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한 일주일이었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국민의 보건과 복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지난 18일, 대구에서 네 살짜리 어린이가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충격적인 보도가 우리 모두의 가슴을 때렸기 때문입니다.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는 말과 굶어죽었다는 말이 함께 기사화 되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대명천지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사람이 굶어죽을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죄책감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정민이와 청훈이 경철이 세 어린이가 엄마가

신문배달을 나간 사이에 화재로 숨져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 사건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다시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국민들이 충격과 분노를 느꼈을 것입니다.

경제대국을 꿈꾸는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가 ‘영양실조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국민적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나중에 ‘희귀질환을 앓고 있어 음식을 먹기 어려웠고,

그 결과로 영양실조가 되었다’는 보도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안전망이 이렇게 허망하게 뚫렸다’는 객관적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특히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아이를 많이 낳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아이들의 생명조차 지켜내지 못했다는 참담함이 가슴을 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충격과 상처를 입은 국민들께 무슨 말로 사죄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멀리서 거친 파도가 쉴새없이 우리를 덮쳐오는 느낌입니다.

 

우리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이제 익숙한 것들과 이별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날로 심화돼 가는 빈익빈부익부 사회 양극화 현상을 뒤로 제쳐두고도

과연 우리 사회가 계속 전진할 수 있을까?

 

근저에서 분열되어 있고 낯설어 하고 대립,갈등하는 구조를 갖고서도

우리 사회가 정말 안전하게 운영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러고도 시장경제가 훌륭하게 작동할 수 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런 시장경제는 억압적인 시장이 아닐까?

이제는 정말 ‘사회통합’을 위해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건 아닐까?

빈곤층은 물론 중산층까지 혜택을 받고 참여하는 진정한 복지사회를 시급히 이뤄내야 하는 것 아닐까?

보건복지부에 부임한 이후 이런 고민을 계속해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회안전망을 튼튼하게 새로 짜고,

우리 사회의 물길을 ‘사회통합’이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밀고 나갈 수 있을지

그리고 사회통합을 통해 새로운 성장, 새로운 발전으로 힘차게 밀고나갈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왔습니다.

 

지난 한 주를 보내면서 자꾸만 쫒기는 느낌입니다.

제 마음이 점점 다급해지는 듯합니다.

 

결국 2005년 내년에 새로운 국민적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새로운 결단을 할 수 있는 새해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준수하게 생긴 그러나 외로워하는 장년 에이즈 환자

 

지난 화요일에는 에이즈 환자를 만났습니다.

12월 1일이 ‘세계 에이즈의 날’이었습니다.

 

축사도 하고 현황도 살펴봤지만 뭔가 찜찜했습니다.

에이즈 환자를 만나 직접 얘기를 듣고 위로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탁했습니다.

뒤에서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허락도 받았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긴장했습니다.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의사가 미리 말해줬는데도 불구하고 손에 땀이 나는 듯했습니다.

 

악수를 하면서 마음을 들킬 것 같아 약간 초조해지기도 했습니다.

에이즈 환자를 만나고 나오면서 목이 말랐습니다.

 

자꾸 ‘소록도’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가 다시 ‘제2의 소록도’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 에이즈를 ‘천형’이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에이즈는 과거에 문둥병이라고 부르며

사회에서 격리하고 배척하던 ‘한센씨병’과 비슷한 처지로 규정받고 있습니다.

 

사실, 내가 만난 에이즈 환자는 정말 준수하게 생긴 남성이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저 역시 은연중 일그러진 모습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알게 모르게 편견과 공포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나 TV에서 보던 말기 에이즈 환자를 떠올렸던 것이지요.

 

그러나 제가 만난 그분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회에 대한 증오심도 없었고, 자제력도 충분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오직 에이즈 환자들의 모임을 인정하고 지원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분들의 인권을 위해서도 그렇고,

이미 치명적인 질병에서 만성적인 병으로 전환되고 있는 ‘에이즈’로부터

우리 사회를 효과적으로 지켜내기 위해서도

에이즈 환자에 대해 선의를 갖고 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이미 결심을 했기 때문에 약속을 했습니다.

 

앞으로 지켜나갈 생각입니다.

 

해군 방문 이야기

 

좀 가벼운 얘기를 하겠습니다.

수요일에는 동해에 있는 해군부대를 방문했습니다.

 

부대를 둘러보는 동안 군악대가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연주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노래는 제가 지난 4.15 총선에서

국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면서 도처에서 불렀던 노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부대에서 사전에 저의 18번에 대해 알아보고

‘사랑으로’를 골랐다고 합니다.

 

그런 부분까지 신경 써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제가 실수를 좀 했습니다.

 

첫 번째는 ‘국군장병 아저씨’였습니다.

군부대를 방문하면서 어릴 때 위문편지를 쓰던 기분이 들어서 그랬는지

자꾸 그 말이 입안을 뱅뱅 돌면서 튀어나오려고 해 혼났습니다.

 

아들까지 군대를 갔다 온 제 처지를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두 번째는 장병들과 함께 ‘화이팅’을 외치는 순간에 터져 나왔습니다.

‘대한민국 해군 화이팅!’을 하자고 했는데

실제로는 그만 ‘육군 파이팅!’이라고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육군 병장 출신이라서 그렇다고 하면서

‘와’ 웃으면서 상황을 넘겼습니다.

다소 쑥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정겨운 느낌도 많았습니다.

우리 기술로 만든 자랑스러운 ‘광개토대왕함’을 둘러봤습니다.

 

그런데 내 눈길을 끈 것은

옛날에 영화를 통해 봤던 좁고 가파른 계단이었습니다.

 

그때는 계단을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는데

막상 현장을 보니 이해가 됐습니다.

 

좁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군복을 보니 그리웠던 지난날이 떠올랐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해군복 같은 디자인의 옷을 ‘세라복’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진명여고 학생들이 입고 다니던 세라복이 그렇게 예뻐 보였는데

그 세라복이 바로 해군복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아주 정겹게 다가왔습니다.

 

간부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세계화시대를 맞아

해군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고 합의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대륙에 연결된 섬’의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휴전선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해군은 우리의 물동량을 지키고

세계와 우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해군 장병들에게 구호에 그치는 ‘세계속의 해군’이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대양 해군’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해군부대를 방문하는 동안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육해공군의 경계를 넘어서 동아시아에서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전략을 가져야 할 것인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군사전략을 어떻게 짜야 하며

결국은 그것을 담보할 정치 전략은 무엇이고 그것을 실현시킬 프로그램은 무엇인지

등등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해군 부대 방문은 그렇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2004.12.27

김근태

 

 

 

목요일, 찬바람 부는 종묘공원을 갔습니다.
햇살은 제법 따스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무려 500명이 넘는 노인 어르신들이 찬바람을 맞으며

노상에서 점심식사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보건복지부에 부임하면서 복지부는 가정으로 치면

‘어머니’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민들이 춥고 배고프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

보건복지부 장관의 ‘존재이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많은 어르신들이 바람 막을 벽 하나 없는 한데서

점심식사를 하는 현장을 접하니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연말연시를 맞아 춥고 배고픈 민생현장을 찾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역 노숙자들을 만났고, 청량리역에서 밥 푸는 일도 거들었습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사람들을 찾아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막상 찾아간다고 해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만

국민의 건강과 복지를 책임지는 장관이라면

‘함께 있어주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시작한 일입니다.

 

종묘공원에서 국 배식을 맡았습니다.

사진 기자들이 포즈를 취해달라는 요구를 해왔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마치 사진 찍기 위해서 온 증거가 될 것 같아서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할 일 하고 가는 게 내가 취할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입니다!’


함께 간 직원이 못 알아보는 어르신들이 많을까봐

자꾸 그 말을 반복했는데 민망스러웠습니다.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또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 같아서 못들은 척 했습니다.

 

대신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손으로 조용히 해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배식을 모두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봉사를 하고 있는 사랑채의 김금복 회장은

11년째 그 일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한 푼도 재정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르신들이 찬바람을 맞으며 식사를 하지 않도록

간이시설이라도 했으면 하는 것이 김회장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김금복 씨의 이런 바램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지역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종묘공원에서 무료급식을 하는 것에 대해

마땅치 않게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수군거림을 들었습니다.

 

무료급식을 하면 노숙자가 늘어난다거나

근로의욕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서 함께 마음을 모으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너무 야박하고 야멸찬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관으로 일한지 이제 6개월이 다돼갑니다.

많은 공직자들을 만났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밖에서 생각하던 것보다 능력있는 공직자들이 많았고

배울 점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 나라는 우리가 끌고 간다’는 확신을 갖고 일하는 공직자들을 발견하고선

대견한 느낌에 미소를 지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좀 더 ‘따뜻한 행정’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국민의 가슴으로 다가가는 행정,

따뜻한 행정을 해야 국민에게 신뢰받는 공직사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더욱 통합되는 사회

그래서 정말로 일류 사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묘공원을 떠나면서 어르신들의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힙니다.

가슴 서늘한 느낌, ‘춥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직원들을 불러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는지

찾아보라고 당부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봉사의 대열에 참여하고

어르신들이 찬바람을 맞지 않으면서

따뜻한 한 끼 점심을 자실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개성공단에서 생산한 냄비

롯데백화점에서 북한산 냄비가 불티나게 팔렸다고 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뉴스다운 뉴스였습니다.

한국의 설비와 기술이 북한의 노동력과 만나 생산품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서울의 백화점에서 이틀만에 다 팔렸다고 합니다.

 

정말 상징적인 뉴스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반도에서 서로 가장 멀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냄비를 매개로 만나게 된 것이라고 얘기하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이제 시작입니다.

냄비를 시작으로 많은 제품이 생산되어

한국에서 그리고 또 세계 곳곳에서 팔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말 가능할까 싶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정말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성공단을 터전삼아 남과 북이 어떤 일이 있어도 힘을 모아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개성공단에 입주한 우리 기업들이

근로환경에도 주의를 기울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북한 노동자들이 좀 더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당연히 배려를 해야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개성공단은 공산품을 생산하는 ‘공단’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남과 북이 상생하는 협력의 용광로로 발전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남북이 함께 꿈꾸는 희망의 근거지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개성공단은 우리 모두가 서로 배려하고 보살필 필요가 있는 그런 곳입니다.

 

정동영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정말, 애썼습니다. 오랜만에 상쾌한 뉴스입니다”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냄비’를 보내주겠다고 하더군요.

 

아마 오고 있는 중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끈따끈한 ‘개성산 냄비’가 말입니다.

 

개성공단은 휴전선 바로 너머 손에 잡힐 듯이 보입니다.

도라산 전망대에서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6.25 사변 때 그랬던 것처럼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지뢰가 제거된 길을 따라,

북한 탱크가 줄줄이 내려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래서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고, 폐지해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시장경제’가 그 모든 것을 넘어서 가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진,선봉과 신의주 경제특구는 성공하지 못했고,

한국과 협력한 ‘금강산 관광’은 목하 성공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와 연관해서 북한 당국자가 자신들의 국민 내치에 무수한 부담이 오고 있는데도

 - 그 증거는 많습니다.

그 많은 남북교류 모두를 베이징을 거쳐서 서울-평양을 왕래케 하는 것은

휴전선에는 아직 긴장이 높고, 이른바 평화협정도 맺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기 위한 정치적 판단이고 정치적 결정일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개성공단 건설을 위해 왕래하는 한국 인사들에게

결심을 하고 대문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대담한 접근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경제에서, 민주주의에서 그리고 국제 정치 사회 영향력 모두에서

압도적으로 앞서나가고 있는 우리가 방어적일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나는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국가보안법’을 미련 없이 폐지하고 나면,

북한 당국에게 노동당 규약과 북한 형법의 개정을 요구할 정당성과 당당함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꿈은 거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아니, 냉엄한 현실은 우리에게 꿈을 깨라고 채찍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동아시아에서 북한 동포들을 껴안은 채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지 미래를 설계해야 합니다.

 

7천 5백만 민족의 생활권을 확보하고

평화와 협력을 제도화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그 비전과 실행 가능한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한다고

역사는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느낍니다.

더 이상 늦어져서는 안 된다고 저는 주장하고 싶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 그렇게 느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시계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 것일까요?

 

일부가 관성적으로 주장하는 대로

20세기 중반의 그 지루한 냉전적 증오와 대결의 뒤 끄트머리 어디쯤엔가 멈춰서서

시간을 그냥 낭비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2004.12.20
김근태


 

 

일요일, 편지쓰기를 시작하며―.

일요일 오후입니다.
며칠 전, 함께 일하는 후배로부터 

 ‘일요일에 쓰는 편지’에 대한 원고청탁을 받았습니다.

 

“일요일 오후에 그저 부담 없이 짧게 쓰시면 됩니다”

 

그 후배는 정말 부담 없이 부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만 주눅이 들어버렸습니다.


‘정말, 쓸 수 있을까? 일주일에 한번씩??’


하지만 후배의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어

덜컥 그러겠노라고 대답하고 돌아섰지만

그 순간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편지를 쓰겠다는 약속을

온전히 지킬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편하게 쓰겠습니다.
잘 정리된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냥 제가 일주일을 보내면서 품었던 ‘생각의 조각’을

여러분과 함께 나눈다는 마음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일주일을 보내고 제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

추억이건 감상이건 눈물이건 분노건….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여러분과 나누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그리워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작은 ‘말’ 하나도 틀림없이 책임져야하는 장관으로서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구실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늘 아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많은 분들께

더없이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빚 갚는 심정’도 작용했습니다.

 

읽어주시고 제가 전하는 ‘생각조각’을

여러분이 ‘큰 생각’으로 키워 주셨으면 합니다.


울고 싶은 일이 많은 지난 한 주였습니다.

먼저, 어이없는 화재로 세상을 떠난

세 남매 때문에 울었습니다.

 

경찰인 아빠는 철야근무를 나갔고,

엄마는 신문배달을 하던 그 새벽에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엄마, 아빠가 너무나 열심히 일하던 분들이라

슬픔이 더 큽니다.

 

특히 “나를 용서하지 말라”고 절규하던

그 어머니 때문에 가슴이 메어졌습니다.

 

정민이와 청훈이 경철이….

세 친구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불행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역할을 해야겠다고 두 주먹 꼭 쥐고 다짐합니다.

 

제가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여러분께서 절대 이 김근태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한 번 더 울었습니다.
노숙자들에게 밥 퍼주는 행사를 하면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특히

‘신이 우리에게 두 팔을 주신 것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보듬어 안기 위해서이다.

마음과 마음이 합쳐지면 기적을 이룬다’

는 영상물이 나를 목메게 했습니다.

사실, 밥퍼 행사 자체가 감동이었습니다.
12년 동안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봉사자들의 몸가짐과

마음 쓰는 모습이 성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다일공동체 봉사자들도 피하고 싶어 하던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친절한 공무원의 소임을 다한다는 이문행 경장님,

천사병원의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님들….

그곳은 정말 너무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이었습니다.

“밥을 많이 퍼야 합니다”라는 말이 가슴을 찡하게 했습니다.
세상은 웰빙이니 비만이니 하는 말과 함께 밥을 조금 먹으려는 추세인데

그곳에서는 밥을 많이 퍼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밥을 많이 퍼서 식판에 높이 쌓아 배식 했더니

또 너무 많이 펐다고 혼이 났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느낌이 많았습니다.

사실, 좋은 일을 계속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몇 번하고 마는 밥퍼가 아니라

‘언제나 그 자리에서 계속하는 밥퍼’라는 점이 특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사랑과 평화가 있는 이곳에 다시 오겠습니다-김근태”

이렇게 사인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언제 우리 모두 함께 앞치마를 두르고 그곳에서 밥을 펐으면 좋겠습니다.

정치 얘기는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뜬금없는 간첩논쟁에 대해서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잘 대응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만

그래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용서하면 안 됩니다.

 

더 이상 이 땅에 냉전과 색깔논쟁의 망령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이런 야만이 준동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됩니다.

지난 봄 촛불로 대통령과 민주주의를 구했듯이

언제나 나라와 민주주의를 구하는 것은 국민이었습니다.

국민의 힘으로 모든 일이 잘 되리라 확신합니다.

지난 주에는 의사당에서 단식하던 권영길 의원님을 위로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서 나왔지만 가슴은 더없이 짠했습니다.

이런 이심전심이

여러분과 저를 연결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요일에 보내는 편지’가

여러분과 제가 더 깊이 이심전심을 나누는

‘따뜻한 악수’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덜 춥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겨울입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주에 또 뵙겠습니다.


 

2004.12.15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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