다공원'에서 개최한다고 돼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시위 개최지로 선정된 곳은 종로 2가 길거리였고, 시간은 오후 7시 30분이었다. 경찰의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의도였다.

민민학련 측을 대표하여 남녀 대학생 2인이 신혼부부를 가장하여 종로2가 YMCA 호텔에 투숙했다. 둘 다 성균관대 재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약속된 시간에 호텔 창문을 통해 플래카드를 내려뜨렸고, 유인물을 살포했다. 그에 호응하여 가두에 배치된 민청련의 두 '야사'(야전사령관)가 행동에 나섰다.

 시간이 각각 7시30분과 4시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반외세반독재 민족민주헌법제정민중회의 쟁취투쟁본부’ 이름의 민중대회 안내 전단지 앞면(왼쪽)과 민청련에서 제작한 민중대회 안내 전단지(오른쪽)
 시간이 각각 7시30분과 4시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반외세반독재 민족민주헌법제정민중회의 쟁취투쟁본부’ 이름의 민중대회 안내 전단지 앞면(왼쪽)과 민청련에서 제작한 민중대회 안내 전단지(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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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투쟁의 두 야전사령관, 진재학과 최경환

진재학은 YMCA 호텔 앞에서 10여 미터 뛰어나가며 유인물을 살포하고 구호를 외쳤다.

"광주학살 원흉을 처단하라! 헌법제정민중회의 쟁취하자!" 고함 소리가 거리에 울렸다. 그와 동시에 최경환은 지하철역 출입구 덮개 위에 올라가서, 경찰에 잡힐 때까지 현장 시위를 지휘하고자 했다. 그래서 신문 가판대를 딛고 출입구 덮개에 몸을 걸쳤으나, 한 번에 올라서지 못하고 버둥댔다. 결국 그는 사복 경찰들에게 붙잡히고 말았고, 구호를 외치면서 끌려갔다.

경찰에게 끌려가는 두 동료의 모습을 보면서 종로2가 가두에 점점이 모여 있던 민청련 회원들은 내면 의식의 폭풍우를 겪어야 했다. 대의에 헌신하다가 희생되는 동료를 무기력하게 지켜만 보고 있는 자신의 나약함과 비겁함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동료의 용기에 진정한 경의를 느꼈고, 그와 동시에 솟아오르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날 시위는 사복 경찰이 쫘악 깔려있는 시내 중심가에서 감행한 과감한 행동이었다. 경찰 은 이미 파고다 공원과 종각 지하철 역 등에 정사복 경찰 22개 중대 3천여 명을 배치한 상태였다. 시위 현장에서 364명이 연행됐고, 그 중 10명이 구속됐다.

 경향신문 1986년 5월 19일자 사회면 톱기사에 실린 1986년 5월 17일 시위 기사. 10명의 구속자 명단 중 검은테두리 안에 최경환, 진재학 회원의 이름이 있다. 왼편 위에 있는 사진은 진재학(왼쪽)과 최경환(오른쪽). 아래 사진은 당시 종로2가 YMCA 일대 사진
 경향신문 1986년 5월 19일자 사회면 톱기사에 실린 1986년 5월 17일 시위 기사. 10명의 구속자 명단 중 검은테두리 안에 최경환, 진재학 회원의 이름이 있다. 왼편 위에 있는 사진은 진재학(왼쪽)과 최경환(오른쪽). 아래 사진은 당시 종로2가 YMCA 일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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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투쟁을 끝낸 뒤 민청련은 엄정한 자체 평가에 들어갔다. 그 결과 노학청 연대와 공동투쟁에 심각한 문제가 내재해 있음을 인정했다. 공동투쟁에 임한 세 주체가 '헌법제정회의 소집' 슬로건을 표방한 점에서는 동일했다. 그러나 그 슬로건의 의미에 대해서는 연대 파트너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민민학련과 반반노투의 생각은 민청련과 달랐다. 그들은 개헌투쟁의 성격을 곧바로 헌법제정회의를 소집하여 민중권력을 수립하는 투쟁으로 보고 있었다. 이에 비해 민청련은 아직은 그런 시기가 아니며 개헌투쟁을 전술적 투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는 심각한 차이였다. 슬로건의 외형적인 합치만을 기준으로 삼아 연대를 이뤘던 점에 대해서 자기 반성을 한다고 고백했다.

연대 파트너 선정에도 문제가 있었다. 연대 대상이 됐던 노동운동 세력이란 실제로는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노동 현장에 들어가 만든 비공개 정치투쟁 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동안 추구해 왔던 노학청연대란 학생운동에 더하여 학생운동 출신자들을 덧붙인 데에 지나지 않았다. 거창한 관념적 의미 부여에 비해 내용적 실체는 국지적인 범위에 한정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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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샘 공방전까지... 민청련이 마주한 치열한 논쟁



민청련의 최고 의결기구는 규약에 따라 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총회'였다. 이 규정은 충실히 지켜졌다. 독재정권의 탄압에 쫒기면서도, 어김없이 총회를 열었다. 제6차 총회는 1986년 3월 1일에 열었다.

제6차 총회를 앞둔 민청련에게는 중요한 현안 문제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조직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당면 투쟁의 전술 문제였다. 둘 다 논쟁적인 성격을 띠었다. 조직 문제는 제6차 총회의 가장 큰 이슈였다. 탄압으로 야기된 조직의 위축 양상을 떨쳐버리고 조성된 정세에 맞게 조직 체계를 전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회원들 사이에 널리 공유됐다.

그러나 대응책은 각양각색이었다. 네 가지 주장이 제기됐고, 각 주장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됐다. 각 입장은 익명으로 불렸다. 크게는 A와 B로, 다시 세분되어 A1, A2, B1, B2로 나뉘었다. 내부에서는 이를 'AB논쟁'이라고 불렀다.

AB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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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안은 창립 이래의 조직 위상을 그대로 발전시키려는 입장이었다. 학생운동 출신자들을 기반으로 하여 반외세 반독재 정치투쟁을 선도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는다는 관점이었다. 그에 반해 B안은 민청련의 조직적 혁신을 주장했다. 조직 기반을 노동자와 농민 대중 속으로 옮기자는 주장이었다. 학생운동 출신자를 규합하는 데에 머물지 말고, 독자적으로 기층 민중을 조직한다는 관점이었다. A2와 B2는 각각 A안과 B안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도출된 수정안이었다. 

이 논쟁은 총회준비위원회(총준)에서 시작됐다. 총준위원은 각급 부서와 기구에서 선출된 10명 이내의 열성 회원들로 구성됐다. 총준위원 최성웅의 회고에 따르면,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총준위원 진재학이 그 동안 진행된 논쟁에 대해 브리핑을 했는데, 민청련을 바라보는 시각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 줄줄 꿰더란다. 그 얘기를 듣고 자기가 네 개의 초안으로 분류했다고 한다.

 6차총회 총준위원과 이후 11인체제 상임집행위원이었던 진재학(왼쪽)과 총준위원으로 활동한 최성웅(오른쪽)
 6차총회 총준위원과 이후 11인체제 상임집행위원이었던 진재학(왼쪽)과 총준위원으로 활동한 최성웅(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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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쟁은 쉽사리 종결되지 않았다. 각 주장이 팽팽하게 평행선을 그었다. 부득이 대의원총회의 힘을 빌어야만 했다. 대의원총회란 정기총회에 앞서서 비공개적으로 열리는 실질적인 최고 의사결정 기구였다.

각급 기구와 계반에서 선출된 대의원 수십 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조직 문제 이견을 해소하기 위한 최고 심급의 최종적인 논의가 이뤄졌다. 회원들의 이목을 끌었던 네 가지 제안이 발표됐고 그를 둘러싼 찬반 논의가 시작됐다. 논쟁은 뜨거웠다. 논리적 공방전이 밤새워 계속됐다.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긴 논란을 종결지을 필요가 있다는 데에 참석자들의 의견이 모였다. 대의원들은 네 개의 제안 가운데 A안과 B안 두 가지만을 표결에 부치기로 합의했다. 긴장 속에서 표결이 이뤄졌다. 그 결과 A안이 근소한 차이로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음이 판명됐다.

조직 논쟁은 다수결로 종결됐지만 후유증이 남았다. 양측 지지자들의 숫자 차이는 아주 작았다. 그래서일까. B안을 지지했던 간부와 회원들 사이에 실망감과 함께 불복종의 기운이 돌았다. 자칫하면 결별마저 불사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따라서 새 집행부 구성이 지혜롭게 이뤄질 필요가 있었다. A안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구성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B안 지지자들의 심리를 도외시할 수 없었다. 절충이 이뤄졌다. 새 집행부의 면면은 주로 A안 지지자들로 구성하되, B안 지지자들에게도 일정한 몫을 할애했다.

총회 결정에 따르지 않은 사람들

그러나 집행부 안배만으로는 내부 이견을 봉합할 수 없었다. B안을 지지했던 회원들 가운데 많은 수가 대의원총회 결정에 불복했다. 그들은 민청련 탈퇴를 선택했다. 탈퇴한 사람들 중에는 임원들도 있었다. 한경남 의장, 천영초 상임위원회 위원장 등이 그 속에 있었다.

 AB논쟁 이후 민청련을 탈퇴한 한경남 의장(왼쪽)과 천영초 상임위원회 위원장(오른쪽)
 AB논쟁 이후 민청련을 탈퇴한 한경남 의장(왼쪽)과 천영초 상임위원회 위원장(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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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하는 회원이 많았던 데에는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던 마음 속 규범이 영향을 미쳤다. 그 시기에는 학생운동을 마친 사람은 마땅히 노동현장에 투신하여 기층 민중운동을 강화하는 데에 헌신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당시 정세도 영향을 끼쳤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 이후에 노동운동 내에서 정치투쟁 그룹이 활성화하던 시기였다. 그 결실로서 출현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은 전체 민중운동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학생운동 출신자들에게 거대한 흡입력을 발휘했다. 이 때문에 노동운동에 뜻을 두고 있던 민청련 회원들은 서둘러 노동 현장으로 이전하는 길을 걸었던 것이다.

민청련의 조직 기반은 큰 타격을 받았다. 6차 총회 이전에는 계반과 각급 기구에 망라된 민청련 회원 숫자가 400∼500명 정도였다. AB논쟁은 회원 숫자를 감소시켰다. 논쟁이 끝난 이후에 그 숫자는 50%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평가된다.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았다고 해서 탈퇴를 결행하는 것은 공동체의 논의 규범을 따르지 않는 행위였다. 조직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

논쟁이 왜 이처럼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는가? AB 논쟁이 조직의 분열과 약화로 귀결된 원인에 대해서 민청련은 뒷날 자체 분석의 결과를 내놓았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민청련의 조직 기반을 학생운동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 출신자들은 억압과 불의에 맞서는 비판 의식과 동지적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운동 출신자의 규합에만 힘썼을 뿐, 독자적인 회원 재생산을 꾀하지 않았다.

둘째, 학생운동 출신자였기에 학연에 민감했다. 출신 학교와 써클 등의 차이가 구성원들 내부에 균열을 가져왔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학생 출신이기에 이론적 승부욕을 갖기 쉬웠다. 내부 토론과정에서 상대방에게 밀리거나 지기 싫어했다. 따라서 다수결에 승복하지 않고 분파적으로 활동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회원 감소와 함께 민청련의 위상과 영향력도 축소됐다. 민청련은 출범 초기부터 민주화운동 단체들 간의 연대에 힘을 기울였고, 또 노동운동 세력과의 연대 활동에도 관여해 왔다. 이 두 갈래 연대 활동은 총체적인 조망과 방향 설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민청련의 위상이 위축됨에 따라 상황이 일변했다. 민청련을 향한 구심력보다도 외부 운동을 향한 원심력이 더욱 강하게 작용했다. 어느 쪽과의 연대를 중시하느냐에 따라 조직 구성원들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됐다. 그 틈은 어느새 넘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벌어져 갔다.

김희택 집행부의 출범

새 집행부가 출범했다. 6인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가 선출됐다. 김희택 의장을 비롯하여 최민화, 김병곤, 박우섭, 이범영, 윤여연 등이 중앙위원이 됐다. 이미 구속됐거나 수배중인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최민화, 김병곤은 구속중이었고, 박우섭은 6차총회가 끝난 이튿날 체포됐다. 다른 3인은 지명 수배중이었다. 도망자의 처지에 처해 있으면서도 이들은 지도력을 발휘했다.  윤여연이 운영위원장을 겸했다. 김근태 초대 의장에 뒤이어, 짧았던 한경남 의장 체제를 이어받아 세 번째 의장 리더십이 형성됐다.

 6차 총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들 1.김희택 의장 2.박우섭(수배 후 구속) 3.최민화(구속 중) 4.김병곤(구속 중) 5.이범영(수배) 6.윤여연 운영위원장
 6차 총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들 1.김희택 의장 2.박우섭(수배 후 구속) 3.최민화(구속 중) 4.김병곤(구속 중) 5.이범영(수배) 6.윤여연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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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 국면이었으므로 실질적인 집행부는 비공개 상태로 두어야 했다. 그래서 종전의 비공개 상임위원회 체제를 확대 개편하여 상임집행위원회를 설치했다. 상임집행위원으로는 장준영, 이병호, 이승환, 유기홍, 오세중, 임태숙, 최경환, 진재학, 이난현, 박선숙, 진영효 등 11인이 선임됐다. 대학교 입학년도를 기준으로 볼 때 73학번에서 79학번에 이르는 세대였다. 이들은 상임위 내부 부서를 하나씩 책임지고 이끌었다.

 6차 총회에서 선출된 11인의 비공개 상임집행위원회 1.장준영 2.이병호 3.이승환 4.오세중 5.유기홍 6.임태숙 7.진재학 8.이난현 9.진영효 10.최경환 11.박선숙
 6차 총회에서 선출된 11인의 비공개 상임집행위원회 1.장준영 2.이병호 3.이승환 4.오세중 5.유기홍 6.임태숙 7.진재학 8.이난현 9.진영효 10.최경환 11.박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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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개헌 요구 투쟁

AB논쟁 못지않은 또 하나의 논쟁이 있었다. 개헌 문제였다. 이것이 당면 전술 논쟁의 초점이 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독재정권이 개헌논의 불가 방침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1986년 1월 16일, 전두환은 헌법상 대통령 임기가 보장된 1988년까지 개헌 논의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헌법논의를 빙자한 범법행위를 처벌하겠다고 발표했다.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한 처사였고, 따라서 이제 개헌 요구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최대 현안이 됐다.

끓는 물에 기름을 부은 듯 개헌 요구 투쟁이 불타올랐다. 대학생들이 가장 먼저 항의 행동에 나섰다. 학생운동 세력은 개량주의적인 노선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혁을 수행할 수 있는 혁명적인 노선에 입각해서 개헌문제에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전학련은 2월 4일, 헌법제정국민의회 구성을 요구하는 범국민서명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군사독재와의 타협 여부를 저울질하고 있던 야당 정치세력도 개헌 요구를 촉구하고 나섰다. 신민당은 2.12총선 1주년 기념식에서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을 시작한다고 선언했다. 그에 뒤이어 '대통령 직선제 등 민주개헌촉진 1천만인 서명운동' 명단을 3월 6일자로 공개했다.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연합기구인 민통련과 기독교계 민주인사들은 민주제 개헌을 요구하고 나섰다. 박형규 목사를 비롯한 민주화 운동 지지 교역자들은 2월 17일 '기독교 민주헌법개정 서명추진본부' 결성 준비회의를 열었다. 민통련은 3월 5일, '군사독재 퇴진 촉구와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 선언'을 발표하고, 서명자 303인의 명단을 공개했다.

구로동맹파업 이후 강력한 정치투쟁 드라이브를 걸고 있던 노동운동 세력도 개헌 요구투쟁에 나섰다. 서노련은 "우리가 진정 획득해야 할 헌법은 오직 삼민통일헌법 뿐"이라고 주장하고, "일천만 노동자가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 개헌투쟁을 전개"하자고 호소했다.

이와 같이 개헌 문제를 둘러싸고 전체 민주화운동 진영 내에서 다양한 의견과 주장이 제기됐다. 직선제 개헌, 민주헌법 쟁취, 헌법제정회의 구성, 삼민통일헌법 제정, 개헌투쟁 무용론 등이 어지럽게 교차됐다. 민청련 회원들 내부에는 이 모든 입장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영향이 큰 것은 민주헌법 쟁취론과 헌법제정회의 소집론이었다. 이 두 가지 견해를 지지하는 회원들이 민청련 내에서 다수를 점했다.

이처럼 내부의 이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6차 총회는 개헌투쟁의 전술에 관한 민청련의 통일된 견해를 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두 개의 골자로 이뤄져 있었다. 하나는 직선제 슬로건을 폐기한 점이다. 종전에는 직선제 개헌 슬로건을 다른 주요한 슬로건들과 함께 병용해 왔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부각되어 다른 슬로건들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의도와는 달리 개량주의적 색채를 전면에 내세우는 착오를 범하게 됐다고 인식했다. 그 결과 6차 총회 논의 과정에서 직선제 슬로건은 개량주의적 성격을 갖는다는 이유로 공식적으로 폐기됐다.

다른 하나는 헌법제정회의 소집론이 승인된 점이다. 「군사독재헌법 철폐하고 헌법제정회의 소집하자」는 슬로건이 기본 슬로건으로 채택됐다. "군사독재의 즉각적인 종식 → 군사독재의 잔재를 일체 배제하고 민중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헌법제정회의의 소집 → 민주헌법의 제정" 이라는 정치 일정을 실현해야만 반독재투쟁의 근본적 승리를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헌법제정회의 소집론’을 슬로건으로 채택하여 배포한 민청련 전단지
 ‘헌법제정회의 소집론’을 슬로건으로 채택하여 배포한 민청련 전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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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먹이 홀로 돌보는데...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쳐들어왔다


대탄압 탓에 민청련은 위기에 몰렸다. 고문 수사에 반대하는 맹렬한 대응 운동에 나섰지만, 타격을 받고서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도력을 제공하던 공개 간부를 한꺼번에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김근태 전 의장을 비롯해 최민화 부의장과 김병곤 상임위원장, 이을호 상임위 부위원장, 연성수 상임위 부위원장, 김종복 청년부장, 권형택 사회부장, 김희상 대변인 등과 같은 상층 간부들이 모두 구속됐다.


1986년 4월 민청련·민가협에서 발간한 [민청련 탄압사건 백서-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싸우길 원한다]에 실린 당시 민청련 사건 관련자 사진과 명단ⓒ 민청련동지회


장보러 가는 길까지 미행... 감시는 '일상'

이범영 집행국장을 비롯한 체포되지 않은 간부들도 행동이 자유롭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수배령이 내려졌다. 각급 수사기관에 소속된 체포조들이 다투어 수배자들의 행적을 뒤쫓고 있었다.

그뿐인가. 지도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새로 선출한 신임 간부진도 부자유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한경남 신임 의장을 비롯해 김희택 부의장, 천영초 상임위원장과 윤여연 사무국장, 서원기 집행국장 등 새 집행부 성원들 10여 명도 지명 수배자가 됐다. 선출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도망자 신세가 됐다. 안팎으로 민청련을 대표하고, 다른 부문 운동과의 연대를 담당하던 공개 간부들이 한꺼번에 활동의 자유를 속박 당했다.

수배자를 뒤쫓는 경찰의 추적은 삼엄했다. 우선 수배자 가족이 표적이 됐다. 첫 아이를 출산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새댁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범영 집행국장의 부인 김설이가 젖먹이를 홀로 양육하고 있는 집에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쳐들어와 수색 영장도 없이 집을 뒤지는 게 예사였다. 그녀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상황에 놓였다. 사복형사 3인이 1개조로 시장에 장 보러 가는 것까지 미행했다. 감시조는 3교대로 24시간 작동했다. 따라서 수배자로서는 가족과 연락을 시도하는 행위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공개 활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무실 운영도 난관에 부딪혔다. 그곳을 지킬 활동가가 없어진 데다가 경찰의 감시 및 폐쇄 조치가 강화된 탓이었다. 중부경찰서 형사대는 1985년 9월 8일, 민청련 사무실을 압수 수색했다. 잠긴 자물쇠를 쇠톱으로 자르고 강제로 진입해 사무실에 보관된 책자와 문서들을 가져갔다. 뒤이어 10월 6일에는 민청련 사무실이 치안본부, 국가안전기획부, 중부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폐쇄됐다. 간부들에 대한 수배령과 함께 출입 차단 조치를 내렸던 것이다.

이제 사무실에 출입하는 행위는 경찰의 강화된 감시·통제 조치로 인해 위험한 일이 됐다. 사무실에 출입하는 것은 신분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았고, 느닷없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형사대에게 붙잡힐 우려가 있었다. 사무실은 텅 빈 상태가 됐다. 입구는 자물쇠로 굳게 잠긴 채 아무도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다.

민청련 탄압을 규탄하는 농성을 하면서 동료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있는, 이범영 집행국장 부인 김설이ⓒ 민청련동지회


남산처럼 부른 배를 부여잡고 삼각지 사무실로  

이때 경찰의 부당한 폐쇄 조치를 무력화하고 민청련 사무실을 다시 활성화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민청련 여성들이었다. 체포되거나 수배된 민청련 간부들의 젊은 아내들은 고문 수사와 용공조작에 맞서는 제3차 농성 장소를 민청련 사무실로 잡았다.

폐쇄 명령이 내린 지 불과 9일 만인 그해 10월 15일, 민청련 여성들은 아침 일찍부터 삼각동 사무실로 집결했다. 연합 농성을 벌이기로 약속한, 문익환 의장을 비롯한 민통련의 연로한 임원들도 동행했다. 여성과 노인으로 이뤄진 연합부대였다. '적진을 향해 돌격 앞으로' 진격하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웬걸! 아무도 지키는 자들이 없었다. 각목으로 출입문을 가로질러 못질을 해놨을 뿐이었다. 일행은 장도리로 못을 빼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경찰의 연이은 압수 수색 탓에 난장판이 된 사무실 공간을 말끔히 청소하고 항의 농성에 돌입했다. 이 농성은 반독재 연합전선을 구성하는 데에 큰 지렛대가 됐다. 농성 이틀째에는 야당 정치세력의 두 지도자인 김대중과 김영삼이 4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경찰 저지를 뚫고 농성장인 민청련 사무실을 격려 방문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경찰의 사무실 폐쇄 조치는 사실상 무력화됐다. 삼각동 사무실은 탄압 하의 민청련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웅변해주는 하나의 상징이 됐다. 그해 12월 28일 민가협이 현판식을 거행한 장소도 삼각동 민청련 사무실이었다.

민가협 현판식을 거행할 때 경찰은 현장을 봉쇄했다. 이미 사무실에 들어간 사람들과 뒤늦게 도착한 회원들은 격리되고 말았다. 어떻게든 그 저지선을 뚫어야 했다. 해산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은 최정순이 앞장섰다. 민청련 회원이자 구속자 이을호의 부인인 그녀는 남산처럼 불러 오른 배를 부여잡고 맨 앞장에 섰다.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던 경찰들도 차마 그녀를 제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무실 봉쇄는 여전히 유지됐다. 사무실 진입이 가로막힌 구속자 가족들은 삼각동 민청련 사무실 앞 길거리에 앉아서 농성을 시작했다. 군중들이 모여들고 교통 혼잡이 일어났다. 경찰은 군중을 해산시키려 했다. 거리에 주저앉아 있는 농성 대열을 향해 트럭을 밀고 들어왔다. 놀란 가족들이 순간적으로 일어나서 피하려 한 탓에 대오가 흩어졌다.

이때 끝까지 대오를 지킨 이들이 있었다. 민청련 여성들이었다. 연성수 상임위 부위원장의 아내 이기연이 끝까지 버티자, 트럭 범퍼가 등에 닿으려는 위급한 상황이 조성됐다. 김희택 부의장의 아내 조명자가 그 옆으로 뛰어 들어왔다. 둘이 함께 트럭의 진입을 막았다. 그 당시의 극적인 장면을 찍은 사진이 있다. 그 사진은 일본에서 만든 민가협 회보 번역판 뒤표지에 실려서 민청련 여성들의 투쟁사를 증명하고 있다.


1985년 12월 18일 삼각동 민청련 사무실에서 개최한 민가협 현판식 날, 도로에 난입한 트럭을 막고 있는 이기연(왼쪽)과 조명자(오른쪽). 민가협 회보 민주가족 일본판에 실린 사진이다.ⓒ 민청련동지회


공개 포스트를 맡은 진영효

그렇지만 민청련은 활동의 중점을 옮겨야만 했다. 공개 영역의 활동을 부득이 축소해야만 했다. 구속자 가족들과 민가협 회원들이 활용하고 있는 삼각동 사무실에는 민청련 대표로는 한 사람만 출입하게 했다. 진영효 회원이였다.

서울대 사대 78학번이었던 그는 비공개 계반 조직 4개 단위 가운데 한 단위를 관리하는 팀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공개 영역과 비공개 영역을 연결하는 유일한 대표자로 선임된 것이다. 그는 공개 영역에 연결된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에 수배 중인 간부진과 접촉하는 것은 금기시됐다. 비공개 집행부와의 연결은 장준영 부의장이 맡았다. 진영효와 장준영 두 사람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개 영역 전반에 걸친 여러 현안과 의제를 협의했다.

진영효는 민청련의 유일한 공개 활동가로서 동분서주했다. 민청련 대표 자격으로 '고문 수사 및 용공 조작 공동대책위원회'에 참석했고, 설립 이후에는 그 실무를 맡았다. 민가협이 결성될 때에는 행정적인 일 처리를 도맡았다. 대외 연대 업무도 그의 일이었다. 종교계와 민통련 관계자들을 만나 현안에 관한 대책을 논의하고, 구속된 민청련 간부들의 담당 변호사들과 만나 협의하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민청련 탄압 시기에 유일하게 공개 활동 역할을 맡은 진영효(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민중신문] 제작을 담당한 연성만(오른쪽에서 세번째)이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인 이부영(오른쪽 첫번째)과 1985년 11월 8일 고문공대위 보고대회가 열린 혜화동 성당에서 구수회의를 하는 모습ⓒ 민청련동지회


만화가게로 위장한 비공개 단위들

민청련 활동의 중점이 비공개 영역으로 옮겨지면서 비공개 상임위원회와 기반 조직인 계반이 활동의 중심이 됐다. 상임위원회를 중심으로 주요 비공개 활동 단위들이 재배치됐다. <민중신문>과 전단지를 제작하는 선전국, <민주화의 길>을 발간하고 정책을 입안하는 정책실, 회원을 관리하는 조직국,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국이 그것이다. 이 기구들은 합정동, 영동시장, 아현동, 냉천동 등지에서 비공개 사무실을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비공개 사무실들은 겉으로는 가게나 사업체인 것처럼 꾸몄다. 이를테면 1985년 하반기에 집행국 교육선점부의 비공개 사무실로 사용된 공간은 마포 공덕동 고갯길에 있는 만화가게였다. 교선부장 윤형기가 그곳에 상주했고, 부엌과 방이 있어 부원들이 일주일에 며칠씩 교대로 숙직을 했다. 그 방에서 전단지를 비롯한 각종 유인물 초안을 작성했고 인쇄소에서 찾아온 유인물을 일시적으로 보관하기도 했다.

이 선전용 인쇄물들은 각 계반으로 분배됐고, 민청련 회원들의 손을 거쳐 서울 시내 곳곳에 은밀히 살포됐다. 이와 같이 원고, 제작, 배포에 이르는 모든 업무를 윤형기 부장과 김석영, 이영애, 곽해곤, 최성웅 등이 나눠 맡았다.

1985년 말부터 1986년 봄에 이르기까지 <민중신문> 팀의 비공개 사무실은 아현동에 있었다. 아현시장을 지나 북아현동 언덕배기 오르막길에 위치한 이 사무실은 들고나는 사람이 많아서 그랬는지 경찰의 주목 대상이 됐다.

결국 1986년 4월 17일 오후에 경찰이 불시 기습을 받았다. 그때 불운하게도 사무실에서 4.19 메시지 작성에 여념이 없던 연성만 회원이 연행되고 말았다. 머지않아 들이닥친 10여 명의 정사복 경찰은 2대의 차량을 동원해 사무실에 보관해 두었던 민청련 발행 소책자와 간행물을 닥치는 대로 압수해 갔다. 이날 <민중신문> 제12호 6천 부, <민청련탄압사건 백서> 소책자 400여 권을 빼앗겼다. 그뿐 아니라 <민중신문>팀 활동가들의 신원이 노출됐다. 유기홍과 유재상 회원이 경찰의 지명 수배를 받았다. 

민청련 탄압 시기에 신분이 노출되어 경찰의 수배를 받은 [민중신문] 팀의 유기홍(왼쪽)과 유재상(오른쪽)ⓒ 민청련동지회


여성부 조직도 탄압 국면에 적응했다. 이전에는 민청련 조직이 공개영역의 운영위원회와 비공개 상임위원회로 나뉘어 있었다. 여성운동의 경우, 운영위원회 내에서 여성부장 1인이 연대 사업을 담당했고, 상임위원회에는 여성분과를 설치해 정책 입안과 교육·연구 부문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탄압 국면에서는 조직 체계를 단일화했다. 여성부와 여성분과 조직을 상임위원회 산하 여성국으로 재편했다. 이 체제에서 밖으로는 다른 여성단체들과의 연대투쟁을 이끌어내고, 안으로는 여성 회원들을 비공개 가두 선전전에 지속적으로 동원해나갔다.

이리하여 탄압에 대응하는 새로운 조직 체계가 짜였다. 앞 시기의 집행부는 공개와 비공개의 2중 체제였다. 공개된 의장단과 운영위원회는 제1진이고, 비공개 상임위원회는 제2진이었다. 하지만 탄압으로 인해 체제가 바뀌었다. 제1진은 구속되거나 잠복 상태에 들어갔고, 공개 영역은 위축됐다. 이제 집행부는 비공개 단일체제로 재편됐다.

민청련은 조직체계를 정비함과 동시에 투쟁 대오를 가다듬었다.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탄압 국면에 맞서는 고문 수사 반대 투쟁이었다. 민청련은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투쟁위원회'(아래 고문투위)를 설립하여, 탄압 국면에 맞서는 항의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고문투위의 활약상은 두드러졌다. 민청련 구속자 가족들과 결합하여 과감한 농성 투쟁을 연이어 벌였으며, 그에 기반해 활발한 연대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야당 정치세력까지 포함한 광범한 반독재연합전선을 조직했고, 민가협 설립마저 이끌어냈다.

탄압 돌파는 투쟁으로

1985년 10월에는 세계은행(IBRD)·국제통화기금(IMF) 서울총회가 예정돼 있어 이에 대한 반대 투쟁에 힘을 쏟았다. 이 총회는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서울 힐튼호텔에서 개최됐는데 가맹국 148개국의 재무장관을 비롯한 대표 3,200여 명이 참석했고, 리셉션만 370여 회에 달하는 호화판 행사였다. 취재기자들의 솔직한 토로에 의하면, 총회 개최국이 누리는 실익은 별로 없고 예산 낭비에 불과한 국제회의였다.

민청련은 이 국제회의의 본질을 폭로하는 자료집 <IMF·IBRD 서울 총회와 민중민주화운동>을 발행하고, 전단과 스티커 등의 선전물을 살포했다. 10월 4일에는 민통련 등 28개 민주화운동 단체와 더불어 공동성명서를 발표했으며, 10월 8일에는 가두시위를 감행했다. 이 시위는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이뤄진 것으로서, 민통련 가맹단체와 EYC 등 청년단체들이 공동으로 개최한 것이었다. 300명 정도의 소규모 시위대가 청량리 미주상가 앞길에서 "외채정권 물러가라"는 구호와 함께 전단을 뿌리며 15분간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 시기에 민청련이 역점을 둔 또 하나의 투쟁이 있었다. 개헌투쟁이 그것이다. 민청련은 고문투위와 함께 '민주제개헌투쟁위원회'(개헌투위)를 자기 내부에 조직할 정도로 이것을 중시했다. 그러나 개헌투위의 활동은 기대 수준에 현저히 못 미쳤다.

 
1985년 9월 19일 영등포 성문밖교회에서 ‘군사독재정권퇴진과 민주제개헌쟁취를 위한 공개대토론회’를 열었다(위). 아래 사진은 윤여연 신임 사무국장이 교회 옥상에서 거리를 향해 토론회에 대한 홍보 및 선전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 민청련동지회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개헌투쟁의 전술 논쟁이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오래 계속된 점을 들 수 있다. 민청련 회원들 사이에는 개헌 문제를 둘러싸고 '직선제 개헌론'에서부터 '제헌의회 소집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입장이 혼재돼 있었다. 이러한 이견은 전체 민주화운동 내부의 불일치가 반영된 것이었다. 민청련 안과 밖의 논쟁 당사자들은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또 하나의 원인은 민청련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축소된 데에 있었다. 탄압으로 인해 활동력이 손상된 데다가 구로동맹파업 이후 노동운동권의 정치적 발언력이 증대되고 있었다. 게다가 민통련의 확대통합 과정에 민청련이 참여(9월 20일)하게 된 점도 이에 관련이 있었다. 뒤늦게 확대통합이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연합운동의 방향과 정책 수립을 둘러싸고서 여전히 체제 정비가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민청련은 개헌투쟁에 임하는 전체 민주화운동 대열의 통일적 대응을 모색했으나 성공할 수 없었다. 지난 8월 학원안정법 반대 투쟁과 10월 고문수사 반대운동에서는 실현했던 광범위한 반독재연합전선을 개헌문제에 관해서는 재현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민통련, 개신교, 청년, 학생운동은 제각각 개헌투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1985년 12월 6일, 민청련은 개헌 문제를 내세운 가두시위를 조직했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뤄진 연대투쟁이었다. 민청련, 민중불교운동연합, 기독청년협의회, 기독학생회총연맹, 가톨릭학생총연맹 등 5개 청년 학생단체가 주동한 시위였다. 경찰의 원천 봉쇄로 인해 시위운동 개최지는 서울시 외곽의 화양동 로터리로 변경됐다. 300명 수준의 소규모 시위 대열이 형성될 수 있었고, '군사독재헌법 철폐 및 민주헌법 쟁취대회' 개최를 알리는 전단과 유인물이 길거리에 살포됐다.

그러나 시위 시간은 경찰 병력의 신속한 출동으로 10분을 넘지 못했다. 민주화운동 전반에 위기감이 전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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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찾아내고 경찰과 대거리... 여자들은 이렇게 싸웠다        

                                   

  

1985년 10월 29일 서울대 민추위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결과를 보도한 경향신문. 이 사건의 배후가 민청련과 김근태 의장라는 검찰 발표를 그대로 베껴 쓰고 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최환 공안검사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2017년 개봉된 영화 [1987]에서 그는 박종철 고문사를 밝힌 의로운 영웅으로 묘사됐지만, 1985년의 그는 권력에 복종하는 다른 공안 검사와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 ⓒ 민청련동지회


"김근태는 빨갱이다!"

1985년 10월 29일, 서울지검 공안부가 '김근태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공안부장 최환이 마이크를 잡고 김원치, 최연희, 고영주 등 공안부 검사 8명이 배석했다.

발표에 따르면 최근의 모든 극렬 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해온 용공 지하조직이 있다고 했다. '민주화추진위원회'(약칭 민추위)였다. 이 비밀 조직은 위원장 문용식을 비롯하여 46명의 서울대 졸업생과 재학생들로 이뤄져 있었다. 검찰은 그중 26명을 구속했고, 3명을 입건했으며, 17명을 수배했다고 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검찰은 비밀 단체 민추위 배후에 또 비밀스런 배후조종자가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김근태였다. 민청련 전 의장 김근태는 1985년 2월 이래 민추위 위원장 문용식과 만나 그 활동을 고무, 격려, 조종해 왔다고 지목받았다.

검찰 발표에 따르면, 김근태는 '운동권의 대부'이고, '극렬 좌경의 사회주의자'이며, 폭력 시위 때마다 장외에서 조종하는 자였다. 그뿐 아니라 그의 가족은 온통 시뻘건 '빨갱이' 집안이라고 매도됐다. 큰형, 둘째 형, 셋째 형이 죄다 해방 후에 좌익에 가담한 끝에 월북했고, 숙부도 마찬가지였다. 외가도 그렇다고 한다. 외사촌 형 두 사람이 6.25전쟁 당시 부역 끝에 월북했고, 외숙모는 여성 동맹 활동 탓에 처형당했다. 처가도 그랬다. 장인은 6.25때 인민위원장으로 부역했고, 처이모부도 부역 끝에 월북했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친가, 외가, 처가 삼족이 모두 북한과 연루되어 있고, 김근태에게도 그런 혐의가 있다는 주장을, 국가권력이 언론매체를 통해 널리 유포했던 것이다.

독재정권의 의도는 명백했다. 고조되는 학생운동의 모든 책임을 민청련 김근태에게 지우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북한과 연루되었다는 구체적인 '범죄 사실'은 특정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구체적인 범죄사실에 대하여는 앞으로도 철저한 수사를 계속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좌경, 용공 이미지를 뒤집어씌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1985년 11월 4일 열린 고문공대위에서 발언하는 고 문익환 목사 ⓒ 민청련동지회


온 몸을 던져 고문을 고발하다

검찰 발표에 대한 항의 운동이 불붙었다. 민청련은 '소위 '민추위' 사건과 김근태 전 의장에 대한 배후조작 발표에 대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해, 검찰의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6개 항에 걸쳐서 낱낱이 밝혔다. 그리고 "고문에 의한 강압 수사이므로 수사 결과는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선언했다. 또 판결이 확정되기 전에 "수사 결과를 언론에 보도하여 여론 재판을 유도"하는 헌법 위반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청련 구속자 가족들은 독자적으로 '현 정권의 정치적 기만술을 폭로한다'라는 성명서를 냈다. 배후 조작과 김근태 가족에 대한 모략 선전에 항의하고, 민청련 간부의 석방, 이을호에 대한 전문의 치료, 고문 담당자의 처단, 용공 조작의 중지 등을 요구했다.

그에 멈추지 않았다. 민청련 회원과 구속자 가족 30여 명은 10월 31일부터 11월 4일까지 기독교회관에서 농성 투쟁에 돌입했다. 민청련 구속자 가족들이 주도하는 네 번째 농성이었다. 농성 참가자들은 새로운 항의 방법을 개발했다. 기독교회관이 큰길가에 위치해 있는 점을 활용하여 건물 난간에 '고문경찰 처단하라', '민청련 탄압 중지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창문을 통하여 매일 한두 차례씩 가두방송을 감행했다.

소설가 김국태도 나섰다. 현대문학상(1979년)과 월탄문학상(1981년)을 수상한 중견 작가인 그는 김근태의 친형이었다. 그는 검찰 발표에 항의하는 글을 썼다. "나의 가계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왜곡, 조작한 사실에 분개"한다고 집필 동기를 밝힌 그는 "다행인 것은 나의 동생 김근태가 검찰 발표대로 나의 가계의 불행한 어느 친지와 접선한 사실이 없다"는 점이라고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언론이 "나의 가계를 왜곡, 조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작가는 이렇게 묻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일반 대중들에게 관습화되어 있는 고정 관념을 건드려 검찰 당국 자신의 비논리성을 은폐하고 동정받자는 저의에서" 그랬을 것이라고.

민청련 여성들의 항의 운동은 외롭지 않았다. 공대위와 그에 합류한 여러 세력이 동참했다. 제4차 농성 마지막 날인 11월 4일 공대위는 농성장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공동대표 인사들과 민청련 농성자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세계 인권단체에 보내는 메시지' 등을 발표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4일 뒤인 11월 8일에 혜화동성당에서 '고문 및 용공 조작 저지를 위한 보고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농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 시민대회와 시위운동을 벌이겠다는 선언이었다.

   

1985년 11월 8일 고문공대위 보고대회가 열린 혜화동 성당에서 열린 미사와 보고대회 전경 ⓒ 민청련동지회


'고문 반대" 농성에서 거리 시위로 확산

뭇사람들의 관심과 긴장 속에서 보고대회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경찰은 수천 명의 사복 및 전투 경찰을 동원하여 혜화동성당 주위를 포위했다. 보고대회에 참석하려고 모여드는 시민들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과 문익환 민통련 의장을 비롯한 재야 민주인사들은 자택에 연금당했다. 시내 중심가 곳곳에도 기습 시위에 대비하기 위해 수많은 경찰관들을 배치했다. 마치 '전투지역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며 시민들은 공포감을 느꼈다.

결국 보고대회는 경찰의 통제로 개최되지 못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공대위 임원들과 민청련 여성들 70여 명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약식으로 보고대회를 열고 30분가량 노래 부르며 항의의 뜻을 표출했다.

시민대회 개최가 봉쇄되자 공대위는 실행 가능한 다른 방법을 택했다. 11월 11일부터 3일 동안 민추협 사무실에서 연합 농성에 돌입한 것이다. 고문수사와 용공 조작에 항의하는 것으로는 제5차 농성인 셈이었다.

이 농성에는 구속자 가족들을 비롯하여 민청련, 민통련, 충남민주운동협의회, 가톨릭농민회, 민중불교운동연합, 인천사회운동연합, 목민선교회, 민주헌정연구회, 신민당, 사민당, 민추협 등에서 100여 명이 참석했다. 참가 단체도 많아졌고 참가자 숫자도 훌쩍 늘었다. 농성자들은 이미 개발된 행동 전술을 되풀이 활용했다. 건물 앞뒤로 '살인적 고문 및 용공 조작을 즉각 중단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핸드 마이크로 거리의 시민을 향해 구호와 노래를 전했다.

이처럼 규모가 커진 까닭은 구속자들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고문수사에 대한 시민의 공분이 고조됐기 때문이었다. 그즈음 민청련 탄압 사건 외에도 여러 시국 사건의 구속자들이 고문 수사와 용공 조작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삼민투 사건, 깃발 사건, 민추위 사건 등으로 체포된 사람들이 그러했다. 삼민투 부위원장 허인회는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깃발 사건 연루자들은 "뜨거운 물에 거꾸로 처박혀 매를 맞으면서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책을 읽은 것으로 자백"하라고 강요당했다.

학생들만 대상이 아니었다. 9월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정치부장 등 언론인 3명이 신문 보도와 관련하여 안전기획부에 끌려가 가혹한 구타를 당했고, 대구교도소에서는 정진관 등 양심수 10여 명이 교도관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급기야 목숨을 잃는 희생자가 나왔다. 민추위 사건으로 도피 중이던 서울대 학생 우종원은 1985년 10월 11일, 경부선 철로 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그는 불운하게도 추적자들에게 사로잡혔던 것 같다. 도대체 그에게 어떤 짓을 했던 것일까? 그는 시신 상태로 발견됐고, 그로부터 하루 만에 경찰의 강압에 몰려 서둘러 화장되고 말았다.

누가 보더라도 그의 죽음은 고문치사의 결과이며, 서둘러 화장한 이유는 증거를 없애려는 의도 때문임이 분명했다.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한 정권이 권력을 장악한 뒤에도 끊임없이 고문과 폭행을 자행하고 있었다. 도처에 만연한 폭력에 대해 피해자들과 시민들이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전민학련 사건의 이태복 모친 이정숙 여사(오른쪽)와 민가협 문양을 디자인한 이기연(왼쪽). 1986년 민가협 집회에서. ⓒ 민청련동지회


민가협 탄생의 주역, 민청련 여성들

고문 수사와 용공 조작에 반대하는 항의 열기를 이처럼 고조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탄압에 맞서서 줄기차게 운동을 전개해 온 민청련 여성들이었다. 민청련 여성 회원이거나, 혹은 구속 및 수배된 민청련 회원의 젊은 아내들이 그들이었다.

인재근(김근태 부인), 박문숙(김병곤), 최정순(이을호), 김설이(이범영), 이기연(연성수), 조명자(김희택), 이경은(서원기), 박혜숙(최민화), 김충희(김희상), 김해숙(한경남), 이미영(박우섭). 이들은 구속자와 수배자의 가족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스스로 민주주의자이자 사회운동 참가자였다. 이들 중에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민족문화운동 참가자들이 많았고,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비밀결사의 구성원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러한 경험과 식견이 민첩한 대응과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게 하는 내적 원동력이 됐다.

민청련 여성들은 갑자기 사라져버린 남편들을 찾아 나섰다. 관할 경찰서를 항의 방문하고 숨겨져 있는 비밀 수사 건물들을 찾아냈다. 남영동, 장안동 경동산업, 신길동 신길상사, 옥인동 서울시경 대공분실, 송파 보안사, 남산 안기부, 이문동에 위치한 비밀수사기관들을 다 찾아냈다. 그뿐인가. 가로막아서는 경찰관들과 싸우고, 갖은 어려움을 뚫고서 수감자와 면회하고, 국가기관의 폭력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만들고, 플래카드를 내걸고 농성했다. 서로 손잡고 격려하면서 그렇게 했다.

구속자 가족의 능동적인 대응은 구속자들에 대한 국가폭력을 저지하고 완화시키는 데 큰 힘이 됐다. 또 가족의 그러한 노력은 구속자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어 고문을 버티는 힘이 돼 주었다.

민청련 여성들의 대응 행동은 다른 구속자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즈음 대학생과 노동자 구속자들이 급증하고 있었다. 시국 사건으로 인한 구속자 수가 800여 명에 이르렀다. "유신 말기의 최대 구속자 수 430명의 2배에 달하는 구속자를 양산"했다는 통계도 나왔다. 그러나 구속자 가족들은 처음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었을뿐더러 사건별로 제각기 따로따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민청련 사건의 젊은 아내들의 행동 양상은 그러한 경향을 변화시켰다. 가족들은 수사 당국의 부당한 조치에 항의하기 시작했고, 서로 연대를 모색했다.

민청련 여성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전면화시켰다. 모든 시국사건의 구속자 가족을 규합하여 마침내 1985년 12월 12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를 발족시켰다.

   

1985년 12월 18일 민가협 현판식을 막아서는 경찰(위)과 사무실이 있는 거리 앞에서 농성중인 민가협 회원들(아래) ⓒ 민청련동지회


집 속의 태양이 거리의 전사로

민가협은 서로 다른 사건에 따로따로 엮인 많은 가족들이 공동으로 연대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구성했다. 그 결과 각 부문별 구속자 가족 모임을 대표해서 공동의장으로 9명을 선출했다.

공동의장 중 5명은 양심수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소속(강길호의 부친 강영목, 김민석의 모친 김춘옥, 이춘의 모친 이청자, 함운경의 부친 함정석, 박능출의 부친 박순격)이었다. 다른 2명(전태일 모친 이소선, 전국민주노동자연맹사건 이태복의 모친 이정숙)은 '구속노동자가족모임'을, 또 다른 2명(남민전 사건 안재구의 아내 장수향, 재일동포간첩단 사건 이철의 장모 조만조)은 '장기수 가족 모임'을 대표했다.

민가협 창립에는 민청련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단체 명칭은 민가협 창립 선언문을 함께 집필한 최정순과 이기연이 협의해 고안해 냈다. 처음에는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라고 명명했으나, 민청련과 이름이 너무 비슷하다는 비평이 있어서, 민주화를 실천하는 가족운동이라는 의미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로 정했다.

상징 마크는 민중미술 작가인 이기연이 고안했다. 태양 속에 집이 들어 있는 형상이었다. 아내라는 말의 고어가 '안해'라는 점에 착안해, 여성들이 집안에 있는 태양과 같은 존재임을 중첩적으로 표현한 디자인이었다.

기관지로 <민주가족>을 발간했는데, 그 제호는 민가협 고문으로 위촉한 백기완이 썼다. 글씨를 잘 쓰지 못한다고 겸손해하면서도, 그는 기꺼이 임무를 맡았다. 기관지 편집은 홍보위원회에서 담당했다. 구속학생학부모 측에서 유시춘(유시민의 누나), 장기수가족 측에서 박광숙(김남주의 아내), 민청련여성 중에서 이경은이 그를 맡았다.

민가협 창립의 산파는 인재근이었다. 장기수 가족 모임을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서 구속학생학부모 측에서 반대의견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구속된 자기 아들이 좌익사범과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재근은 발 벗고 나서서 당사자들을 일일이 만나서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성원들의 내면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민가협 창립 이후 첫 사업으로 '장기수 석방 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인재근은 민가협의 초대 총무로 취임했다. 민가협의 총무는 다른 단체의 총무와는 그 역할의 비중이 크게 달랐다. 민가협의 모든 활동의 중심엔 총무가 있었고, 총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기획하고 운영해야 했다. 초대 총무 인재근에 뒤이어 2대 총무 조무하(장기표의 아내), 3대총무 박광숙도 막중한 민가협 총무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민가협 기관지 [민주가족] 창간호와 2호 표지 ⓒ 민청련동지회


인권운동의 중심이 된 민가협

민가협은 출범하자마자 인권운동의 근거지가 됐다. 과거에는 양심수 지원활동이 기독교와 천주교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이제 그 중심이 일거에 민가협으로 옮겨졌다.

민가협은 구속자 가족들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체계를 짰다. 맨 먼저 민가협 회원 수첩과 홍보 명함을 만들었다. 홍보 명함에는 민가협이 하는 일과 전화번호,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수감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든 옥바라지의 행동 매뉴얼이 적혀 있었다.

민가협문고도 운영했다. 하루 종일 갇혀있는 양심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읽을거리였다. 단기간에 열 몇 권씩 읽어대는 이들에게 책을 차입해주는 일만 해도 경제적으로 버거운 일이었다. 민가협문고는 양심수들에게 필요한 책을 구비했다. 구치소에 차입이 가능한 범위 내의 도서 목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책의 차입을 거부당하는 비율을 낮출 수 있었다.

민가협은 '구속자 가족이여, 당신은 외롭지 않다, 당신을 보호하는 단체가 있다'는 따스한 위로와 연대의식을 심어주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에서 형상화됐던 현상, 옥에 갇힌 투사의 가족이 우여곡절 끝에 수감자의 내면의 신념에 공감하고 그 동지로 거듭나는 현상이 현실화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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