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스토리> KBS2 TV 2012년 8월 8일 방송

“너는 나의, 나는 너의” - 내 아들 석이

“흙을 주무르며 많은 걸 얻었죠. 기쁨도, 희망도”

 

지적장애 1급 아들을 키우며 겪은 애환과 희망을 도자기에 오롯이 담아낸 박정희 선생님.

그녀는 30여 년을 교직에 몸담아 온 교사다.(現 대전 변동중학교 교장)

난산으로 장애를 갖게 된 아들, 벌써 29살 된 어엿한 청년이지만 지능은 3살 수준.

할 수 있는 말은 ‘엄마, 아빠, 그리고 까까’ 정도라고...

 

심하게 우울증을 앓기도 여러 번, 하지만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교직 생활까지 병행한 슈퍼우먼으로 당당히 살아왔다.

14년 전, 아들을 위한 특수교육의 일환의 하나로 도예를 배우면서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그녀!

오늘도 집 방, 작은 작업실에서 아들과 흙을 매만지며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아들은 더 이상 책임의 존재가 아닌, 행복한 인생의 동반자고 동무라 말하는 인생, 그녀가 발견한 희망은 무엇일까?

<휴먼스토리, 아름다운 사람>에서 담아 본다.



연세동문회보 / 이달의 여동문

박정희 (신학 72입) 대전 변동중학교 교장

 

도자기를 빚는 마음으로 교육 한 길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 양분이 필요하듯이 한 아이가 바르게 성장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한 학생 한 학생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는 그런 교사가 되고자 했습니다.”
신학과를 졸업하고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한 뒤 1981년 고등학교 윤리교사로 처음 교단에 섰을 때 박정희 동문의 각오는 남달랐다. 특히 학교에서 문제 학생으로 낙인찍힌 아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고자 했다. 하지만 1984년 12월 시골의 한 병원에서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의 인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난산 끝에 산모는 정신을 잃었고 아이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이후 아들은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젖을 삼키지 못해 애를 태우더니 목을 가누는 것도, 뒤집는 것도, 일어서는 것도 유난히 더뎠다.
세 살 무렵 의사로부터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커갈수록 점점 더 뒤처지는 아들에게 조바심을 내며 “똑바로 걷지 너는 왜 자꾸 넘어지니”, “침 좀 흘리지 마라”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한동안 직장을 그만둘까 고민했으나 일을 포기하고 아이에게 매달린다 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장애가 있는 아들과 사는 것을 힘겨워하던 남편은 아들이 일곱 살 무렵 영영 떠나버렸다. 그는 위자료나 양육비 대신 친권을 챙겼다.
“아이가 밤에 잠을 안 자고 설치는 경우가 많아서 밤새 시달리다 아침 7시30분에 집을 나서 아이를 스쿨버스에 태워주고 출근했죠. 친정어머니께서 아이를 돌봐주셨지만 그래도 그 무렵 하루가 48시간이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를 만큼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쉼, 여유, 위안, 안식, 평안 이런 단어들이었어요.”
한동안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에 우울증에 빠졌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도자기를 접하고 활력을 되찾았다. 주말마다 흙을 주무르고 두드리고 빚다 보면 현실 세계의 절망감과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성취감도 컸다. 대전교원미술전 공예부문 1등급 상과 전국백제토기물레경연대회 은상을 수상했고, ‘정신지체 학생의 작업기능 신장을 위한 생활도자기 만들기 지도자료’로 교육과학기술부장관상을 받았다. 다시 공부를 시작해 침례신학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도예 활동을 통한 집단상담이 장애아 어머니의 양육 스트레스 및 자기 효능감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도 썼다.
“특수학교에 근무할 때 장애아들에게 도자기 수업을 했는데, 평소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아이들이 도자기를 만드는 동안에는 가만히 앉아서 흙을 만지더군요. 부드럽고 촉촉한 흙을 만지며 원하는 모양을 만들고 불에 구워 작품이 완성될 때 아이들은 성취감을 느끼죠. 작년부터 자폐아와 가족들에게 도자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자폐아들이 도자기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면서 대인관계와 사회적응력을 키우고, 부모들도 자녀를 더 이해하게 되고 양육 스트레스도 풀 수 있지요.”
박정희 동문은 2013년 7월 도자기를 시작한 지 14년 만에 첫 개인전을 열었고 올 11월에 두 번째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지난 해에는 교장으로 승진해 교육자로서 도예가로서 모두 성공적인 길을 걷고 있다. 한때 눈물과 한숨이 서렸던 그의 도자기에 지금은 사랑과 기쁨이 넘친다.
“여전히 일상생활을 스스로 하지 못해 옷을 입히고 양치질을 해줘야 하지만 아들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아들의 순수하고 천진한 미소가 나를 정화시키고 아름답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글·김현미(신방 86입) 동아일보사 주간동아 팀장


원본 http://www.yonsein.net/ebook/dong/1505/201505.pdf    13 of 24

인용 http://blog.daum.net/choemh/16140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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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라는 초등학교 여교사가 있었다 .
개학 날 담임을 맡은 5학년 반 아이들 앞에 선 그녀는

아이들에게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였다 .

 

그 것은 아이들을 둘러보고

모두를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


그러나 바로 첫 줄에 구부정하니 앉아 있는 작은 남자 아이 ,

철수가 있는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


K 선생은 그 전부터 철수를 지켜보며
철수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옷도 단정치 못하며 , 잘 씻지도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
때로는 철수를 보면 기분이 불쾌할 때도 있었다 .

 

결국은 철수가 낸 시험지에 큰 X 표시를 하고

위에 커다란 ㅇ 빵점을 써넣는 것이 즐겁기까지 한 지경에 이르렀다 .

 

그런데 K 선생님이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의 지난 학년의 생활기록부를 다 보도록 되어 있었다 .

그러나 그녀는 철수것을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다 .
그러다 마지막으로 철수의 생활기록부를 보고는 깜짝 놀랄수 밖에 없었다 .

 

철수의 1학년 담임선생님의 기록은 이렇게 써 있었다 .
“ 잘 웃고 밝은 아이임 .

깔끔하게 잘 마무리하고 예절이 바름 .
함께 있으면 즐거운 아이임 . ”


2학년 담임선생님의 기록은 이렇게 써 있었다 .

“ 반 친구들이 좋아하는 훌륭한 학생으로 ,

어머니가 불치병을 앓고 있음 .
가정생활이 어려울 것으로 보임 . ”

 

3학년 담임선생님의 기록은 이러 하였다 .
“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함 .
최선을 다하지만 아버지가 별로 관심이 없음 .

어떤 조치가 없으면 곧 가정생활이 학교 생활에 까지 영향을 미칠 것임 . ”


철수의 4학년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썼다 .

“ 내성적이고 학교에 관심이 없음 .
친구가 많지 않고 , 수업시간에 잠을 자기도 함 . ”


여기까지 읽은 K 선생은 비로소 철수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뒤 늦게 깨달아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
반 아이들이 화려한 종이와 예쁜 리본으로 포장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왔는데 ,

철수의 선물만 식료품 봉투의 두꺼운 갈색 종이로 어설프게 포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

 

K 선생은 애써 다른 선물을 제쳐두고 철수의 선물부터 포장을 뜯었다 .

알이 몇 개 빠진 가짜 다이아몬드 팔찌와 사분의 일만 차 있는 향수병이 나오자 ,

아이들 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러나 그녀가 팔찌를 손목에 차며

와아!! 정말 예쁘구나~ 감탄하고 ,
향수를 손목에 조금 뿌리자 아이들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


철수는 그날 방과 후에 남아서 이렇게 말했다 .

“ 선생님 , 오늘은 선생님에게서 꼭 우리 엄마에게서 나던 향기가 났어요 . ”

 

그녀는 아이들이 돌아간 후 한 시간 넘게 울었다 .
바로 그날부터 그녀는 읽기 , 쓰기 , 국어 , 산수 가르치기를 그만두었다 .

그리고 아이들을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


K 선생은 철수를 특별히 대했다 .

철수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때면 철수의 눈빛이 살아나는 듯했다 .
그녀가 격려하면 할수록 철수는 더 빨리 반응하였다 .

 

그 해 말이 되자 철수는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고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겠다는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가장 귀여워 하는 학생이 되었다 .


1 년 후에 그녀는 교무실 문 아래에서 철수가 쓴 쪽지를 발견 했다 .

거기에는 그녀가 자기 평생 최고의 교사였다고 쓰여져 있었다 .


그로부터 6 년이 흘러 그녀는 철수에게서 또 쪽지를 받았다 .

고교를 반에서 2등으로 졸업했다고 쓰여 있었고 ,

아직도 그녀가 자기 평생 최고의 선생님인 것은 변함이 없다고 쓰여 있었다 .

 

4 년이 더 흘러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
이번에는 대학 졸업 후에 공부를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쓰여져 있었다 .

이번에도 그녀가 철수에겐평생 최고의 선생님이었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

하지만 이번에는 철수를 나타내는 이름이 조금 더 길었다 .
편지에는 ‘ Dr. 박철수 박사 ’ 라고 사인 Sign 되어 있었다 .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
그해 봄에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
철수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으며 ,

K 선생님에게 신랑의 어머니가 앉는 자리에 앉아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

그녀는 기꺼이 좋다고 화답했다 .


그런 다음 어찌 되었을까 ?

그녀는 가짜 다이아몬드가 몇 개 빠진 그 팔찌를 차고 ,
어머니와 함께 보낸 마지막 크리스마스에 어머니가 뿌렸었다는 그 향수를 뿌렸다 .

 

이들이 서로 포옹하고 난 뒤 이제 어엿한 의사가 된 박철수는 K 선생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

" 선생님 , 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

그리고 제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

 

K 선생은 또 눈물을 흘리며 속삭였다 .
“ 철수 너는 완전히 잘못 알고 있구나 !
내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바로 너란다 .

내가 널 만나기전 까지는 제대로 가르치는 법을 전혀 몰랐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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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이 , 아니 이 이야기가 꼭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

누군가를 믿어주고 칭찬해준다면 어른일지라도 분명 큰 일을 해내리라 믿습니다 .

 

내 입술이라고 상대방을 내 잣대로 판단해 배우자를 , 자녀들을 ,

또는 주변의 사람들을 함부로 비난하지는 않았는지 ?

K 선생님을 보며 ,다시 한번 나를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

 

" 격려는 귀로 먹는 보약이다 ! "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 "

 

우리 모두 이 시간이후부터는 남의 말을 좋게 하십시다 .
상대를 좀 더 이해하고 격려하고 북돋우고 칭찬해 주십시요

아울러.. K. 선생님께선 저히 초등학교 선생님이 셧 습니다.

올해 70순을 바라보고 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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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동지'를 꿈꾸며...(김진숙지도위원 편지글)

http://bsnodong.tistory.com/m/post/30

 

 

집회도 없고 수련회도 없는 휴일은 외려 잠이 일찍 깨요.
아무 일도 없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언제부터 저는 평화가 실감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걸까요.

아무 일도 없는 이상한 토요일.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 화면에 뉴스속보가 뜨는군요.


“노무현 전 대통령 뇌출혈로 입원”


검찰조사가 시작되면 입원으로 시작해서

휠체어나 마스크가 구명보트처럼 등장하는 꼴을 늘 봐오긴 했습니다만
당신은 그런 쇼를 할 사람은 아닌지라 스트레스가 어지간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10 여분 후 “노무현 전대통령 사망한 듯”이라는 자막이 뜨고

그제서야 뒹굴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날이 일구 우일구하기 여념없는 시시껍절한 방송이 중단되고 속보가 이어지더군요.
경호원, 사저뒤편, 부엉이 바위, 세영병원, 양산부산대병원, 심폐소생술, 열상 따위의

일상과 밀접하지 않은 단어들이 바퀴벌레처럼 툭툭 튀어나와 소름을 돋게 했습니다.
정신적 공황상태까진 아니었지만 불면 탓으로 약간 멍한 채로 이틀을 보냈고

월요일 아침 부산역까지 가긴 했으나 조문은 못하고 역 광장을 몇 바퀴 빙빙 돌다 왔습니다.

선뜻 신발을 벗고 절을 하는 문상객들의 거리낌없는 몸놀림이 참 부럽다고 생각하며.
잠이 안오대요.


다음 날 다시 부산역엘 갔습니다.
역 광장을 또 빙빙 돌다가 그냥 돌아가면 다시 닥칠 불면의 밤이 성가셔
문상객들의 뒤에 얼른 붙어 섰습니다.
방명록에 몇 줄 쓰기도 했습니다. 잠을 자야하니까.


“오랜 세월 동지였고 짧은 시간 적이었습니다.
90년 변호사 접견 오셨을 때처럼
봉하마을 어딘가에 앉아 각자의 위치가 만들어 낸
그동안의 원망과 미움들을 두런두런 털어낼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곧..
고맙고 죄송합니다.“
 
90년. 제가 첫 징역을 살 때였습니다.
접견을 오셨었지요.
보통 변호사 접견은 재판 전날 와서(사실 재판 전날도 안 오는 변호사도 많습디다만)
재판절차를 일러주고 이빨도 맞추고 하는데 재판날짜와는 아무 상관없는 시기였던지라
많이 의아했던 만큼 20년 전인데도 이리 생생하네요.


접견실에 먼저 오셔서 기다리시더군요.
보통은 재소자들이 한 시간 이상씩 주리를 틀면서 기다리는데.
요샌 교도소 반찬이 뭐가 나오냔 얘기, 여사에선 뭐하고 노냐는 얘기,

변호사가 해주던 징역살이 얘기, 남사에선 뭐하고 논다는 얘기,
법무부 시계도 가니까 재밌는 놀이를 많이 개발해서 징역을 잘 깨라는 얘기.
변호사가 접견을 와선 재판이야긴 한마디도 없이 노닥거리기만 하다

그 더디기로 유명한 법무부시계가 세상에 한 시간이나 흘렀습니다.

 

“가야겠네” 일어서시길래 하도 황당해서 물었습니다.
“왜 오셨어요?”
“진숙씨 징역살이 힘들까봐 놀아 줄라고 왔지요”

 

그리고 당신은 정치권으로 갔고,
정치권으로 갔다는 건 권력을 탐하는 변절로 규정하는데 한치의 주저함도 없었으니
변호사 비용을 거침없이 떼먹고도 사기꾼의 돈을 떼먹은 것 마냥 일말의 부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복직하면 갚으마. 유전 발견하면 갚으마.

보물선 찾는대로 갚으마. 막연한 약속이 선임비였던 시절이었으니.
그게 인권변호사의 당연한 책무였으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상실감이었어요.

 

그 시절 당신은 우리들의 유일한 빽이었는데.
공돌이 공순이 편을 들어주는 가장 직책 높은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있어 우린 수갑을 차고도 당당할 수 있었는데.


그때 직감적으로 생각했어요.
이제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겠구나.
재판장 앞에서 수갑을 찬 채 잔뜩 주눅 든 우리를 향해, “피고인은 무죕니다.”
외쳐 줄 사람이 이젠 없겠구나.
이제 재판에서 지더라도 찾아가 울 데도 없겠구나.
노동자들이 그들의 부엉이바위인 크레인 위에 올라갈 때 따라 올라가지도 않겠구나.

 

그리고 당신을 잊었습니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없어서 혼자 진행했던 1심 재판에서 당연히 지고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왜 항소를 안했어요?” 라는 질문에 “항소가 뭔데요?” 라고 되묻던 저에게
“노동자가 항소를 알면 그건 노동자가 아니지.” 하던 말도 잊었고,
노동자도 이론이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며 함께 했던 소모임도 잊었고,
군사정권 시절 해고된 노동자의 그 막막한 눈빛을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유일하게 내 얘기를 그대로 들어주던 무료법률 상담소도 잊었고,
어느 날은 밤에 오라 길래 밤에 찾아갔더니 그날이 전태일이라는 노동자의 기일이라고
변호사 사무실 구석에 조촐한 제상을 차려놓고 아무 말도 없이 유령들처럼 절을 하던
그 뭉클하던 밤도 잊었고,
함께 같은 거리를 달리던 6월 항쟁도 잊었고,
최루탄 가루가 싸락눈처럼 내린 범냇골 국민운동본부 옥상에서 막걸리를 나누던 걸판지던 뒤풀이도 잊었습니다.

 

그리고 침례병원이 초량에 있을 때였습니다.

노동조합 조합원 교육에 초청을 받았는데 앞 시간 강사가 당신이었더군요.
당신은 내려오고 나는 올라가던 계단에서 마주쳤습니다.
난 참 어색하기가 짝이 없습디다.
그냥 모른 척 할라고 했습니다만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지요?”
굳이 손까지 내미시더군요.
그때 대답을 했거나 웃기라도 좀 했으면 지금 잠을 이루기가 좀 쉬웠을까요.
 
그리고 당신이 출마한 대선에서 전 4번을 찍었습니다.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외포리를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생 1번을 벗어난 적이 없는
큰언니가 전화를 했더군요.


“이 노무헤니가 그 노무헤니지? 니 벤호사. 그 사람 찍었다.

너 인쟈 깜빵 안가지? 복직두 되갓지?”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제가 왜 “내 변호사”를 놔두고 4번을 찍었는지 우리 큰언닌 죽을 때까지 이해 못할 거예요.
2번과 4번의 극심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도 이리 막막한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그 미세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은 저의 재주로는 난망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뻐서 우는 사람도 있습디다만

이회차이가 당선된 거보다 노무혀이가 당선된 게 노동자들에게는 더 힘들 거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고립은 깊어졌고 고착화되었습니다.


김영삼이가 당선되었을 때 운동권이 1/3이 떨어져 나갔고,

DJ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른바 재야가 사라졌고,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서는 그야말로 오롯이 노동자들만 남았습니다.


한 사업장에서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해고될 때 그 무지막지한 자본을 향해 호통쳐주는 어른 하나 없습디다.
노동자들이 핏발 선 눈으로 거리로 나설 때 역성들어주기는커녕 죄 우리만 나무랍디다.


그거 아세요.

당신은 조중동이랑 열심히 싸우셨습니다만 우리에겐 조중동이랑 한편처럼 보인 거.

 

 “야~ 기분좋다!” 시며 봉하로 가셨을 때 오리농법보다 더 중요한 일은 농민들의 삶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왜 목숨 걸고 한미 FTA를 반대했는지.
그리고 전용철, 홍덕표 그들의 죽음에 당신이 늦게나마 사과를 하면 참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봉하마을을 갔을까요. 아마 갔겠지요.
그리고.. 김 주익 얘기도 했을까요. 아마 그 얘긴 못했을 거예요.
말로 꺼내긴 크나큰 상처였으니까.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 말씀.


유난히 노동자들에겐 가혹하셨습니다.
2003년도 한진중공업에서 저는 한꺼번에 두 명의 지기이자 동지를 잃었습니다.
김 주익은 600여명 조합원의 명퇴에 맞서 2년을 싸웠고 노사가 합의를 했고
그 합의를 회사가 번복을 했고 그래서 크레인에 올라갔고 그 크레인 위에 129일을 매달려 있다가
아시다시피 목을 맸습니다.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런 시대는 정말 지났을까요.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에게 종종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조각인 것을..

 

저는 당신을 부정한 게 아니라 당신을 넘어서고 싶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지배가 없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시대에 그 꿈은 가장 허황되고 지리멸렬해졌습니다.
때론 우리가 품은 꿈이 너무 초라했고 궁색했습니다.


당신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짤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으로 격상됐고 그들은 언론과 자본은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조차 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기주의를 꾸짖으십디다만 동료가 수백 명씩 짤리는 걸 목격한 노동자가

비정규직에게 내밀 손이 남아 있겠습니까.
저 살아남는데 써야지.

 

징역을 살 때 만난 사형수가 있었어요.

이 여잔 영치금이 한 푼도 없는 개털이었는데
새로 신입이 들어오면 아주 불쌍한 표정으로 샴푸나 속옷을 사달라는 거예요.
출소한 사람들이 쓰다만 물건들도 다 그 여자 차지였죠.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이 사소한 물건에 집착하는 게 도덕의 눈으로 보자면 참 추접스럽습디다.
그 여자 집행되고 보니 샴푸나 속옷 나부랭이가 구석구석에서 쏟아져 나옵디다.
백분의 일도 못쓰고 죽었죠. 생에 대한 나름의 집착이었던 거죠.
샴푸 생길 때마다 빌었겠죠. 이거 다 쓰고 죽자.


정규직 노동자들은 삶의 벼랑에서 그런 심정으로 잔업하고 철야를 합니다.
얼마가 남았을지 모를 정규직의 삶을 그딴 식으로 저축하면서.


그 무렵쯤이었을 거예요.
변호사비용을 이제 그만 갚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당신의 시혜나 은전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적이 될 거라면 호적수이고 싶었습니다.
실력도 한참 모자라고 열정도 전만 못하고 진정성마저 잃어 그리 되진 못했습니다.
그게 참 부끄러워요.


똑똑한 사람들은 다 떠나 우리를 속속들이 아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되었고

남은 자들은 동네북이 되어 초딩들마저 두들겨대고 천덕꾸러기가 되어

크레인엘 올라가고 굴뚝엘 기어 올라가도 언놈 하나 눈길주는 놈이 없어졌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고등학교 밖에 못나온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입 달린 사람은 죄다 침이 마릅디다만
고등학교도 못나온 저 같은 노동자들은 당신의 시대에 대부분 절감해야 할 원가가 되어
구조조정 당했고 효율화를 위해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차라리 군사독재 시절엔 대드는 노동자만 짤렸으나 당신의 시대엔 남녀노소가 짤렸습니다.
서민의 벗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부자와 빈자의 간극은 훨씬 더 까마득해졌습니다.
당신이 변호사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24년의 세월 동안

전 아직 복직도 못한 해고노동자로 찌질한 50대가 됐습니다.


생각해보니 짧은 시간 동지였고 오랜 세월 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뜨겁고 바른.
만고 씰데없는 소립디다만 그래서 대통령 같은 거 하지 말았으면 참 좋았겠단 생각
지금도 해요.

 

불안하고 불길한 기운으로 떠돌던 예감이 당신의 죽음으로 확연해집니다.
한 시대가 갔다는..

이제 상고출신이 변호사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양양한 가도가 보이고 그 길을 편하게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의 있습니다!”
외칠 때, 그 외침에 뒤돌아보는 사람도 이제 더는 없을지도 몰라요.

 

만 명이 울어주면 천국에 간다했던가요.
천국에 가셨을 거라 믿어요. 진심으로.


김주익 곽재규 배달호 김동윤 최복남 이용석 이해남 이현중 정해진 하중근 박수일 허세욱..
당신의 시대에, 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서러움으로 억울함으로 목 놓아 울었던
죽음들입니다.

당신처럼 벼랑 끝에 내몰렸던..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죽음을 당신이 이해해주길 바란 적이 있었어요.
하도 야속해서. 노동자의 삶을 안다는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있나 너무 미워서.
아무리 야속하고 미워도 그런 바람은 품지 말걸 그랬다 싶어요.
애증도 부질없어 졌습니다.

언젠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말들이 기형도의 시처럼
떠돌다 때때로 부딪히겠지요.


이제 변호사비용은 영원히 안 갚아도 되게 생겼습니다.
다음 생에 오실 땐, 너무 똑똑하게 오지 마시구려.
사법시험 같은 것도 합격하지 마시구요.

그냥 태생대로 기름밥 먹는 노동자로 만났으면 해요.


저는 당신에게 변절이라 손가락질 할 일 없이,

당신은 절더러 경직되었다거니 세상을 모른다거니 한심해 할 일 없이.

떠날 일도 보낼 일도 없이 그냥 내내 동지로.
그래서 언젠가 하셨던 말씀대로 자본가가 지는 해라면 노동자는 뜨는 해다.
그 멋진 말씀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 남다른 정의감 그대로 만날 수 있길.
다시는 미워할 일도 상처 받을 일도 이렇게 미어질 일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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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신부의 1910년대 대한민국 사진◈  






차 한국방문 1925년 5월14일 ~ 10월2일

베버 신부는 한국에 대해
"내가 그렇게도 빨리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나라였다." 라고
고백 했습니다. 1925년 촬영된 영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는
한국에 대한 한 독일인 선교사의 지극한 사랑과 연민의 기록입니다.

베버 신부는 직접 영화에 출연해 당시 영화를 보는 독일인 관객들을 위해
칠판에 지도를 그려가며 한국을 유럽의 이탈리아 반도와 비교해서 묘사
하기도 했습니다.
 

 1925년 수도 서울 시가지의 모습 



혜화문(동소문) 태조 1397년 건립, 일제강점기 전차공사 중 헐렸다.




1925년 북한산의 모습


1925년 북한산의 모습


1925년 서울 도성 성곽 모습

베버 신부는 서울이 오목한 분지이고 희고 단단한 성곽이 능선을 따라서
산으로 기어 올라가는 것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산을 구름속에 솟아 있는 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서울의 마을들이 주로 산 밑에 모여 있는 것을 주목 했습니다.
그리고 쌀을 좀 더 많이 재배하기 위해서 넓고 좋은 땅은 농토로 삼았고
집은 비좁은 산 비탈에 잡았다고 분석했습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인들은
"자연과 더불어 살며 하루 종일 자연과 함께하다가 석양을 뒤로 하고
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고, 자연을 정복하기 보다
그 찬란함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꾼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의 문화를 존경했습니다.
독일 민족이 아직 숲에서 뛰어 다닐 때 한국은 이미 고도의 문화를 가진
민족이라 여겼습니다. 그에게 감동을 주었던 한국 '문화' 그 중에 하나는
'효도' 입니다. 천년 이상 지속된 유교전통에 따라 복종과 순종 그리고
권위에 대한 인정은 한국인들이 태어나면서 배워오고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조상과 어른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삶의 일부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깊은 감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가족에 대한 책임과 사랑은
그를 사로 잡았습니다.





















 


베베 신부는 한국의 농경 문화에 주목하면서
특히 품앗이라는 노동 형태에 매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계 어디어서도 볼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공동체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노동을 통해 성숙된 공동체문화'

이는 카톨릭 공동체에 거대한 뿌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베버 신부는 일본의 신민지 폭력성 앞에서 아름답고 고귀한
한국의 공동체 문화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1925년 금강산 장안사, 6•25 전쟁 때 완전히 불에 타 사라지고
지금은 축대, 비석 등만 남아 있다.


1925년 금강산 장안사 승려들의 모습


1925년 금강산 장안사 대웅전

베버 신부 일행은 1925년 6월초 약 열흔간의 일정으로 금강산을 여행합니다. 
그리고 금강산 장안사의 가람의 배치와 명칭에 대해 정확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웅전의 화려한 장식을 보고 마치 마법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제단을 덮고 있는 우아한 지붕, 그것은 수없이 많은 붉은 나무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력적으로 짜 맞춘 것입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의 사찰이야말로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록 한국이 유교 국가였지만 민중의 삶에는 불교 문화가
훨신 강력한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가 보기에 불교는 한국의 역사에서
역사와 민중의 편에 가까이 있었습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을 떠나면서
그는 "1911년에는 내가 그리도 빨리 사랑에 빠졌던 한국과 이별할 때
작별의 아픈 마음으로 '대한만세'를 불렀다.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한국과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함께 가져오게 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예술가였고, 문학가였으며 겸손한 목자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
그는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1956년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사랑과 연민의
기록은 먼 세월을 돌아 우리의 곁에 와 있습니다.


역사스페셜

만주대탐사 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1908년 중국 청나라 선통황제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역사에 마지막 형제였다. 중국 혁명 후 그는 친일 전범자로 법정에 선다(1959년 중국 푸순 전범 재판소). 황제의 본명은 아이신줘러 푸이였다. 아이신줘러, 아이신줘러.

 

아이신줘러. 즉 애신각나. 이것은 청 황실의 성씨입니다. 성이 꽤 길죠. 그런데 이 아이신줘러에는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중국 동북아를 꿰뚫는 역사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골타와 누르하치, 이 이름들을 기억하십니까? 아골타는 여진족으로 1115년 금나라를 세운 금 태조이고요, 누르하치는 또한 여진족으로 후금, 그러니까 청나라를 세운 청 태조입니다. 오늘 우린 그동안 북방 오랑캐 정도로만 여겨져 왔던 여진족 혹은 만주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역사 속의 비밀을 풀어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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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펑은 중국 역사상 가장 문화가 발달했던 송나라의 수도였다. 천백 년 대, 카이펑은 인구 50만의 국제 도시였다. 로마나 유럽의 도시들이 인구 4, 5만의 불과하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국제도시 카이펑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청명상하도. 당대 최고의 화가 장택단(張擇端)이 화려한 카이펑 시가를 그려 송황제 휘종에게 바친 중국의 보물이다. 넘치는 물산과 활기찬 수도 카이펑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광적으로 예술을 사랑했던 휘종 황제 후원아래 문인 예술가들은 절정의 중국 문화를 표현했다. 그러나 카이펑의 치욕적인 한족의 역사가 서려 있다. 천백 년대, 중국 송나라는 북방민족 거란이 세운 요나라와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만주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만주에 살던 여진족도 거란의 지배를 받았다. 그들 중 거란족에 직접 지배를 받던 여진족을 숙여진이라 하고 송화강 동쪽에 거주하며 거란의 간접 통치를 받던 여진족을 생여진이라 했다. 중국 하얼빈 인근 송화강 유역에서 유목과 농경을 하던 완안 여진족도 거란의 간접 지배를 받던 생여진 중 하나였다.

 

 

일찍부터 북방에선 ‘여진족이 일만 명 뭉치면 대적하지 말라’고 한 말이 있었다. 그래서 거란족은 철저히 여진족을 뭉치지 못하게 경계했다. 그러나 완안 여진족은 거란의 통제속에서도 서서히 힘을 결집하고 있었다. 1114년 일 만의 여진족이 요나라 십만 대군을 하얼빈 인근 출하점에서 대파하는 사건이 벌어진다(1114년 팔리성 전투). 하루 밤새 만주의 질서는 뒤집어졌다. 출하점 전투의 주역은 바로 완안 여진의 지도자 아골타였다. 1115년 아골타는 곧바로 금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다.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킨 아골타는 한족의 북방 저지선인 만리장성을 넘어 바람처럼 남진한다. 금나라 군대는 순식간에 황하를 건너 한족의 나라인 송의 수도 카이펑으로 밀려들었다. 놀란 송황제 휘종은 화친을 제의하지만 끝내 수도 카이펑은 금군에 점령당한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한족의 심장부인 중원을 이민족에게 내주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1127년 송나라 수도 카이펑 함락).

 

 

 

정강지변(靖康之變). 휘종과 흠종 부자는 여진족의 포로가 되는 참담한 신세가 됐다. 이것이 한족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 정강의 변이다.

 

왕우량 교수 / 중국 다렌대학

"1127년의 정강지변은 중국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북방민족, 즉 중국동북지방의 여진족, 작은 민족이 요국을 멸망시킨 후 다시 중국역사상 강대한 왕조인 송 왕조를 멸망시킨 사건입니다. 이때부터 북방민족은 중원의 통치자가 되고 북방민족이 북경을 기초로 정치통치 중심이 되는 기반을 닦습니다."

 

 

한족의 심장부를 점령한 여진 추장 아골타. 아골타는 금을 건국한 후 황실 성을 완안씨로 정한다. 금태조 아골타의 정식 이름은 완안 아골타다. 송을 정벌할 때 금나라 군부의 핵심 인물은 아골타의 넷째 아들 완안올출(完顔兀朮)이었다. 황제가 이민족에게 잡혀간 충격 때문에 정강의 변은 중국에서 영화나 드라마(‘팔천리로의 雲月’)에 단골 소재가 됐다. 완안올출도 주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진우주. 그런데 아골타의 아들 완안올출을 진우주 즉 우리말로 김올출로 부른다. 완안올출을 왜 김올출이라 부를까? 금나라 왕자의 성이 완안이 아니고 왜 김씨일까? 중국 서부 깊숙한 곳 감숙성의 경안현엔 뜻밖에도 완안 성씨의 여진족들이 동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직계조상이 금태조 아골타의 넷째아들 완안올출 즉 김올출이라 했다. 왜 금황족의 후손들이 만주와 정반대의 땅인 이곳에 살고 있을까?

 

 

아직도 가족공동체를 유지하며 척박한 환경 때문에 밭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현대식 집을 짓긴 했지만 감숙지방의 전통적인 주거 형식인 토굴생활도 병행하고 있었다. 오지의 정체를 숨긴 채 오천 여명의 완안씨들은 씨족 공동체를 이뤄 팔백여년동안 이어오고 있었다. 이들은 천백사십년대에 김올출 즉 완안올출의 아들이 금황실 내부 정쟁에 휘말려 살해되자 이곳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역대 금황실의 황제와 형제들을 그린 선인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완안 청베이 / 완안 올출 후손

"김올출은 금희종이 즉위하도록 돕고 해령왕을 배척했습니다. 희종이 황제가 되었지만 해령왕이 희종을 살해합니다. 해령왕은 희종을 죽인 후 김올출의 후손을 죽이려합니다. 김올출의 아들 완안헝은 해령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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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도 완안올출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김올출이라 부른다. 명절이면 전부족이 모여 제사을 지내는 완안씨 사당엔 역대 황제와 자신들의 선조인 완안올출의 비가 있었다. 완안올출의 비에도 역시 김올출이라는 이름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왜 자신들 선조의 성을 완안씨라 하지 않고 金씨라 부를까?

 

완안 청베이 / 완안 올출 후손

"학술계에서는 아직 확정을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김올출의 성은 금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성이 김이고 이름이 올출입니다."

 

후손들도 오래전부터 그냥 김올출이라 불러 왔을 뿐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만주에서 감숙까지의 거리만큼이나 기나긴 역사의 비밀이 ‘쇠 금’자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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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주. 즉 김올출. 중국 금나라의 왕자가 김씨 성이라고 하니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김씨 성은 우리나라에서야 가장 흔한 성씨입니다만 중국에선 대단히 드문 성입니다.

 

 

 

중국 대륙에는 워낙 많은 왕조들이 흥하고 망해서 상당히 헷갈립니다. 잠시 중국과 만주의 역사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668년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30여년 후인 698년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이 옛 고구려 땅에 발해를 건국합니다. 그러다가 926년 거란족이 이 발해를 멸망시키는데요. 거란족이 요즘 우리가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볼 수 있는 요나라를 세운 사람들입니다. 이때 여진족은 요동에서 살고 있었는데요. 아골타라는 영웅이 등장하면서 1115년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를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금나라는 곧바로 한족의 나라인 송을 침략해 중원 대륙을 초토해 시키는데요.

 

이 한족의 본거지인 중원대륙은 이때부터 북방 이민족들에 의해 농락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 아골타의 선조들이 상당히 흥미로운 사람들입니다.

 

 

 

강화도 마니산. 이곳엔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의 뿌리와 정기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 이 개천각은 민족운동가였던 이유립 선생이 설립해 24분의 우리나라 위인을 모시고 있다. 환웅천제, 치우천황, 단군왕검, 고주몽, 대조영 등을 모시고 봄, 가을 두 번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곳엔 금태조 아골타가 모셔져 있다. 여진족인 아골타가 왜 우리나라 위인들과 나란히 모셔져 있을까?

 

 

구한말 역사학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박은식 선생은 금태조 아골타를 꿈에서 만났다는 ‘몽배금태조’라는 글을 남겼다. 그런데 이글에서 대금국 태조 황제는 우리 평주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역사학자가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중국 하얼빈 근교에 아청시는 금나라의 수도인 상경회령부가 있던 곳이다. 제국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여진족 아골타는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아청엔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그런데 여진족의 전통가옥이 눈에 익다. 짚을 섞어 쌓은 흙벽과 가로지른 석까래는 우리나라 옛 시골집의 구조를 닮았다. 한켠엔 볏짚으로 이은 행랑채와 재래식 화장실이 있고 텃밭도 있다.

 

한족들의 가옥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구조다. 집 내부는 우리와 같이 온돌을 이용해 난방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가시간이면 모여서 전통방식의 겨루기를 즐긴다. 그것은 씨름이었다. 경기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씨름과 대단히 흡사하다. 이 또한 한족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놀이다. 옛날 우리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말도 문자도 잃어버리고 이젠 만족이라 불리는 여진족의 후예들. 이들의 조상인 금태조 아골타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베이징의 수도 도서관은 중국 최대의 도서관이다. 특히 이곳의 고문헌 자료실엔 각종 고서들이 보관돼 있다. 그런데 사서 중에 금황실의 가계를 기록한 송막기문이란 책을 볼 수 있었다. 여진족 금나라에 쫓기던 송은 양자강 건너 항적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포로도 잡혀간 황제의 귀환을 위해 1129년 금에 홍우를 파견했다. 송막기문은 남송의 홍우가 10년 동안 금나라에 머물며 기록한 당대의 생생한 증언이다.

 

 

 

그런데 송의 사신 홍우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여진 추장은 신라사람’. 뿐만이 아니다.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엔 자신들의 황실 뿌리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형 아고네는 고려에 남고 둘째인 금해 시조와 동생 보할리는 여진으로 왔다는 것이다. 이 금시조의 8대손이 태조 아골타다. 고려에서 온 금나라 시조 이름은 함보였다.

 

신라와 고려인이란 차이는 있지만, 두 사서 모두 금의 선조가 한반도에서 넘어온 것으로 기록했다. 아골타는 1068년생이다. 8대조 함보로 거슬러 올라가면 대략 9백년대 초반이 된다.

 

왕우량 교수 / 중국다렌대학

"한푸는 고려에서 왔다고 말하거나 고려 전의 신라에서 왔다고 말해도 무관할 것 같습니다. 왕건이 이미 고려를 세웠고 신라는 멸망한 시기로 조선반도는 동란의 시기였습니다. 여기서 왜 함보가 이동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록으로 봐서 한 사람만 왔을 리 없습니다. 분명히 가족 또는 자신의 씨족이나 부락을 데리고 왔을 겁니다. 이것이 민족의 이동이었습니다."

 

신라 말 고려 초의 격동하는 정세 속에 한 무리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동한 것이다. 그 뿐 아니다. 중국 수도 도서관 고(故)문헌실에선 금나라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들을 속속 확인할 수 있었다.

 

 

흠정 만주 원류고는 1600년대 초반 여진족이 세운 또 하나의 나라 청나라의 공식 역사서다. 이 책엔 금의 국호에 대한 설명이 있다. 금은 신라 김씨에서 유래했고 국호도 이를 딴 것이며 그 외의 주장은 근거 없다고 단호하게 정리했다.

 

김위현 명예교수 / 명지대 사학과

"지금 새로운 주장이 아니고 이미 9백여 년 전에 정사에 나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한반도에서 넘어갔던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주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기다 아니다’ 하는 논란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북만주에서 바람처럼 일어나 중국 대륙을 제패했던 여진의 영웅 아골타. 그의 8대조는 고려 초의 한반도에서 넘어간 사람이었다. 천년 넘는 역사의 저편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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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같은 이야기만 엄연히 중국 정사에 기록돼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겠죠. 이 내용은 앞서 본 송막기문, 금사, 흠정만주원류고 뿐만 아니라 금지(金志), 삼조북맹회록(三朝北盟會編) 등에도 줄줄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민족으로는 최초로 중국대륙을 장악하고 한족 황제를 포로로 잡았던 여진족. 그들의 선조는 한반도로부터 왔고 그들의 성씨는 김씨였다, 어떻습니까? 갈수록 흥미진진해 지는데요. 금태조 아골타의 선조인 의문의 사나이 김함보.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신라의 왕릉은 모두 신라 수도였던 경주에 있다. 그런데 유일하게 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의 무덤만이 이곳 경기도 연천에 있다. 왜 신라 왕릉이 경기도에 있을까? 후삼국 말기 고려의 압박에 경순왕은 신라 천년 사직을 고려에 넘기기로 한다. 그러나 마의태자는 천년 사직을 고려에 넘기는 것에 대해 결사반대했다.

 

"왕자는 울면서 하직하고 떠나 곧바로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9년

 

 

그렇게 신라 천년 사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엔 특이한 지명이 있다. ‘다물’. 다물은 빼앗긴 나라의 광복을 뜻한다. 이곳 강원도엔 무슨 나라가 있었다는 것인가? 그런데 금강산에서 쓸쓸하게 죽었다는 마의태자의 행적에 의문을 품게 하는 유적들이 이곳 인제에 있다. 왜 마의태자 유적비가 여기 있을까?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엔 수백 년 된 대왕각이란 사당이 있다. 매년 김부리 사람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대왕각엔 마의태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인제 인근 곳곳에 남아 있는 마의태자 관련 유적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신라인들이 고려에 저항했음을 보여 준다.

 

박성수 교수 / 한국학 중앙연구원

"천년이나 되는 신라가 아무 저항 없이 망했다고 하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신라의 화랑들이 그대로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의태자가 반대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반대해 가지고 신라의 저항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강원도 인제 유적들이 있죠."

 

 

고려에 항전하던 일단의 반 고려세력들. 그들과 금나라 황실의 시조가 된 김함보는 어떤 관계일까? 고려사에는 금의 시조에 대한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평주의 승려인 금준이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금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혹자는 평주 승려 김행의 아들 극수가 금의 선조라고도 한다.”

 

 

그런데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과 같은 이름이 등장하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1636년 김세렴이 일본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남긴 <해사록>이란 책엔 놀라운 기록이 나온다. 경주에 들린 감회를 쓴 대목이다. 조선 유학자가 여진족 아골타를 경순왕의 외손이자, 안동권씨 시조인 권행의 후손이라 했다.

 

 

 

아골타의 선조 함보는 김씨인데 왜 권행의 후손이라 했을까? 서기 930년 고려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은 안동 병산에서 대혈투를 벌인다. 이때 안동의 권행과 김선평, 장장필, 세 사람이 왕건을 도와서 고려군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왕건은 이 세 사람에게 태사의 직위를 내리고 김행에겐 권씨를 하사했다. 이로써 김행은 안동 권씨 시조인 태사공 권행이 됐던 것이다.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이 안동의 김행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권행은 본래 경주 김씨였다. 그런데 태사라는 최고의 직위를 받은 권행과 그의 후손들은 이후 백년 넘게 고려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

 

박성수 교수

"'신라에 대한 충성심, 후백제의 공격을 막고 어디까지나 신라를 위해 싸운 것이지 왕건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그가 왕건의 벼슬을 하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김함보는 누구인지 명확치 않지만, 그는 김씨 출신의 신라 광복군으로 추정되며 그가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선조임은 명확해졌다.

 

김위현 교수

"김함보는 신라 왕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신라가 망하고 김함보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반고려 세력들이 동해안을 거쳐서 두만강을 건너가지고 여진 지역에 옮겨 간 것으로 추론이 됩니다."

 

격동의 시기 망국의 한을 품고 북으로 올라간 김함보와 그의 무리들. 그들에겐 새로운 땅, 드넓은 만주 벌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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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 김함보의 후손들이 만주를 통일하고 나아가 한족의 본거지인 중국대륙을 장악했다. 이 북방민족인 만주에 중국이 흡수된 형국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여진족은 읍루, 말갈, 물길, 숙신, 주신, 여직, 여진 그리고 만주족으로 등장합니다. 부여와 고구려, 발해의 주요한 구성원들이었고 우려 역사에 한 축을 이루던 사람들이 바로 여진족입니다.

 

이 금사에 따르면 김함보가 여진족의 땅으로 들어갈 당시 여진의 각 부족들 사이에서는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함보가 우마변상법이라고 하는 일종의 성문법을 제정하고 각 부족으로부터 합의를 이끌어 내자, 그 지도력을 인정받게 되죠. 이 이후 그의 후손들은 완안 여진뿐만이 아니라 전체 여진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7세손의 이르러서는 영토가 간도에까지 확대되죠. 그리고 1102년엔 고려로 사신을 보냅니다. 그런데 아골타가 이 여진족의 지도자가 되기 직전 고려와 대충돌이 일어납니다.

 

 

 

1107년 12월. 윤관 장군이 지휘하는 고려군 17만 명은 여진 정벌에 나선다. 고려군의 상대는 김함보의 후손들이었다. 김함보가 여진족의 지도자가 된 지 150여년 후 팽창하던 여진족은 함경도 인근에서 고려와 잦은 충돌을 벌인다. 이 그림은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북경비를 세운 장면이다.

 

 

 

윤관 장군은 이 전쟁에서 동북 9성을 확보하고 최북단인 공험진에 북경비를 세웠다. 고려의 북쪽 국경선인 공험진은 어디였을까? 일제강점기 때부터 공험진의 위치는 함경남도 일대도 알려져 왔다. 그러나 윤관이 국경비를 세운 공험진은 함경도 종성에서 북으로 7백리 지점이라고 돼 있다. 세종 때 실측한 이 지도(‘조선국회도’를 말함.)를 보더라도 공험진은 함경북도 종성의 북쪽이고 두만강 너머에 있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공험진 비는 이곳 중국 지린성 옌지시 인근에서 발견됐다는 기록만 전해져 올 뿐 행방은 알 수 없다. 조선국회도와 북관유적도 등을 종합해 볼 때 공험진은 이곳으로 추정된다. 여진은 자신들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였던 간도지방을 고려에 빼긴 것이다.

 

 

 

다급해진 여진은 고려의 동북 9성을 돌려달라는 서신을 보낸다. 당시 여진 추장은 아골타의 형 오아속이었다. “일찍이 우리 선조(여진)가 대방 즉 고려로부터 나왔으니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옛 땅을 돌려주시면 기왓장 한 장 던지지 않겠습니다(고려사 예종 4년).”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부르고 있다. 1115년 금 황제가 된 아골타도 여진과 고려는 형제지간이고 역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했다. 금나라에게 고려는 선조들이 나온 부모의 나라였던 것이다.

 

왕우량 교수

"동일한 언어, 동일한 지역, 동일한 문화가 있습니다. 이 각도에서 보면 고려와 여진 사이의 전쟁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을 겁니다. 물론 전쟁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 할 수 없었습니다만 그들은 거란이나 몽고와 다릅니다. 거란과 몽고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민족 공동체입니다. 그들에게는 혈연상, 역사상의 유대관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여진인과 조선반도의 신라인 나중의 고려인은 민족공동체가 되었습니다. "

 

 

금나라 오경 중 하나인 동경성이 있었던 요양. 이곳에서 1985년 우연히 한 점의 비가 발견됐다. 비명은 덕망 높았던 한 스님의 일대기였다. 비가 제작된 것은 1190년, 스님의 성은 고씨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공이 발해인이라고 기록돼 있다. 1190년이면 발해가 망한지 무려 260년이 지난 시점인데, 아직도 발해인이다. 여진과 발해는 어떤 사이였을까?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건국했던 발해는 926년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멸망했고 발해인은 집단으로 거란의 동경과 상경 등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3백만 발해인들은 끈질긴 광복운동을 벌였다. 거란의 수도 인근에서 발생한 발해인의 반란이 2년 동안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발해인과 여진족 사이엔 반 거란이란 연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여진인과 발해인은 원래 한 집안이다.” 아골타는 거란에 맞서 봉기할 때 여진과 발해는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로 한 집안임을 주장해 발해유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다.

 

김위현

"발해, 여진 동일가라는 그런 말이 먹혀들어 갔다고 하는 것은 이미 여진과 발해 사람들 사이에는 우리는 민족적으로 친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먹혀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 베이징은 송나라 때까지만 해도 한족에겐 변방에 불과했다. 여진족은 중원을 장악한 후, 이곳에 대규모 신도시를 만들었다. 북경은 이후 중국의 중심지가 됐다.

 

 

이 박물관의 지하엔 금나라 때 건설한 대규모 수로 시설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인공으로 수로를 파서 물길을 연결한 것이다.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나무로 만든 수문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베이징의 명소인 북해공원도 이때 완성된 정원이다. 당시 베이징 건설의 총 책임자는 장호였다. 그는 뛰어난 능력으로 사대에 걸쳐 황제 신임을 받았던 발해 유민이었다. 장호 뿐 아니라 수많은 발해인들이 금나라의 고위 관료층을 형성했다. 대제국을 운영했던 발해인들에 대한 금나라의 신뢰는 단순히 혈연적인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성호 / 동양사학회, 금사 연구

"대제국을 건설, 운영해 본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금이 건국을 하고 국가체제를 확장 그리고 반석 위에 올려놓는데 그들의 경험이 상당히 필요했을 것이고 따라서 금은 이러한 발해인들을 중용해서 국가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활용했던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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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은 금나라 5대 도시였기 때문에 수많은 금나라 시대의 금석문이 남아 있다. 요양박물관 별관에 늘어선 금대의 비들 속에는 특별한 비가 한 점 있다. ‘통혜원명 대사 탑명’으로 불리는 이 비의 주인공은 관찰사 이후의 딸로 역시 발해인이었다. 남편은 아골타의 셋째 아들인 허왕이다.

 

 

 

그녀의 아들 정국공은 나중에 금 황제가 되는데 이가 바로 금의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 황제였다. 4대 황제 혜릉왕의 어머니 또한 발해인 대씨였다. 금나라 건국 후 많은 발해 여인들은 금 황실로 시집을 갔다. 이로써 발해인들은 금나라의 고위관료층과 왕비족으로 자리 잡았다. 금나라는 발해인과 여진족, 연합정권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김위현

"따라서 금나라는 발해 후손의 왕비족과 그 다음에 신라 후예인 왕족, 이게 합해져서 금나라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낳았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 역사에 한 자리 매김을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금 황실의 선조가 신라 출신이었고 국가의 지배층은 발해유민, 그리고 고려와의 우호적 관계. 여진족 금나라는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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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만주의 역사는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 그리고 신라의 후예와 발해유민이 세운 금나라의 역사가 되는데 이는 중국의 역사와는 상충되고 우리의 역사와는 맥락이 이어지는군요. 이렇게 만주와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금나라는 또 다른 북방민족인 몽골족의 원나라에 중원을 내주고 만주로 사라집니다. 북방민족인 금나라와 원나라의 삼백년 지배를 받았던 한족이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해서 중국대륙을 지배함으로써 한족의 자부심을 회복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여진족이 1616년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무너뜨리므로 중국대륙을 지배하게 되죠. 이것이 바로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입니다.

 

 

제작진은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과 관련된 뜻밖의 사람을 북경에서 만날 수 있었다. 북경 농업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그녀는 자신을 청 건륭황제의 7대손이라고 소개했다. 집안인 증조부의 사진을 비롯해 건륭제 후손들의 글씨 등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여진족의 후예들이 세운 중국 마지막 왕조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는 60여 년 동안이나 재위한 황제로 유명하다.

 

 

건륭제는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지역까지 장악했다. 지금의 중국 영역은 청 건륭황제가 이룬 것이다. 한족의 나라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만주족이 세운 청 황실의 성은 아이신줘러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성이 김씨라고 했다. 그녀의 이름은 김괄(金适)이었다.

 

김괄 / 청 건륭제 7대손

"제 할아버지 성함은 헝쉬입니다. 아이신 줘러 헝쉬요. 헝 항렬입니다. 그는 당시에 직업을 구하거나 학교를 다닐 때 김광평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김계종이고 우리는 그걸 따랐습니다. 저는 김씨입니다."

 

 

 

누루하치는 1616년 만주에서 후금을 건국한 후 랴오닝 성 심양을 수도로 정한다. 이곳 심양 광장엔 청태조 누르하치부터 마지막 황제 푸이까지 역대 청조 황제의 12사람의 좌상이 놓여 있다. 청태조의 이름은 애신각라 노이합적(愛新覺羅 努爾哈赤) 즉 아이신줘러 누르하치. 청황실의 성은 한자로 애신각라다. 고

 

 

그런데 왜 청황실의 후손인 김괄 교수는 자신의 성을 김씨로 할까? 청나라의 역사서인 만주실록엔 청황실과 만주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나온다. 자신들은 하늘의 딸인 불고륜(佛庫倫)의 후손들이며 성은 애신 즉 만주어로 ‘아이신’이라는 것이다. 아이신을 한자어로 표기하다보니 애신이 됐고 만주어 아이신의 원래 뜻은 금이다. 각라는 만주어 줘러를 한자로 차음 표시한 것이다. 뜻은 겨레, 성, 씨족 등과 같고 성씨에 붙는다.

 

김괄

"황족 안에서 우리 성은 아이신 줘러(애신각라)입니다. 아이신 줘러(애신각라)는 만주어이고, 한어로 바꾸면 금이 됩니다."

 

 

청 황실의 성, 애신각라 즉 아이신 줘러는 금 부족들, 김씨들 또는 김씨 집안을 뜻한다. 금을 성으로 삼는 여진족의 후예, 만주족들. 아이신 줘러 푸이는 금 푸이다. 경주 김씨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설화를 보자.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금 궤짝이 매달린 나무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금 궤짝이 나무에 매달려 있었고 그 밑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금궤 속에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름을 알지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성을 김(금)씨로 하였다.” -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9년

 

 

신라왕 성인 경주 김씨와 신라인의 후예 금 황실. 그 금나라의 후신인 청 황실. 그들은 금을 뜻하는 김씨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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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신해혁명과 함께 청나라는 무너지고 맙니다. 이때 중국인들이 내세웠던 구호가 멸만흥한, 그러니까 만주족이 세운 나라를 타도하고 한족의 나라를 건설하자는 얘기입니다. 결국 이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한족들은 만주와 중국이 혈연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전혀 다르다는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요즘 중국은 수천 년의 한족중심 사관을 벌이고 다민족 통일 국가론이라는 사관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즉 중국 역사는 한족이 이민족의 항쟁한 역사가 아니라 다양한 민족이 중국이라는 통일된 국가를 이루는 과정이란 겁니다. 이는 만주와 우리 역사에서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데요. 이민족인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그리고 금나라와의 전쟁도 모두 중국 내부의 갈등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진족의 역사를 돌아본 것은 단순히 신라인의 후예가 금제국을 건설했다는 민족적 우월감을 확인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벌이고 있는 역사전쟁, 즉 동북공정이 얼마나 허황된 역사관인가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항저우의 명소인 악왕묘. 항우와 더불어 중국의 양대 충장으로 불리는 악비(岳飛, 1103~1141)의 사당이다. 송 멸망 후 양자강 너머에 들어선 남송, 그러나 금나라 군의 공격은 매서웠고 남송은 위기에 빠진다. 이때 금군을 막아선 사람이 악비장군이었다. 악비는 악가군을 이끌고 곳곳에서 금군을 저지했다. 그래서 산은 흔들어도 악가군은 흔들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악비는 한족들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았다.

 

 

항저우의 송성가무쇼는 상해에서 서커스와 함께 중국인들이 꼭 보고 싶어 하는 양대 공연이다. 이 송성가무쇼의 하이라이트는 악비장군의 무용담 장면이다.

 

 

900년 가까이 악비는 중국의 민족지광으로 불리며 한족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데 악비의 무덤엔 무덤보다 더 사람이 몰리는 곳이 있다. 그것은 발가벗겨져 무릎이 꿇린 진회 부부의 동상 앞이다. 진회는 남송의 대신으로 부인과 함께 악비장군을 독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람객들은 이들에게 침을 뱉고 때리는 것을 악비의 한을 달랜다.

 

예 샤오타오

 

"송나라 이후부터 중국인은 이름에 회(檜)자를 쓰지 않습니다. 진회(秦檜), 진회 그자를 이제 쓰지 않습니다. 그 글자를 쓰면 이름에 쓰면 진회가 생각나니까요."

 

 

중국인들은 아침 식사용으로 유자고라는 음식을 즐겨 먹는다. 그런데 이 유자고에도 악비의 원혼을 달래는 전설이 담겨 있다. 유자고는 밀가루 반죽을 한 다음 두 개를 꼬아 기름에 튀겨 만드는 간단한 음식이다. 그런데 이 유자고가 악비를 독살한 진회부부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악비에 대한 한족들의 사랑은 이처럼 크고 깊다. 그런데 2002년 중국 당국은 동북공정을 시작하면서 악비가 더 이상 민족의 영웅이 아니라는 고등중학교 역사대강을 발표한다.

 

왜 중국은 민족의 영웅 악비를 갑자기 격하시키려는 것일까?

 

왕우량 교수

 

"우리는 과거에 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만을 강조했습니다. 소수민족의 역사에 대해서는 충분히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민족영웅 부분이요. 우리가 악비를 민족영웅이라고 한다면 김올출 즉 여진족의 영웅은 영웅이 아니라 변변치 못한 인간이 되는 거죠. 아니면 침략자거나. 그렇게 되면 모순이 생기는 거죠."

 

 

시안을 중심으로 한 황하 문명권에서 일어난 한족들은 전통적으로 한족 외의 민족들은 오랑캐인 이민족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만주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는 동북공정의 역사관에서는 민족의 영웅 악비가 중국 통일의 장애물이다. 어제의 민중 영웅이 오늘은 반통일 인물로 전락한 것이다.

 

김위현 교수

 

"여태까지 적국으로 보던 북방계 나라들, 이걸 자기 국사로 포괄하려다 보니까 거기에 딜레마가 생긴 겁니다. 자기네 민족의 영웅으로 받들던 악비를, 금나라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시키려 하다 보니까 할 수 없어서 부득이 수천 년 내려오던 영웅을 추락시키고 그렇게 까지 하면서 금나라 역사를 자기네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그 궁색함을 보면 동북공정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중원을 빼앗기고 황제가 포로가 되는 치욕을 한족들에게 안겨준 이민족의 나라 금나라, 더구나 금태조 아골타의 시조가 신라 후손이라는 것은 중국의 야심찬 동북공정의 역사관을 근본부터 흔드는 것이다. 잃어버린 역사, 버려진 역사, 만주. 그곳은 이제 치열한 역사전쟁으로 부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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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그동안 이렇게 명확하게 역사에 나와 있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어쩌면 우리의 의식 속에 한족은 우수하고 흉노, 여진 등은 북방 오랑캐라는 소중화사상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역사는 흥미롭고 놀라운 과거지만, 옛날이야기는 아닙니다. 지나친 아전인수(我田引水格) 격의 역사 해석은 역사를 민족 간의 갈등요인으로 만듭니다. 반면, 역사에 대한 무관심은 단순히 우리의 과거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리고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동북공정, 우리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그냥 지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정강지변(靖康之變)

 

이 사건은 1126년 금(金)이 송(宋)의 개봉을 함락시키고 휘종과 그의 아들 흠종을 만주로 납치해 간 사건을 말합니다. 정강의 변의 결과 북송은 공식적으로 끝이나고 남송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사건은 연운 16주를 차지하고 있던 요나라를 금과 송이 협공하기로 한 조약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여진인이 금을 건설하여 요를 위협하고 있다는 정보는 요나라의 망명자를 통해 송에게도 전달됩니다. 송 조정에선 이 신흥국과 연합하여 요를 양쪽에서 협공함으로써 숙원인 연운십육주를 탈환할 수 있겠다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즉시 사자를 파견하여 금과 동맹을 맺는데, 이를 '송금해상의 맹'(宋金海上의 盟)이라고 합니다. 해상에서 조약이 맺어진 이유는 송과 금 사이에 요가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피해서 바다(발해만)를 통해 사신이 오고 갔기 때문입니다.

 

조 약은 송측에서 지금까지 요에게 지급하고 있던 세폐를 전액 금나라에 주는 대신, 협공시에 하북지방은 송측이 공략하고 금은 이 곳에 진둔하지 않기로 합니다. 이리하여 양측의 군대는 남북 양면에서 요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금군(金軍)은 애초 송과 약속했던 요의 영토를 거의 점령합니다. 반면 송측에서는 요의 연경(燕京, 현재의 北京)을 공격했다가 대패합니다. 그래서 송은 금에 원조를 요청하여 1122년 결국 연경도 금의 군대에 의해 함락됩니다. 요의 황실은 몽골로 도망을 가구요.

 

애시당초 약속과 달리 송이 연경을 공략하지 못했으므로, 금에게 전쟁에 든 비용과 보상금을 요구합니다. 이에 송과 금 사이에 배상금계약이 체결되자 금은 연경을 철저히 약탈한 다음 관리와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 북으로 귀환합니다. 요가 멸망한 후 송과 금은 직접 대결하게 됩니다. 송은 배상금을 금에게 주는 조건으로 연경을 손에 넣었지만 좀처럼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차례 금을 도발하기도 합니다. 금에 복속된 요의 장수가 금의 영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선동하고 원조하기도 했으며, 나아가 요의 멸망직전에 음산산맥으로 도주한 천조제(天祚帝)와 은밀히 연락하여 금에 대한 협공을 약속하기도 합니다.

 

이 러한 배신 행위에 금의 대군은 재차 연경을 점령하고 파죽의 기세로 남하하여 개봉을 위협합니다. 이 보고에 두려워진 휘종은 황제자리를 아들 흠종에게 양위하고 황급히 남쪽으로 피난합니다. 조정에선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다투는 가운데 흠종은 어찌해야좋을지 몰라 우왕좌왕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금의 대군이 개봉을 포위하고 배상금 액수를 올릴 것, 산서의 중산(中山), 하간(河間), 태원(太原) 3개 진(鎭)을 할양할 것을 요구조건으로 내세웁니다. 송이 우선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그 요구를 수용하니 금의 군대는 일단 포위망을 풀고 북으로 돌아갑니다.

 

금군이 돌아간 후 송에서는 주전파가 조정을 장악하여 휘종을 다시 수도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3개의 진(鎭_ 할양의 약속을 거부한 후 금의 치하에 있는 거란인 들에게 모반을 부추겨 금 내부를 교란하는 계획을 추진합니다. 배반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습니다. 거듭된 배반에 노한 금은 재차 군사행동을 하고 개봉을 포위한 다음 40일간의 공성전으로 마침내 함락시킵니다. 그 두 휘종 및 흠종을 위시하여 황족과 궁녀, 관료, 기술자 등 3천 여명을 포로로 잡아 북방으로 이주시켰고, 휘종이 돈을 쏟아 수집한 서화와 골동품 및 궁중의 온갖 재보(財寶)를 남김없이 북으로 가져갑니다. 이로써 송은 일단 멸망합니다. 이 사건을 당시의 연호를 따서 '정강의 변'이라고 합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ssaumjil/LnOm/964518?docid=3652541031&q=%C1%A4%B0%AD%C0%C7%20%BA%AF&re=1

 

 

* 글의 저작권과 이미지는 KBS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사용을 금합니다.

 

 

출처 : 책을 벗 삼아
글쓴이 : 문화재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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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 만주대탐사 1부

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

 

 

만주는 이제 우리에게 잃어버린 땅입니다. 하지만 만주는 잃어버린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우리와 함께 했던 땅이기도 하죠. 이 만주 벌판 한가운데에를 흐르는 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요동과 요서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요하입니다. 최근 들어 이 요하 일대에서 고대유적들이 발견되면서 세계적으로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세계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이른 시기에 유적과 유물들이 나오고 있는 것인데요. 주목할 만한 것은 이곳에서 우리민족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간 수수께끼 같았던 우리민족의 기원에 대한 단서를 이곳에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린 자동차로만 장장 4000km를 달려서 만주벌판 요하 대장정에 나섰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아직 국가도 국경도 없던 시기, 우리 민족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었을까? 드넓은 땅 만주. 지금은 중국의 영토가 됐지만 그곳엔 우리 선조들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내몽고 자치구 적봉 시에 있는 홍산. 붉은 산이란 뜻이다. 이 붉은 바위와 황토 속엔 수천 년 전 고대 문명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1984년 중국 고고학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오천 년 전의 여신상이 발견된 것이다. 여신은 단호한 시선으로 후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 세계로 타전된 이 발굴 소식은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신점산 / 前 요녕성 문물고고학연구소장

“이곳은 중국 고대 문명 중에서 가장 이르고 선진적인 곳입니다. 시대가 아주 이르죠. 중국 고대문명은 세계적인 인도문명, 이집트 문명과 같습니다. 매우 이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홍산 문화를 정점으로 화려한 꽃을 피웠던 문명은 요하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어 일명 요하문명이라 불린다. 세계 4대 문명 중 탄생이 가장 늦었던 중국 문명은 이로써 단숨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발상지로 발돋움 하고 있다. 30여 년 동안 요하 문명을 연구해 온 이형구 교수는 이곳이 중화 민족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3주일의 준비 작업을 거쳐 2주일 동안 이루어지는 이번 탐사는 요하문명의 발굴 현장을 샅샅이 뒤지는 4000km의 대장정이었다.

 

 

 

만주벌판 서쪽을 달리는 요하. 지금은 수량이 많이 줄었지만 이 강은 요하문명을 잉태한 문명의 젖줄이었다. 여신상이 발견된 우하량은 요하 문명지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소다. 신전을 비롯해 기원전 3500년 시기에 홍산 문화 유적이 집중된 곳이다. 2006년에 새로 만든 이 여신묘의 표지석은 중국에선 이례적으로 영문표기까지 하고 있어 국제적인 위상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정작 여신묘의 입장은 강한 제재를 받았다.

 

보호시설을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일정 방문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신묘은 우하량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졌다. 이곳에서 여신상이 발굴된 것은 홍산 문화 발굴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이형구 교수 / 선문대학교

“예, 그런 당시 홍산인들의 얼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엄청난 수확이었습니다.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 지금으로부터 5500년에 이런 여신을 모신 신전(神殿)이 발견됐다는 것은 대단히 큰 사건이면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런 곳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신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수십 개의 조각이 함께 발견됐는데 이는 예닐곱 개의 몸통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조각은 사람 크기이거나 두, 세배 큰 경우도 있었다.

 

 

 

5500년 전 반 지하식 건물이었던 여신 묘엔 각 방마다 크기가 다른 여신상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통제를 받긴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한 시간을 설득한 뒤에야 어렵게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원형 및 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돌무지, 이 수수께끼 같은 유적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 변이 20미터에 이르는 이 건축물은 3단으로 쌓아 올린 돌무지무덤, 적석총이다.

 

“지금 3단이 보입니다. 3단으로 쌓아올리고 또 쌓아 올린 이번 방법.”

 

 

 

 

이런 계단식 적석총은 중원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묘제다. 바로 옆에선 27기의 석관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돼 중국학계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이런 석관묘를 쓰는 묘제가 한반도나 요동반도, 시베리아와 같은 이런 북방벨트를 따라서 분포하고 있는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묘제가 함경도로부터 제주도까지 심지어 일본까지 이런 석관묘가 발견되고 있는데 요기에서 보는 석관묘는 시베리아보다 2천년 정도 앞선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동안 적석총의 기원이 시베리아란 학설을 뒤집어 버릴 만한 엄청난 발견이었다. 무덤은 4각형, 제단은 원형으로 만들었다. 거의 허물어지고 윤곽만 남은 제단의 둘레에선 대량으로 토기 편이 발견됐다. 이곳은 무슨 용도로 사용되던 것일까?

 

 

 

흙으로 다지고 돌을 쌓아올려 만든 3단의 원형 제단을 위아래가 모두 튀인 토기가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은 하늘과 소통하고 싶었던 홍산 인들의 종교의식이었다. 기원전 3500년 거대한 적석총과 신전, 제단을 만들어 냈던 홍산 문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실하 교수 / 항공대 교양학부

“그 우하량 지역은 홍산 문화 전체에서 가장 중심적인 성소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신 묘와 천제 재단 터와 거대 적석총을 갖추고 있는 삼위일체의 구조라는 것은 이미 우하량을 짓는 이 시기에는 최소한 ‘초기국가단계’나 혹은 ‘초기문명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굉장히 중요한 유적입니다.”

 

황하문명보다 천년 이상 앞선 홍산 문화는 오천 년 전 이미 초기국가단계로의 진입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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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량은 어쩌면 홍산인들의 성지였을지도 모릅니다. 우하량 전역에서 주거지는 전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무덤과 제단과 신전들만 발굴이 됐기 때문이죠. 대체로 학자들은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성지가 건설되려면 ‘강력한 권력자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홍산인들이 기원전 3500년에 이미 초기국가단계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중국인들에게 많은 혼란을 주었습니다. 만주지역에 중원의 영향을 받아 발전해 왔다는 전통적인 중화사상이 도전을 받았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새로운 문명의 출현 앞에서 그러면 중국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요하 문명의 출현은 중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부터 황하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더 발달된 문화가 만리장성 이북지역에서 발굴됐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해관. 이곳에서 시작하는 만리장성은 총 길이 2700km에 이르는 거대한 경계성이다. 예로부터 중국은 만리장성을 중원과 변방을 가르는 북방한계선으로 인식시켜왔다.

 

이형구 교수

“중국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곳에 만리장성을 쌓아 놓고 만리장성 이남은 중화문화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만리장성 이북을 오랑캐의 소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 만리장성 북쪽에서 많은 고대문명의 유적지, 유물이 쏟아져 나오니까 중국 사람들은 이제 와서 이것을 중화문명의 시원으로 끌어들이고 있는데 이것은 자기모순이고 견강부회죠.”

 

 

 

만리장성 이북 오랑캐 땅이라고 여겨왔던 지역에서 중원보다 훨씬 더 선진적인 문명이 발견되자, 중국은 큰 충격에 빠졌다. 중국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중화문명의 기원이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이라는 이른바 다기원론을 들고 나왔다. 중국은 오랫동안 황하문명을 중하문명의 기원지로 보았지만 1970년 들어서는 장강문명, 그리고 최근엔 요하문명을 시원지로 삼고 있다. 이렇게 되면 중화문명사는 천년이나 앞당겨 진다.

 

 

 

중국 고고학계 대부 쑤빙치(1909~1997)는 한 발 더 나아가 전설 속의 인물을 끌어들여 고고학적 성과와 연결시켰다. 중국의 건국신화와 나오는 전설의 제왕이 유하문명의 꽃 홍산 문화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 전설의 제왕이 바로 황제다. 황제는 중국의 신화적 인물이지만 이젠 역사적 인물로 완전히 탈바꿈해 있다. 북경인근 황제의 성이라 불리는 곳에 중국인들의 시조를 모시는 사원이 있다.

 

 

1997년에 건립된 중화삼조당. 이름 그대로 세 명의 시조를 모신 곳이다. 그 한 가운데가 바로 황제. 중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황제와 염제를 자신들의 시조로 모셨는데 최근 여기에 슬며시 치우가 끼어들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왕인첸 / 중화삼조당 안내원

"염제와 황제는 우리 한족의 조상을 대표합니다. 치우는 중국 내 소수 민족의 조상을 대표합니다. 염제, 황제, 치우를 한 곳에 놓은 것은 중화 56개 민족의 대단결을 도모한 것입니다. 문화의 융합은 56개 민족의 통합을 말합니다."

 

 

 

중국 사서에 의하면 치우는 황제와 맞서 싸웠던 인물로 그 성격이 포악하다며 부정적으로 묘사돼 왔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자신들의 시조로 편입해 놓은 것이다. 삼조당 내부의 벽화, 자신들의 조상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치우를 또 한 명의 조상이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현재 중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이민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란 틀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실하 교수 / 항공대 교양학부

"예전의 황제의 영역은 만리장성을 넘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만리장성 너머에서 요하 문명 전체 지역을 신화시절부터 여기가 바로 황제의 땅이였다는 논리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황제의 땅이었던 요하 지역에서 중국문명이 최초로 꽃피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 이어서 황하와 장강에서 문명이 꽃피기 시작했다. 다기원론으로 가는데 실질적인 기원을 요하로 삼고 있는 게 현재 재편 작업에 가장 핵심적인 논리 중에 하나입니다."

 

중국으로선 요하문명을 중국 역사로 끌어 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다.

 

 

 

심양의 요녕성 박물관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가장 분비는 곳은 박물관 3층, 이곳에선 4년째 요하 문명전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는 중국 문명의 시원을 요하문명으로 정하고 이를 황제가 주도했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전설과 고고학적 성과를 끼어 맞춰 황제를 홍산문화의 대표로 등록하므로 북방민족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넣어버리는 소위 동북공정의 핵심이다.

 

우실하 교수

“동북공정은 고구려만의 문제가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은 동북아시아 전체 역사에 대한 재편 작업에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가 명백히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장성이북 만주 지역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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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이제 그들의 자부심이었던 황하 문명과 만리장성을 넘어 요하문명을 그들 문화의 원형으로 탈바꿈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구에 우리나라의 참여가 극히 제한돼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중국 측의 주장을 마냥 수긍할 수만은 없는 부분들이 참 많습니다. 또 우리 국내의 언론과 학계가 접촉할 수 있는 방법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또 무엇보다 앞서 보셨던 것처럼 요하문화와 중원의 문화는 이질적인 면들이 대단히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요하문명을 주도했던 세력, 그 진정한 주인공들은 누구였을까요?

 

 

 

요하문명의 서광은 홍산문화보다 수천 년 더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6천년에 탄생한 사해유적이 바로 요하문명의 시작이다. 중화제인촌이라고 불리는 사해 유적은 중국 영토 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유적을 빛나게 하는 요소는 바로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이 형상물이다.

 

리징옌 / 사해박물관

"이것은 용(龍) 모양의 돌무더기입니다. 크고 작은 돌들을 용의 형태로 늘어놓은 것입니다. 용의 전체 길이는 19.7m입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고고학적으로 발견한 연도가 가장 이르고 형태가 가장 큰 용입니다. 현재 중화제일용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기존의 발견된 용 형상보다 무려 2천년이 앞서는 것이다. 중국 용 신앙의 원형마저 이곳 요하 지역에서 나타나자 중국 학계엔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었다. 마을은 57개의 주거지가 용(龍)형상 주변을 감싸는 형태로 배치돼 있었다. 돌로 만든 각종 농기구가 출토 돼 이미 농경생활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는데 주목할 점은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형구 교수 / 선문대 역사학과

“중국인으로서는 그러니까 중국의 가장 이른 취락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취락에서 나온 토기들을 보면 빗살무늬, 우리가 쓰고 있는 빗살무늬가 나오고 있단 말이죠. 이것은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빗살무늬와 이 빗살무늬가 너무 유사합니다. 하는 방법(제작방법)이라든가 태토라든가 그런 것을 보면 야, 과연 우리 빗살무늬토기 쓰는 사람들과 이 사람들과의 관계가 뭔가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빗살무늬토기는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북방루트를 통해 발견되는 유물이다. 한반도와 요하 유역에선 대부분 발견되지만 황하유역에선 보이지 않는다. 이는 기원전 6천년 당시부터 만주지역은 중원과 관계없이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음 알려준다. 사해에서 100km 떨어진 내몽구 자치구의 흥륭와 유적(興隆窪, BC 6000)은 중국 최초의 마을 자리를 놓고 사해 유적과 다툼을 벌이는 곳이다.

 

“8000년 전 부락입니다.”

“(중국) 최초의 부락이군요.”

“예, 최초입니다.”

 

 

 

 

마치 계획도시처럼 조성된 이곳은 주거지가 일렬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돼 있었다. 사람과 돼지가 함께 묻힌 순장의 흔적도 발견됐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옥이였다. 인류가 사용한 그리고 가공한 최초의 옥이다. 저명한 옥기 전문가 북경대 조조홍 교수는 수년 동안의 조사 끝에 흥륭와 옥이 압록강 부근 수암산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색깔과 경도 모두가 정확히 일치했다.

 

조조홍 교수 / 북경대 고고학

“함께 비교해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옥 재료가 북방의 것이라는 겁니다. 모든 옥이 수암 옥은 아니겠지만 대부분 수암 옥이 분명합니다.”

 

 

 

수암은 흥륭와에서 450km 거리다. 더 놀라운 것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 거의 똑같은 옥 귀걸이가 나왔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이 지역들이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최광식 /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중국에서는 보통 중국문명의 시대가 황하문명으로 보다가 요하에서 황하문명보다 더 빠른 시기의 문명이 나오니까 중국문명으로 자꾸 관련시키려고 하죠. 그런데 사실 여기서 나온 문명을 보면 우리 문명의 시원으로 볼 수 있는 그런 부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암각화라고 할 수 있죠.”

 

국립중앙박물관에 최광식 전 관장은 두 차례에 걸친 요하문명지역 답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 한국형 암각화를 요하 일대에서 다수 찾아냈다.

 

 

 

각노영자(閣老營子)의 암각화는 함안 도항리의 동심원 문양과 일치하고 상기방영자(上機房營子) 암각화는 포항 칠포리에 검파형과 비슷하며 지가영자(遲家營子)의 연속된 마름모는 천전리 암각화를 그대로 빼닮았다. 한반도를 제외하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한국형 암각화가 대륙 깊숙한 곳에서 고개를 내민 것이다.

 

최광식

“중국에는 이런 암각화가 없습니다. 검파형이라든지 방패형이라는게 이게 한반도에는 나타난단 말이죠. 그러니까 결국 상고시기의 어떤 정신세계의 신앙, 제의 같은 것들이 분명히 이쪽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기원전 6천년 문명의 서곡을 울렸던 요하 문명은 처음부터 중원과는 이질적인 문명이었던 반면 만주와 한반도는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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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요하문명이란 요하가 둘러싸고 있는 지역에서 발생한 신석기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치는 고대문명을 말합니다. 이 기간은 수천 년에 걸쳐 있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요. 기원전 6천년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소하서를 시작으로 사해와 흥륭와에서 요하문명의 새벽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기원전 4500년 무렵에는 요하문명의 꽃이라 불리는 홍산문화가 시작되고 기원전 3천년 이후에는 하가점 문하로 계승되는 거대한 문명의 흐름이 이어지게 되는데요. 이것이 바로 요하문명입니다.

 

우린 이번 탐사를 통해서 기원전 6천년 당시부터 만주지역은 중원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한반도와는 대단히 연관성이 깊은 유대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해나 흥륭와는 서곡에 불과합니다. 수천 년간 가려져 있었던 역사의 베일이 벗겨질 때마다 역사적 상식들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사해와 흥륭와로 시작된 요하문명은 홍산문화기에 와서 화려한 꽃을 피운다. 우하량 적석총에서 발견된 유골. 머리 옆에 낯선 물건이 놓여 있었다. 바로 옥이었다. 옥은 형태와 용도에 따라 유골에 배치됐으며 사해, 흥륭와 시기에 비해 보다 세련되고 다양해졌다. 한 무덤에선 무려 20점의 옥기가 나오기도 했다.

 

조조홍

“고분 안에 부장된 것들은 주로 옥이었다. 일반적으로 도기는 보이지 않는다. 후에 곽대순 선생은 이런 현상을 ‘유옥위장(唯玉爲葬)’이라 했다. 우리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고대 홍산인들은 옥을 숭배했다. 옥을 매우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중요한 부장품이 된 것이다.”

 

홍산인들은 왜 옥을 숭배했을까? 조조홍 교수는 부장품으로 사용된 옥의 모양이나 위치로 보아 종교 혹은 권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주장을 한다. 홍산인들에게 옥은 영혼불멸의 상징, 하늘과 소통하는 상징이라는 것이다.

 

아직 철기가 발명되지 않았던 시대, 홍산인들은 어떻게 옥기를 만들었을까? 지금은 현대화된 기계로 가공을 하지만 옥을 가공하기 위해선 여전히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래서 옥은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는데 한 직원의 목걸이는 우리 돈으로 1억 원을 훌쩍 넘는 고가품이라고 한다.

 

40년 경력의 장인 진량위씨는 홍산옥을 만들기 위해선 지금 기술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진량위 옥 장인/경력40년

“최소한 3가지 제조 절차가 필요합니다. 쪼는 것이 첫 번째이고 가는 것이 두 번째이고 광택을 입히는 것이 세 번째 절차입니다. 이 절차를 밟는데 10여일 정도 걸립니다.”

 

그런다면 5천 년 전에는 얼마나 걸렸을까?

 

“문지를 수 밖에 없겠죠.”

“(홍산문화시대) 가공법으로 만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몇 년은 걸리지 않겠어요? 1, 2년은 걸리겠죠.”

 

 

 

홍산인들이 어떻게 옥을 만들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이지만 분명한 것은 매우 오랜 작업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우실하

“굉장히 중요한 의기라는 것이죠. 일반인들이 뭐, 석기처럼 이렇게 상용할 수 있고 항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의기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의기들이 굉장히 많이 발굴된다는 것은 결국 그 문명 단계에서는 옥기를 만드는 전문 장인집단이 기능적으로 분화돼 있다는 점입니다.”

 

세련된 옥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전문 장인. 또 그중 최고품을 소유하며 신께 제사지내는 권력자의 존재. 홍산문화 시기엔 권력과 신분이 이미 분화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조홍

“위치, 권력, 재산에 차이가 있었던 거죠. 명확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비교적 복잡한 사회’라고 합니다. 곧 문명에 진입할 단계에 있었던 거죠.”

 

 

 

문명 단계에 진입한 홍산문화는 후에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현지인들도 잘 가지 않는 곳, 적봉시 성자산에 홍산인들의 후예가 남기 흔적이 있다. 수천년에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성곽. 기원전 2천년 경으로 세워진 이 성은 홍산문화를 계승한 하가점 하층문화의 일부로 확인된 건물 터만 232개에 이른다.

 

“구조로 봤을 때 성자산성은 외성과 내성을 겸한 성입니다. 외성은 적을 방어하는 성이고 내성은 아마 신성시 하는 무슨 신전이나 제사하는 곳으로 보입니다.”

 

기원전 2천년 경이 되면 유하문명 지역엔 수많은 성들이 건축되기 시작한다.

 

복기대 교수 / 국제 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요서지역에서는 이미 70개 넘는 성들이 발견되었습니다. 70개 넘는 성들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람들이 살았을 때는 분명히 제도 즉 시스템이 갖춰졌을 것입니다. 그 시스템이 갖춰진 사회를 국가라고 부르는데 그 국가가 과연 어느 나라냐 그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죠(∴ 70개 이상의 성을 관리하던 국가 체제). 그런데 중국이나 한국이나 사서를 검토를 해봤을 때 그 지역은 고조선밖에 없습니다(∴ 한·중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요서지역의 유일한 국가는 고조선).”

 

 

 

기원전 2천년 경 요서 지역을 터전으로 국가란 체계를 갖출 수 있는 세력은 고조선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엔 우리 민족의 첫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신화가 나오는데 그 건국 연대를 기원전 2333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환웅이 웅녀를 만나 단군을 낳고 그 단군이 나라를 개국했다고 돼 있다. 이 신화를 적극적으로 해석해보면 고조선 개국 세력이 곰 토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하량의 여신녀에서는 흙으로 만든 동물상도 함께 발견됐는데 새를 형상화 한 소조상과 함께 곰발이 출토됐다. 남쪽 방에선 곰 턱뼈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형구 교수

“이와 같은 사실은 홍산인들이 여신뿐만 아니라 곰에게도 제사 지냈던 사실을 나타내는 겁니다. 바로 이것은 홍산인들이 곰을 숭배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이 묘에 안치된 인골은 다리를 교차하고 있어 하늘과 교류하는 제사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가슴에 놓여 있는 옥은 곰을 형상화 한 것이다. 홍산문화의 옥기 가운데 가장 많이 발견되는 웅룡(熊龍). 곰을 숭배하던 홍산인들이 그들의 터전에서 세운 나라는 고조선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현재의 요하 지역 일대엔 개발이 지연되고 있어 비만 오면 침수되기 일쑤다. 교통의 중심지 조양(朝陽). 중국역사상 한족과 북방 민족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조양 일대에서는 비파형 동검이 대거 출토돼 고조선 연구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십이대영자 유적에서 다양한 청동장식 유적들과 함께 고조선의 대표 유물 비파형 동검이 발굴됐다. 비파형 동검은 시기에 따라 크기와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비파형으로 이뤄진 검몸체와 손잡이 검자루맞추개 등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는 특징은 일정하게 유지된다. 검 손잡이 부분을 조립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기원전 10세기 무렵 동아시아에서의 종족과 문화를 구별 짓는 기준이 바로 청동검이었던 것이다.

 

복기대 교수

“고조선 지역에서는 비파형 동검이라고 하는 검이 발전을 하게 되고 고조선의 이웃지역에는 주나라 같은 경우에는 직인검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비파형 동검은 계속해서 한반도까지 그 고조선 전체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시종일간 끝까지 나타나는 그런 형태고 주나라 지역에서 나오는 직인검 있죠. 직인검은 꼭 시종일관 꼭 그 지역에서 계속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고 하면 고조선 지역에 나타난 비파형 동검은 지역적인 즉 고조선 특색을 끝까지 보유한 가장 특색 있는 청동기가 될 것이라 봅니다.”

 

 

 

요나라에서 수도였던 영성(榮成). 이곳에 위치한 초원 청동기 박물관은 이 일대에서 출토되는 청동기 유물을 전문적으로 수집, 전시하고 있다. 지금은 다른 유물로 대체돼 있지만 한 때 북한과 중국의 공동조사에서 출토된 청동기를 전시하고 있었다. 1963년부터 3년 동안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아서’란 주제로 이 일대에서 합동 발굴 조사를 벌인 것이다.

 

이형구 교수

"북한과 중국은 1963년부터 3년 동안이나 중국 동북 지방의 고조선 유적을 합동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중국이 고조선 영역에 대해서 일체 함구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 정부가 고조선의 영역을 요서지역까지 만리장성까지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북한과 중국의 합의 하에 3년에 걸쳐 이뤄진 조사 지역은 요하문명의 터전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어 당시 중국도 이 지역을 고조선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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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선사 문명은 시베리아에서 전래된 것으로 그간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요하지역의 문명들이 발견되면서 시베리아보다 훨씬 더 빠르고 발전된 문명이 요하 서쪽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가 어렵게 됐습니다. 물론 우리 민족의 기원을 요하 한 지역에만 둘 수는 없겠죠. 하지만 최소한 요하문명을 주도했던 세력이 오늘날 우리 민족을 구성하는 한 원류가 됐다는 것은 매우 일리 있는 지적으로 들립니다.

 

 

 

성자산에서 100km 떨어진 곳엔 고대인들의 또 다른 신비로운 공간이 있다. 2007년 발굴이 완료된 삼좌점 산성(적봉시). 성벽이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내부엔 돌을 둥글게 쌓아 올린 건물 터가 수십 군데 있다.

 

쉬즈펑 교수 / 적봉대 고고학

"둥근 제단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이고 사각 제단은 땅에 제사 지내는 것입니다. 땅 위로 지어진 것도 있고 땅 아래로 지어진 것도 있습니다. 하늘에 빌고 땅에 빌고 태양신, 달의 신에게 빌었습니다."

 

 

 

내부가 원형과 사각형 제단으로 가득 채워진 이 성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은 바로 이 부분 치다. 5미터 거리로 배열된 치는 어림잡아 13개나 된다.

 

 

 

치는 고구려 성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집안시의 고구려 성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성벽 앞으로 돌출한 치는 고구려의 군사 작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국내성의 단면도는 치의 형태를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

 

최광식

“그 삼좌점 유적에 보면 치 같은 것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그게 바로 청동기 시대, 하가점 하층문화단계거든요. 그러니까 이미 그 시기에 고구려 치와 같은 그런 시설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결국 치라는 것은 고구려 성의 특징인데 이미 이 시기부터 나타났다는 것은 고구려 성과도 이 지역 삼좌점에 이런 성 축조시설, 구조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고구려와 같은 축성 방식을 사용했던 사람들은 우리 민족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중국 길림대의 주홍 교수는 하가점 하층 문화에서 나온 134기 인골의 체질 인류학적 분석을 시도했다. 연구결과 크게 두 개 종족으로 나눠졌는데 요하문명 일대에 고(高) 동북형이 3분의 2이상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복기대 교수

“중국 사람보다는 한국 사람이 더 훨씬 친연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 유적지들을 조사해 봤을 때 60%이상의 고대 주민들이 한국 사람들과 친연성이 있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본다고 하면 요서 지역의 고대 문화는 한국 선조들이 한국 계통들이 건설한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가점 하층 문화 시기 거대한 성을 세우고 대륙을 호령하던 국가는 고조선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광활한 대륙을 누비던 고조선의 영역은 어디까지 이르렀을까? 만리장성 바로 앞에 있는 건창현의 동대장자 마을에서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왠지 낯익은 돌담이 눈길을 끄는 곳, 이곳에서 특이한 비파형 동검이 출토됐다.

 

“제일 좋은 칼은 손잡이 앞뒤가 황금으로 되어 있었어요. 다른 무덤의 칼은 비교적 짧았어요.”

“주로 청동검이었나요?”

“다 청동검이었어요. 청동검은 굉장히 날카로웠어요.”

 

 

 

 

30여개의 묘가 한꺼번에 발견된 이곳에선 연나라의 청동기가 대거 출토됐다. 흥미로운 건 무덤이 적석총이라는 것과 황금으로 장식된 비파형 청동검이 출토됐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적석총과 청동검이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형구 교수는 이 무덤을 고조선의 영역을 침입한 연나라 장수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형구 교수

“연나라 장수가 고조선 땅을 쳐들어 와서 이곳에 정착하면서 고조선 문화를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중국 사서들에서 보이는 기록들하고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봐서 고조선의 강역이 이곳 연산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춘추시대 연나라 장수 진개가 5만 병력으로 조선 땅 2000리를 진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형구 교수는 동대장자 유적의 수수께끼가 이 기록을 참고한다면 진개 공격 이전에 이 땅이 고조선의 영역이었음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강역은 이곳 만리장성 바로 앞 연산산맥까지 이르게 된다. 만리장성 앞에 있는 연산. 그것은 고조선과 중국을 나누는 경계선이었다.

 

 

이번 탐사의 마지막 일정은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거대 적석총. 아직 지표 조사만 이뤄져 흙에 덮여 있지만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적석총이다.

 

“이런 돌과 자갈과 흙을 같이 다진 것이죠. 석축 안에 내부에 그렇게 다져 올라가고 저쪽에선 2층 구조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런 적석총은 외벽은 석축을 쌓고 내벽은 흙으로 쌓아 올린 것인데 마치 유럽에서 보는 큰 피라미드와 같은 것입니다.”

 

 

 

가로 세로 6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적석총. 요하 문명 일대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적석총이면서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천년 앞서 세워진 것이다.

 

 

 

이 적석총은 장군총과 거의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집안시 일대는 이런 형태의 적석총이 수천기가 분포돼 있다. 적석총은 한반도와 요서 일대에 집중 분포하는 지역적 특색이 매우 강한 유적이다.

 

우실하 교수

“결국 그것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문화인데 그 문화는 한반도로 해서 일본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요하문명은 동북아시아의 시원 문명임과 동시에 주요한 세력들은 몽골, 만주,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북방문화 계통이 가장 중심적인 문화 유형이라는 것입니다.”

 

이형구 교수

“중국은 요하 일대의 고대 문명을 요하 문명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시원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우리 민족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고 그 지역 범위도 요하를 훨씬 벗어나서 요동반도와 한반도까지 이르는 이른바 발해연안벨트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을 요하문명이라고 한정해서 부르는 것보다는 발해연안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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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는 이제 더 이상 우리 땅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 역사마저 잊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장장 4천 킬로미터에 달했던 만주 대탐사. 우린 그곳에서 수천 년 전 우리 민족의 원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감춰졌던 역사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곳은 우리 민족의 고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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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책을 벗 삼아
글쓴이 : 문화재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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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주기 강우일 주교 강론

 

오늘 우리는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았다.
 
세월호는 출항해서는 안 될 배였다.
1년 전 그날 인천항은 악천후였고, 가시거리는 800미터밖에 안 되었다.
그 때 출항한 배는 세월호 단 한 척뿐이었다.
그리고 출항 당시 세월호는 규정된 물량의 약 2배를 과적했고, 엄청난 화물들을 고정하지도 않고 적재했다.
그리고 화물을 더 싣기 위해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배 밑바닥의 평형수를 절반 이상 빼버렸다. 출항 전에 인천항 운항관리자는 배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않고 안전점검 보고서에 ‘양호’라고 기재하고 출항허가를 내주었다.
심각한 기상악화가 풀리지 않아 단원고 아이들은 세월호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아이들을 다시 태우고 돌아올 버스가 인천항으로 출발했었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세월호는 왜 무리한 출항을 했을까? 누가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 아무것도 밝혀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왜 갑자기 세월호가 침몰했는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검찰은 침몰 원인으로 급변침을 지목하며 ‘조타미숙으로 선체가 크게 기울었으며, 과적 및 고정 불량과 평형수 부족으로 복원력을 상실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급변침은 사고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라고 한다.
세월호가 왜 급하게 방향을 틀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7천 톤이나 되는 세월호가 100여분 만에 완전 침몰했고 선체가 1초에 14도나 기울어졌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급격한 침몰과 변침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월호에서 자기 발로 나온 사람 말고는 해경이 들어가서 구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세월호는 사고 후 1시간 동안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라고 하는 안내방송 외에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침몰 당시 아이들은 유리창을 두드리며 구조 요청을 했지만, 해경은 선실 유리창을 깰 생각도 안 했고, 탈출 안내도 하지 않다가 10시17분, 해경 함정 123정이 도착한 후 47분 만에 현장에 있던 해경 헬기와 선박, 잠수부는 돌연 일시에 철수했다.
후에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잠수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경이 “언딘”의 작업을 위해 철수를 요구했다.’ 고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일이다.
사고 해역 근처에 있었던 4만톤 급의 미 함정의 지원도 거부했다.
해군참모총장이 두 번이나 통영함 출동을 명했는데도 해경이 해군함정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리고 일본 해상보안청의 구조협력 제안도 거절했다.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사고의 원인과 경과를 분석해 줄 전문가들이 침묵하기 시작했다.
어떤 언론사에 따르면 세월호 문제를 제기해 온 전문가들이 4월21일부터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 시작했다고 한다.
익명의 대학교수는 인터뷰에서 ‘압력이 들어온다. 주로 정보 부처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4월22일 방송통신위원회는 ‘세월호 관련 재난상황반 운영계획’이라는 문건을 통해 방송사 조정 통제 및 대응 임무를 하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세월호는 국내 여객선 중 유일하게 해양 사고 발생 시 국정원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국정원은 4월16일 오전 9시10분, 청해진해운 사장 등으로부터 사고 문자 메시지를 받았고, 9시28분에 해경상황실에 전화해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세월호 내부에서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국정원은 세월호에 99가지의 상세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왜 민간 여객선이 배의 시설 아주 작은 부분까지, 그리고 선원들의 수당이나 휴가까지 국정원 지시를 받아야 했는지 아무도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한국 주교단이 함께 로마를 방문하고 프란치스코 교종을 뵈었다.
5년마다 한 번 하도록 되어 있는 정기 행사다.
그 때 교종께서 우리에게 제일 처음 던지신 질문이 ‘세월호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였다.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정부가 세월호 진상을 조사하겠다고 조사위원회 조직은 구성했는데 실제로 조사는 전혀 한 발자국도 진척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밖에 답할 수 없는 우리 현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교종께서는 아직 세월호 가족들의 비통함이 잊을 수가 없고 가슴 속에 가라앉아 있다고 하셨다.
 
세월호 참사 한 달 후인 5월16일 대통령은 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서 분명히 ‘특별법은 만들어야 하고, 검경수사 외에 특검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낱낱이 조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씀까지 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록 위원회는 한 발자국도 못 내딛고 있고,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의 독립적 진실규명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시행령을 발표했다.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사고를 유발한 원인 제공 기관들인 한국해운조합, 지방항만청, 한국선급, 선박안전기술공단과 직접 연결된 상부 기관이다.
간단히 말하면 직접 사건의 피고가 되거나 피고와 아주 가까운 부서다.
피고 신분의 공무원이 세월호 진상 규명의 실무 전체를 책임 조정하는 역할을 맡도록 하는 시행령은 진실 규명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피고의 한 가족에게 판결을 내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정부는 희생자 가족에게 보상비는 몇 억 원씩 줄 것이라고 흘리며 돈다발을 자꾸 펄럭이며 마치 유가족들이 돈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처럼 국민 여론을 오도한다.
이것은 유가족들에 대한 인격모독이다.
대통령이 눈물 흘리며 한 약속을 이런 식으로 변형하고 왜곡하면 국민은 국가를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나 한다.
어떤 이들은 광화문 광장에 기한도 없이 농성하고 노숙하고 있는 가족들, 시민단체 사람들의 존재가 불편하고 피곤하고 혐오스럽게 느낀다.
언제까지 세월호 문제에 붙잡혀 있을 것인가, 나라 경제도 불황이고 민생 문제도 산적한데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마치 강도 만나서 얻어맞아 초죽음이 되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웃을 보고도 내 갈 길이 바쁘다며 길 건너편으로 돌아서 지나가버리는 레위인이나 사제와 다를 바 없다.
이웃 형제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질 수 없는 오늘의 메마른 우리 영혼이 서글프다.
형제의 신음 소리가 전혀 우리 가슴에 공명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콩크리트 벽 같은 불통의 우리 마음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304명이나 되는 이웃 형제와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버린 사건의 충격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오늘의 개인주의적 문화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국민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기관이 외면하고 밝히려 하지 않는 의혹 가득한 사건을 그냥 잊고 덮어버리자고 하는 것은 우리 몸에 돋아난 종기의 뿌리를 도려내지 않고 겉에 붕대만 감고 말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종기는 속에서 더 곪아서 뼈 속까지 썩어 들어가고 나중에는 세월호보다 더 큰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의 비극을 잊으려하기보다는 도리어 거듭 상기해야 한다.
희생자들의 고통과 참담한 최후를 기억해야 다시는 그런 참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와 회심을 열매 맺을 수 있다.
세월호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자꾸 상기하여 질문하고 밝히려고 해야 진실한 원인에 접근할 수 있고 그 사악한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고 거기 머물고 있는 가족들과 연대하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고 나누고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걸린 몹쓸 개인주의의 염병에서 치유될 수 있다.
상처는 회피하고 어설프게 봉합해서는 속에서 갈수록 더 곪아간다.
 
우리는 오늘 성체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해내야 하겠다.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가족들의 상처를 주님께서 어루만져주시기를 청하도록 하자.
그리고 동시에 이런 참혹한 비극을 직접 초래한 사람들이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유가족들과 국민에게 용서를 청할 용기를 내도록 기도하자.
 
예수님은 진리의 증언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 치셨다.
우리는 오늘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죽음을 둘러싼 불의와 의혹과 고통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살아있는 증언을 하도록 초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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