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일이 많은 지난 일주일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가슴이 휑 빈 것 같은 참담한 심정으로 뉴스를 지켜보았습니다.

황우석 교수를 둘러 싼 의혹과 공방은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한결같이 큰 기대를 갖고 있던 터라 사회적 충격도 컸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밝히고, 고쳐야 합니다.

문제가 생긴 원인을 찾아내 감당할 일이 있으면 가혹하더라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미래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진실이 바로 국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세계 속의 당당한 대한민국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일로 우리 과학계가 위축되거나 과학기술 연구가 후퇴하는 일은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 후유증은 크겠지만 우리에겐 자정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실규명의 계기는 섀튼 교수나 ‘사이언스’지가 한 게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의 소장 과학자들이 한 것입니다.

양심적인 내부고발자의 용기있는 증언이 있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재기의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우리 과학기술은 계속 발전해야 합니다.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줄 생명공학 발전을 위한 투자도 위축돼선 안 됩니다.

 

아직 가려진 부분이 너무 많고,

우리 사회가 감당할 마음의 준비도 덜 된 상태라 이런 말씀이 좀 과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우울한 소식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눈에 확 띄는 반가운 소식도 있었습니다.

바로, 신애라-차인표 부부의 입양 소식입니다. 답답하던 국민들의 가슴에 신선한 기쁨을 안겨준 소식이었습니다.

특히 ‘가슴으로 낳은 딸’이라는 신애라 씨의 말은 많은 분들의 가슴에 작지 않은 울림을 일으켰습니다.

그 딸을 낳기 위해 두 분이 오랫동안 진정으로 기도하고 봉사해왔다는 소식을 들으며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정말, 새로운 생명을 얻는 일은 그런 마음으로 해야 하는 소중한 일입니다.

 

‘마땅히 축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신애라-차인표 씨 가족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두 분의 결단에 박수를 보냅니다.

 

처음 이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기쁘게 받아들일 분들은 해외입양을 떠난 입양인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들에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기 스타 부부가 공개입양을 했다는 소식은 아주 특별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마침 해외 입양을 떠났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분들의 모임인 ‘해외입양인연대(G.O.A'.L. Global Overseas Adoptees’ Link)'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토요일 늦은 밤, 파티가 열리는 신촌의 한 카페를 불쑥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마지막에는 ‘우리는 친구’라고 말하고 결국, 못 부르는 ‘친구여’라는 조용필의 노래도 한곡조 뽑고 돌아왔습니다.

 

사실, 맨 처음 해외 입양인들을 만났을 때는 차마 ‘친구’라고 말할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저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몇 차례 해외 입양인들을 만나면서 그분들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아픔을 나누면서 ‘친구가 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해외 입양인들을 만났습니다.

국내에서도 몇 차례 만났고,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빼놓지 않고 입양인들을 만났습니다.

만날 때마다 그분들이 간곡하게 부탁하는 말이 있습니다. 국내입양을 활성화해달라는 것입니다.

 

‘이제 해외입양을 중단하고, 국내에서 모두 감당할 때가 되지 않았나?’
‘과거에는 가난 때문에, 또 전쟁 때문에 할 수 없었다고 하겠지만, 먹고 살만한 지금도 해외 입양을 계속하는 것은 웬일인가?’
‘지금 해외로 떠나는 아이들이 커서 왜 대한민국이 나를 버렸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더 참담한 것은 그분들의 그 말씀에 100퍼센트 동의하면서도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수 없는 답답한 현실이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있는 나는 “당장이라도 정책적으로 ‘해외입양 중단’을 선언하고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국내입양’의 어려운 현실을 잘 알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선택은 결국, 가정을 잃은 아이들이 해외에서라도 가정을 가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빼앗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별 수 없이 중기계획을 세워 ‘해외입양중단’을 실현할 계획입니다.

정책적 지원과 ‘입양’에 대한 사회적 인식전환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국내입양을 늘려나갈 생각입니다.

동시에 수양부모 맺기 운동도 적극 뒷받침하겠습니다.


반대로 해외입양은 단계적으로 줄여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멀지 않은 장래에 그 어느 날 반드시 ‘해외입양 중단’이 결정될 수 있도록 첫 발자욱을 내딛겠습니다.

 

그러나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도 몇 차례 정부가 그런 생각을 갖고 정책을 추진한 적이 있었습니다.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생각만큼 국내입양이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입양은 한 생명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신애라 씨의 말처럼 ‘가슴이 아파 낳은 자식’이 ‘배가 아파 낳은 자식’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신애라-차인표 씨가 내린 결단이 소중한 계기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두 분의 입양이 우리사회에 자리 잡고 있는 ‘핏줄’과 ‘입양’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는 큰 전환점이 됐으면 하는 기도를 바칩니다.

2005.12.20
김근태

 


얼마 전에 결재를 하면서 화를 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어지간한 일에는 화를 잘 내지 않는 편입니다.

좀 모자라는 점이 있어도 믿고 맡기거나 격려하는 편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좀 화가 났습니다.

 

위원회 때문이었습니다.

정부 일을 하다보면 위원회를 많이 만들게 됩니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정책의 완결성을 높이는데 위원회가 효과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위원회를 구성할 때 제가 좀 까다롭게 굽니다. 잔소리도 많이 하는 편입니다.

형식적으로 구성해서는 안 된다,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을 반반으로 구성해야 한다,

듣기 싫은 소리 하는 사람이 있다고 배제해서는 안 된다 등등.

 

그런데 일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이런 위원회가 불편하게 마련입니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위원을 구성해 신속하게 정책을 결정하고 일을 진전시키고 싶은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그날, 결재를 하면서 화를 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복지부 일을 한 지난 1년 반 동안 ‘실질적인 토론을 벌일 수 있는 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수도 없이 강조했는데

또 옛날 방식대로 위원회를 구성해서 결재해 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위원회를 구성해 심의한 정책은 반드시 뒤탈이 납니다.

당장은 효율적인 의사결정이 이뤄진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꼭 사고가 터집니다.

정책 결정과정에서 소외된 분들이 문제제기를 하고, 사회적인 논쟁으로 번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결국, 쉽게 일하려다가 시간도 더 걸리고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반면에 찬반이 팽팽한 위원회를 구성하면 당장은 삐걱거리고 힘겨워 보일지 모르지만

일단 정책이 결정되고 나면 훨씬 쉽게 일을 추진할 수 있습니다.

팽팽한 토론 과정에서 모난 부분은 깎이고 부족한 부분은 채워지게 마련입니다.

정책에 대한 집행력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해집니다.

보건복지부의 특성상 위원회 구성만 잘 해도 일을 반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흔히 보건복지부를 ‘지뢰밭’이라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 대형사고가 터질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복지부 일을 시작하면서 주위에서 그런 걱정을 많이 들었습니다.

잘해야 경상이고, 잘못해서 지뢰를 밟으면 중상을 면하기 어렵다는 농담도 많이 들었습니다.

 

복지부에 널려 있는 지뢰 가운데 가장 큰 지뢰는 역시 이해집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쟁입니다.

복지부에는 서로 이해를 달리하는 수많은 산하 단체들이 있습니다.

이런 단체의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하면 타협의 여지가 없는 극단적인 충돌로 비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약분업을 둘러싼 분쟁이나 한약분쟁이 대표적입니다. 약대 6년제 문제를 놓고도 치열한 줄다리기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보건복지부 일을 하는 동안에 큰 분쟁은 없었습니다.

조마조마한 순간은 있었지만 서로 이해하고 한발씩 양보해 큰 충돌은 피했습니다.

정말 고맙고 다행스런 일입니다.

 

대신, 새로운 기풍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건강보험 수가 및 보험료 인상폭을 둘러싸고 해마다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공급자인 보건의료계는 수가인상을 주장하고, 시민단체를 비롯한 가입자 대표들은 보험료 인상 반대를 주장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서로 평행선처럼 같은 주장만 반복하다 협상결렬을 선언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국민의 최저생활기준을 정하는 ‘중앙생활보장심의위원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서 정하는 기준이 ‘최저임금’의 기준이 되고, 기초생활수급권자를 정하는 기준도 되기 때문에

정부와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이 팽팽히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합의’에 의해 기준이 정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복지부 일을 시작하고 나서 2년 연속으로 네 차례에 걸쳐 ‘합의’를 이뤄냈습니다.

처음에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지만 지루한 토론과정과 치열한 의견충돌을 거쳐

결국 ‘합의’를 이끌어내고 박수를 주고받으며 협상을 마쳤습니다.

 정말 고맙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올해는 정부와 보건의료계의 각 단체들이 모여 보건의료계 투명사회협약을 체결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 국민들은 보건의료계를 아직도 리베이트와 뒷거래가 많이 남아있는 분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국민의 불신을 털어내기 위해 보건의료계의 각 단체 대표들이 모여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자고 결의한 것입니다.

 

물론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거북한 부분은 좀 가려놓고, 속 시원하게 본질적인 부분까지 손대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합의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합의하면서 점차 투명성을 높여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투명함’을 흔들리지 않는 큰 방향으로 세우고 우선 쉽게 합의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진전시켜 나가면

국민이 기대하는 수준으로 투명성을 높여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해관계가 첨예한 문제일수록 이런 합의를 이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협상에 임하는 대표들의 입장에서는 ‘협상결렬’을 선언하는 것은 가장 쉽고 안전한 선택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렬’을 선언한 대표는 자기가 속한 단체에 돌아가 ‘선명성’을 주장하고 박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어렵더라도 양보해 합의를 이루면 ‘배신자’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고 곤경에 처하기 십상입니다.

그런 어려움을 각오하고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결단’해준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사회에는 ‘합의’를 이뤄야 할 일이 수없이 많습니다.

삐걱거리고 있는 노사정위원회를 정상화 시키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크지만 정작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일은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인내를 갖고 추진하면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번거롭고 둔해 보이지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식입니다.

이런 합의의 기풍이 우리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이 길밖에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분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합의’는 ‘통합’과 ‘발전’으로 향하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2005.12.13
김근태

 

 

국회에 국민연금 특별위원회가 구성됐습니다.

아직 속도를 내고 있지는 않지만 기대가 큽니다.
일단 본격적인 논의의 장이 만들어 졌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물론 곧 속도도 낼 것이고, 강력한 동력도 만들어져야 하겠지요.

국회의원들과 각 정당 지도부의 고충은 이해가 됩니다.


민심의 바다를 항해할 수밖에 없는 의원과 지도부 입장에서 국민을 향해

‘더 내고, 덜 받자’고 요청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미래에 닥칠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지금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고 요청하는 것은

현실 정치 세력으로서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곤혹스런 처지를 이해합니다.

정치는 숙명적으로 현실의 어려움 앞에서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이 얼음처럼 냉정하다면, 미래는 안개처럼 막연합니다.

미래에 닥칠 ‘재앙’이 아무리 엄청난다 하더라도,

국민이 겪고 있는 현실의 고달픔과 팍팍함을 고려해야 하는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당장에 닥친 현실을 먼저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외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연금개혁’은 정권의 명운을 걸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안전한 내일’을 위해 연금개혁이 필수적이라는데 대해 국제사회가 예외 없이 동의하면서도

막상 개혁을 성공시킨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과정에서 정권이 흔들린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우리 국회는 ‘국민적 토론’이라는 정공법을 받아 들였습니다.

이런 결정을 내린 대한민국 국회에 박수를 보냅니다.

차일피일 외면하거나 회피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인데 여야 지도부는

국민연금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토론을 시작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처음 보건복지부 일을 시작할 때가 생각납니다.

일을 시작하면서 많은 분들이 ‘과연 김근태가 국민연금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지켜보자’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더 내고 덜 받자’는 기존의 정부 입장과 달리 국민의 입장에서 속 시원한 해답을 내길 기대하는 분들,

뭔진 모르지만 ‘뾰족한 해법’을 던질 거라고 기대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민스러웠습니다. ‘정부안’을 만든 분들과 함께 다른 대안은 없는지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국가재정을 대거 투입하는 방법이 있지만, 결국 그만큼 국민의 세금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의 부담이 늘어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묘안’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더 내고 덜 받는 연금개혁을 하지 않으면 재앙적 미래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분명했습니다.

이것이 냉엄한 현실이라는 점을 국민에게 알리고 이해를 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댓가는 컸습니다.

오랫동안 같은 생각을 하고 저를 지지해주던 상당히 많은 분들이 ‘실망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가깝게 지내던 분들은 ‘그렇게 하면 정치인 김근태의 미래는 포기해야 한다’는 말로 겁을 주기도 했습니다.

“국민연금제도는 과거 군사정권이 국민을 속이고 ‘막대한 자금’을 손쉽게 끌어다 쓰기 위해 시작한 것인데

왜 그 책임을 다 짊어지려고 하느냐 또 그게 도대체 가능한 일이냐?”는 말도 들었습니다.

 

흘러간 냇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습니다.

‘미래의 재앙’이라는 시한폭탄이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는데 과거 군사정권 탓만 하는 건 무의미한 일입니다.

시한폭탄의 시계바늘을 최대한 뒤로 되돌리거나 시한폭탄의 뇌관을 제거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국민의 입장에 서서 국민연금 기금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지켜내고,

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가장 냉정한 오늘의 ‘현실’입니다.

 

연금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분들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첫단추부터 잘못 채운 연금제도 때문에 심각한 불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그런 불신이 가슴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그렇다고 무책임한 선택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사회가 최소한의 안전판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초고령사회’라는 핵폭탄을 맞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예상치 못한 일도 있었습니다.

국민연금제도에 대한 불신이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국민연금 기금을 동원해 대규모 투자사업을 하겠다’는 경제부처의 언급이 있었습니다.

또 적대적 M&A를 국민연금기금을 동원해 막겠다고 하는 경제부처 장관의 주장도 있었습니다.

경기 활성화를 위해, 그리고 경영권 보장을 위해 경제부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는 할 수 있는 얘기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사정이 크게 달라진 것을 외면하는 발언이었습니다.
국민의 눈에는 결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국민연금 기금을 갖다 쓰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 되어 안 된다,

더 큰 후유증이 남는다고 강조하는 과정에서 국민연금을 지켜야하는 보건복지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정부가 편하게 돈을 끌어다 쓰기 위해 연금제도를 도입한 것이 아니냐는 국민적 불신이 심각한 상황에서

내부 토론 및 합의 없이 국민설득과정 없이 마치 각본대로 기금 동원이 경제부처의 생각대로 결정되는 것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제가 단호하게 나섰습니다. 경제부처에 대한 정책적 문제 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적 문제제기가 정치적인 해석이 보태지면서 한바탕 혼선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문제는 국회를 설득하는 일이었습니다.

여당조차 정부가 추진하는 연금개혁방향에 대해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메아리 없이 외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 복잡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각 정당의 지도부들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 동의를 해주었습니다.

맨 몸으로 각 당을 방문해 지도부를 만나고 요청했습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민주노동당 그리고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서로 생각이 다를 수는 있지만 이대로는 못 간다.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 보다 나은 안을 만들자’고 뜻을 모아 주었습니다.

 

복잡한 몇 구비의 고비를 넘어 마침내 연금제도에 대한 토론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런 일입니다.

연금제도에 대한 범국민적인 토론은 단순히 좋은 제도를 만드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국민적 토론과정을 거쳐 ‘사회적 합의’라는 기본 인프라를 이뤄낼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훨씬 중요합니다.

 

국제사회의 예를 보더라도 연금제도 개혁방안에 대한 국민적 토론을 제대로 진행하고 합의를 이룬 나라는

예외 없이 사회통합을 이루고 더 큰 경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반면, 당장의 어려움과 혼란을 이겨내지 못하고 논쟁과 토론을 회피한 나라일수록 국민통합에 실패한 경우가 많습니다.

 

국회 특별위원회의 역할을 기대하고 마음 졸이고 있습니다.

국민의 미래가 걸린 중대사인 만큼 국회에서 충실한 논쟁이 벌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결론을 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국회 국민연금 특별위원회가 국민통합을 위한 소중한 첫걸음을 뗐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정말 바랍니다.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2005.12.6
김근태


 



얼마 전, 복지부 팀장 이상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팀제’로 조직을 바꾸는 과정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한 간부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가 ‘저녁 한 끼 사겠다.’며 마련한 자리입니다.

간부들을 한꺼번에 만나니 가슴 깊은 곳에 묵직한 느낌이 차올랐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이 각별한 느낌이었습니다.

어려운 일도 많고, 갈등도 많았는데…. 장관인 나를 믿고 따라와 준 사람들…. 한사람 한사람 꼬~옥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습니다.

올해 복지부 직원들 마음고생 많이 했습니다.

밖에서 보던 것보다는 열심히 일하고, 반듯하게 생각하는 공무원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마음 든든했습니다.

어지간한 일은 직원들의 말을 경청하고 격려하는 방향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새해를 맞으며 마음을 싹 바꿨습니다.

사명감과 책임감은 기본이다,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몰아붙였습니다.

‘무능한 공직자는 국민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며 모진 말도 했습니다.

새해 처음으로 국장급 간부들을 임명하면서 따뜻한 격려와 축하 대신 “이번 인사는 임시로 하는 것이다.

6개월 후에 업무성적을 재평가해 다시 인사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했습니다.

직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전 직원이 모인 조회에서 “앞으로 복지부는 정책기획부서로 간다. 정책을 기획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복지부에 있을 수 없다.

집행업무를 담당할 다른 조직으로 가는 것이 옳다. 자원하면 내가 책임지고 보내주겠다.”고 윽박질렀습니다.

말만 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 지난 일 년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관행과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인사를 했습니다.

보여주기 위해 한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렇게 하니까 나중에는 파격도 파격이 아닌 것이 되더군요.

당연히 승진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을 제외하고, 심지어 승진심사위원회를 통과한 직원을 직권으로 승진 보류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좌천 인사도 했고, 급기야 정무직에 해당하는 최고위층 간부진들에 대해 일괄사표를 받는 극약처방도 감행했습니다.

근무경력과 고시 출신인지 여부에 따라 승진을 안배하던 관행도 바꿔버렸습니다.

철저한 평가를 거쳐 ‘능력 있는 사람’ 위주로 승진 시켰습니다.

적당히 눌러앉아 있는 사람은 분명하게 가려냈습니다.

억지로 내보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자동으로 승진하는 일은 없게 했습니다.

그렇게 일 년을 보냈습니다.

당연히 그동안 승진의 기준이던 행정고시와 공무원 채용시험 기수는 통하지 않게 됐습니다.

4~5년 일찍 들어온 사람이 늦게 들어온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게 이미 ‘뉴스’가 아닐 정도가 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 고마운 분들이 ‘일반직’ 직원들입니다.

사실, 이분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잔일치레를 묵묵히 해온 분들인데 어느 날 갑자기 ‘무능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됐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행정고시에 합격해 젊은 나이에 사무관으로 온 사람들은 ‘능력 있는 사람’으로 대접받고,

반평생 잔 일, 굳은 일 가리지 않고 일해 온 사람은 ‘정책기획능력이 없다’는 평가를 받게 됐으니….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가로막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과거에는 복지부가 집행업무를 많이 했기 때문에 ‘기획능력’이 없어도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집행업무가 대부분 지방으로 이양된 지금은 ‘기획능력’ 없이는 복지부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가슴엔 상처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분들 가운데 상당수가 흉터를 안은 채로 함께 해주었습니다.

특히 6급 이하 직원들의 권익을 위해 존재하는 ‘공무원직장협의회’의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장관의 방침이 칼날이 되어 날아올 것을 잘 알면서도 국민을 위해, 복지정책의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받아주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지난 일 년, 복지부는 유례없는 ‘인사혁명’을 치러냈습니다.

능력위주의 인사는 물론이고요, 팀장이 직접 팀원을 선발하고

팀원이 스스로 팀을 선택하는 ‘매칭 시스템’을 전면 도입해 정착 시켜내기도 했습니다.

과학적인 평가체계 구축을 위한 성과관리제도(BSC 시스템) 도입,

전 직원에 대한 육성체계 등 일정한 성과를 이뤄냈다고 자부하고 싶습니다.

복지부가 이번에 시행한 ‘매칭 시스템’은 ‘신인사제도’의 열풍이 몰아치고 있는 민간기업에서도 성공한 예가 많지 않은 일입니다.

요즘 제가 하는 일은 우수한 인재를 영입하는 일입니다.

중앙인사위원회를 찾아가 사무관, 과장, 국장을 만나 부탁하고, 민간의 우수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7급 공무원 시험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성과가 있었습니다.

14명의 사무관이 복지부에 새로 배치를 받았고, 민간의 능력 있는 분들 다수가 복지부에서 함께 일하겠다고 결심해줬습니다.

7급 공채에서 우수한 인재를 발굴해 현업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복지부의 인재풀이 풍성해지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조직 전체에 학습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입니다.

맡은 정책분야에 대해 국내 최고의 권위자가 된다는 각오로 학습해야 합니다.

업무를 통해 학습하고, 근무시간에 학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팀장이 팀원 육성을 책임져야 합니다. 아직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지난 일 년 동안 진행한 하드웨어 혁신보다 몇 배 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지부 ‘인사혁명’은 이제 시작입니다.

앞으로 5년만 꾸준히 계속하면 기대하는 수준으로 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장관이 바뀌더라도 이 일은 계속돼야 합니다.

복지부 직원 개개인의 능력이 곧 복지부의 능력이고, 복지부의 능력은 국민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공직사회의 눈높이와 국민의 눈높이는 아직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믿음을 갖고 지켜봐 주십시오.

저는 우리 공직자들의 책임감과 사명감을 믿습니다.

그리고 역량을 키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모자라는 점이 있더라도 애정을 갖고 도와주고 격려해 주십시오.

훌륭한 공직자를 많이 키워내야 ‘능력있는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능력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좋은 나라가 되고,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가 됩니다.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2005.11.29
김근태



 


일요일 오후, 루게릭병과 싸우고 있는 박승일 씨를 만났습니다.

루게릭병은 의식은 뚜렷한 상태에서 운동신경세포가 파괴되 온몸의 근육이 마비되는 병입니다.

덜컥 만나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걱정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습니다.

침울한 분위기가 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승일 씨도 감당하기 어렵겠지만, 저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농담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밝은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무슨 농담을 할지 또 막막합니다.

그러나 승일 씨를 만나면서 고민은 쉽게 풀렸습니다.

제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잘 생기셨습니다’ 혹은 ‘미인이십니다’ 그런 인사를 가끔 하는 편인데

빈말이 아니라 정말 미남이라고 느꼈습니다.

‘옛날에 농구할 때 오빠부대가 많았겠다’고 인사 했습니다.(승일 씨는 유명한 농구선수 출신입니다)

얼굴에 얼핏 미소가 비치더군요.

승일 씨의 손을 잡았습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얼굴 표정에서는 반가운 감정을 분명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

희미하게나마 마음을 얼굴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던지요.

승일 씨와의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카메라 후레쉬며 또 함께 여러 사람이 같이 갔기 때문에 승일 씨의 맥박이 다소 빨라져서 서둘러 자리를 나왔습니다.

잠시 후 조용히 승일 씨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런데 승일 씨 앞에 놓인 컴퓨터 화면에 ‘후보 꼭!!!’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습니다.

눈동자를 움직여 어렵게 쓴 글이었습니다. 멍~했습니다.

그렇게 어렵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농담’ 할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어머니 손복순 씨를 만났습니다.

승일 씨 같은 루게릭 환자들은 음식비 부담이 크다는 말씀도 했습니다.

음식물이 다 수입품인데 가격이 비싸 건강보험 적용만 받아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루게릭 환자들을 위한 요양소가 꼭 필요하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다른 루게릭 환자들도 의사표현을 할 수 있도록 안구 마우스 프로그램을 지원해 달라고 승일씨가 컴퓨터로 찍기도 들었습니다.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가위 눌린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는 그래야 한다고,

본인의 잘못도 아닌데 부담을 개인이 다 짊어져야 하는 지금의 건강보험체계는 말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박하게 호소하는 이분들을 마주 보면서도 선뜻 ‘그러겠노라’고 확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답답한 건강보험의 현실을 잘 알면서 그 자리에서 덜컥 약속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식대를 보험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루게릭 환자에 대해서만 예외를 인정할 수 있는 건지,

요양소를 건립할 경우 건축비며 운영비를 어떻게 조달할지,

당장 정부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수많은 중증․희귀난치병 환자와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극빈층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어머니의 절절한 눈빛을 마주하고,

가슴 속으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장 흔쾌히 약속 할 수 없는 것이 비참하고 참담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따로 노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치 뒤엉킨 필름으로 상영하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혼란스러웠습니다.

결국, 그냥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어떤 것도 속시원하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지 못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승일 씨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오래 살아야 한다고, 승일 씨 스스로 얘기한 것처럼 고통스럽더라도 세상과 연결된 끈을 놓지 않고

‘희망의 날’이 올 때까지 세상을 향해 ‘나 여기 살아있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아가 루게릭 환자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가 돼줘야 한다고도 요청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많이 고민하고 궁리해 봐도 여전히 속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꼬박 하루가 더 지나고 이 편지를 쓰는 지금도 제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2005.11.22
김근태


 

토요일에 관악산을 올랐습니다. 오랜만에 하는 산행입니다.

정부 일을 시작하고는 휴일에도 거의 개인 일정을 잡지 못했습니다.

행사며, 회의를 쫓아 다니다 보면 손가락 사이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주말과 휴일이 스멀스멀 지나가곤 합니다.

제 사무실이 있는 곳이 바로 관악산 자락입니다.

사무실에서 바라보는 관악산은 장관입니다.

하루하루 새 옷을 갈아입는 산의 현란한 ‘패션쇼’를 지켜보며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산에 한번 오를 여유가 생길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러다가 만사 제쳐놓고 등산화를 챙겼습니다.

더 늦으면 이대로 훌쩍 가을산을 떠나보낼 것 같아서요.

가까이서 본 관악산은 멀리서 본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산을 오르는 내내 ‘바스락 바스락’ 잎사귀 소리가 정겨운 하모니로 귀를 간지럽히고,

약간 덜 탈색된 단풍잎은 ‘언제 선홍빛이었냐’는 듯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모처럼 하는 등산이라 그런지 정상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더군요.

북한산에만 있는 줄 알았던 ‘깔딱고개’가 관악산에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생각해보니 ‘깔딱고개’는 어디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상을 눈앞에 두면 반드시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깔딱고개’를 만나게 되는 건 아닌지요?

어쩌면 우리 사회도 새로운 질서를 찾아 ‘깔딱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갈등이 있고, 심지어 혼선도 있지만 마치 정상을 눈앞에 두고 ‘깔딱고개’를 오르는 것처럼

분명히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을 것이 확실한 내일을 향해 우리는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산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해맑습니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 마치 오랜 지기처럼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어, 김근태 장관이네!’하며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요즘 김치파동이다 뭐다 해서 등산을 하면 따가운 시선 좀 받을 거라고 각오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봐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관악산이 베풀어주는 넉넉함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상에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내려갈 일이 아득합니다.

‘저 길을 언제 또 내려가나?’ 걱정이 됩니다.

눈으로 올라온 길을 되짚어 보니 산자락에 ‘서울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제 모교이긴 하지만 산 중턱까지 건물이 들어서고 산과 ‘높이대결’이라도 할 듯이 솟아오른 모양이 좋아 보이지만은 않더군요.

이웃이나 자연과 잘 어울리는 넉넉하고 겸손한 서울대학교가 됐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내려오는 길에 숨 헐떡이며 산을 오르는 분들을 만나니 또 기분이 묘합니다.

‘어휴, 저 길을 언제 다 오르려나’ 걱정이 되면서도, 솔직히 나는 이제 쉬운 길만 남았다는 사실에 약간 홀가분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산을 내려와 막걸리 한사발 들이키며 근 2년 만에 맞는 여유를 만끽합니다.

한잔하는 틈을 타 방금 다녀온 관악산을 다시 올려다 봅니다.

그렇게 바라본 관악산은 또 그 나름대로 아름답습니다.

가까이에서 만나면 가까운대로, 멀리서 바라보면 또 먼 그대로….

 

산은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선물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삼 많은 것을 받고 산다는 사실을 다시 느낀 주말이었습니다.

2005.11.14
김근태

 



경남 사천을 다녀왔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놓인 분들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 ‘자활사업’을 하는데,

그날 경남에서 자활사업에 참여하는 분들이 모두 모여 모처럼 허리띠 풀고 ‘한판 논다’는 연락을 받고 길을 나섰습니다.

마음으로 응원도 하고 박수도 치고 싶었습니다.

행사장인 ‘사천공설운동장’에 들어서니 맨 먼저 아주머니 그리고 아저씨들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유난히 반갑게 악수하고 좋아하시더군요.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일상에 지치고, 삶에 지친 그분들이 정부에, 이 나라에 기대하고 희망하는 바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많은 말씀을 나누지 않아도 거칠고 굳은살 박인 손을 맞잡으니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제 가슴 속으로 전해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축사를 했습니다. 딱딱하지 않고 편하게 말씀드릴 작정으로 우스개 소리도 좀 섞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짜~안’ 했습니다. 운동장에 앉아있는 분들이 왜 한결같이 그리도 왜소해 보이는지요?

몸집도 유난히 작아 보이고,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사실, 요즘 자활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마음고생을 좀 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가 크지 않으니 이래저래 눈치 볼 일도 많습니다.

예산집행 실적에 비해 자활성과가 미진하다는 ‘눈총’도 받고,

그 바람에 정부 내 예산 심사 과정에서 자활예산을 깎겠다는 방침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없었던 일로 되돌릴 생각이고, 거의 그렇게 되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활사업에 참여하는 분들이나

자활사업을 돕는 분들이 적잖게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자활은 복지부의 여러 사업 가운데서도 가장 성과를 내기 어려운 일입니다.

오죽하면 복지부 직원들이 가장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일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성과를 내기 어려운 사업을 맡으면 개인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려우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저는 자활사업에 많은 분들이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일하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우리 사회의 부담이 되기보다 스스로 다시 일어서겠다고 생각하는 이분들이 있는 한 이미 문제를 절반은 해결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기죽지 마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두번, 세번 주눅 들지 마시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축사를 마쳤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더군요.

장터를 한바퀴 돌았습니다. 행사장 한켠에 잔치판이 열렸습니다.

서툰 솜씨로 떡매를 치고, 또 떡도 만들었습니다. 아이처럼 솜사탕도 사먹으면서 여기저기 휘젓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쏘다니다가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자활사업을 돕는 분들 가운데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과 고민을 한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번 예산 삭감 방침에 항의하는 분들을 만났는데 옛날에 탄압에 맞서 일하던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십년만에 만났는데 당장 큰 성과가 나지 않는 사업이라는 이유 때문에 괜히 주눅 들어서 힘겹게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희망입니다.

당장은 고달프고, 주눅 들고 왜소해 보이지만 이런 몸부림이 있기에 우리 사회가 쓰러지지 않는 팽이처럼 돌아가는 셈이니까요.

그 희망을 하늘만큼 키워갔으면 좋겠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 훌쩍 타넘고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2005.11.08
김근태


 


“정부가 어떤 대책을 내놔도 가임여성의 출산파업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며칠 전, 한 방송프로그램 저출산 토론에서 나온 말입니다.

자유기고가인 그 여성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끼리 그런 말을 주고받는다고 소개했습니다.

뜨끔했습니다. 그냥 하는 말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출산을 고민하는 상당수의 여성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범정부적으로 저출산 대책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그런 말씀을 들으니 약간 힘이 빠지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출연한 생방송 토론이라 처음엔 좀 어벙벙했는데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정말 피부에 와닿는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라는 절박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정책수립과정과는 좀 다른 복잡하고 종합적인 프로세스가 필요합니다.

문제 자체가 상당히 복합적이기 때문입니다. 고차방정식풀기라고 할까요?

과거 여성이 가사를 전담하던 시절과 지금은 상황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저출산 문제가 단지 사교육비나 보육시설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런 경제적인 이유 못지않게 여성 스스로 자기실현을 하겠다는 욕구가 크게 높아진 것도 중요한 원인입니다.

IMF 이후 부쩍 심화된 ‘과로형 직장환경’도 빼놓을 수 없는 원인입니다.

그래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대전환을 해야 합니다.

제도와 정책은 물론, 사회적인 인식과 문화의 변화도 함께 이뤄야 합니다.

출산은 하늘이 주신 축복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진정으로 출산을 축복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말뿐인 축복’이 되지 않도록 실제로 경제적․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데까지 밀고 나가야 합니다.

방향은 그렇게 잡고 있는데 실제로 정책으로 구체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첫 번째는 역시 예산 문제입니다.

출산과 보육, 육아에 대한 비용의 상당부분을 정부가 부담하고,

모성보호에 앞장서는 기업에게 인센티브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많은 예산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엄청난 예산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를 놓고 지금 정부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많은 토론을 하고 있고 머지않아 결론을 낼 생각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역시 부처 간의 ‘공조’입니다.

지금은 보건복지부에서 저출산 대책을 총괄하고 있습니다만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이 문제는 복지부의 정책 범위만 가지고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재경부, 산자부, 노동부, 교육부, 여성부, 문광부 등 수많은 부처가 힘을 모으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출산고령화대책은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에서 관장하기로 했습니다.

민간의 역할도 중요하기 때문에 정부 위원과 민간 위원이 절반씩 참여하고 있습니다.

실무부서인 추진본부는 보건복지부와 여성부, 노동부, 산자부 등 여러 부처의 공무원들이 함께 팀을 이뤄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저출산 대책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직 아장아장 걷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두 발로 땅을 딛고 곧추 설만큼 충분한 힘도 없습니다.

반면 우리가 극복해야할 과제는 너무나 많고 어렵습니다.

저는 ‘출산파업’을 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핵심성공요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정책을 만들고 사회적인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여성들 스스로 출산파업을 풀고

출산을 진정한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그날까지 어렵고 힘들더라도 한 걸음씩 나아갑시다.

2005.10.31
김근태

 


‘납은 검출되지 않았다’는 수준으로 만족할 상황이 아닌데도

성급하게 ‘안전하다’고 말한 점은 국민의 기대치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식품관리 정책’을 혁명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절대적인 안전’을 요구하는 국민의 요구에 맞출 수 있습니다.

핵심은 생산자 중심의 식품관리 정책을 소비자 중심으로 전면 전환하는 것입니다.

식품에 대한 정책 패러다임(판단 기준)을 ‘증산’에서 ‘안전’으로 바꿔야 합니다. 

 

안전을 관리하는 기관인 식약청이나 또는 어떤 기관이

‘농장에서 식탁까지’ 모든 과정을 일괄 감독하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합니다.

생산을 지원하는 기관이 덤으로 안전관리까지 담당하는 지금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식품과 관련된 부처가 7~8개가 됩니다.

농장에서 식탁까지 중금속, 농약, 동물 항생제 등 위해요소를 강력하게 규제할 수 있는 일관된 관리체계를 갖춰야 합니다.

그렇게 하자고 정부 안에서 의견을 모아가고 있습니다.

환경영향평가를 건설 기획 단계부터 시작하듯이 소비자 안전평가를 생산단계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제도와 체계를 바꿔야 합니다.

 

걱정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농민과 어민의 부담이 커질 것입니다.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농사짓고 양식하는 일이 더 까다로워 질 것입니다.

애써 지은 농수산물을 폐기하는 일도 많아질 것입니다.

위생시설이나 냉장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으면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수입식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는 통관과정에서 안전성을 확인했지만,

앞으로는 외국에서 생산하는 단계부터 안전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시스템으로 바꿔야 합니다.

수입업자가 안전을 확인할 책임을 지고, 지키지 않으면 강력한 처벌을 하는 체제로 시급히 바꿔야 합니다.

생산자는 물론이고 유통 상인, 수입업자가 안전성을 동시에 책임지도록 준엄하게 해야 합니다.

식품의 안전성을 책임지지 않으면 엄중한 처벌을 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 그래도 어려운데 규제를 강화하면 어쩌란 말이냐?’는 원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생산원가가 올라 물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선 통상마찰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부담이 있지만 추진해 나가야 합니다.

‘식품안전’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자존심을 지키고 건강을 지키고 결국 경쟁력을 높이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농어민의 부담은 국가와 사회가 나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만 고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 같은 나라는 이미 이런 고민을 해왔습니다.

전에 ‘식품파동’을 겪었고, 갈등도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소비자 중심의 식품관리 패러다임’이라는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미래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저서 ‘트러스트(Trust)’에서 한국을 ‘저신뢰 사회’로 지목했습니다.

신뢰가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고, 신뢰가 구축된 나라만 세계적인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충고했습니다.

 

식품에 대한 ‘신뢰’는 원초적입니다.

먹고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왕에 불거진 ‘식품안전문제’에 대해 한발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밀고 나갈 생각입니다.

2005.10.24
김근태

 


국정감사가 끝났습니다.

제 입장에서 보면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시험’을 치는 셈입니다.

불과 일 년이 지났을 뿐인데 지난해와 올해 국정감사를 받는 느낌은 참 다릅니다.

 

지난해 국정감사 때는 잔뜩 긴장했습니다.

우선 의원석에 앉아 질의를 하던 처지에서 증인석에 앉아 선서를 하고 답변을 하자니 어색했고요,

동네 뒷골목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복지부 업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을 때는 가끔씩 앞이 암담해지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국정감사를 마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쩌면 잔뜩 긴장하고 벼락치기를 한 덕분일 수도 있고, 햇병아리 장관이라고 좀 봐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우선 의원들이 지난해 보다 훨씬 많이 준비했고, 집요했습니다. 좀 봐주는 기색도 없었습니다.

복지부 정책 구석구석에 대해 송곳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도 미처 몰랐던 ‘허술함’이 드러나 아찔하고 부끄러운 순간도 있었습니다.

몇몇 사안에 대해서는 국민에게 사과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두 번째 시험을 치르면서 그동안 깊이 느끼지 못했던 ‘국정감사’의 본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국정감사를 하는 걸까요? 국정감사가 보다 효과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국정감사를 시작하면서 복지부 간부들에게 ‘국민을 향해 답변하고, 설명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국회의원의 입을 통해 질문이 쏟아지고, 추궁이 이어지지만

결국은 국민에게 정책 집행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라는 생각을 갖고 솔직하고 당당하게 임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다행히 복지부 직원들이 제 말뜻을 이해하고 그렇게 해준 것 같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부는 이번 국정감사를 받으면서 국민으로부터 많은 회초리를 맞았습니다.

미처 챙기지 못한 실수가 드러나고 국민을 허탈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일들이 정책을 기획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소한 실수일지 모르지만

국민의 눈높이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일 것입니다.

정책을 기획하는 입장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국민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적지 않은 개선점이 있다는 사실도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이런 점에서 국정감사는 일종의 보약입니다.

공직사회는 ‘국정감사’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일 년에 한번씩 ‘국민의 눈높이’라는 특단의 보약을 선물 받는 셈입니다.

행정이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어 집을 짓는 일이라면, 정치는 기초공사를 하는 일입니다.

국회의원들이 국민을 대신해서 기초를 잘 잡아줘야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바닥에 금이 간 곳은 없는지, 썩은 기둥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고 바로잡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국정감사는 집요하고 구체적일수록 좋습니다.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국회의원과 공직자들이 한두 달씩 집중적으로 준비해서 떠들썩한 대형 이벤트를 벌이는데도

국정감사가 ‘국민적 관심’을 모으며 진행되기에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묻히고 자극적인 한두 사안만 도드라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국정감사라는 필터링을 거치면서 국민의 실생활에 직결된 중요한 정책과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뤄내야 하는데

그렇게 결론이 나기보다 ‘한탕주의’ ‘선정주의’로 흐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국정감사의 내용은 언론이라는 창을 통해 국민에게 비춰집니다.

그런데 한날한시에 모든 정부 부처에 대한 감사를 하다 보니 국민이 꼭 관심을 가져야할 사안이 맥없이 묻혀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국정감사’를 연중무휴로 하면 어떨까요?

입시가 끝난 1월에는 교육위원회, 농사철을 앞둔 2월에는 농림해양수산위원회, 식중독 사고가 많은 여름을 앞둔 5월에는

보건복지위원회 하는 식으로 한 달씩 돌아가면서 국정감사를 한다면 훨씬 집중적이고 효과적인 국정감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한 달씩 돌아가며 각 부처의 살림살이를 꼼꼼히 살펴볼 수 있어서 좋고,

공직사회 역시 넉넉한 시간을 갖고 설명할 것은 설명하고 해명할 것은 해명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런 과정이 언론을 통해 투명하게 국민에게 전달되면 공직사회와 국민의 ‘눈높이 차이’도 훨씬 줄어들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2005.10.17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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