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차선 도로 장악, 6월항쟁의 막이 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구호가 있다. 혁명적 시기에 특히 그렇다. 3.1운동 때에는 '조선독립만세!'가 그랬고, 광주민중항쟁 때에는 '전두환은 물러가라!'가 그랬다. 1987년 6월항쟁 때에도 수백만 군중이 소리 높여 외치던 구호가 있었다. 바로 '호헌철폐, 독재타도!'. 그러나 이 구호가 대중들의 합창이 돼 울려 퍼지기까지 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필요했다.

이범영 집행부의 성립

그해 1987년 3월이었다. 폭풍전야라고나 할까. 민청련은 다가올 격변을 앞두고 신발 끈을 고쳐 맸다. 8차 총회가 열렸다. 합정동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비공개로 개최된 이 총회는 6개월 전에 있었던 7차 총회의 정책과 기구를 별다른 변모없이 승계하는 역할을 했다. 지난 총회가 대대적인 구조 개편을 수행한 데 비하면, 이 총회는 기존 체계와 정책을 그대로 이으면서 미비점을 보완했다.

전혀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목할 만한 집행부의 변화가 있었다. 최상층 집행기구인 중앙집행위원회는 그대로 존속하고 약간의 인원만 교체됐지만, 3인 공동의장 가운데 두 사람이 직무를 담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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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영 의장은 개인사정으로 부득이 자리를 비워야 했다. 개인사정이란 그의 고향 집이 댐 공사로 인해 수몰 지경에 이른 것. 이를 해결할 시간이 필요했다. 연성수 의장은 문화운동 쪽으로 활동 방향을 바꿨다. 한국문화운동연구소와 신명문화연구소 설립이 그의 기여를 거쳐 이뤄졌다. 생활문화운동연구소를 토대로 생활문화운동단체 질경이를 만들고, 후자를 토대로 전국 규모의 단체 노동자문화운동연합을 결성했다. 그 때문에 8차 총회에서 공동의장체제는 사실상 이범영 의장 단독체제와 다름없었다.

중앙집행위원회에는 권형택, 남근우, 김종복, 이승환, 임태숙, 윤형기, 유기홍, 김성환이 선출됐고, 운영위원회는 위원장 권형택, 사무국장 겸 사업부장 김성환, 총무부장 이난현, 홍보부장 최성웅, 여성부장 이선희, 빈민부장 남근우로 짜여졌다.

 8차 총회에서 구성된 공동의장 1.이범영, 중앙집행위원 2.권형택 3.김종복 4.유기홍 5.남근우 6.김성환 7.임태숙 8.이승환
 8차 총회에서 구성된 공동의장 1.이범영, 중앙집행위원 2.권형택 3.김종복 4.유기홍 5.남근우 6.김성환 7.임태숙 8.이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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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다지고, 밖으로 뻗어나가고

정책 노선도 이전에 비해 차이가 적었다. 8차 총회의 기치는 '대중노선의 관철과 그를 통한 조직운동의 발전'이었다. 7차 총회에 뒤이어 대중노선을 좀 더 강조했다.

이의 실현을 위해서 몇 가지 활동 목표가 설정됐다. 지역위원회와 직장인 조직을 확장하고, 대중투쟁을 이끌 수 있는 전술을 개발하는 데에 힘을 쓰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안으로는 정회원 제도를 강화하고, 민주집중제를 시행하며, 정책 노선을 더욱 명백히 하기로 했다.

이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맨 첫 번째 항목이었다. 민청련의 조직 기반을 지역과 직장으로 확장하려는 노력을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설정했다. 종래와 같이 학생운동 출신자들만으로 회원이 충원되는 것을 피하고, 독자적인 재생산 시스템을 갖추려는 시도였다.

이범영 집행부는 독재정권을 패퇴시킬 수 있는 무기는 대중투쟁이라고 생각했다. 광범한 대중을 반독재 투쟁으로 이끄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서 상층연대와 하층연대, 두 가지 코스의 연대활동을 병행하기로 했다. 상층연대란 재야 민주화운동과 종교권과 야당 정치세력을 결속하는 사업이고, 하층연대란 노동자, 학생, 청년 운동을 결속하는 사업을 가리켰다.

민청련은 상층, 하층 연대를 동시에 추진하기 위해 각각 대표자를 파견했다. 민통련 등을 파트너로 하는 상층 연대 테이블에는 주로 권형택 운영위원장이 나갔다. 그는 민청련을 대표하여 민통련과 종교권을 묶고 더 나아가 야당 정치세력과 연결하는 일에 종사했다.

노학청 연대 테이블은 최성웅 홍보부장이 담당했다. 노동운동과 학생운동과의 연계는 물론이고, 기독교, 불교, 가톨릭 청년단체 등과의 청년 연대 테이블에도 나갔다. 이렇게 민청련은 연대 운동을 현실화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매개자 역할을 했다.

민청련 집행부가 중시한 또 하나의 당면 사업은 '전국적 청년 조직을 위한 기초 마련'이었다. 민청련을 전국 단체로 발전시킨 전국적 범위의 청년대중단체 결성을 전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나중에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 한국청년단체협의회 등과 같은 전국 규모의 청년단체를 발족시키는 디딤돌이 됐다.

전두환 정권의 강경책, 4.13 호헌 선언

8차 총회가 끝난 뒤였다. 정치정세에 심각한 변동이 일어났다. 4월 13일, 전두환은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개헌 논의를 지양"하겠으며, "현행 헌법에 따라 임기만료와 더불어 내년(1988년) 2월 25일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호헌 선언'이었다.

'호헌 선언'은 군사독재 정권이 야당 정치세력과 더 이상 타협을 모색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또 지난 2년간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추구되어 온 개헌운동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을 의미했다.

전두환의 선언은 큰 충격을 몰고 왔다. 이것은 여태껏 저질러온 것보다도 훨씬 더 혹독한 탄압을 가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민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헌 선언'은 국민대중에게 심각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4.13 호헌조치에 대해 호헌 철폐를 위한 천주교 사제들의 단식이 광주교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위는 4월 28일 광주가톨릭센터에서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7일째 단식중인 18명의 신부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수녀들. 아래는 5월 1일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호헌철폐와 민주개혁을 간구하는 단식기도를 벌이는 명동성당 교육관 모습
 4.13 호헌조치에 대해 호헌 철폐를 위한 천주교 사제들의 단식이 광주교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위는 4월 28일 광주가톨릭센터에서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7일째 단식중인 18명의 신부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수녀들. 아래는 5월 1일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호헌철폐와 민주개혁을 간구하는 단식기도를 벌이는 명동성당 교육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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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4.19에서 5.18로 이어지는 기간에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시위운동에 나섰다. 4월 19일 수유리 묘지에서 민통련 주최로 개최된 4.19혁명 27주년 기념식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4천여 명의 군중이 참가했다. 여기에 참여한 민청련은 '4월혁명 메시지'를 발표했다.

거기에서 호헌철폐 투쟁에 임하는 민청련의 태도를 표명했다. 민청련은 "호헌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과 힘을 합쳐 광범위한 대중투쟁을 조직해 내면서 군부독재의 장기집권음모를 분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야당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그들의 타협성을 비판하면서 "보수야당 세력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자"고 제안했다.

4월 투쟁에 이어 5월 광주항쟁 계승투쟁으로 이어졌다. 민청련의 투쟁에 호응해서 각계 각층에서 저항의 움직임이 꿈틀거렸다. 함석헌을 비롯한 민주인사 28명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개헌 관철을 위한 국민운동협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천주교에서는 각 교구 별로 수십 명의 신부들이 '호헌철폐와 민주개헌'을 요구하며 단식에 나섰다.

각 대학교 교수들도 호헌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명서에 서명했다. 고려대, 광주가톨릭대, 서강대, 성균관대, 서울대 교수들이 행동에 나섰다. 또 소설가와 시인 등 문인 206명의 서명과 선언도 나왔다. 한 마디로 민심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위) 1987년 이화여대에서 경찰의 감시 아래 열린 4월혁명 기념 마라톤. (아래) 수유리에서 민통련이 개최한 4월혁명 27주년 기념식
 (위) 1987년 이화여대에서 경찰의 감시 아래 열린 4월혁명 기념 마라톤. (아래) 수유리에서 민통련이 개최한 4월혁명 27주년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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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

다시 5월 18일이 왔다. 그 날,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는 그날 새벽에 서울 향린교회에서 비공개적으로 진행됐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는 발기모임이 열린 것이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는 민주세력의 광범한 공동 행동기구를 결성하려는 시도였다. 1985년 민청련 탄압에 맞서 형성된 고문공대위,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대책위원회에 뒤이어 다시 한 번 반독재 연합전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날 발기모임에 은밀히 참가한, 민청련 여성들의 맏이 인재근은 이렇게 회고했다.


"릴레이 성명과 농성이 이어져서, 5월 18일 새벽에 향린교회에서 국민운동본부가 탄생됐다. 그 준비모임을 수유리 개나리 산장에서 자주 했었다. 그런데 이전과는 달리 비밀이 전혀 안 새어 나갔다. 그날 새벽에 을지로 지하도를 걸어 향린교회로 가는데,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꼭 레지스탕스가 된 기분이었다.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몇 차례 준비 모임이 있었는데도 비밀이 새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정권의 정보요원이 추적했다면, 이 발기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인재근은 신새벽에 인적 드문 을지로 지하도를 걸으면서 고조된 긴장감 때문에 뒷골이 서늘했던 것이다.

  비밀리에 결성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현판식을 하는 모습
 비밀리에 결성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현판식을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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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공공연하게 이뤄졌다. 박종철 고문사 진상이 조작됐음이 이날 폭로된 것이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상이 축소·조작됐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독재정권이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가리기 위해서 어떻게 거짓을 자행하고 있는지를 생생히 드러냈다.

이 폭로는 5월 투쟁에 기름을 부었다. 이 발표가 나온 후 폭넓은 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민추협을 비롯한 야당 세력에서부터 범 종교계 그리고 사회운동 단체까지 광범하게 참가한 공동행동기구였다. 반독재 연합전선의 맥락을 잇는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5월 23일, 서울시내에서 민통련 주최로 광주항쟁 추모제가 열릴 예정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그것을 허용할 리 없었다. '광주민중항쟁 7주년 범국민 민주영령추모제'는 경찰의 저지로 봉쇄됐다. 하지만 종로 3가를 중심으로 쫓고 쫓기는 끈질긴 가두시위가 계속됐다. 거리에 대량의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2천여 명의 시위대가 형성됐고, 그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소리 높여 외쳤다.

삼엄한 경찰의 봉쇄망을 뚫고 상당한 규모의 군중시위가 진행됐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독재정권의 호헌 조치에 대해서 국민적 반감이 폭넓게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민청련 회원들은 이 시위에 직접 참여했고, 시민들에게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와 조작을 폭로하는 전단을 살포했다.

민청련의 역할은 또 다른 데서도 발휘됐다. 그동안 역점을 두고 추진해 온 상하층 연대사업의 성과가 그것이었다. 당시 대중적 시위운동을 조직할 수 있는 전투적 역량은 오직 학생운동만이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연대 테이블에 참가하는 사회운동과 종교단체 대표자들은 시위에 앞장 설 학생운동을 누가 동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할 때에는 민청련 대표자만 쳐다보았다. 알아서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노학청 연대 테이블에 파견된 민청련 대표 최성웅이 수행한 역할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민청련의 공식 입장을 최대한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이 잘 먹혀들지는 않을 때도 많았다.

왜냐하면 연대 테이블에 나오는 대표자는 실무자이지 정책 결정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성웅은 정보의 소통에 역점을 두었다. 그것이 상층 연대와 노학청 연대를 결합시키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를테면 재야 쪽에서 국민대회를 어떻게 개최할 예정이니, 학생운동 쪽에서는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의논했다. 시위와 집회를 성공적으로 치룰 수 있는 전술적 계획에 관한 정보를 서로 교환했고, 사후에는 공동으로 평가하는 논의를 가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항의 집회부터 6월 항쟁에 이르는 시기에 있었던 크고 작은 대부분의 연합 집회가 이런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민청련은 1987년 5월, 광주항쟁 7주년을 맞아 책자발간, 집회, 시위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왼쪽) 민청련에서 1987년에 제작한 5월 광주항쟁 전단지 (가운데) 1987년 5월에 광주항쟁을 기록한 101쪽 분량의 ‘항쟁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표지 (오른쪽) 광주민중항쟁 7주년 범국민 민주영령추모제 안내 전단지
 민청련은 1987년 5월, 광주항쟁 7주년을 맞아 책자발간, 집회, 시위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왼쪽) 민청련에서 1987년에 제작한 5월 광주항쟁 전단지 (가운데) 1987년 5월에 광주항쟁을 기록한 101쪽 분량의 ‘항쟁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표지 (오른쪽) 광주민중항쟁 7주년 범국민 민주영령추모제 안내 전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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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된 시위가 착착 진행되는 가운데 국민의 분노가 고조되고 있었다. 특히 5월 24일 광주에서 10만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터졌다. 시위 군중은 광주 도심인 금남로 1,2가를 가득 메웠다. 숫자상으로 열세에 놓인 경찰은 밀리게 됐고, 3시 30분 경에는 시위대 저지를 포기하고 도청 방어를 위해 퇴각했다. 시위 군중이 8차선 도로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함성이 치솟았다. "그야말로 7년 전 해방 광주 그대로였다"는 평이 나돌았다.

이렇게 1987년 6월항쟁의 막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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