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된 조직


제2차 총회로 생명력을 증명하다


청년 활동가의 대거 유입으로 활기를 띤 민청련은 1984년 4월 17일 서울 청량리 소재 신흥교회에서 2차 총회를 열었다. 창립 당시 집행부는 구속될 각오를 했고, 그에 대비해 차지 집행부를 구상해 놓을 정도였으나 모두 살아남은 것은 물론 복학조치로 조직이 크게 확대되기까지 했으니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이날 총회에 참가한 인원은 약 180명에 이르렀다.

총회는 내부 행사이므로 경찰이나 정보기관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안을 유지해야 했다. 특히 많은 인원이 모일 넓은 장소를 기밀 누출 없이 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총회 직전 '계원'들에게 전달된 장소는 회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청량리에 있는 신흥교회였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는 윤반웅이었다.

그는 장준하의 동료로서 기독교계에서 존경받는 원로이자, 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1976년 명동3.1민주구국선언 등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투사이기도 했다. 1990년에 향년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런 그였으므로 민청련에게 기꺼이 총회 장소로 교회를 내주었을 것이다.  

 2차총회가 열린 신흥교회는 현재는 옛 자취가 남아 있지 않고, 이름도 동녘교회로 바뀌었다. 왼쪽 사진은 윤반웅 목사
 2차총회가 열린 신흥교회는 현재는 옛 자취가 남아 있지 않고, 이름도 동녘교회로 바뀌었다. 왼쪽 사진은 윤반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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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에서는 조직이 확대된 것을 반영해 부의장직을 2명으로 늘려 창립 당시부터 관여해 왔던 이명준과 고려대 출신의 노동운동가 한경남(2014년 별세)을 부의장으로 추대해 집단지도체제를 갖췄다.

이명준은 천주교 사회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을 지냈고, 창립 당시부터 모임에 참여해온 인물이었다. 한경남은 고대 재학 중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긴급조치 9호 위반 등으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 노동운동에 관여해오고 있었다. 그는 민청련 활동 이후 말년에는 친박연합, 새누리당 등으로 옮겨 정치를 하다가 2014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한경남을 부의장으로 추대한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고대 출신들이 창립에 기여한 바가 컸으므로 그 공헌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노동운동 출신을 대표로 내세움으로써 노동운동 측의 지지와 지원을 기대한 것이었다.  

 2차총회에서 새로 선출된 이명준(왼쪽)·한경남(오른쪽) 부의장
 2차총회에서 새로 선출된 이명준(왼쪽)·한경남(오른쪽)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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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부를 신설하다

2차 총회에서 또 하나 특기할 일은 집행부에 여성부를 신설한 것이었다. 여성부를 맡을 책임자는 당시 집행부에서는 가장 낮은 학번인 77학번의 임태숙이었다. 다른 부서 책임자들과의 학번 차이가 커서 부장이 아닌 부장 대리로 임명했다.

집행부에 여성부를 신설한 것은 당시 여성 운동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다른 진보적 운동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태동됐다. 그리고 해방 정국에서 좌우가 대립하는 국면에서 여성운동 역시 좌우로 분립됐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진보적 여성운동은 다른 모든 진보운동과 함께 거의 소멸됐다.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아래서 보수적 여성운동은 집권세력의 보호 아래 일종의 봉사단체 수준에 그쳐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강권을 동원해 밀어붙인 경제개발 과정에서 억눌리고 짓눌린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운동에 나서게 되는데, 그 구성원의 상당수는 늘 여성이었다. 즉 70년대 노동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이 대단히 컸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운동에 대한 모색이 새롭게 싹트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한국 여성운동의 모태 역할을 한 기구는 강원용 목사가 창설한 '크리스찬 아카데미'였다.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는 여성사회교육과정을 도입했는데, 이 교육을 이수한 여성 활동가들이 1970년대 말에 '여성유권자연맹'을 만들어 여성의 정치적 각성을 위해 활동했다.

한편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신의 일부 여성들은 당시 미국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 있는 것에 착안하여 폭력에 노출된 여성을 위한 운동을 주창하며 1983년에 '여성의 전화'를 설립했다. 이러한 여성운동 단체들은 대체로 중산층 여성들을 대상으로 활동했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으로 무장한 학생운동가들, 특히 여성학생운동가들은 이러한 운동에 '부르주아적' 혹은 '프티 부르주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불렀다. 계급적 한계를 지닌 운동, 민중을 외면한 운동이라는 시각이었다. 그리고 1980년에 여성학생운동가들의 인식을 확인해주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여성유권자연맹 대표는 우리나라 여성운동 1세대 대표주자라고 불리는 김정례였다. 김정례는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왕성한 활동력으로 '자수성가'한 여성운동가였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에는 김대중, 이희호 부부 등 재야 민주세력과 가깝게 지내며 활동했다. 그런데 전두환이 '광주 학살'을 저지르고 권력을 잡아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에 김정례가 여성 대표로 참여한 것이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젊은 여성활동가들이 여성유권자연맹을 탈퇴하고 별도의 조직을 만든다. 그것이 1983년에 창립한 '여성평우회'(약칭 여평)였다. 여평은 1987년에 여성민우회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5년 호주제 폐지는 여성민우회가 이룬 큰 업적이다.

 (위 사진) 여성평우회(1983~1987)가 발행했던 기관지. (아래 사진) 1987년 9월 여성민우회 창립식
 (위 사진) 여성평우회(1983~1987)가 발행했던 기관지. (아래 사진) 1987년 9월 여성민우회 창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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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평은 비록 전두환 정권에 비판적인 여성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었지만, 그 활동의 축은 이전 유권자연맹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여성학생운동가들은 '여성의 전화' 및 여평과는 다른 '변혁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시점인 1984년 4월 민청련 2차 총회에서 집행부 안에 '여성부'를 신설한 것이었다.

민청련의 여성운동론

따라서 민청련 여성부의 여성운동론은 청년운동론과 궤를 같이하게 된다. 청년운동론에서의 청년이 단순히 연령을 기준으로 한 구분이 아니었듯이, 민청련에서 말하는 여성은 단지 성별 구분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사회변혁에 앞장서는 존재로서의 여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여성부를 이끌 인물로 다른 부서와 달리 나이 어린 77학번의 임태숙이 발탁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민청련 여성부는 발족하면서 특별히 '여성부 발족에 붙여'라는 제목의 긴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 결의문에서는 "여성 대중들은 같은 계층의 남성들이 받는 경제적 억압과 더불어 성차별이라는, 이중적 억압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러한 억압을 타파하기 위한 6가지 행동지침을 내걸었다. 그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립 분산된 여성 역량을 결집, 체계화하여 여성의 진정한 해방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투쟁한다.
1. 기층여성들이 처해 있는 경제적·성적 억압의 현실을 폭로하고 이를 여론화하며, 이들의 운동을 지원한다.
1. 바람직한 여성운동을 지향하는 타 여성 세력과의 연대운동에 참여한다.
1. 우리의 현실이 요구하는 여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기 위한 연구 및 조사 활동을 한다.
1.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길들여지고 왜곡된 문화를 지양, 현실에 뿌리 내린 건강한 여성문화를 창조한다.
1. 민주화운동 세력 내부에도 온존하고 있는 여성 차별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 중 특히 마지막 결의가 눈에 띄었다. 운동권 안에서도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용기 있게' 폭로한 것이었다. 이는 이후 다른 단체의 여성운동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민청련 초대 여성부장을 역임한 임태숙. 2008년 10월 민청련동지회 강화도 수련회 당시 모습
 민청련 초대 여성부장을 역임한 임태숙. 2008년 10월 민청련동지회 강화도 수련회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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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곤의 등장

한편 민청련 조직의 강화는 공개된 집행부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었다. 민청련은 창립 당시부터 공개된 집행부 이외에 공개되지 않은 조직으로 상임위원회를 두었다. 초대 위원장은 최민화였다. 상임위는 공개된 집행부의 공식적 활동과는 다르게 노동, 농민, 여성, 빈민 등 각 부문 운동과의 연대 및 지원 활동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부서였다. 또한 정치, 경제, 국제관계 등 각 분야에 대한 정세를 분석하고 정책을 연구하는 기능도 있었다.

상임위는 이러한 일상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공개된 집행부가 구속되어 공석이 될 경우 빠른 시일 안에 그것을 복원해내는 임무도 맡겨져 있었다. 일종의 섀도 캐비닛이었다.

이러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상임위원장에 또한 매우 의미 있는 인물이 영입되었다. 그는 바로 김병곤이었다.

김병곤은 서울대 운동권을 이끌어온 지도자로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사형 판결을 받고 최후진술에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1980년 '서울의 봄' 때 서울대 운동을 이끈 인물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에서는 5월 1일 개교 이래 최초로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1만 명이 참석하는 집회가 있었다. 그리고 5월 15일, 서울역 앞에 20만 시위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 모든 집회의 기획에 그가 관여했다.

이후 광주 항쟁을 거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을 때 그는 모처럼 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나 직장인이 되었다. 민청련 창립에 그가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오랜 투쟁과 투옥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는 운동을 외면할 수 없었다. 유화 국면을 통해 운동의 전선이 넓어지고, 경험 있는 운동가가 요청되는 국면이 조성되자 민청련에 가담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민청련 간부 및 회원들은 그의 참여를 크게 반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펼칠 지도력에 큰 기대를 걸었다.

이후 김병곤은 민청련 활동에 온 몸을 던졌고, 옥살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지만 그의 활동은 그 큰 육신이 감당하기에도 너무 벅찬 것이었을까, 1991년 38세 한창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87년 가을 홍제동 성당에서 열린 시국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했을 당시의 김병곤 민청련 상임위원장
 1987년 가을 홍제동 성당에서 열린 시국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했을 당시의 김병곤 민청련 상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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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는 이틀 앞으로 다가온 4·19 24주년을 기념하여 '민주화의 횃불을 드높이기 위하여'라는 시국성명서를 채택했다. 이 성명서는 4월 19일 서울 수유리 4·19묘지에서 거행된 기념식에서 공개적으로 낭독된다.

총회를 마칠 무렵 이미 정보기관은 눈치를 채고 정복 및 사복 경찰 200여 명을 교회 주변에 배치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하지만 정보기관이 판단하기에 아직은 총회 자체만으로 연행할 상황은 아니었던 듯하다. 회원들은 긴장한 가운데 무리를 지어 청량리 로터리까지 행진을 했다. 이때 구호를 외치거나 했으면 당장 연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원들은 침묵의 행진을 함으로써 그들이 연행할 빌미를 주지 않았다. 무언의 시위를 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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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 조직의 확대


전두환에 맞서기 위한 '청년운동론'의 내용은?


1984년 대학가는 새학기는 전두환 정권의 복학조치로 제적생들이 복학을 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특히 민청련 구성원들에게 복학 여부는 각 개인의 판단에 맡겨진 셈이 되었는데,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체로 복학을 거부한 회원이 다수였다.
또한 복학조치가 정권이 의도한 대로 운동권의 약화라는 효과를 가져 오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 논쟁의 과정에서 학교를 떠난 뒤 흩어져 생활현장으로 돌아가거나 운동을 지속하더라도 소그룹 단위의 지하조직에서 활동하던 이들을 토론의 광장으로 불러내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고 그들 상당수가 민청련의 틀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즉 전두환 정권의 복학조치는 민청련 운동에 밑거름을 제공한 격이었다.

 복학조치는 민청련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사진은 1984년 1월 연세대 제적생들이 개최한 제적학생총회 모습
 복학조치는 민청련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사진은 1984년 1월 연세대 제적생들이 개최한 제적학생총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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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창립 당시에는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반 학번의 소수 활동가들을 주축으로 했지만, 복학 국면을 거치면서 70년대 중·후반에서 80년대 초반 학번 사이의 수많은 청년 활동가들을 회원으로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민청련은 이들을 각 학교, 학번 별로 조직했는데, 기존의 기별 모임을 대신해 '계모임'의 이름을 모방해 '계반'이라고 불렀다.
계반은 서울의 주요 대학을 망라했고, 규모가 큰 서울대의 경우엔 각 단과대학 별로 나아가 각 학번 별로 모임이 만들어졌다.
당시 성균관대 79학번으로 계반 모임에 참석했던 최경환(현 국민의당 국회의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성균관대의 제적생을 중심으로 한 운동권에서도 민청련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기로 하고 79학번에서는 내가 참석했다. 나는 낮에는 출판사 일을 하고, 저녁에는 민청련 일을 했다. 그때 우리 계반에는 은행원도 여럿 있었고, 이름 있는 건설회사 직원 등 나와 같은 직장인이 많았다. 대부분 학생운동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계주' 모임은 모든 활동방향과 노선이 논의되는 대의원회의 같은 성격의 모임이었다. 또한 '계반'을 이끌며 시위와 집회에 참여하고 선전물을 배포하는 실천단위였다. 밤을 세워 토론하고 집회에 나가고 유인물을 뿌리고 하는 일들을 했다. 그리고 '계주'와 '계반'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비공개 조직이었다. 민청련이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오랫동안 조직을 유지하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계주'와 '계반'과 같은 조직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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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이 풍미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민청련 조직이 확대되었다고 해서 민청련 내부의 분위기가 한껏 고양돼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선 우선 그때 학생운동에 뛰어든 청년들의 고민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19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 학생운동을 하던 이들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던 담론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이었다. 이른바 사적 유물론이라는 것으로, 간략하게 말하자면 인류의 역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던 원시 공산사회가 붕괴된 뒤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농노제 사회, 근대 자본제 사회로 단계적 발전을 해왔다고 보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와 [공산당산언] 및 [자본론] 초판. 80년대 학생운동권에게 이런 사진과 책의 소지는 곧바로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재해석한 일서들을 통해 마르크스 사상을 접했다
 칼 마르크스와 [공산당산언] 및 [자본론] 초판. 80년대 학생운동권에게 이런 사진과 책의 소지는 곧바로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재해석한 일서들을 통해 마르크스 사상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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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사관의 근본 뼈대는 역사는 발전한다는 테제이다. 노예제, 농노제, 자본제가 모두 서로 대립하는 두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정도는 단계적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대립하고 있는 현재의 자본제 사회는 그 다음 단계로 발전해서 마침내 계급이 소멸된 사회에 도달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학생운동가들이 모두 사회주의자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로의 이행 이전까지의 역사에 대한 발전사관은 대체로 받아들였다. 즉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므로 기본적으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대립하고 있으며 이러한 대립을 극복할 주체는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따라서 사회운동의 기본 축은 노동운동이어야 했다. 학생운동은 우리나라에서 4·19혁명을 주도했고, 80년 광주항쟁에서도 주력을 담당했던 고도로 정치적인 세력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사회를 발전시키지 못한다, 근본적인 변혁을 이끌 주체는 노동자 계급이다. 따라서 학생운동가들은 노동자 계급을 각성시키고 조직하는 데 투신해야 한다는 것이 이때의 시대정신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학생운동가들은 노동 현장에 투신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운동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이때 대학 학력으로 공장 노동자로 취업하는 것은 이상한 눈초리를 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에 고졸 학력으로 속이고 이른바 '위장 취업'을 했다. 주로 구로 공단과 경인지역 공단의 제조업 기업에 취업한 그들은 노동자들의 소그룹을 만들어 함께 노동법 등을 학습하며 의식을 일깨우고, 그들과 함께 노동자 권익을 위한 '경제투쟁'을 벌여나갔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출신으로 나중에 민주노동당 창당을 주도한 심상정이 이 당시 구로공단의 대우어패럴이라는 의류생산업체에 위장 취업하여 이러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1986년 구로공단 동맹파업 사건으로 수배된 시절의 심상정
 1986년 구로공단 동맹파업 사건으로 수배된 시절의 심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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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민청련 '계반'에서는 민청련 활동에 대한 일정한 비판의 분위기도 존재했다. 그것은 민청련 운동은 기본 계급 즉, 노동자 계급에 기초하지 않은 상층에서의 정치운동이므로 결과적으로 야당 등 제도 정치권의 아류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냉혹한 평가였다. 당시 야당은 민주한국당으로 김영삼, 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가 정치활동이 금지된 상태에서 정부의 간섭 아래 만들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학생운동 측에서는 그들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2중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평을 하고 있었다. 민청련 운동이 그들과 같은 종류의 활동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은 일종의 모욕과도 같았다.

청년운동론을 정립하다


민청련 지도부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방치해서는 구성원들을 붙잡아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학교를 떠난 학생운동 즉 청년운동의 개념을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임무는 서울대 출신의 이론가 이을호에게 맡겨졌다. 이을호는 전북 전주고등학교 출신으로 서울대 미학과 74학번이었는데, 이미 학창시절부터 천재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민청련 창립에 적극 참여하고 정책실장으로서 자기 역할을 맡았다. 그를 중심으로 정리하여 틀을 갖추어 모습을 나타낸 것이 민청련 판 '청년운동론'이었다.
주로 이범영을 통해 회원들에게 전파된 청년운동론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청년운동에서 청년이라 함은 반드시 연령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청년의 특성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혈기 넘치는 활동성에 있다. 이러한 활동성은 곧 진보적인 흐름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진보적 감수성으로도 연결된다. 즉 청년운동에서 청년은 새로운 이념을 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활발할 활동으로 표출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청년운동은 전체 운동에서 '전술적 단위'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술적 단위란 '전략적 단위'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사회의 변혁이다. 그런데 사회 변혁을 이루어낼 운동체나 조직이라고 하면 그 형태는 전 계급을 아우르면서 그 운동을 총체적으로 지휘하는 '전위적 정당'이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운동가들의 인식이었다. 청년운동이 비록 높은 활동성을 가지고 정권에 맞서 싸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운동의 지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전략적 단위'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지만, 80년대 중반 당시의 운동권 안에서 이런 질문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적은 거의 없다. 왜냐 하면, 그런 조직체라면 당시 법규상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일 것이므로 지하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것을 입에 떠올린다는 것 자체를 금기시했다고 볼 수 있다. 또는 그런 조직체는 우리의 운동 수준상 아직 존재하지 않으므로 논의의 대상에 올리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노동운동은 전체 운동의 중심부 역할이어야 했다. 86년 구로 동맹파업 당시 공장 창밖으로 현수막을 내거는 대우어패럴 노동자들
 노동운동은 전체 운동의 중심부 역할이어야 했다. 86년 구로 동맹파업 당시 공장 창밖으로 현수막을 내거는 대우어패럴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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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스스로를 '전술 단위'라고 한정함으로서 노동운동으로부터 제기되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민청련의 운동이 정권과 맞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지만, 스스로를  전체 운동의 지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민청련 운동은 어디까지나 전체 운동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선언이었다.
그렇다면 노동운동에 기초하지 않은 민청련 운동의 효용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선도적 정치투쟁'에 있었다. 노동운동은 비록 기본계급의 운동이고 장차 전체 운동의 지휘부가 되어야 할 '전략적' 운동이다. 그렇지만 아직은 미성숙하여 당장의 부당한 정권에 맞서 싸울 능력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노동운동이 정치적으로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청년들이 나서서 정권에 맞서 정치투쟁을 벌여나가야 한다. 거기에서 정치적 긴장이 조성되고, 민주화를 위한 공간이 열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 운동의 발전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다. 바로 그 임무를 민청련이 떠안는다는 것이었다.
민청련이 선도적 정치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지하에 숨은 익명의 존재여서는 곤란하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활동해야 한다. 그것이 민청련이 공개적으로 창립대회를 열고, 시내에 공개 사무실을 개설하며 활동을 시작한 이유였다.
그렇지만 민청련이 모든 조직 전체를 공개할 경우 정권의 탄압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직은 공개된 부분과 공개되지 않은 부분으로 나뉘어야 했다. 즉 집행부는 대중과 정권 앞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하되, 집행부가 탄압으로 구속될 경우 그를 대체할 차기 지도부 및 그들을 충원할 회원 조직은 비공개로 운영되어야 했다. 이것을 민청련에서는 '반(半)공개 조직'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청년운동론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민청련은 '청년들이 전술적 단위로서 선도적 정치투쟁을 수행하는 반공개 조직'이었다. 

 반공개 조직 민청련에서 공개 및 비공개로 활동한 간부들. 윗줄 왼쪽부터 장준영, 박순섭, 한 사람 건너 장영달. 둘째줄 왼쪽부터 김병태, 유기홍, 박우섭, 김재승. 아랫줄 왼쪽부터 원혜영, 김근태, 최민화, 이을호, 임태숙. 사진은 1988년 김근태 석방 당시의 모습
 반공개 조직 민청련에서 공개 및 비공개로 활동한 간부들. 윗줄 왼쪽부터 장준영, 박순섭, 한 사람 건너 장영달. 둘째줄 왼쪽부터 김병태, 유기홍, 박우섭, 김재승. 아랫줄 왼쪽부터 원혜영, 김근태, 최민화, 이을호, 임태숙. 사진은 1988년 김근태 석방 당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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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집된 아들이 주검으로... '녹화사업 의문사' 6인


1984년 새해가 밝자 전두환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작년에는 많은 시련이 우리를 괴롭게 했으나, 우리는 민족의 위대한 저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착실한 전진을 이룩해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시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아마도 가장 직접적으로는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일 것이다. 그 전해인 1983년 10월 9일, 버마를 방문 중이던 그가 수행원들과 아웅산 장군 묘소를 참배하던 중, 나중에 북한인으로 밝혀진 테러범들이 설치한 폭탄이 터져 비서실장과 장관들을 비롯해 17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던 것. 이보다 한 달 쯤 전에는 대한항공 여객기가 사할린 부근 상공을 지나던 중 소련이 발사한 미사일을 맞아 추락해 탑승객 269명 전원이 사망하는 전대미문의 사고도 있었다. 전두환에게는 글자 그대로 시련의 한 해였을 것이다.

 민청련이 창립한 직후인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사진은 아웅산 묘소가 폭발한 직후 모습
 민청련이 창립한 직후인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사진은 아웅산 묘소가 폭발한 직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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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 언론에 노출된 사건보다 더 큰 시련이 전두환에게는 있었다. 정치활동 금지로 꽁꽁 묶어둔 김영삼이 급기야 단식투쟁으로 항거했고, 그 사실이 언론에는 '현안 문제'라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사건으로만 보도되었지만, 사람들의 귀에서 귀로 구전되면서 정말로 전두환에게 '현안'이 되어갔다. 

더욱 큰 시련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반정부투쟁이 끊이지 않고 불타올랐던 것. 이것이야말로 전두환에게 진짜 시련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모종의 유화책이 필요하다고 보고, 연말에 학생운동으로 제적된 학생들에 대한 전면 복학 조치를 내놓기에 이르렀던 터였다.

'유화국면'과 복학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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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의 처지에서도 1984년은 연말에 발표된 복학조치가 초래한 논란으로 뜨겁게 시작되었다. 운동권에서는 제적생 복학조치를 '유화조치'로 불렀고, 5공이 이러한 조치를 취한 정세를 '유화국면'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궁지에 몰린 5공이 운동세력에게 숨통을 트여 줌으로서 저항의 기세를 누그러뜨려 보겠다는 심산에서 나온 고육책이라는 판단이었다.

따라서 1984년이 밝아오자, 학생운동 출신자들로 구성된 민청련 안에서는 복학 조치를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된다. 민청련이 대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내부에서의 논쟁은 엄청난 열기를 토해냈다.

복학 거부론의 기본 논지는 이 조치가 기본적으로 5공의 수명 연장을 위한 기만적인 제스처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가장 선명하게 밀고나간 민청련 간부로는 기대(기별대표) 모임을 이끌던 이범영을 꼽을 수 있다.


이범영은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굵지만 윤기있는 목소리로 정세에 대해 또한 활동방향에 대해 조리있게 설명하곤 했다. 그래서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 '노가리'였다. 그는 매월 1회의 정기 기대 모임을 소집하고 공개된 집행부의 활동에 대한 보고와 정세에 대한 토론을 주재했다. 또한 각 기별 모임에서 제기된 의견과 기별 모임에서 거둔 회비를 집행부에 전달하는 일도 맡고 있었다.

따라서 1984년 초의 기대 모임에서는 복학 문제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이범영은 복학 거부론의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그는 기대 모임에서 이런 취지로 말했다.

"저들이 던져주는 떡고물을 왜 받아먹어야 하는가. 한 번 뒤로 물러서면 자꾸 물러서게 된다. 복학을 해서 학교에 들어가서 학생운동을 계속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복학한 이들을 통제하고 지휘할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복학은 우리 운동력의 손실만 초래할 것이다."

열혈 투쟁가였던 이범영은 안타깝게도 1994년 담도암으로 40세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에 반해 복학 수용론은 상대적으로 젊은 층에서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서울대의 경우 78학번들(민청련 출범 당시 78학번은 가장 어린 막내세대였다) 사이에 수용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었던 유시민이 대표적이었다.

수용론의 논지는 이 복학 조치 자체는 운동의 힘으로 5공을 압박해 쟁취한 성격이 있으므로 당당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결코 투항이 아니며 학교라는 투쟁의 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했다. 유시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5공에 굴복해서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싸우러 들어가는 거다. 80년 5․17 때 감옥에 가지 않고 군대에 간 것이 늘 부담이 됐었다. 이번엔 감옥 가는 것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겠다."

실제로 그는 복학했고, 복학생협의회를 이끌며 학생운동의 대열에 섰다. 그해 가을에 서울대 안에서 이른바 '학내 프락치 사건'이 일어났고 그는 기꺼이 그 책임자의 일을 떠맡았다. 그리고 그 일로 감옥에 갔으니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킨 셈이었다. 그가 감옥에서 쓴 '항소이유서'는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읽혀지는 명문장이 되었다.

어쨌든 논쟁은 뜨거웠지만, 민청련은 복학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지도부는 민청련이 각 대학 학생운동의 연합체인 점에서 어느 한 쪽을 두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보다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과 저항에 집중하기로 했다.

 복학거부론을 역설한 이범영(왼쪽)은 이후 시위 관련으로 수배되었고, 복학수용론을 주창한 유시민(오른쪽)은 서울대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되었다
 복학거부론을 역설한 이범영(왼쪽)은 이후 시위 관련으로 수배되었고, 복학수용론을 주창한 유시민(오른쪽)은 서울대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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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위로 드러난 녹화사업 공작

이때 민청련이 투쟁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이른바 '강제 징집'과 '녹화 사업'이었다.

강제 징집이란 1979년 무렵부터 각 대학이 학칙에 총장의 권한으로 일방적으로 휴학을 명령할 수 있게 한 제도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일방적인 휴학을 '지도 휴학'이라고 불렀다. 지도 휴학의 요건은 학칙 상으로는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유'라는 식으로 모호하게 표현돼 있지만 사실상 학생운동 관련자들을 학교로부터 강제적으로 격리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대부분의 남자 대학생들은 학사를 이유로 병역을 연기하고 있었으므로 지도 휴학을 당하면 군 입대 연기가 취소되고 곧바로 입대영장이 발부됐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지도휴학 제도는 1980년 전두환 정권에도 이어져 1980년 5·17 계엄포고령 이후 수많은 학생운동 관련자들이 이 제도에 의해 본인의 뜻에 의하지 않은 군 입대를 강요당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지도휴학 제도의 절차적 요건조차 무시하고,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단순가담자를 연행한 상태에서 지도휴학과 징집을 단 하루 이틀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시켜 곧바로 군에 입대 조치했다.

따라서 가족들은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사라지고, 며칠 뒤 군에 입대했다는 통지를 받게 되었다. 깜작 놀란 가족에게 학교 당국과 경찰은 구속되는 것보다 군에 입대하는 것이 일신상 좋은 것이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그렇게 군에 입대하게 된 당사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단순한 군 병영생활이 아니었다. 보안사는 이렇게 강제 징집된 자들을 '특별관리'하여 마치 형사 피의자인 것처럼 불러서 조사를 하고, 학생운동에 관한 정보를 진술하도록 강요했다. 보안사는 이를 '녹화사업'이라고 불렀는데, 좌익사상으로 빨갛게 물든 머리를 녹색으로 바꾸는 작업이라는 뜻이었다.

녹화사업은 법률에 의하지 않은 정책임은 물론 오히려 헌법과 법률을 정면으로 위반한 불법행위였으나,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군 부대 안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보안사는 학생운동 관련 군 복무자들에게 '사상전향'을 강요하는 한편 휴가를 주어 자신이 다니던 대학교를 방문하고 선후배들을 만나 학생운동 동향을 파악한 뒤 보고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녹화사업은 그 과정에서 당사자들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심한 상처를 주었음에 틀림없다. 결국 녹화사업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죽었다는 황망한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가족들에게 전달된 사인은 한결같이 '신병을 비관한 자살'이었다. 가족들은 자살할 이유도 없고, 심지어 유서도 남기지 않은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들의 호소는 언론을 통해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학생운동가들 사이에서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뿐이었다. 

이렇게 소문으로만 떠돌던 녹화사업과 그로 말미암은 의문사 사건이 복학조치를 계기로 군대를 제대한 복학생들에 의해 최초로 공론의 장으로 떠올랐다. 1984년 2월 20일,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과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가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진정한 복교를 위한 공개간담회'를 주최하려고 했으나 당국의 압력을 받은 기독교 측은 장소 대여를 거부했다. 그러자 140여 명의 복학생들이 그 장소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이때 그들이 내세운 구호 중에 "강제징집 철폐"와  "의문사 진상규명"이 들어 있었다.

선도투쟁의 모범을 보이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민청련은 곧바로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앞장서기로 했다. 그래서 기독교 청년단체들과 함께 '강제징집 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준비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을 이끈 이는 서울대 사범대 76학번 이원주였다. 그 자신이 5·17계엄 조치 이후 강제징집으로 군에 입대당해 '녹화사업'을 받은 당사자였다.

이원주는 민청련 활동 이후 인천민주노동자연맹 창립에 참여하는 등 평생 진보정치를 위한 활동에 헌신했다. 말년엔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나가던 중 2016년 11월,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원주는 1984년의 준비모임을 통해 그동안 입으로만 전해지던 녹화사업과 의문사의 진상을 담은 '강제징집 문제 공동조사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총 28쪽에 달하는 강집문제 보고서의 표지와 그 작업을 주도한 이원주
 총 28쪽에 달하는 강집문제 보고서의 표지와 그 작업을 주도한 이원주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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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에 따르면 지도휴학과 강제징집은 법률상 대상이 될 수 없는 이들에게까지 마구잡이로 시행되었다. 시위 현장에서 단순 가담자로 연행된 학생, 뚜렷한 혐의 없이 '문제 학생'으로 지목된 자, 공단 부근에서 야학 강사를 하던 대학생 등이 주된 대상이었다. 그들을 불법으로 연행하여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뒤 본인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강압적으로 자원입대동의서에 서명하게 했다. 그리고 병역법상 정상적 절차 없이, 가족 면회도 없이 수사기관에서 곧바로 군부대로 징집 처리했다.

그들 중에는 신장 및 체중이 규정에 미달하거나 시력이 극도로 미약하여 징집 대상이 안 되는 자가 있었고, 심지어 나이가 아직 징집 대상에 못 미친 자도 있었고, 간질, 늑막염, 축농증, 소아마비 등 징집에서 제외될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자들도 포함됐다. 2대 독자 및 3대 독자로 징집 면제가 될 이들도 있었다.

'보고서'는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특히 정치권은 국민의 생명이 걸린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어 야당인 민한당을 중심으로 정부에 대해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준비모임'은 정식으로 '강제징집 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더욱 광범위한 조사활동과 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때 강제징집돼 '녹화사업'의 대상이 된 뒤 의문의 죽음을 당한 6명의 신원과 죽음을 앞둔 행적을 조사하여 최초로 공개했다. 한양대학교 기계과 81학번 한영현, 고려대학교 정경계열 80학번 김두황, 연세대학교 영독불계열 81학번 정성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81학번 이윤성, 서울대 기계설계과 한희철, 동국대학교 사대 수학교육과 81학번 최온순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죽음이 있기 전 그 어떤 자살의 조짐이나 동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그리고 의문사에 대한 문제 제기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당시 사회분위기에서 군은 일종의 불가침 영역이었고, 군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보안사 분실 같은 곳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따라서 정치권의 야당은 물론 어떤 사회단체도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민청련이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이었다.

공대위에 참여한 단체가 민청련 이외에는 모두 기독교와 가톨릭 교단에 속한 청년 단체였던 것은 그만큼 이 문제가 종교를 배경으로 삼지 않고서는 제기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의 배경이 없는 민청련은 정보기관에게 눈엣가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민청련은 강제징집 문제를 선도적으로 제기함으로써 자칫 학생운동이 복학 문제를 두고 관념적인 논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당면 투쟁을 통해 운동 대열을 유지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녹화사업 의문사 6인 1. 한양대학교 기계과 81학번 한영현 2. 고려대학교 정경계열 80학번 김두황 3. 연세대학교 영독불계열 81학번 정성희 4.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81학번 이윤성 5. 서울대 기계설계과 한희철 6. 동국대학교 사대 수학교육과 81학번 최온순

 녹화사업 의문사 6인 1. 한양대학교 기계과 81학번 한영현 2. 고려대학교 정경계열 80학번 김두황 3. 연세대학교 영독불계열 81학번 정성희 4.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81학번 이윤성 5. 서울대 기계설계과 한희철 6. 동국대학교 사대 수학교육과

81학번 최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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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때문에 6번 해고... 민청련이 나섰다


김근태 의장 폭행사건

김근태 의장의 수난은 경찰에 의한 연행과 구류처분으로 그치지 않았다. 1983년 11월 28일, 안기부 수사 1국장 성용욱이 김 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면담을 요청해왔다. 김 의장은 집행부에 대한 안기부의 집요한 협박과 방해에 대해 항의를 전달하기 위해서 만나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면담에 응하기로 하고 약속장소인 신라호텔로 나갔다.

그런데 저녁식사 도중 성용욱이 무례한 언동으로 김 의장을 자극했다. 이에 김 의장이 격분해 상을 뒤집어엎으며 항의했다. 결국 두 사람 간에 치고받는 싸움이 벌어졌고, 김근태 의장은 눈 위가 찢어지고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져 입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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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사회분위기에서 안기부 요원의 행패에 대해 공개적으로 항의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민청련에서는 즉시 성용욱의 폭력에 대해 고소하는 법적 조처를 취하는 한편 11월 30일자로 폭력사태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2월 9일에는 홍제동 한 중국음식점에서 회원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김 의장 폭행사태에 대한 경과를 보고하고 대책을 협의했다.

안기부는 처음에는 전혀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부인했으나 민청련의 끈질긴 대응에 결국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했다. 결국 안기부 최 아무개 수사단장이 직접 병원에 찾아와 사과하고 치료비를 변상하는 선에서 사태는 마무리됐다.

 김근태 의장에게 가해진 안기부 폭행사태에 대한 성명서
 김근태 의장에게 가해진 안기부 폭행사태에 대한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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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철폐투쟁

12월 6일, 전북 이리에서 태창 메리야스 해고 노동자들이 농성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민청련 사무실로 전해졌다. 민청련은 진상조사와 대책 수립을 위해 즉각 박우섭 총무국장을 현지로 파견한다. 박우섭은 이리 노동부 지방사무소 등을 방문하여 진상조사를 하는 한편 농성 현장을 방문하여 노동자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귀경하여 집행위에 출장보고를 했다.

사회부장 연성수는 박우섭 총무의 조사보고를 바탕으로 가톨릭 JOC 등과 함께 공동으로 농성노동자를 지원하는 활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연성수는 인천에서 노동현장 문화패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사귄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김옥섭, 인천 산업선교회에서 일하는 서기화(JOC 회원) 등을 만나 지원방안을 의논했다.

김옥섭은 동일방직에서 해고된 이후에도 사업주들 사이에 돌고 있는 블랙리스트 때문에 6번이나 더 해고된 전력이 있었다. 블랙리스트는 노동운동을 막기 위한 정부와 사업주의 합작품으로 노동운동에 큰 족쇄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리 태창 메리야스의 쟁의 역시 이것이 문제가 돼 일어난 것이었다.

민청련은 즉시 노동⋅청년운동단체들과 함께 블랙리스트를 철폐하는 운동을 조직했다. 12월 15일 JOC 회장단 단식농성, 16일 인천지역 해고노동자 단식농성, 21일 JOC 주최의 해고노동자를 위한 예배 및 농성에 민청련이 동참했다.

이와 동시에 민청련은 12월 20일, 16개 청년단체 연석으로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이 논의의 결과로 청년단체들은 12월 26일 13개 단체 연합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민주노동운동자 블랙리스트 문제 대책위원회'(위원장 문익환)를 발족하기에 이른다.

 블랙리스트 철폐를 위한 연합 성명서(왼쪽)과 1978년 7월 동일방직 노조에서 일하던 김옥섭(오른쪽)  유인물 배포 사건으로 재판에 출석하는 모습
 블랙리스트 철폐를 위한 연합 성명서(왼쪽)과 1978년 7월 동일방직 노조에서 일하던 김옥섭(오른쪽) 유인물 배포 사건으로 재판에 출석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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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연합회 탄압 폭로투쟁

1983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른바 '야림사건'으로 알려진 '야학연합회' 사건이 발생했다.
치안본부 직속 비밀수사기관이 150여 명의 야학교사들을 불법적으로 연행하고 가택수사를 하는 등 전면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행된 교사들은 수사과정에서 장시간 밀실감금과 잠 안 재우기 등의 가혹행위를 당하며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의식화 교육'을 시켰다는 강제진술서를 요구받았다. 치안본부는 이런 과정을 통해 대학생 300명, 노동자 200명이 연루된 조직표를 작성하고 야학 전체를 사회주의 단체로 낙인찍으며 좌경용공의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민청련은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파헤쳐 전두환 정권이 어떻게 순수한 야학운동을 용공조작하고 있는지 실상을 폭로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농협민주화운동과 수세 현물납부운동

그리고 1983년에 가톨릭농민회 중심으로 전개된 '농협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연대했다.
'농협민주화운동'은 농협이 농민의 경제적 이익을 담보하고 농민이 식량생산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데 도움이 되는 조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농민의 이익과는 무관하게 외국농산물을 수입해 판매하는 등 농민을 어렵게 만드는 기구로 타락해가고 있던 현실에서 출발했다.

가농은 농협의 문제는 농민이 직접 대표를 뽑지 못하고 정부가 임명하는 데 원인이 있다고 보고 농협민주화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83년 7월 27일부터 '농협조합장 직선제 100만 서명운동 추진 결의대회'를 연합회별로 개최하고 범국민적인 서명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이 서명운동에 민청련은 적극 동참하고, 지지성명도 발표했다.

아울러 민청련은 '수세 현물납부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연대를 표시했다. '수세 현물납부운동"은 경남 관방마을에서 가톨릭농민회 주도로 일어났다. 83년 11월초부터 이 마을 농민들은 추곡수매량을 늘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하자 현물(벼)로 수세(농지개량조합비)를 납부할 것을 결의했다.

농민들은 12월 19일, 경운기 17대에 261가마의 벼를 싣고 '수세 현물 자진납부 차량'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12km 떨어진 진주시내의 진양 농지개량조합으로 출발했다. 가는 도중 온갖 방해와 구타를 무릅쓰고 조합에 도착, 잠긴 출입구의 담장 너머로 벼 가마를 던져 넣었다. 이 투쟁으로 이장이 구속되기까지 했으나 전국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한 당국이 농민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했다. 민청련은 이 사건의 경과를 사회에 적극 알려나감으로써 농민들의 투쟁을 지원했다.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창립 이후 그해 작성한 성명서 목록. 1984년에 열린 제2차 총회 보고 문건의 일부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창립 이후 그해 작성한 성명서 목록. 1984년에 열린 제2차 총회 보고 문건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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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자율화조치와 제적학생 복학문제

1983년 12월 21일, 이른바 학원자율화조치가 발표됐다. 권이혁 문교부 장관은 전국대학 총⋅학장회의에서 제적학생 1,363명에 대한 복교조치를 발표하고, 학원대책도 처벌 위주에서 선도 위주로 바꿀 것이라고 밝혔다. 이튿날에는 공안사건으로 구속됐던 172명이 석방되고 142명이 복권되었는데 그 중 131명이 학생운동으로 구속 수감되었던 학생들이었다.

제적생 복학 조치는 민청련 활동에 즉각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미쳤다. 민청련의 기반조직에 속한 회원들 중 대다수가 제적생이었기 때문에 이 복학 문제는 자신의 거취와 관련된 중대사였다.

그래서 복학 문제를 둘러싸고 민청련 각 조직 내에서 격렬한 토론이 일어났다. 집행위에서는 집행위원 모두가 민청련 상근 활동으로 복학이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일단 집행위원들은 복학하지 않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리고 민청련 집행부는 복학 논의가 복학여부를 떠나 민청련 조직을 활성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판단했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공개운동에 소극적이었던 제적생들도 대부분 이 복학논의에는 참여했고, 이 논의를 매개로 미조직 계반을 조직화하여 민청련과 연결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판단이 옳았음이 곧 드러났다.

이렇게 복학논의가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하는 시점에 어느덧 해는 기울어 연말이 다가왔다. 민청련은 당시 운동권 사람들에게는 낯선 모임인 대규모 송년회를 계획한다.

마리스타 송년회

송년회는 12월 28일 서울 합정동에 있는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열렸다. 2호선 전철 합정역에서 한강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병인년(1864년) 천주교도들이 목이 잘려 순교한 절두산 성지가 나온다. 절두산 성지를 오른쪽에 두고 왼쪽으로 꺽어 3-4분 가면 마리스타 수도원이 나온다. 1973년 멕시코 수사들이 세운 수도원이다.

이곳은 2013년 통진당 이석기 의원이 당원들을 모아놓고 강연했다가 내란음모를 꾸민 것으로 기소되어 당 해산의 빌미가 됐던 곳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곳은 1980년대 민청련⋅민통련의 민주화운동과 인연이 깊은 장소였다. 6월항쟁 당시 민통련과 국민운동본부의 중요한 결정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983년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 28일 저녁 7시 이곳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민청련 합동송년회가 열렸다. 합동송년회라 이름 붙인 것은 민청련이 주관하는 송년회지만 민청련 회원들 외에 아직 민청련에 들어오지 않은 재야 민주청년들 모두를 초청한 송년회였기 때문이다. 마침 22일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130여명의 청년 학생들이 석방되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석방환영회도 겸하는 모임으로 자리가 마련됐다.

민청련 집행부가 공안기관의 방해공작을 뚫고 사무실에 입주한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고, 성명서 한 장에 김근태 의장이 연행되고 구류를 사는 등 전두환 정권 탄압의 서슬이 아직 시퍼런 때라 이 합동송년회를 개최하는 문제를 놓고도 기대(기별대표모임)에서는 논란이 많았다.

기대의 분위기는 신중론이 강했다. 아직 우리의 힘이 약한데 공개적으로 이렇게 큰 집회를 열었다가 저들에게 탄압의 빌미를 줄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 신분이 노출될 수 있는 공개집회란 점도 우려의 이유였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집행부에서는 이 송년회가 운동권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민청련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회원을 확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기대에서도 결국 집행부의 적극적인 설득에 따라 합동송년회를 열기로 결의하고, 각 출신학교별로 대대적으로 참석을 독려했다. 송년회 장소는 창립총회와 마찬가지로 보안을 고려해 시내 중심가에서 좀 떨어진 합정동 마리스타 수도원으로 정했다.

 1983년 민청련 송년회가 열린 마리스타 수도원 현재 전경. 지금은 마리스타 교육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1983년 민청련 송년회가 열린 마리스타 수도원 현재 전경. 지금은 마리스타 교육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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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는 예상을 뛰어넘어 200여 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송년회는 1⋅2부로 나누어 진행했다. 1부에서는 석방된 동지들에 대한 환영회를 진행했다. 박우섭의 사회로, 석방된 청년 40여 명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소개되고 환영과 격려의 박수를 받았다. 김근태 의장의 환영사와 석방자 대표의 답례 인사가 이어졌다.

석방자들은 수감 중에 민청련과 김근태 의장에 대해서 어렴풋이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자기들을 환영해주리라 예상치 못했었기 때문에 감동이 컸다. 그리고 군대를 갔다 온 나이든 제적생들은 학생운동 후에 자신이 선택할 활동지로서 자연스럽게 민청련을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2부에서는 연성수의 사회로 민주화운동상 시상식을 가졌다. 이것은 연성수가 직접 기획한 것인데,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한 해 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활동과 인물에 대해 시상하는 것이었다. 우수성명서상에는 <황정하 학형을 누가 죽였는가!>가 차지했다. 시위 중에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 허리를 다친 연대의 양경희와 외대의 이경옥에게도 상이 수여됐다. 민중가요대상에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선정됐다.

이어서 박우섭의 사회로 흥겨운 여흥시간을 가졌다. 참석한 청년동지들은 투쟁과정의 온갖 시름을 모두 털어버리고 한데 어울려 밤이 깊도록 놀았다.

민청련은 예상외로 큰 성황을 이룬 송년회에 크게 고무되었다. 김근태 의장은 이 송년회를 이렇게 평했다.

"민청련이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한 송년회는 굉장히 열기 있는 모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자신감을 가졌고, 그리고 함께 뜻을 모아서 더욱 전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 굉장한 열기가 민주주의 쪽으로 진군할 수 있는 힘이 됐다."

송년회 모임을 기점으로 민청련은 공개정치투쟁단체로서 대내외에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1984년부터는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가게 된다.

 1983년 송년회에서 상을 받은 민청련 회원 이경옥. 2012년 촬영
 1983년 송년회에서 상을 받은 민청련 회원 이경옥. 2012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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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방한' 반대 시위... 누가 황정하를 죽였는가?


민청련은 사무실과 조직체계가 어느 정도 정비되자 11월 초부터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첫 활동으로 11월 5일, 사무실 근처 음식점 대우정에서 내외신 기자와 외부인사 초청 다과회를 가지고,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에 반대하는 장문의 성명서 <민주화여! 민주화여! 민주화여!>를 발표한다. 11월 12일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는데 이는 미국이 전두환 독재정권 지지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에 대한 한국민의 반대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 성명서에서 민청련은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이 '우리의 민주화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독재권력의 지원을 위한 것인가'라고 묻고 전두환 독재정권의 지원을 위한 이번 방한에 단호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레이건 방한 반대투쟁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에 반대하는 장문의 성명서 ‘민주화여! 민주화여! 민주화여!’ 의 첫장과 마지막장.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에 반대하는 장문의 성명서 ‘민주화여! 민주화여! 민주화여!’ 의 첫장과 마지막장.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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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명서는 단순히 레이건 방한 반대만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성명서는 A4 용지 9쪽에 달하는 장문의 문건으로 성명서라기보다는 당시 운동권에 떠돌던 운동론 팸플릿에 가까웠다. 여기서 당시 민청련이 바라보는 정세에 대한 인식과 향후 운동방향과 실천과제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문건의 작성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근태 의장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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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 말미에는 민청련 운동의 방향에 대해서도 정리해 놓았다. 목소리만 높이는 명망가 운동이나 권력이 그어놓은 선 안에 머무는 소극적인 운동을 배격하고 투쟁성에 기초한 조직적 대중투쟁이 청년운동의 방향임을 밝혔다.

레이건 방한 반대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치안당국은 민주인사들에 대해서 불법 연행과 불법 연금조치를 남발했다. 이를테면, 당국의 주요 요시찰 대상이던 학생운동 출신 제적생을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했다.

이때 숭실대 제적생이었던 윤여연은 다짜고짜 경찰의 급습을 받고 연행돼 구로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레이건이 한국을 떠나는 날까지 꼬박 갇혀 있었다. 윤여연은 이 유치장에서 외국어대 제적생인 김성원과 첫 대면을 했는데, 이들은 훗날 민청련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민청련은 11월 11일에 기독청년협의회(EYC)와 함께 규탄 성명서를 발표했다.

 2008년 10월 민청련동지회 강화도 야유회에 참석한 김성원(왼쪽)과 윤여연(오른쪽)
 2008년 10월 민청련동지회 강화도 야유회에 참석한 김성원(왼쪽)과 윤여연(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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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정하를 죽였는가?

11월 8일 서울대에서 레이건 방한에 반대하는 교내 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 과정에서 주동자였던 4학년 학생 황정하가 시위를 주동하기 위해 도서관 6층에서 줄을 타고 5층 난간으로 내려오다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교내에 상주하던 기관원들의 과잉제지가 사고의 원인이었다.

이에 민청련은 11월 30일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와 공동 명의로 <이 땅에서 폭력은 영원히 추방되어야 한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누가 황정하 학형을 죽였는가?'라고 묻고, 1차적 책임은 학원에 투입된 학원사찰요원들에게 있지만 그 배후에서 이들을 '교사하고 명령한' 권력 당국이 진짜 주범이라고 주장하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성명서는 아울러 억압과 감시체제를 묵인하고 침묵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그 책임이 있음을 고백했다. 또한 '황정하 학형은 영웅인가?'라고 묻고, "아니다. 결코 아니다!...(중략) 그는 연속적인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꿰뚫는다는 진리 앞에 한 작은 물방울이고자 했다. 외롭고 두려운 자기 결단과 희생 앞에 지극히 겸허하게 작아지고자 한 황정하 학형은 그러기에 오히려 위대한 것이다"라고 그 죽음의 뜻을 기렸다.

 당시 배포되었던 황정하 추모 전단지 전면
 당시 배포되었던 황정하 추모 전단지 전면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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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민청련과 청년단체들은 12월 4일 명동성당에서 황정하 추도미사를 열었다. 추도미사는 명동성당 교육문화관에서 1500여 청년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는데, 함세웅 신부가 강론을 하고 서울대학생 백낙현 군의 추도사 낭독, '학원민주화를 위한 카톨릭 학생 선언' 등으로 진행됐다. 미사 후에는 100여 명의 청년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학원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성당 밖 100m 앞까지 진출했다.

이 추도식장에서 민청련은 고인의 뜻을 기리는 황정하 추모카드를 만들어 300원씩에 팔았다. 이 추모카드에 공동성명서 내용을 담았는데, 당시 재정이 어려웠던 사정도 있었지만 성명서를 판매한다는 것이 집회 참석자들에게 신선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호응이 좋았다.

김근태 의장의 수난

안기부와 경찰에서는 민청련 간부들을 계속 감시하는 한편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해 여러 형태로 위협을 가해왔다. 그 중에서도 김근태 의장이 가장 중요한 타깃이었다. 김근태 의장은 창립총회 때 안기부에 연행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난 이후에도 툭하면 담당서인 종로경찰서에 연행됐다. 민청련이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집회 같은 대외 활동이 있을 때마다 경찰들은 김근태를 연행해갔고, 그 과정에서 구류도 여러 번 살았다.

11월 중순쯤 되었을까. 김근태 의장이 종로서에 연행되어 갔다는 소식이 사무실로 전해졌다. 아마도 그 직전에 냈던 레이건 방한 반대 성명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무실에 비상이 걸렸다.

박우섭 총무와 홍성엽 재정부장이 전화로 회원들을 불러 모으고, 박계동 홍보부장은 언론사에 연락하여 연행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종로 경찰서장에게 전화로 강력히 항의하고 즉각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비상을 건 지 한 시간쯤 지나 이해찬, 박성규, 권형택 등 10여 명의 회원들이 사무실에 모였다.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의논한 결과 종로경찰서로 직접 쳐들어가기로 했다.

실탄이 필요했다. 실탄이란 민청련 입장을 알리는 성명서였다. 우선 급한대로 박계동이 초안한 16절지 한 장짜리 항의 성명서를 쓰고, 연성수 등 집행부원들이 함께 달려들어 수동식 먹지 인쇄기로 200여 부를 인쇄했다.

역전의 용사 이해찬, 박계동이 앞장서고 집행부원들과 회원들 10여명이 뒤따르면서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면서 종로경찰서까지 행진했다. 간간히 "김근태를 석방하라!" 구호도 외쳤다. 사무실에서 종로경찰서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지만 연도의 시민들에게는 이 시위행렬이 당시 전두환 철권통치 아래에서 보기 힘든 신기한 광경이었다. 종로서에 도착한 이들은 경찰서 마당에서 저지하는 경찰들에 둘러싸였다. 그러자 이들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서장 면담과 김근태 석방을 요구했다. 경찰들과 밀고 당기고 하는 과정에서 이해찬의 안경이 깨졌다.

결국 민청련 담당이었던 정보과 소속 정아무개 형사가 쫓아 나와 정보과 사무실로 안내했다. 정보과에 들어가자마자 박계동, 이해찬이 주동해서 사무실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금방이라도 책상을 둘러엎을 태세로 큰소리로 김 의장 내놓으라며 소란을 피웠다. 한참 소란을 피운 후에야 정보과장이 나와 김근태 연행에 대해 해명했다. 조사 중이니 기다려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자리에서 김 의장의 석방 약속을 받아 내지는 못했지만 민청련의 강력한 항의 의사를 경찰 측에 전했다. 그리고 이해찬 상임위 부의장 폭행에 대해서는 종로경찰서장의 사과와 깨진 안경에 대한 변상약속을 받아냈다. 김 의장은 이번에도 결국 구류 3일을 살고 나왔다.

5분대기조 공동번역실

이런 긴급동원에는 권형택이 운영하던 공동번역실이 한몫을 했다. 이 번역실은 권형택이 아현동에 있는 선배 박경희(동국대 74학번)가 운영하는 출판사 지양사 옆에 사무실 한 칸을 얻어 운동권 후배 4-5명과 운영하고 있었다.

이 번역실은 일반직장에 다니는 회원들에 비해 근무가 자유로운 편이라 민청련의 긴급사태가 있을 때마다 일차적으로 동원되었다.

공동번역실은 권형택이 다음 해 민청련 집행부로 들어가기 전까지 책임자가 되어 1년여를 운영했다. 이 번역실에는 오의택, 진재학, 백병규, 김성환, 최보은 등이 있었다.

 공동번역실 멤버들. 1.천희상 2.권형택 3.오의택 4.진재학 5.백병규 6.김성환
 공동번역실 멤버들. 1.천희상 2.권형택 3.오의택 4.진재학 5.백병규 6.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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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역실의 일거리는 당시 운동권 선배들이 경영하는 사회과학 출판사에서 주로 얻어왔다. 물론 바로 옆 사무실 지양사도 고객 중 하나였다. 그러나 번역일은 당시 소규모 사회과학 출판사들의 재정사정이 워낙 뻔한 것이어서 번역료도 쌌고, 결재도 몇 달씩 미뤄지기 십상이라 썩 재미있는 일이 못되었다.

그나마 당시 여의도 전경련빌딩에 있는 현대경영이라는 잡지사에 다니는 천희상(서울대 73학번)이 잡지에 게재할 영어 원고 번역 일을 나눠줘서 큰 도움이 됐다. 원고료도 비교적 괜찮았고, 무엇보다 월말에 꼬박꼬박 결재 받을 수 있었다. 천희상은 나중에 권형택이 번역실을 떠난 뒤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번역실장으로 들어와 앉았다. 

공동번역실은 말이 직장이지 선후배들이 모인 동아리 비슷했다. 출퇴근 시간은 정해놓았지만 실제 규율은 느슨했다. 번역 작업을 하다가 오후 3-4시면 모여서 바둑도 두고, 고스톱도 치고, 그러다 술 먹으러 가는 일이 잦았다. 각자의 수입은 자기가 일한 분량만큼 가져가고, 그 중 일정 부분만 사무실 경비조로 내놓는 방식이었다. 일종의 협동조합과 비슷했다. 권형택이 명색이 번역실장이었지만 회사 사장처럼 지시하고 이윤을 챙기는 것은 아니고, 단순 관리자에 가까웠다. 일종의 방장 역할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민청련이 생기고 나서 이 번역실에 변화가 생겼다. 민청련 집행부가 구성되고 사무실을 내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번역실이 집행부의 행동대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번역실 사람들에게는 민청련에서 한 달이면 몇 번 씩 동원령이 떨어졌다.

민청련이 사무실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한 긴급대책회의라다든지, 또 김근태 의장이 경찰서에 잡혀가서 항의방문을 해야 할 때면 어김없이 번역실로 연락이 왔다. 막상 직장 다니는 회원들을 근무 중에 불러내기는 어려웠으니 자유노동자인 번역실 사람들이 일차 동원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실 사람들은 자신을 민청련의 '5분대기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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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설렁탕의 '기대 모임', 민주화의 역사를 만들다



민청련은 그 회원들은 상당수가 주로 서울에 있는 각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그 과정에서 구속과 수감생활을 경험한 이른바 '빵잽이'들이었다. 그래서 민청련 창립 이후 그들은 자연스럽게 각 대학별로 조직을 만들어나갔다.

최대 인원을 자랑한 서울대

서울대는 72학번부터 78학번까지는 1980년 이후 대체로 학번별 모임이 형성되어 있었다. 학생운동을 함께 한 동기들이 매월 한두 차례 십여 명 정도씩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모였다. 71학번 이상 60년대 후반 학번 선배들은 숫자도 적고 대개 서로 잘 아는 사이라 학번 구별 없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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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민청련 조직으로서의 기별대표 즉, '기대'는 초기에는 서울대의 학번별 모임 대표들이 주축이 되었다. 당시 기대로 활동한 면면을 보면, 71학번 이상 선배 그룹은 임상택, 72학번은 김도연, 박성규, 73학번 이범영, 박석운, 74학번 권형택, 김영현, 75학번 이우재, 연성만, 76학번 김종복, 77학번 오세중, 유기홍, 78학번 김성환, 진영효 등이었다.

공대 출신은 별도로 모임이 형성되어 기대에는 이래경, 백경진, 이종현 등이 참석했다. 농대 쪽은 1984년 이후에 이병호(75학번)가 참석했다. 문화 쪽은 학번 상관없이 별도로 연성수가 애오개소극장 문화패들과 연결되어 집행부 겸 기대 역할을 맡았다.

 서울대 기대 1.임상택 2.박석운 3.김영현 4.김종복
 서울대 기대 1.임상택 2.박석운 3.김영현 4.김종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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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 노장이 많았던 고대와 연대

고대는 서울대 다음으로 인적 자원이 많은 그룹이었다. 조성우와 박계동이 초기에 고대 출신 인맥들을 민청련과 조직적으로 연결하려고 시도했지만 오랫동안 내려오는 학교 이념서클의 인맥들을 모두 다 커버하기 어려웠다. 그런 데다 1983년 10월 조성우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 박계동도 집행부로 들어왔기 때문에 내부 조직 작업에 힘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범영, 김도연 등이 나서서 선배 그룹 쪽은 한경남(68학번)으로, 그 아래 후배 쪽으로는 이범, 고성국, 정경연(이상 75학번), 이승환(76학번) 등을 접촉하여 조직적 연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후배 쪽은 현장론이 강한데다 내부 논의가 복잡해 본격적으로 민청련과 조직적 연결이 이루어진 것은 1984년 이후였다.

연대는 선배 쪽은 최민화(연대 69학번)와 홍성엽(연대 73학번)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민청학련 사건 때 함께 옥고를 치른 김학민(67학번), 송무호(71학번), 송재덕(73학번), 고영하(71학번)와 고영하의 의대 후배 몇 사람, 문병수 등과 개인적으로 연결했다. 이들은 모임을 하면 반드시 회비를 걷었고 이를 민청련에 전달했다.

그러나 후배 쪽은 홍성엽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84년까지도 거의 참여가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현장론이 강해 공개운동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서울공대 기대 1.백경진 2.이래경 3.이종현. 서울농대 기대 4.이병호
 서울공대 기대 1.백경진 2.이래경 3.이종현. 서울농대 기대 4.이병호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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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참여를 결정한 성균관대

성대는 비교적 빨리 '기대'에 참여했다. 장준영(73학번)이 중심이 되어 비교적 일찍 내부논의를 정리하고 1983년 10월 말에 조직적으로 민청련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성대와 처음 접촉을 시도한 사람은 김도연이었다. 김도연은 1983년 7, 8월경 성대 쪽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던 중 장준영이 성대의 핵심인물이라고 파악하고, 전화를 걸어 만난다. 김도연으로부터 공개청년단체 논의를 처음 접한 장준영은 그것이 어느 정도 실효성 있는 논의인지 몇 번 더 신중하게 확인했다.

당시 성대는 전투적인 학생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주류는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현장론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선배 그룹은 이 문제에 대해 성균관대 학생운동 조직 전반에 집단적인 논의로 부쳐, 창립총회 직전인 9월 하순에 천마산에서 전체 회동을 가졌다. 참석자는 장준영, 김수길, 김희상, 최영삼, 탁무권, 이순동, 김찬, 최금희, 이현배, 민병두, 최경환, 이헌필 등 72학번에서 80학번까지 약 20명이었다.

이 모임에서 장시간 논의 끝에 '민청련이 변혁운동의 중심이 될 수는 없으나 당면 운동에 필요한 조직이니 참여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성대 대표로 기대에 장준영이 참석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9월 30일 창립총회에는 시일이 촉박하므로 내부적으로 좀 더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조직적인 참석은 보류하고 78학번 이현배만 개인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리고 창립 한 달쯤 뒤인 10월 말부터 기대 모임에 장준영이 참석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화여대에서는 최정순(75학번)이 기별대표로 참석했으나, 조직적 논의 단위 형성은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이루어졌다. 중앙대에서는 이명준(68학번), 이석표(73학번)가 옵저버 자격으로 부정기적으로 참석했다.

 고려대 기대 1.정경연 2.이승환. 중앙대 기대 4.이석표
 고려대 기대 1.정경연 2.이승환. 중앙대 기대 4.이석표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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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중요 결정은 '기대'에서

민청련 창립에서 '기대'(기별 대표조직)는 일종의 대의원회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기대의 조직 위상이 집행위와 상임위보다 상위에 있었다. 모든 중요한 문제의 결정이 이 '기대' 회의에서 이루어졌다. 예컨대 민청련의 조직 명칭이라든지 기관지 '민주화의 길'의 명칭도 이 기대회의에서 결정했다.

중요 집회라든지 집행부에서 발표하는 성명서나 문건도 반드시 이 기대회의를 거쳤다. 이런 권한에는 그에 상응한 책임이 따랐다. 우선 기대에서는 각 단위조직을 통해 회원들로부터 회비를 거두어 집행위에 전달해야 했다. 전체 운영경비의 1/3에서 1/2 정도가 이 기대에서 거두어들이는 회비로 충당되었다. 그리고 기대모임은 중요 집회에 인원을 동원하는 일도 맡았다. 당시 시위 주동자를 '야전사령관'이라는 뜻에서 '야사'라고 불렀는데, '야사'를 선정하는 일도 기본적으로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성대가 참여한 뒤 10월 말경에 열린 기대모임에는 대략 15~20명 정도의 기별대표가 참석했다. 서울대가 7~8명 정도로 제일 많았고, 연대, 고대, 성대, 이대가 1~2명, 그 밖에 2~3개 대학 출신들이 옵서버로 참석했다. 김근태 의장 등 집행위에서 2~3명, 상임위에서도 이해찬, 이을호 등 1~2명이 배석했다.

모임은 주 1회 정례모임을 갖는 걸 기본으로 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주 2회 이상 모이는 일도 자주 있었다. 김근태 의장은 이 기대모임에 자주 나와 국내외 정세분석과 활동상황 보고했다. 그러나 중요한 결정은 '기대'의 자율적 논의에 맡겼다. 이런 김 의장의 민주적 조직운영은 기대의 책임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기대'의 운영 책임은 창립 초기에 김도연과 이범영이 주로 담당했고, 성대가 참여하고 나서 11월 초부터는 장준영이 여기에 가세했다.

기대 모임은 대외적으로는 드러내지 않는 비밀 조직이어서 모이는 시간과 장소도 보안에 신경을 많이 썼다. 주로 모임장소로 종로 2가 이문설렁탕 등을 이용했다. 기대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직업은 자영업, 회사원 등 다양했지만 집행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직장인이 많았다. 한번 모이면 회의가 3~4시간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 자정을 넘기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모임의 열기가 뜨거웠다.

기대의 역할은 기대모임 참석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기대의 논의 결과를 자기가 속한 기별, 또는 대학별 모임에 전달하고, 회비 수납, 인원 동원, 중요문제에 대한 의견 수렴 등을 해야 했다. 그래서 기대는 보통 1주일에 2~3일은 민청련 활동에 자기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1983년 12월 21일 학원자율화조치 발표 이후 민청련 조직원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기대모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성균관대 기대 1.장준영 2.김희상 3.김찬 4.이현배 5.최경환
 성균관대 기대 1.장준영 2.김희상 3.김찬 4.이현배 5.최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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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근직으로 월급도 받은 집행 간부들

민청련의 대외적인 활동은 집행위 간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아침 9시면 어김없이 김근태 의장의 주재로 장영달 부의장, 박우섭 총무부장, 박계동 홍보부장, 홍성엽 재정부장, 연성수 사회부장 등 6명의 집행위원들이 사무실에 모여 아침 조회를 열었다. 퇴근은 저녁 6시였다.

김근태 의장은 온유한 성품이었지만 상근 간부들의 근무 기강을 세우는 데는 엄격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모두 김근태 의장을 형처럼 따랐지만 한편으로 어려워했다. 장영달 부의장이 때때로 옥중투쟁, 교도관들과 싸운 무용담으로 분위기를 돋웠다.

안기부, 치안본부 등 민청련 담당 기관원들과의 교섭 창구는 박계동이 맡았다. 박우섭은 부지런히 재야운동과 민청련 내부조직을 오가며 일을 기획하고 추진해 나갔다. 홍성엽은  성품대로 언제나 말없이 사무실을 지키면서 온갖 궂은 살림살이를 도맡아 조용히 꾸려나갔다. 연성수는 주로 노동현장 쪽과 연결하며 민중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일에 나섰고,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내서 사업 전반에 활력을 주었다.

집행위 간부는 모두 상근직이었다. 민청련은 집행 간부의 상근화를 위해서 최저생계비 수준이지만 고정급여를 지불했다. 급여체계는 간단했다. 연령에 상관없이 월 10만 원을 기본급으로 하고, 기혼자는 10만 원을 추가하고, 자녀가 있을 경우 2명까지 1인당 각 5만 원씩 추가해 최대 20만 원까지 가족 수당을 지급했다.

단, 부인이 돈을 벌 때는 5만 원을 삭감했다. 예를 들면, 기혼에 자녀가 둘이 있으면 30만원을 받았고, 부인이 돈을 벌 경우 25만원을 받았다. 당시 일반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월급이었지만, 이 급여는 집행 간부들이 한눈팔지 않고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것이었다.

이렇게 상근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회원들과 후원자들의 노고가 숨어있었다. 특히 '기대'들의 노력이 컸다. 이들은 매달 회원들이 내는 1만 원씩의 회비를 모아 10-20만 원 정도씩 꼬박꼬박 박우섭 총무에게 전달했다. 박우섭의 회고에 의하면 창립 초기 급여를 포함하여 매월 400~500만 원 정도 운영비가 들었는데, 그 중 대략 1/3은 회비, 1/3은 후원금, 1/3이 수익사업으로 충당되었다고 한다.

정책 기능을 담당한 상임위원회

상임위원회는 원래 집행위 간부들이 모두 구속되는 사태에 대비해 2진 개념으로 조직했지만, 집행위가 안정을 찾으면서 주로 정책 기능을 담당했다. 초기에는 사무실과 상근자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활발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꾸준히 정기적으로 모임을 유지하면서 자기 역할을 수행했다.

모임 장소로는 주로 이해찬 상임위 부의장의 돌베개 출판사 사무실을 이용했다. 최민화 의장, 이해찬 부의장, 이을호 부의장 등 4-5명이 모여 토론하고, 정세분석 등의 문건을 작성했다.

문건 초안 작성은 주로 이을호가 맡았다. 이을호는 당시 출판사에 간부직원으로 근무하면서도 저녁 시간을 거의 전적으로 상임위 활동에 투여하다시피 했다. 1984년부터는 독자적인 사무실을 마련하고 상근 인력도 충원하면서 보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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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두꺼비의 탄생

 1983년 10월 29일, 사무실 입주식에서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부의장이 현판을 달고 있다.
 1983년 10월 29일, 사무실 입주식에서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부의장이 현판을 달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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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경찰병력이 둘러싼 살벌한 상황 속에서 창립총회를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총회 직후 안기부로 연행됐던 김근태 의장과 집행부원들도 우여곡절 끝에 일주일여 만에 전원 무사히 풀려났다. 이로써 민청련은 일단 전두환 독재정권의 유화조치 틈새 속에서 공개청년운동의 활동공간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전두환 신군부의 철권통치 속에서 절치부심하며 숨죽이고 있던 민주청년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이범영의 말처럼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하는데 그 비빌 언덕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어렵게 확보한 그 활동공간은 24시간 기관원들의 감시 아래 놓여있는 불안정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민청련 집행부는 민청련을 설화 속의 독사와 두꺼비에 비유했다. 두꺼비는 힘으로는 언제든지 독사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꺼비는 비록 독사에게 잡아먹히지만 두꺼비를 잡아먹은 독사도 두꺼비의 독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잡아먹힌 두꺼비는 독사의 몸을 자양분으로 삼아 품고 있는 알을 부화시켜 새끼들을 탄생시킨다.

 사회부장 연성수와 부인 이기연이 제작한 두꺼비 판화.
 사회부장 연성수와 부인 이기연이 제작한 두꺼비 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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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민청련은 언제든지 독재정권의 탄압에 희생될 각오를 하면서 출범했다. 그러나 그 희생을 바탕으로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민중들의 세상을 탄생시킬 것이라는 당찬 희망을 가졌다. 이 희망은 민청련 초기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민청련 집행부와 회원들을 지탱해 주고 당당하게 했던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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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꺼비의 비유는 사회부장 연성수가 전래 민담에 나오는 두꺼비 설화에서 따온 것인데, 이후 민청련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연성수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요. 하나는 어렸을 때, 손에 흙을 덮고 두드리며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하며 놀던 생각이 났어요. 우리가 지금 처한 현실이 헌집이고, 우리가 원하는 새 세상은 새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또 하나는 두꺼비는 대개 알을 품으면 독사한테 가요. 일부러 독사 앞에 가서 약을 올려서 자기를 잡아먹게 만들어요. 잡아먹히면 자신은 죽지만 독사를 영양분으로 해서 새끼가 부화하거든요. 그게 우리 공개운동의 취지와 딱 맞는다고 생각한 거지요.

우리가 앞에 나서서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면 탄압을 받겠죠.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전두환 정권의 본질이 폭로되고 그로 말미암아서 전두환 정권이 끝장이 날 거다, 그런 걸 상징한 거였죠."

이 두꺼비 이야기는 연성수의 부인 이기연이 판화로 새겨 민청련의 공식 로고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초부터 발간되는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도 이 두꺼비 판화가 표지를 장식했다.

 민청련 두꺼비를 제작한 이기연. 1985년 민가협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모습. 현재 '질경이 우리옷'을 경영하고 있다.
 민청련 두꺼비를 제작한 이기연. 1985년 민가협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모습. 현재 '질경이 우리옷'을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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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확보를 위한 투쟁

김근태 의장과 집행부는 안기부에서 풀려나자 우선 활동근거지가 될 사무실부터 물색했다. 10월 하순 드디어 종로2가에 적당한 사무실이 임대로 나와 있는 것을 찾아냈다.

종로 2가 사거리에서 낙원상가로 가는 대로 왼편에 있는 파고다빌딩 5층 514호실이었다. 10평쯤 되는 사무실인데, 도심 한복판이라 우선 교통이 편리한 장점이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이라 임대료도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김근태 의장이 박우섭 총무와 함께 직접 가서 부인 인재근의 명의로 사무실을 계약했다.

사무실 보증금은 예춘호 선생 등 재야 원로들이 마련해 준 찬조금에 회원들이 낸 회비를 보태 마련했다. 계약할 때 민청련이 대정부투쟁을 하는 재야단체라는 걸 알면 계약해 주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출판사 사무실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관리인은 별생각 없이 순순히 1년 기한의 임대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사무실 집기는 중고가구점에서 일부 사고, 회원들이 경영하는 출판사들에서 남는 집기를 보내 주었다. 전동타자기 한 대와 수동식 먹지 인쇄기 1대를 장만하고, 전화도 놓았다.

10월 29일 2시에는 회원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입주식을 갖고 현판식도 했다. 내빈들과 회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부의장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란 글자가 선명한 현판을 출입문 위에 달았다.

 민청련 창립 당시 재정에 큰 도움을 준 1. 장하구 종로서적 사장과 2. 한글 타자기 개발자이자 국내 최초 안과의사인 공병우 박사
 민청련 창립 당시 재정에 큰 도움을 준 1. 장하구 종로서적 사장과 2. 한글 타자기 개발자이자 국내 최초 안과의사인 공병우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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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 초기 운영자금 마련에는 김지하의 수묵화가 큰 도움을 주었다. 재정부장 홍성엽이 김지하 시인에게서 난초 그림 10점을 받아 왔다. 이 '김지하 난'을 마침 일본을 방문하는 성래운 교수에게 부탁해 일본교포들에게 5점을 팔고, 나머지 5점은 국내 지인들에게 판매해 500여만 원을 만들었다. 공병우식 타자기로 유명한 공병우 선생은 타자기 수십 대를 협찬해 주었다. 문익환 목사와 친분이 있었던 종로서적 장하구 회장도 후원금을 내놓았다.

10월 30일 9시, 새로 마련한 사무실에 첫 출근하는 집행부원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러나 곧 사단이 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파고다빌딩은 비리사학의 상징으로 세상에 알려진 상지대학의 설립자 겸 이사장에 민정당 국회의원을 3번이나 지낸 김문기의 소유였다. 입주자가 민청련이라는 걸 안 김문기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입주한 지 1주일쯤 지났을 때 관리인이 찾아와서 보증금을 돌려줄 테니 방을 비워달라고 통고했다. 민청련이 입주식을 하자마자 빌딩 관리실로 안기부, 치안본부, 서울시경, 종로서 정보과 등 온갖 기관에서 민청련 담당자라는 사람들이 찾아와 동향을 캐물었던 것이다. 출판사로 알고 별 생각 없이 계약해준 빌딩 측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야단이 났고 그 소식은 김문기에게도 보고됐을 것이다.

총무 박우섭은 관리실로 내려가서 계약서를 꺼내놓고 계약서에 명시돼 있는 계약만료 기간이 되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고 항변했다. 쉽게 나갈 사람들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관리인은 자기들이 받은 보증금에 이사비조로 상당액을 얹어 주겠다고 회유하는 한편, 만일 나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여 강제 퇴거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들이 보기에 민청련은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는 범죄단체였던 것이다. 하지만 계약서에 무슨 일을 한다는 내용이 있을 리 없고, 범죄단체도 아닌 민청련이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쫓겨날 수는 없었다. 박우섭은 마음대로 해 보시라고 완곡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튿날 사무실에 출근한 민청련 집행부원들은 빌딩 앞 길거리에 책상, 소파 등 사무실 집기들이 쌓여 있는 걸 보았다. 지난밤에 관리실에서 인부를 시켜 사무실 집기를 모두 들어내 놓은 것이다. 5층 사무실에는 큼직한 자물통을 채워 출입을 막아 놓았다. 그들이 말한 대로 강제퇴거를 집행한 것이다.

 민청련 사무실이 있던 파고다빌딩의 현재 모습. 리모델링을 했으나 자세히 보면 옛 건물 흔적이 꽤 남아 있다.
 민청련 사무실이 있던 파고다빌딩의 현재 모습. 리모델링을 했으나 자세히 보면 옛 건물 흔적이 꽤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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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굴할 민청련이 아니었다. 민청련 간부들은 즉시 사무실에 항의하고, 열쇠공을 불러 자물통을 열었다. 그리고 책상과 집기들을 모두 원래대로 다시 5층 사무실로 올려놓았다.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이런 사태는 계속되었다. 밤중에 밖에 내려놓으면 아침에 올려놓고, 다시 내려놓으면 다시 올려놓았다. 이런 실랑이가 5일간이나 계속됐다.

종로경찰서는 수수방관했다. 관리인 측에서 신고를 했다 하더라도, 쫓아낼 법적 근거도 없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개입해서 유리할 일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1주일 만에 빌딩 측이 손을 들었다. 민청련이 공개단체로 자리 잡는 또 한 번의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기별대표모임과 계반

민청련은 창립총회를 마치고 사무실 마련 등 집행부 근무환경을 조성하는 한편으로 내부에서는 기반조직의 건설에 주력했다. 중심 역할은 집행부와 함께 이범영, 김도연이 맡았다.

민청련의 기반조직은 이미 기존에 형성돼 있던 출신학교 및 학번별 모임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각 단위 모임에서 대표가 한 명씩 나와 대표모임을 구성했는데, 처음에는 이것을 기별 대표조직이라는 뜻으로 '기대'라고 불렀다. 그러다 1984년 들어 조직이 확대되면서부터는 그 단위모임을 '계반'이라 하고, 계반대표를 '계주', 계반대표 모임을 '계주모임'이라 불렀다. 이것은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민청련 조직원들끼리만 통하는 일종의 은어를 쓴 것이다.

사실 이 기반조직은 창립총회 이전부터 창립준비모임 형식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각 단위의 공식 대표성을 온전히 갖추지는 않았다. 창립총회 때까지만 해도 서울대 정도가 단위모임 대표성을 갖추었고, 여타 대학들은 대개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창립총회 이후 조직을 정비하면서 각 단위의 대표성을 갖춘, 말하자면 대의원회 성격의 기반조직으로 정비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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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결혼식의 '신랑', 또다시 감옥 가기를 자청하다



소사 모임

김근태가 민청련 의장으로 내정된 1983년 8월 이후, 창립준비모임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모임에서는 우선 조직을 집행위원회와 상임위원회로 이원화하기로 결정했다. 집행위원회는 처음부터 공개 활동 전면에 나서는 조직이다. 반면에 상임위원회는 2진 개념으로, 처음에는 공개되지 않고 집행위가 탄압을 받아 전원 구속이 되어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다시 집행부를 구성할 책임을 지는 조직이었다. 집행부 전원 구속은 당시 상황에서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 아래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비공개 상임위가 불가피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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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당면과제는 집행위 구성이었다. 누가 1순위로 감옥에 갈 것인가?

9월 초, 소사(현재의 부천시)에서 창립 준비 모임이 열렸다. 집행위를 구성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구월동에서 김근태 의장과 함께 뒹굴었던 박우섭이 맨 먼저 나섰다. 박우섭은 김근태가 의장으로 나서는 순간 자신은 김 의장과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망설임 없이 집행위에 자원했다. 김근태, 박우섭 외에 나머지 3~4명의 집행위원이 필요한데 누가 맡을 것인가?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정적을 깨고, 홍성엽이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집행위에 참여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1970년대에 민청협 총무를 맡아 온갖 궂은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고,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고 감옥살이를 했던 홍성엽의 집행위 지원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고 나서 11월 10일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가 유신헌법에 의해 새 대통령을 뽑겠다고 발표했을 때, 이 통대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민주청년들이 계획한 것이 바로 YWCA 위장결혼식이었다. 계엄 하에서 원천적으로 정치집회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를 돌파하기 위해 명동 YWCA 강당에서 결혼식을 위장하여 통대선거반대 국민대회를 개최하려고 한 것이다.

위장결혼식이지만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청첩장에 박힐 신랑 이름은 최소한 실제 인물이어야 했다. 최규하 발표가 있던 날 열린 민청협 8인 운영위원회에서 홍성엽이 신랑역을 자청했다. 홍성엽은 이후 현실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살며 운동에 헌신하다가 2005년 10월 7일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계엄 하에서 위장결혼식의 신랑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보안사에 끌려가 참혹한 고문을 당했고,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런 그가 이번에도 감옥 갈 것이 뻔한 길을 담담하게 선택한 것이다.

이어 박계동과 연성수가 참여 의사를 밝혔다.

박계동은 고려대 정외과 3학년이던 1975년 5월, 이른바 '명동성당 전국대학생연맹사건'으로 첫 징역을 살았다. 당시 과 선배이자 서클 선배였던 한경남과의 인연으로 험난한 인생행로에 들어선 박계동은 출소 이후에도 늘 민주화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했다. 1977년부터는 같은 학교 출신 조성우가 회장으로 있던 민청협의 간부로 활동했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에는 광주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배후로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채 전국에 지명수배되기도 했었다. 수배 상태에서 구월동에 살던 명동사건 공범 이명준의 집을 드나들면서 구월동 수배자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당시부터 김근태와도 안면이 있었다. 일찍부터 공개운동으로 감옥과 경찰서를 드나들어 수사기관의 요주의 인물로 알려졌던 그였기에 고대 쪽에서 민청련 집행부에 참여할 사람으로는 그가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소사 모임에 참석한 그는 역전의 용사답게 망설임 없이 집행위 참여를 선언했다.

 제1선인 집행위원회를 자원한 1. 장영달 2. 박우섭 3. 연성수 4. 박계동 5. 이범영 6. 홍성엽
 제1선인 집행위원회를 자원한 1. 장영달 2. 박우섭 3. 연성수 4. 박계동 5. 이범영 6. 홍성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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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수의 참여는 회의 전에 이미 예정돼 있었다. 연성수는 1975년 5월 서울대 식물학과 2학년에 재학 중 이른바 '오둘둘 사건'(5월 22일 서울대에서 긴급조치9호에 반대하여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학생시위)에 주동자로 참여해 징역을 살았다.

학생 때부터 반유신 문화운동패인 '가면극회'의 일원이었던 연성수는 징역을 살고 나와서도 민중문화운동판을 떠나지 않고, 김민기, 채희완, 홍석화, 황선진 등과 함께 현장극단운동을 계속했다. 이들은 '한두레'라는 이름으로 아현동에 애오개소극장을 열고 '진오귀굿', '예수전' 등 저항성 강한 마당극을 무대에 올리고, 동일방직, 콘트롤데이터 등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런 그가 민청련 집행부 참여를 결심하게 된 것은 민중극단 한두레 모임에서였던 것 같다. 당시 학교, 학번별로 이루어졌던 민청련 기반조직 모임과 달리 별도의 논의 단위를 형성하고 있던 문화운동 쪽은 황선진과 김도연이 대표로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을 통해 집행부 참여를 권유받은 연성수는 큰 고민 없이 집행부 참여를 결정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내 자신이 민중 출신이다. 그리고 문화판에서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 작업하다 보니 이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생각으로 참여를 결정했다고 한다. 아내 이기연과도 의논하여 동의를 얻었고, 연로한 어머니가 반대할 것을 염려했으나 아들의 단호한 결심에 어머니도 따라주었다.

이범영도 집행위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이 기반 조직을 오랫동안 조직하고 관리해 온 이범영에게 뒤에 남아서 계속해서 기반 조직을 관리해주도록 부탁했다.

모임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무슨 일이든 맡겨주면 기꺼이 하겠노라고 김근태 의장에게 일임했던 장영달도 집행위에 포함시켰다. 집행위원들 간에 부서도 정했다. 총무와 재정을 나누어 총무부장에 박우섭, 재정부장에 홍성엽, 그리고 홍보부장 박계동, 사회부장 연성수로 정했다. 사회부장 연성수는 노동현장과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 하는 점을 고려하여 일단 창립총회에서는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했다. 장영달은 연배를 고려하여 부의장으로 내정했다.

 왼쪽부터 상임위원회 의장 최민화, 부의장 이해찬, 부의장 이을호.
 왼쪽부터 상임위원회 의장 최민화, 부의장 이해찬, 부의장 이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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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상임위 구성을 논의했다. 상임위 의장에 최민화가 내정되었다. 김근태를 의장으로 추대하는 데 앞장섰던 최민화는 직장이 있어 준비 모임에는 자주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에게 약속한 대로 자신의 거취는 전적으로 김근태 의장에게 일임해놓고 있었다.

준비 모임에서는 최민화에게 1진 집행위 유고 시 후속 집행위를 재조직하는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향후 재정문제가 중요한데 재정 조달을 위해서도 OB모임의 물주였던 최민화가 2선에 남을 필요가 있었다.

상임위 부의장에는 이해찬과 이을호가 내정되었다. 이해찬의 냉철하고 정확한 정세판단 능력을 평가한 것이었지만, 향후 상임위가 담당하게 될 기관지 출판을 위해서도 출판사를 운영하는 이해찬이 상임위에서 역할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이을호도 탁월한 이론적 능력을 인정하여 상임위 부의장으로 배정되었다.

이것으로 집행부 구성은 대체로 마무리되었다.

창립총회 준비

한편으로 창립총회를 열기 위한 실무 준비도 집행부 중심으로 착착 진행되었다. 우선 단체의 명칭은 준비모임에서 민주화운동청년(전국)연합, 약칭 민청련으로 결정되었다. 전국을 괄호로 넣은 것은 아직 지역 조직이 건설되기 전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서울에서 하향식으로 조직해 가는 것이 아니라 지역으로부터 상향식으로 전국 조직이 건설되어야 한다는 원칙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것은 지역 운동의 자발성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적절했던 것이었지만, 창립 이후 전국에서 지역 운동 조직이 자생적으로 생겨나면서 '전국' 호칭은 사라진다.

 문건준비팀으로 활동한, 왼쪽부터 김도연, 황선진, 권형택.
 문건준비팀으로 활동한, 왼쪽부터 김도연, 황선진, 권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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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총회에서 발표할 문건으로 창립선언문과 발기문을 준비했다. 이 두 문건을 준비하기 위해 김도연을 중심으로 문건준비팀이 따로 꾸려졌다. 이 팀에는 황선진과 권형택이 함께 했다. 이 문건팀은 김도연의 집과 사무실에서 3~4차례 만나서 회의를 하고 문건의 내용을 논의, 검토했다.

처음에 창립선언문은 황선진, 발기문은 권형택이 초안을 써와서 함께 검토했는데, 김도연이 의견을 많이 내고 문장도 다듬었다. 이렇게 수정보완된 두 문건은 창립준비모임에 넘겨졌는데, 발기문은 대체로 문건팀에서 작성한 대로 통과되었으나 창립선언문은 논란이 되었다. 그래서 김근태 의장이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해서 다시 만들었다.

이 두 문건은 보안을 생각해서 인쇄소에 넘기지 않고, 원지에 타자를 쳐서 드럼에 원지를 올려 돌려 찍는 수동식 인쇄기로 직접 찍었다. 이 문건 인쇄는 홍보부장 박계동이 당시 EYC 간사로 일하는 후배와 함께 기독교회관에 있는 EYC 등사기를 이용하여 밤 시간에 비밀리에 수행했다. 각각 300부 정도씩 준비했다.

창립총회를 어디서 할 것인지 대회장소를 물색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과제였다. 200명쯤 들어가는 곳이면서 대회 전에 수사기관에 포착되지 않을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은 난제 중의 난제였다.

일반적으로 많이 집회 장소로 사용하는 곳으로 YWCA회관이나 흥사단 강당 등이 있었지만, 수사기관이 항상 주목하고 있는 곳이라 사전에 발각되기 십상이었다.

오랫동안 가톨릭 쪽과 함께 운동을 해왔던 박계동이 여기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박계동이 당시 한강성당 주임신부로 있던 함세웅 신부에게 부탁하여 수녀들의 수양기관으로 쓰이고 있던 돈암동 상지회관 예배실을 쓰기로 예약한 것이다.

상지회관은 성북구 돈암동의 아리랑 고개에 있는 가톨릭 수녀들의 수양기관인데, 지금은 '상지 피정의 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은 재개발 사업으로 주변에 산뜻한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지만, 1983년 당시에는 상지회관으로 올라가는 길이 차 한 대가 겨우 비켜 갈 수 있는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이었고, 골목 양쪽에 낡은 주택들이 죽 늘어서 있는 전형적인 서울의 서민층 주택가였다.

 왼쪽은 상지회관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은 '상지 피정의 집' 전경.
 왼쪽은 상지회관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은 '상지 피정의 집' 전경.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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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난제를 해결한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집행부는 마지막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어떻게 하면 무사히 창립총회를 치를 수 있을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대회 장소가 수사기관에 알려지면 대회를 봉쇄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라 무엇보다도 대회 장소에 대한 보안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대회 날짜는 대회 1주일 전쯤, 조직을 통해 확인된 회원들에게만 구두로 전달했다. 고문·지도위원들에게도 가급적 직접 만나서 전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전화가 도청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대회 장소를 각 대학 기별 대표들에게만 알려주고 그 대표가 회원들을 일정 장소에 모이게 하여 함께 데려오는 방식을 취했다. 집행부원들은 정보가 새서 사전 구금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대회 3~4일 전부터는 아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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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가 의장을 수락하다



최민화의 삼고초려

1983년 6월 말경, 정문화의 제안을 받은 최민화는 부천 역곡에 사는 김근태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간 OB모임에서의 논의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새로 건설할 청년단체의 의장이 되어줄 것을 간청했다.

김근태는 최민화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더니 자신으로서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이고, 아직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최민화 당신이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역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최민화는 그냥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공개정치운동과 현장민중운동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은 형님밖에 없다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최민화의 진정어린 뚝심에 결국 김근태가 졌다. 한 시간이 넘는 옥신각신 실갱이 끝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있고, 의논할 사람도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하지 말고 시간을 달라'고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만날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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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화는 첫 만남에서 김근태가 딱 잘라 거절하지 않는 걸 보고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래서 2주 뒤 김근태를 다시 만나러 가면서는 김근태의 수락을 받아내기 위한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다. 예상대로 이번에도 역시 김근태는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최민화가 준비한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형님이 만일 의장을 맡아주신다면 내가 3가지 약속을 하겠습니다. 첫째, 새 단체의 재정문제는 전적으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집을 팔아서라도 운영비를 대겠습니다. 둘째, 감옥 갈 일이 있으면 제가 첫 번째로 가게 해주십시오. 몸으로 때우는 일은 자신 있습니다. 셋째, 형님이 의장을 맡아주신다면 앞으로 저는 형님을 저의 정치적 얼터너티브(Alternative)로 모시고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말하자면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 3차원의 충성 맹세를 한 것이다. 최민화의 강력한 대시에 김근태의 마음이 움직인 듯 보였다.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김근태는 신중했다. 바로 수락 의사를 밝히지 않고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1984년 8월, 흥사단에서 열린 ‘전두환 방일 반대’를 겸한 민청련 8·15 집회에서 나란히 자리한 최민화와 김근태. 김근태 바로 뒷자리는 부인  인재근.
 1984년 8월, 흥사단에서 열린 ‘전두환 방일 반대’를 겸한 민청련 8·15 집회에서 나란히 자리한 최민화와 김근태. 김근태 바로 뒷자리는 부인 인재근.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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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중순쯤 최민화가 근무하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으로 박우섭이 찾아왔다. 박우섭은 다짜고짜 따졌다.

"형이 우리 운동권을 말아먹을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우?"

최민화가 지금까지 논의되지 않은 누군가를 새 청년단체 의장으로 추대하려는 모종의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것이다. 최민화는 적당히 달래서 보내려고 했다.

"잘하면 이상적인 모양새가 될 것 같으니, 조금만 참아라. 2주 후에 다시 와라."

외부에 알리지 않겠다는 김근태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냥 순순히 물러날 박우섭이 아니었다. 박우섭의 집요한 물음에 최민화는 지금 김근태와 교섭 중이라고 전말을 고백하고 말았다.

박우섭은 원래 구월동 시절부터 김근태와 자주 만났던 사이라서 김근태의 인품과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김근태가 민청련 의장으로 적임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다만, 잘못되면 1회용 소모품이 될지도 모르는 민청련 의장에, 김근태를 써먹는 것은 좀 낭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김근태를 자주 만나면서도 그에게 그런 권유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의장 문제가 잘 안 풀리고 있는 이때 최민화의 노력이 성사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7월 말, 최민화가 세 번째 김근태를 만나는 날, 김근태는 결국 새로운 청년단체의 의장을 맡을 것을 수락한다. 최민화의 삼고초려를 방불케 하는 눈물 어린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김근태의 결단

김근태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장영달, 조성우, 이해찬, 박계동 이런 사람들이 중심이 돼서 청년운동을 새로 만들자는 주장이 제기됐고, 지금 이 상황에서 이걸 만들어서 활동하는 게 맞는 거냐, 또 어떻게 만들 거냐, 누가 책임을 질 거냐, 이런 논의가 있었습니다. 하나하나가 다 복잡한 문제였죠. 탄압은 엄혹하고, 또 그걸 뚫고 만든다고 해도 역할은 어느 정도 할 수 있는지 예측이 안 되고, 또 일부는 책임자를 누구로 할 거냐를 둘러싸고 좀 갈등도 있고, 다른 한편에 무섭기도 하고, 이런 게 다 겹쳐 있었습니다... (중략)... 최민화가 나한테 와서 설득을 하더군요.

그는 내가 선배 그룹이라는 것, 학생운동을 떠난 뒤 노동운동을 해왔는데 사람들이 그런 내가 대표가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일단 '지금은 공개 정치투쟁이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인정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이란 게 대체로 '그게 옳다, 해야 된다'고 주장하면 그 주장한 사람보고 '당신이 해봐라'라고 하는 게 상례였습니다. 최민화가 와서 권유한 것도 있지만, 그런 상례에 따라서, 말하자면 뒤집어 쓴 거죠."

사실 김근태는 구월동 사람들과의 논의과정에서 이미 공개투쟁단체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 중심에 서야 한다는 생각까지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최민화가 찾아와서 그를 의장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김근태는 같은 인터뷰에서 민청련 결성을 필요로 한 당시의 정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때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근거는, 공개적으로 국민에 다가가지 않고는 정권과 싸우는 깃발이 있다, 싸우는 리더십이 있다는 걸 국민에게 알릴 수 없다는 거였죠. 그런데 당시 전두환 정권이 권력을 잡은 지 한 3년 가까이 되고, 물가를 잡고 경제도 안정돼 있었어요.

전두환의 헤게모니가 확립됐다, 세상도 그렇게 느꼈고, 또 전두환 그룹도 그렇게 느껴서 자신감을 가지면서 좀 풀어주기 시작했어요. 학생시위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아주 혼내고 그랬는데 덜 혼내는 분위기였어요. 그 기회, 틈을 밀고 들어가야 한다는 건 운동하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거죠.

그런데다가 학교에서 데모하다가 구속돼서 복역하고 나온 청년들이 많이 쌓였어요. 그들은 사회과학서적 출판사를 만들고 그랬는데 그런 거 가지고는 정권과 맞설 수 없는 거죠. 그렇게 사람들이 있고, 또 국민들 속에서 유화 국면이 되고, 분위기가 다시 솟는 시점에서 거기에 돌파구를 내는 거는 운동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책무다. 그래서 민청련이 결성된 거죠."

김근태가 술회한 대로 그는 최민화의 집요한 노력에 '엮인' 것이었다. 그러나 위 진술로 볼 때 어느 정도는 '자발적으로' 엮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근태는 7월 말 세 번째로 최민화가 찾아왔을 때 의장직을 수락했다. 그리고 8월 중순경부터는 OB, YB가 함께 모이는 민청련 결성 준비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한다.

김근태 의장이 준비론자?

 공개정치투쟁과 노동현장운동의 한 단면. 1984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공개정치투쟁을 벌이는 민청련(위 사진)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파업 현장 모습(아래 사진).
 공개정치투쟁과 노동현장운동의 한 단면. 1984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공개정치투쟁을 벌이는 민청련(위 사진)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파업 현장 모습(아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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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의 의장직 수락으로 공개청년단체의 건설 작업은 가장 큰 난제를 해결하고, 아연 활기를 띠게 됐다. 당시 OB, YB를 막론하고 김근태를 의장으로 하는 것은 극히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 환영했다. 노동현장 쪽의 일부 사람만이 김근태의 공개운동으로의 진출을 소영웅주의가 아니냐는 비판을 했다. 이들은 당면 정치투쟁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협소한 시각 즉, '준비론'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학생운동 출신자들 사이에는 공개정치투쟁과 노동현장운동에 대해서 많은 토론이 있었다. 그러나 논쟁의 결과 대체로 이것은 운동 영역의 문제일 뿐,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노동현장운동을 강조하는 것을, 장기적인 투쟁을 위해 현재는 투쟁을 자제하는 준비론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김근태가 '준비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김근태는 오랫동안 노동운동에 몸담고 있었고 현장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준비론은 철저히 배격하는 입장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김근태 의장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리했다.

"이것은 오래전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부터 논쟁이 되어왔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전략이나 원칙에 있어서의 준비론이라는 것은 옳지 않다. 전술적으로 준비를 하고 잘 갖춰야 한다, 이런 얘기는 맞지만, 원칙이나 근본에 있어서 준비론, 이런 것은 인간의 약한 면을 반영한 것이고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개정치투쟁이냐 노동현장운동이냐 구분하는 것은 형태적인 것일 뿐, 그 근본적인 마음가짐과 태도와 원칙에서 보면 군사독재와 맞서 싸울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는 것이다."

창립준비모임과 기반 조직 건설

 기별대표를 역임한 1. 박성규(72) 2. 이범영(73) 3. 이우재(75) 4. 연성만(75) 5. 진영효(78) 6. 김성환(78). 괄호 숫자는 학번. 작고한 이범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근래 사진
 기별대표를 역임한 1. 박성규(72) 2. 이범영(73) 3. 이우재(75) 4. 연성만(75) 5. 진영효(78) 6. 김성환(78). 괄호 숫자는 학번. 작고한 이범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근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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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가 전면에 나서면서 8월 중순부터는 기존의 OB, YB 논의구조 대신 김근태를 중심으로 준비모임이 새로 꾸려졌다. 여기에는 실제로 향후 건설될 공개청년단체에서 중추적 역할을 할 사람들이 참여했다. 최민화, 박계동, 김도연, 이해찬, 박우섭, 이범영, 홍성엽, 연성수, 이을호, 연성만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각 학교별, 학번별 모임을 활성화하여 광범한 기반 조직을 건설하는 일에 착수했다. 준비모임에서는 무엇보다 이 기반조직 건설에 힘을 기울였는데, 새 단체가 일회성 조직이 아닌 지속 가능한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인적, 물적 재생산 기능을 할 수 있는 이런 기반조직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과거 민청협 조직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이기도 했다.

우선 서울대는 72학번 이상 선배그룹은 처음에는 박우섭이 조직을 담당했다. 그리고 박우섭이 집행부에 참여하기로 하면서 김도연, 황선진, 박성규 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73학번은 이범영, 74학번은 권형택, 75학번은 이우재, 연성만, 77학번은 유기홍, 78학번은 김성환, 진영효 등이 모임을 이끌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범영이 이들 기별 대표를 만나 정보를 전달하고 조직 작업을 독려했다.

고려대는 처음에는 조성우와 박계동, 설훈(74학번)이 내부 조직 작업에 나섰고, 나중에는 한경남(68학번), 천영초(72학번), 서원기(75학번) 등이 합류했다. 연세대는 최민화(68학번)와 김학민(68학번), 홍성엽(73학번) 등 선배그룹 중심으로 참여했다. 74학번 이하 후배그룹은 노동현장 지향성이 강했고, 그래서 민청련 참여가 상대적으로 늦었다.

문화패는 나름의 독자적인 논의구조가 있었는데, 채광석(68학번), 채희완(68학번), 김도연(72학번), 연성수 등이 논의구조를 이끌었고, 이 논의 결과 연성수가 나중에 집행부에 참여하게 된다. 그밖에 이화여대는 최정순(75학번)이 대표로 참여하여 이대 출신들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다.

 민청련 창립 논의부터 참여한 각 대학 대표들. 1. 조성우(1990년) 2. 설훈(1987년) 3. 서원기(1991년) 4. 한경남(1988년) 5. 김학민(1987년) 6, 최정순(1981년). 괄호 숫자는 촬영 당시 연도
 민청련 창립 논의부터 참여한 각 대학 대표들. 1. 조성우(1990년) 2. 설훈(1987년) 3. 서원기(1991년) 4. 한경남(1988년) 5. 김학민(1987년) 6, 최정순(1981년). 괄호 숫자는 촬영 당시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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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 언니'의 아이디어, "김근태를 만나봐라"


김영삼의 단식

1983년 초부터 전두환 정권의 유화적 조치들이 발표되고, 수배자들이 수배에서 풀리는 등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먼저 1983년 2월 정치활동 피규제자 중 452명을 2차에 걸쳐 해금했다. 그러나 김대중, 김영삼 등 야당 핵심인사 99명은 여전히 정치활동 금지를 풀어주지 않았다.

김영삼은 1983년 5월 18일, 광주항쟁 3주년을 맞이하여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1980년 5.17 쿠데타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서 전두환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최초의 행동이었다. 김영삼은 성명에서 구속인사 석방과 전면 해금, 해직교수와 근로자 및 제적학생의 복직∙복교∙복권, 언론의 자유, 개헌 및 국보위 제정법률의 개폐 등을 요구했다. 이 소식은 정권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으나 AP통신 등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고, 국내신문에서도 차츰 1단으로 '정치현안' 등의 표현을 쓰면서 국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3년 5월 24일 동아일보 1면. 김영삼의 단식을 애매모호한 '정치관심사'로 표현하고 있다.
 1983년 5월 24일 동아일보 1면. 김영삼의 단식을 애매모호한 '정치관심사'로 표현하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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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의 단식은 운동권 청년들에게도 즉시 알려졌고, 공개정치투쟁단체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에 활력소가 됐다. 1970년대에 민청학련 사건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거나 학교에서 제적된 청년들 사이에는 출신 대학교별로 모임이 있었다. 인원이 많았던 서울대는 학번별로 모였다. 이 모임들은 고난을 같이하는 동지애로 뭉쳐져 있었다. 느슨하지만 끈끈하고 응집력이 있었다.

이들은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사회 속에 흩어져 자기 갈 길을 모색했지만 정기적으로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시국담을 나누었다. 여기에 김영삼의 목숨을 건 단식 소식은 청년들의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이제 우리도 모여서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들이 청년들의 마음속에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었다. 누군가 이것을 조직할 사람이 필요했다.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이범영과 박우섭

 1976년 서울대 농법회 수련회에 참여한 회원들 모습. 맨 왼쪽이 이범영이다.
 1976년 서울대 농법회 수련회에 참여한 회원들 모습. 맨 왼쪽이 이범영이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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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가장 먼저 발 빠르게 움직인 사람이 이범영과 박우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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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영은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이념서클 농법회 회장을 지내 서울대 운동권 선후배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76년 12월 학내 시위로 2년여 징역을 살고 나와 1979년부터 학생운동으로 징역을 산 사람들의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병역대책위를 조직하여 투쟁하면서 지방대학 출신자들과도 폭넓게 유대관계들이 있었다. 이범영은 오랫동안 구월동 수배자들 모임에서 함께 지내면서 선도적 정치투쟁이 시급하고, 그를 위한 공개 청년운동단체 건설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박우섭은 대학 시절 연극반, 극단 연우무대 활동 등을 통해 문화패들과 광범하게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당모임'이라는 이해찬, 황선진, 김도연, 이석원, 박성규 등 서울대 72학번들 모임의 연락 담당 역할을 했었고, 문익환, 백기완 등 재야 원로들과 장기표, 이신범, 조영래 등 중견 재야인사들과도 광범하게 교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동수, 김근태 등을 통해 청계노조 등 현장 노동운동권과도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광범하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공개운동단체 설립에 관한 의견을 수렴했다.
OB그룹에서는 최민화와 이해찬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렇지만 최민화는 기사연 출판부장으로 직장에 다녔고, 이해찬도 당시 돌베개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어서 박우섭, 이범영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이범영은 서울대 후배 권형택(74학번), 이우재(75학번), 연성만(75학번) 등과도 자주 만나 논의했다. 또 고려대 출신 조성우, 설훈, 연대 출신 홍성엽도 열심히 움직였다.

 1979년 창립한 돌베개 출판사는 장준하 선생의 항일 수기집에서 따온 이름이다. 파주 출판단지에 위치한 현재 전경.
 1979년 창립한 돌베개 출판사는 장준하 선생의 항일 수기집에서 따온 이름이다. 파주 출판단지에 위치한 현재 전경.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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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리 모임

6월 말 경, 양수리 북한강가 한 민박집에 30-40명의 청년들이 모였다. 수사기관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민주동지들이 오랜만에 서로 얼굴들이나 보자는 취지로 각 학교별, 학번별로 몇 사람씩 연락했다. 아직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시퍼럴 때인지라 은밀히 조심스럽게 연락을 취했다.

신동수, 안양로(서울대 68학번), 조성우, 최민화 등 OB그룹들과 이해찬, 김도연, 박성규, 이범영, 설훈, 권형택, 이우재, 최정순(이대 75학번) 등 YB그룹으로 논의를 진행하던 사람들이 거의 모두 모였다. 박우섭은 참석하지 못했다. 박우섭은 4월에 수배가 풀려 5월 22일에 뒤늦게 결혼식을 올리고 당진 고향집에 갓난아이와 새댁을 데리고 들어가 있었다.

이 양수리 모임이 그동안 진행해온 공개단체 논의에 대해 한 매듭을 짓는 자리가 되었다. 사실상 이 자리에서 공개 청년단체가 필요하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안양로가 이날 논의를 끌어가는 데 상당히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공개 청년단체를 띄우자는 데는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구체적인 조직 결성작업은 쉽지 않았다. 전두환 정부가 일련의 유화 제스처를 보이긴 했지만 사실 공개적인 반정부단체의 활동을 용인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사실 전두환 정권은 1983년 초까지도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철저히 탄압 기조를 유지했고, 학생운동 출신 군복무사병에 대한 학원프락치사업, 이른바 녹화사업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희생이 따르더라도 공개정치투쟁 단체는 필요하다는 것이 당시 양수리에 모인 청년운동가들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결국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가 문제였다.

 왼쪽부터 안양로, 장영달, 조성우. 1990년대에 활동하던 모습들이다.
 왼쪽부터 안양로, 장영달, 조성우. 1990년대에 활동하던 모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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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막 한 과수원에서 다시 모인 20명의 청년들

7월 중순, 포도철에 인천 동막에 있는 한 과수원에서 이해찬, 박우섭, 이범영, 연성수, 연성만, 최정순 등 20명쯤 되는 청년들이 다시 모였다. 모인 사람들은 모두 공개단체가 출범하면 구속을 각오하고 참여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조직을 앞장서서 이끌 지도자를 누구로 세울 것인가였다. 손학규(서울대 65학번), 장명국(서울대 66학번), 안양로, 조성우 등 1960년대 학번 중에서 대표급 인물들이 모두 거론되었다. 이때만 해도 김근태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아마도 김근태는 노동현장에서 자기 역할을 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을 일부러 끌어내 세우는 것은 쉽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헤어졌다.

5월 말부터 OB모임 물주 역할을 하던 최민화 역시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다. OB모임에서도 의장 후보를 놓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OB멤버 중에는 안양로, 조성우, 장영달 등이 추천되었다. 안양로는 성격이 두루 원만하고, 선도투쟁파나 현장파에게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라는 장점이 있었으나 본인이 고사를 했다. 일선에서 투쟁한 경험이 적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본인이 내세운 이유였다. 조성우는 본인이 의지는 있는 듯 보였으나(사실 본인은 일본 유학 계획 때문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이 반대했다.

조성우의 경력으로 볼 때 지나치게 선도정치투쟁으로 기울 우려가 있고, 그래서 현장파의 참여를 끌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장영달은 오랜 투옥생활로 운동권 청년들과의 인간관계가 넓지 못한 것이 흠이었다. 그리고 당시 장영달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7년간이나 징역을 살고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다시 구속 1순위 자리에 세운다는 것도 동료들의 마음에 흔쾌하지 않았다.

의장 세우기

6월 말쯤 최민화에게 정문화가 중요한 제안을 했다.

"형님이 김근태 선배를 한번 만나 보쇼."

김근태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최민화는 이것이 아마도 정문화 부인 천영초(고대 72학번)의 아이디어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당시 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 실무간사를 했던 천영초가 당시 인천산업선교회 실무간사를 하던 김근태의 근황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천산선의 내부사정이 김근태가 조만간 실무간사 일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는 것이다. 최민화는 무릎을 쳤다.

'그래, 그거야!'

김근태는 서울상대 65학번으로 손학규, 조영래, 신동수와 경기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 데모하러 나갈 때 교실을 지킨 모범생이었던 그가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은 대학 1학년 때 한일회담반대 데모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1967년 6∙8부정선거반대투쟁 때 서울상대 대의원 의장으로 데모를 주도하다 제적되면서 학생운동의 중심인물로 부각된다.

군대를 갔다 와서 1970년 복학을 하는데 이후 1971년 위수령, 1972년 유신쿠테타 등 박정희 군사정권이 장기집권체제를 굳혀가는 과정에서 그는 항상 배후에서 학내시위를 지도했다. 그러나 심재권, 장기표, 조영래, 이신범 등이 체포되어 언론에 오르내릴 때 그만은 늘 잡히지 않고 지명수배된 상태로 남았다. 체포된 동료들의 법정에서는 항상 '공소외 김근태'로 불렸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공소외'였다.

그는 유신쿠테타가 있은 1972년부터는 학생운동만으로 독재정권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중앙정보부의 추적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냉동학원 강사, 보일러 기사 등으로 노동현장에서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부인 인재근을 만나 동거하다가 애기도 낳고 살았다. 그러다 10∙26으로 박정희가 죽고 수배가 풀려 1980년 4월 26일 뒤늦은 결혼식을 올린다. 1980년 5.17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실무간사로 노동조합 교육과 노동자 의식화 사업에 주력했다. 그리고 공개청년운동이 한참 논의되던 1983년 초에는 구월동에서 역곡으로 이사해서 살고 있었다.

 오른쪽이 인재근. 이화여대 재학 시절의 모습이다. 인재근은 노동현장에서 활동하던 중 수배자 김근태와 만나 결혼했다.
 오른쪽이 인재근. 이화여대 재학 시절의 모습이다. 인재근은 노동현장에서 활동하던 중 수배자 김근태와 만나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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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화는 정문화의 제안을 듣는 순간 김근태가 이 문제를 풀 열쇠라는 걸 직감했다. 김근태야말로 공개청년단체를 이끌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최민화는 학생운동 선배로서 김근태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김근태를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잘 알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운동의 뿌리가 기독교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근태를 처음 만난 것도 1971년 강원룡 목사가 시작한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에서였다.

최민화는 집안이 원래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데다 기독교 학교인 연세대학에 다녔기 때문에 학생 때부터 함석헌, 박형규, 김찬국 등 기독교계 민주 인사들과 가까웠다. 산선 설립자 조승혁 목사와는 일찍부터 한 교회를 다녀 친했고, 나중에는 조 목사가 시무하는 회현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그래서 인천산선 실무자로 일하는 김근태의 근황을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최민화가 생각할 때 김근태는 학생운동 출신 청년들의 선배로서 1960~1970년대 학생운동 출신들을 두루 아우를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장지향적인 성향이 강한 1970년대 중후반 학번 후배들 세대에도 어필할 수 있는 강점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민주화운동권의 가장 영향력 있는 거점인 '종로5가'(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 기독교 운동단체가 모여 있어 기독교 민주화운동권을 이렇게 불렀다)와 연결하고, 그 도움을 받는 데도 적임으로 보였다. 문제는 대표적인 현장파로 알려진 김근태가 과연 그 제안을 수락할 것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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