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사태를 지켜보며

서울대아시아언어문명학부 4학년 임명묵


조국 교수의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둘러싼 공방이 연일 지속되고 있다. 아마 근래 들어 가장 재밌게 보고 있는 시사 이슈가 아닌가 싶다. 장관 임명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서슬퍼런 투쟁을 벌이고, 장관 후보자와 관련된 논란이 계속해서 쏟아져나와 진위여부를 가리는 공방이 오가고, 심지어 그 논란의 핵심에는 한국인들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교육, 입시 문제가 도사리고 있으나. 재미가 없으면 그게 이상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조 후보자 임명과 관련된 논란은 단순히 자유한국당과 민주당의 기싸움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 정도 이슈였다면 이런 정도로 국민적 관심을 모으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국 후보자 임명은 한국 사회의 밑에서 강하게 흐르던 어떤 분노의 감정을, 조국 후보 반대자 진영에게서 끄집어냈다. 바로 그 감정을 원동력으로 극렬한 반발이 이어진 것이고, 그에 맞서 장관 임명 찬성측도 더욱 열을 내서 조국 수호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이다.


그 분노의 원천은 주지하다시피 옳은 말을 하는 위선적 특권계층에 대한 혐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한국 사회의 계층화 경향이었다. 웅동학원 및 사모펀드를 둘러싼 논란이 사실 자녀의 부정입학 스캔들보다 어떤 면에서 훨씬 위중함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관심사를 모은 이유는 결국 이 같은 ‘원초적 감정’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조 후보자 임명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분노가 부당한 것이라고 항변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조 후보자와 관련된 논란에 대응하고 있다. ‘옳은 말이라도 하는 위선’이 대놓고 나쁜 것보다 왜 더 경멸받아야 하는가? 부당한 흠집내기가 아닌가? 조 후보자의 딸이 특권과 연줄을 활용해 대학에 들어왔다고 치더라도, 그렇게 따지면 그걸 비판하는 자들(자유한국당 의원, 서울대, 고려대 재학생)도 다들 비슷한 방법을 써서 들어온 특권층 아닌가?


나는 조 후보자의 법무부 장관 임명에 분명히 반대하지만, 이 같은 이야기와 논쟁들이 맞다 그르다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맞다 그르다를 따지기엔 너무 많은 이슈가 터지고 있고 너무 복잡한 사실관계가 얽혀있으며,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은가? 다만 이 조국을 둘러싼, 특히 그의 자녀 입시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한국 사회에 어떤 화두를 던지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얘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너무나 첨예해진 이 사안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면, 먼저 마음을 차분히 하고 흥분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 잠깐 다른 곳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바로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소비에트 연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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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러시아는 17세기 이후 최대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나라를 송두리째 뒤집어놓은 제1차세계대전, 러시아 혁명, 적백내전으로 수백만 명이 전쟁으로 죽거나 기근으로 아사했다. 또한 교육 받은 엘리트, 귀족, 중산층들이 공산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라를 대거 떠나면서 인적자본에 엄청난 타격도 입었다. 피비린내 나는 혁명과 내전을 겪은 뒤 마침내 러시아 인민들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 소련을 건설했지만 그 결과물은 사실 폐허 속의 잿더미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오히려 그런 파괴를 신세계를 건설할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다고 기뻐했다. 사실 이는 빈말은 아니었다. 구체제의 제약 조건이 없는 가운데서 혁명가들은 온갖 종류의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때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마저도 구체제와 어떤 연도 없이 길러낼 수 있는 혁명의 자원으로 간주 되기까지 했다.


내전이 끝나고 국가가 안정화되면서 소련의 유토피아 건설 프로젝트는 차츰 시동을 걸고 있었다. 레닌의 국가 전력화 계획, 국가 전체를 내전 이상으로 송두리째 뒤흔들 스탈린의 제1차 5개년 계획들이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치면서 진행되었다. 볼셰비키들의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러시아는 쟁기를 든 문맹 농민들의 사회에서 거대한 베어링, 프레스, 발전기를 돌리는 엔지니어의 사회로 변모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엘리트층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과거 러시아 제국의 엘리트들은 당연히 러시아 제국의 기득권들만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귀족 가문이나 새로이 러시아에서 등장한 상공계층은 군인, 학자, 실업인, 의사 등 다양한 엘리트, 전문직으로 진출했고, 많은 수는 프랑스, 독일 등지의 발전된 서유럽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 서유럽에 가지 않더라도 이미 이들은 그런 서유럽 언어들을 어렸을 때부터 가정교육을 통해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혁명과 내전으로 이런 엘리트층이 쓸려나가고, 남아있는 엘리트층은 혁명 정권과 사이가 소원하게 되자, 과거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엘리트가 될 수 없던 이들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바로 ‘비드비젠치(발탁자)’들이었다. 원래 도시 노동자, 빈농의 자녀로 태어나 고등교육은커녕 글도 깨치기 힘들었던 이들은, 신생 소련 정권이 제공해주는 국민 교육의 수혜를 받아 기술 인력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특히 여기서 출신성분, 당성, 능력이 뛰어났던 이들은 체제가 ‘발탁’하여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몇 계단이나 껑충 올려주곤 했는데, 예컨대 대학 교육을 보장해준다든가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의 대도시 유학 기회를 준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1930년대 이후 이들은 ‘붉은 엔지니어’로서 소련 체제의 핵심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엘리트들은 전문직, 엔지니어, 화이트칼라 관리직, 공산당 간부 등으로 진출하며 커리어의 상승가도를 쌓아갔다. 스탈린 시대 소련이 겪었던 격번, 5개년 계획과 대조국전쟁의 현장에서 이들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자신들을 발탁한 공산당 체제와 스탈린에 대해 무한한 충성을 다했다. 그들은 개천에서 태어나서 용이 된 자신들의 존재야말로 노동자 농민을 위한 소련 체제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련 체제가 초기의 격변기를 거치고 점점 안정화되면서 다른 종류의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먼저, 이 당의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 비드비젠치들은 대체로 세대 측면에서 동질적이었다. 대체로 혁명을 전후로 한 짧은 시기에 태어나서, 핵심적인 교육을 혁명 이후에 받았어야 하고, 혁명과 숙청으로 쓸려나간 선배 세대의 자리를 빠르게 메워야만 했다. 아마 대략 1900년생에서 1920년생 정도를 이런 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동질적인 특정 세대의 특정 그룹이 굉장히 강력한 카르텔로서 소련 체제의 핵심을 오랜 기간 지켜나간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소련의 ‘제2의 건국 신화’나 다름 없던 5개년 계획과 대조국전쟁에서 눈 부시게 활약한 선배 세대를 후배 세대가 따라가는 것은 몹시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에 1960년대부터는 레닌이나 스탈린 시대에 있던 정치적 격변 또한 사라지게 되었으니, 발탁자 그룹은 계속해서 고위직에 앉아 소련 국가와 공산당의 핵심 요직을 주물렀다. 이런 인사 적체는 필시 소련 체제의 쇠퇴를 불러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몇몇 인물들의 커리어를 살펴보면 이런 경향은 쉽게 관찰할 수 있다. 1906년 금속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레오니드 브레즈네프는 제철소에서 일하면서 스탈린 시대 야금학을 공부했고, 간부로 발탁되어 정치에 입문하였다. 그는 이미 40대에 모스크바 중앙 정계에서 활약하였고, 50대 후반에 전임자인 흐루쇼프를 몰아내고 최고 지도자가 되어 18년 동안 죽을 때까지 나라를 통치했다. 전설적인 경제 관료인 니콜라이 바이바코프는 1911년 석유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34세에 석유부 장관으로 초고속 승진하여 제2차세계대전 때 활약하였다. 전후 장관을 비롯한 고위 관료로 커리어를 이어가 1965년 소련 경제의 최고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어 1985년까지 무려 20년을 그 자리에서 머물렀다. 1909년에 가난한 벨라루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안드레이 그로미코도 30대 중반에 주미 소련 대사가 되었으며, 48세에는 외무장관이 되어 76세에 은퇴했다. 이런 사례는 이 시대의 인물에서 찾으려면 한도 끝도 없이 찾을 수 있다.


나는 물러날 때 물러나지 않았다고 이들 세대가 특별히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들은 계속 언급했듯 소련 체제의 건설기와 위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활약하여 조국 근대화와 전쟁 승리에 이바지했다. 그것도 20대, 30대의 젊은 나이에 말이다. 아마 자신들이 닦은 기반 위에서 ‘나약하게 자란’ 후속 세대가 못 미더운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다 했다. 그 결과는 아마 1960년대부터 20여년 간 계속된 소련의 정체였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후 소련 사회가 안정화되면서, 새로운 엘리트들을 탄생시켰던 소련 사회의 역동성이 어쩔 수 없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특히 이 같은 경향은 아래 세대로 내려갈수록 점점 심해졌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1900년 무렵에 태어난 세대는 모든 것이 혁명과 내전으로 쓸려나가 강제로 평등해진 사회에서 출발했다. 자연스레 개중 능력이 뛰어나고 운까지 좋았다면 손쉽게 사회발전의 흐름을 타고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새로운 고위직들의 자녀의 경우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비록 소련이 계층 간 생활수준의 격차가 적은 사회주의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간부와 광부는 전혀 다른 사회적 자본, 교육 기회, 생활 환경을 가질 수밖에 없다. 소련 태생으로 북한사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거의 모든 사회주의 진영국가에서 갈수록 세습화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당비서의 아들은 당비서가 되고, 광부의 아들은 광부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후기 소련 사회를 특징짓는 ‘노멘클라투라’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노멘클라투라는 간부 명단을 의미하는 말로, 나중에는 공산당 간부 전반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공산당 간부들은 1970년대와 80년대에 복지부동의 부패 집단으로, 당의 권력을 얼마든지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쓸 수 있는 자들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이들 노멘클라투라의 생활은 굉장히 이중적이었는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미국 자본주의 세력에 맞서 노동자 농민의 혁명을 수호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고 레닌의 어록을 외웠지만,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특권을 활용해 자본주의 세계의 사치품을 수입하고 즐기는 데 몰두했다. 최고지도자인 브레즈네프부터의 취미부터가 외산 수입차와 고급 의류 쇼핑이었다. 


반면 일반 인민들은 이런 사치품에 접근조차 힘들었다. 자동차만 해도 일반 인민들은 품질이 훨씬 떨어지는 국산차를, 각종 연줄로 만들어낸 새치기로 가득찬 대기 명부에 이름을 올려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소련 인민들이 주로 동유럽 단체 관광을 떠날 때, 미제국주의에 맞서 핵전쟁도 불사할 수 있다는 고위 노멘클라투라의 자녀들은 워싱턴, 파리의 외교관으로 들어가 서방 생활을 즐겼다. 스탈린 시대 ‘발탁자’들이 건설하고 지켜낸 체제는 이제 그들, 무엇보다 그들의 자손들로 인해 정체하고 병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1991년, 소련이 붕괴했다.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개혁 조치들은 사회의 혼란만 가중시키고 의미 없는 것으로 판명 났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 공산당을 몰아내고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방의 부유한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하고 있으니, 소련도 민주주의를 하면 평화와 안정,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기대에서 나온 요구였다. 하지만 계층에 따라 그 목적은 조금 달랐다고 평가해볼 수 있다. 젊은 노멘클라투라들은 뛰어난 인적자본을 갖고 있었고, 국가 재산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과 정보가 있었다. 몇몇 이들은 공산당 통제 체제가 사라질 경우 그 공백을 활용해 어마어마한 부를 쌓을 수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챘을 것이다. 설령 그런 ‘불순한’ 의도가 없었다 치더라도, 많은 젊은 간부들이 국가 재산을 외국에 팔아치우거나, 때로는 자신이 헐값에 인수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들 중 특출난 거물들은 ‘올리가르히’라는 새로운 특권층으로 변모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돈으로 미국이나 영국으로 이민을 가기도 했었고, 자식들을 서유럽과 북미의 고급 사립학교에 유학 보냈다. 러시아 인민들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삶을 살아가야 했던 체제전환기에 말이다.


숭고한 혁명과 산업화, 전쟁의 이야기가 어쩌다 이런 부조리한 비극으로 끝났을까? 어째서 소련은 간부직의 세습을 방치했을까? 이 점에 대해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옛날 소련 공산당 서기장들의 후손들이 오늘날 아주 잘 사는 이유에는 제일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쨰는 교육이고, 둘째는 인맥입니다. 제일 먼저 권력자의 아들딸들은 어린 시절부터 좋은 학교를 다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잘 배울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권력자 아들딸들은 어린 시절부터 다른 고위 간부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모가 큰 권력이 있기 때문에, 다른 간부들이 많이 도와줍니다. 결국 그들은 처음부터 발전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유감스럽지만 세계 어느 사회이든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상류층의 특권 세습화를 통제나 관리 할 수 있지만,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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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십 년 전 소련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이렇게 쓴 이유는 이 이야기가 한국 사회에도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한국은 100년 전 러시아와 비슷하게 철저한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던 상황이었다. 러시아처럼 엘리트들이 갑작스럽게 나라를 집단적으로 떠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으나, 전통적인 엘리트들 중 많은 이들이 토지와 자산을 잃고 몰락했다. 공산주의의 압력으로 실시된 농지개혁으로 지주들은 땅을 내놓아야만 했었고, 그 대가로 받은 돈은 전쟁과 전후 인플레이션으로 휴지조각이 되었다.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정말 소수의 엘리트들을 제외하고, 한국 사회는 극단적으로 평평해졌던 것이다.


그 후 고난의 시간을 거친 뒤 남한의 신화적인 경제발전과 민주화가 뒤따랐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발탁자들처럼 특정한 세대의 특정한 그룹이 사회의 엘리트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부모가 대부분 농민이었던 이들. 조선시대와 실질적으로 크게 다를 것 없는 심성을 지닌 빈농의 자녀로 태어나 박정희 시대에 근대 교육의 수혜를 입은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이중 50년대생들과 60년대생 중 대학 진학을 통해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직, 대기업에 진출한 사람들은 한국 경제 성장을 견인했고, 또 동시에 그 수혜를 받으면서 이 사회를 주도해나갔다. 


물론 그들이라고 해서 날 때부터 편한 자리에서 담배나 피면서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지시를 내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상층에 있든 하층에 있든, 한국의 기본 경제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어떤 종류의 불공정과 부정의, 무엇보다 폭력적 문화와 마주쳐야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모두가 똑같이 가난했던 50년대생과 60년대생 중에서 공무원이 되었든, 대기업 직원이 되었든, 자영업이 되었든, 전문직이 되었든 어떤 경로를 통해서 중산층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대거 생겨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60년대생의 엘리트 그룹이 가장 큰 수혜를 본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20~30% 밖에 되지 않았던 대학 진학이라는 과제를 달성한 이들은 민주화 투쟁에 뛰어들었고, 사회에 진출해서는 각종 영역의 핵심 중추로 부상했다. 나는 여기서 일부 좌익 운동권을 뿌리로 하는 시민단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대학 졸업장을 받고 사회 각지의 영역으로 파견된 대략 25%의 인구집단은 ‘386’을 형성했고, 그들은 한 줌의 시민단체를 넘어 광범위한 영역에서 주도권을 잡았던 것이다. 특히 IMF 위기로 그들의 선배 세대가 전혀 예상치 못하게 대거 물러나자 그들은 30대와 40대의 이른 나이부터 의사결정에 참여하며 훈련되었다. 마치 소련의 발탁자 세대의 선배들인 혁명과 내전 세대의 엘리트들이 내전으로 대거 쓸려나가면서, 발탁자 세대가 일찌감치 중요 직책을 맡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다음 벌어진 일도 소련에서 벌어진 일들과 유사했다. 386은 중년이 되면서 노멘클라투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앞선 세대의 빈자리를 빠르게 채운 뒤 자신의 자리를 놓지 않고 후속 세대가 주도하는 세대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성벽을 세웠다. 이 과정은 어떤 면에서 보면 소련보다 더 심한 면도 많았다. 특히 자녀 교육과 관련된 문제에서 그랬다. 노멘클라투라들이 활약하던 시대는 소련뿐 아니라 서방 국가들도 부의 불평등을 억제하는 분위기가 강하던, 사민주의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386들이 엘리트로 부상하여 부를 축적하고 사회의 중추로 자리매김 하던 때는, 이미 사회주의가 붕괴된 뒤로, 불평등과 세습에 대한 저항감은 세계적으로 그보다 훨씬 더 약해져 있었다. 


그 결과 대학에 가지 못한 ‘6’들과 대학에 갈 수 있던 ‘86’들 사이의 골은 점점 더 심해졌다. IMF 위기, 2000년대의 집값 상승, 이어지는 꾸준한 경제 성장 등은 한국 사회에 불균등하게 분배되었다. 세계화로 일국 내에서 연결되어 있던 고부가가치 영역과 저부가가치 영역 사이의 사슬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들어서 한국의 불평등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고, 몇 가지 우연적 요소와 필연적 조건들이 개입하여 60년대 생 사이의 분화가 불평등 악화를 견인하고 있었다고 봐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자, 소련의 사례를 보건대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더욱 명약관화하다. 란코프 교수가 ‘광부의 아들은 광부가, 당간부의 아들은 당간부가’ 되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획득한 지위와 계급을 후대에도 물려주고 싶었던, 지극히 자연스런 욕망에 충실하였던 386들은 자녀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하였다. 외국어고, 과학고, 영재고, 자사고, 국제고 등 수많은 특수한 고등학교와 8학군의 명문고 등. 아니면 영어 열풍에 편승하고자 자녀들을 일찌감치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로 보내 당당한 세계시민으로 키워내기도 하였다. 이런 교육투자에는 당연히 수많은 요소가 개입하기에 모든 이들이 성공을 거머쥐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확률적으로 보자면, 80년대에 대학을 나와 전문직, 대기업, 대도시 공무원으로 진출한 부모 밑에서 자란 90년대생 내 또래들은 상기한 특목고 진학과 조기유학 등의 기회를 수월하게 잡을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즉 대학에 가지 못한 부모를 둔 90년대생들은 어땠을까? 그들이 받았던 사교육은 아마 ‘단과학원’, ‘보습학원’, ‘공부방’ 정도였을테고 그마저도 아니면 PC방이나 만화방 등에 갔을 것이다. 어떻게 단언할 수 있냐면 내가, 내 주변 친구들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나에게 조기유학은 발음교정을 위해 혀를 인위적으로 늘어뜰인다는 얘기만큼 기이하게 들리는 별세계 이야기였다. 또 당시 불어닥쳤던 특목고/자사고 열풍에 나도 지원해보기도 하였으나 당당히 낙방했다. 내가 살던 지역의 부모님들은 대체로 자녀 교육에 그렇게 신경쓸만한 자원, 정보, 의지 등이 ‘386’ 부모에 비하면 아무래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당연히 학업성취도에 있어서 차이로 나타났다. 사실 나도 수능은 전혀 잘 보지 않았었고, 지방 고등학교에서 내신을 잘 받아서 농어촌 전형으로 서울대에 들어갔다(능력 밖에 있던 학교가 나를 뽑아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다시 강조하자면 모두가 이런 도식을 따른 것은 아니고 상당히 유의미한 확률로 예외라는 것은 늘 존재하며, 이런 계층화를 완화하기 위한 제도적 노력도 꾸준히 이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식이 현실에 엄존하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철의 공식은 이후 사회에 진출하였을 때 경제적 격차로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서울대 나와도 취직이 안 된다’는 말이 많지만, 그렇다면 서울대, 아니 인서울도 못 나왔다면 어디로 가야한다는 말인가?


따라서 조민씨의 입시를 둘러싼 논란은 단지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독립 이후 약 70년 간 발전해온 성과에 대한 점검이라는 차원에서 심원한 의미가 있다. 한 번 조민씨가 한영외고를 거쳐 고려대, 의학전문대학원에 간 것에 어떠한 탈법, 불법 요소가 없었고, 그리하여 조국이 아무런 문제 없이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고 치자. 설령 그렇다고 한들 ‘평범한’ 이들은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아니 존재 자체도 몰랐던 교수들 사이의 ‘자녀 스펙 품앗이’마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일본에 대해 죽창가를 선동하고 민족주의의 폭풍을 불러일으키려 했던 사람이 자녀 둘을 모두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 보내 교육시킨 것 또한 남지 않는가. 그리고 그런 그가 ‘이제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는 필요 없다’고 선언한 것도 여전히 진실 아닌가. 마치 노멘클라투라들이 자본주의를 욕하며 누구보다 그들의 산물을 즐기고, 노동자 농민의 유토피아를 말하면서 누구보다 노동계급과 유리된 삶을 살고, 자녀들은 어떻게든 좋은 자리에 꽂으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솔직히 나는 조국이 법무부 장관이 되든 말든, 그가 검찰개혁을 하든 말든, 그런 것은 나에게는 이제 더 이상 와닿지 않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저 한 인간을 둘러싼 흥미진진한 정치 드라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시대를 가로막는 386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번 일로 386이라는 존재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그들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회 각지에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마 조만간 한국 사회는 절대 부숴질 것 같지 않던 386의 철옹성을 어떻게 공략해야할지, 혹은 어떻게 수비해야할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겪지 않을까 기대된다. 즉, 이 문제는 다소 정적이고 폐쇄적이었던 소련의 노멘클라투라 문제와 달리 한국 사회가 역동적이고 개방적이기에 시간이 금세 해결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신 나에게 중요한 것은 마침내 백일하에 드러난 한국 사회의 거대한 계층화다. 이 흐름은 막을 수도 없고, 386을 쫓아낸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막대한 교육 투자와 인맥으로 무장한 엘리트들, 즉 386의 자녀들이 결국 그 자리를 이어받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물론 결코 이전과 같은 형태가 반복되지는 않겠지만). 이는 결국 앞서 자주 언급했던 이중의 세계화 문제와도 이어진다. 정말 거칠게 말해서, 세계도시를 오가는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상층의 세계화의 수혜자는 ‘86’의 자녀들이다. 그리고 생산 시설이 이전하고 저개발국 이주민들과 경쟁해야하는 세계화의 피해자들은 ‘6’의 자녀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고려대와 서울대 학생들의 집회는 사회적으로 과도한 관심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집회와 그 집회에 참여한 이들을 폄훼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조민 게이트’에서 그 입시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의 이야기도 조명 되어야겠지만 가장 시급한 것은 그 입시 경쟁에 참여할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한 ‘복학왕’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지 않냐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계층화 자체가 무엇이 문제냐고 누군가는 되려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설령 조국이 문제가 있다 치더라도, 중산층이 막대한 교육 투자로 자식들에게 다양한 자본을 물려주고 인적자본을 축적시키는 행동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나? 사실 이는 굉장히 날카로운 문제의식이다. 그렇게 따지면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어머니의 요식업이 15년 전부터 잘 풀려서 다른 또래들이 주야간 공장을 다닐 때 편하게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부모는 결국 계층에 상관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만큼’ 자녀를 지원한다. 어찌보면 소련의 노멘클라투라들도, 한국의 386들도 그 점에서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집합적으로 모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잘 알고 있다. 경제를 발전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개별 사회는 화석연료를 열심히 소모해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것을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국가가 화석연료를 더 많이 소모하고자 경쟁한다면 지구는 점점 뜨거워져 전체 인간이 살기 힘들어진다. 평등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평등은 구성원들의 만족도를 높이고 범죄율을 낮춰주며, 전체 사회의 안정성을 높여준다. 과거 사민주의 전성기가 모든 것이 완벽한 시대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풍요롭고 평등하다는 환경 자체가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심리적 안정이 되어준 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개별 국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평등은 구성원 간의 공동체 의식과 연대 의식의 기반이 되어준다. 내 주변 사람들이 나와 상당한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을 때, 그 집단에 대해 헌신적이고 이타적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째서 소련인들은 조국을 위해서 그런 엄청난 고통을 감내했으며,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업적들을 동시에 달성해낼 수 있었을까? 사회가 평등한 것은 이런 성취를 이루어내는 데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구 러시아 제국 같은 귀족 사회, 필리핀 같은 지주제 사회, 현대 미국 같은 새로운 계층 사회는 구성원들 사이에서 ‘같은 집단’이라는 동질감을 앗아간다. 엘리트들은 타국의 엘리트와 더 동질감을 느끼고, 대중들과 심리, 정서 면에서 점차 유리된다. 이 골이 누적되면 결국 국가의 정치적 안정성 자체가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결국 노멘클라투라들도 나중에는 인민을 버리고 올리가르히가 된 것이고, 그 올리가르히에 분노한 러시아인들은 푸틴을 뽑아주는 것으로 대응한 것이다.


음울한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진다. 피터 터친은 변경 지대에 위치한 평등한 사회가 제국으로 발전할 확률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발전을 일정 수준까지 이룩하면, 제국은 발전의 동력이 되었던 여러 요소를 상실하여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도 말했다. 첫째 요인은 발전의 필연적 결과로 발전에서 더 많은 과실을 누린 지도층이 등장하게 되고 세습이 시작되면서 사회 연대의식이 약화되는 것에 있었다. 


터친은 그런 와중에 사회가 완숙하여 발전의 속도가 느려질 국면이 되나 엘리트층의 재생산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엘리트가 과잉생산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과거에는 엘리트를 위해 제공되는 100의 파이를 10명의 엘리트가 나눠먹었다. 그런데 10명의 엘리트가 20명으로 불어났고, 엘리트들의 눈높이는 이제 20을 바라고 있는데, 파이는 겨우 150으로 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터친은 이런 국면에서 엘리트 간의 갈등도 더욱 심해진다고 분석했다. 전근대 사회에서 이는 곧 내전을 의미했고, 현대 사회에서는 보다 안정화된 정치적 혼란 정도를 의미한 것이었고 말이다. 이번 서울대생들과 고려대생의 집회는 그런 ‘엘리트 과잉생산’도 우리 사회에 감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울대생들이 (그들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한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우리도 팍팍하게 살고 있는데’ 그 룰을 위반한 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인서울 명문대생들의 반감과 그렇지 못한 다수 청년의 반감은 미묘하게 구분되는 점이 있다고 본다. 상층과 하층의 계층화라는 첫 번째 골과, 과잉생산된 엘리트들의 내부 투쟁이라는 두 번째 골로 말이다.


즉, 이러한 점을 종합했을 때 당분간 한국 사회는 계층 문제로 더욱 심한 갈등과 혼란을 겪을 것 같다. 저성장 국면에서 계층 문제는 이민, 젠더 갈등의 문제를 심화시켜 반엘리트 정서를 충족시켜주는 정치인들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 사회는 서구 사회만큼 계층화의 역사가 길지 않고(1953년에 모든 것이 초기화 되었기에) 이민 문제도 그렇게까지 크지 않으며, 기성 정치권의 지도력이 아직은 견고하기에 이 모든 것은 기우일 수 있다. 하지만 정의로운 사나이 조국이 가족들까지 모두 조사받고 그 위선이 손가락질 받게 될 줄 그 누가 상상했겠는가? 아니면 철의 장막이 어느날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레닌의 유훈을 받들어 모시던 공산당 관료들이 하루 아침에 국가 재산을 훔치는 강도들로 변하리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렇다면 이런 위기가 닥쳐오기 전에 한국 사회가 이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사실 확신이 서지 않는다. 스탠포드 대학교의 역사학자 발터 샤이델은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ler)>에서 인류 역사상 불평등을 장기간에 걸쳐 유의미하게 줄인 요인은 오직 네 가지 대재앙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총력전, 공산주의 혁명, 대규모 전염병, 국가 붕괴가 각각 그것이다. 한국과 소련을 포함해 상당수 국가들이 총력전과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몹시 평등한 사회로 이행했고, 그를 기반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하지만 그 누가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파괴하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면서 평등 사회를 이룩하자고 주장할 것인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도 없을뿐더러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 합의를 이룰수 조차 없는 주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득주도성장이 불평등 해소에 실패한 것은 어찌보면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고, 장기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대부분의 정책들은 그다지 가시적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한 번 소련과 한국에서 평행선처럼 통용되었던 공식을 떠올리자. 사회가 발전하면 차등적으로 이득이 돌아가며, 더 많은 이득을 확보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녀에게 그 자원을 투자한다. 이 과정에서 공식적 교육과 비공식적 인맥이 개입하는 것은 결코 막을 수 없다. 조민씨가 그렇게 어이 없게 논문의 저자로 등극하게 되는 과정을 당시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조국 후보자의 임명을 둘러싼 이 모든 이슈가 너무 재미있었음에도, 다소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30년 전 86과 6 사이에 벌어진 분기점에서 출발해 끝내 그들 자녀 세대에서 너무나 노골적으로 벌어진 계층화가 이토록 극적으로 드러난 사례는 당분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이 1인당 GDP 3만 달러의 강국으로 떠오르는 데 이 모든 일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던 일이었다는 점은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더욱 절망적인 것은, 역사적 선례와 주변 선진국의 상황을 보았을 때 이 같은 상황에 개선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아직 한국이 영국, 프랑스, 미국 같은 수준으로 엘리트와 나머지의 격차가 커지지는 않았으나, 이제 대학에 들어오기 시작한 00년대생들 사이에서 그 격차는 더 클 것이고, 그 뒤는 아예 서로를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있을까? 386 세대가 천년왕국을 건설해 결국 한국도 소련의 운명을 따라가게 될까? 아니면 어찌어찌 적응은 해서 보다 역동적이지만, 영국과 미국 같이 신분제가 형성되는 사회로 안착할까? 그 점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모른다’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386도 아니고, 386이 만들어준 레일 위만 달려온 청년들도 아닌 다른 누군가들이 만들 수 있는 길 말이다.






< 지극히 낮은 곳을 향했던 의사 >

ㅡ 1995년 12월 25일


예수가 탄생한 지 1995년 (12월 25일이 원래 예수의 생일이 아니라던가, 서력 기원 계산이 잘못되었다던가 하는 반론은 받지 않겠다. 그냥 그렇다고 친다.)되는 해, 예수는 아마도 꿈에도 몰랐을 동쪽의 머나먼 나라에서 평생 그의 가르침을 따르던 의사 하나가 거룩하다고 감히 표현해도 무방한 일평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이름은 장기려.  


장기려 자신은 부인했지만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모델이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그는 일찌감치 이름을 날렸던 의사였다. 1928년 그의 나이 열 일곱에 그는 경성의전에 입학하고 32년 수석으로 졸업한 뒤 스승 밑에서 조교로 일하며 실력을 쌓는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경성의전 교수 또는 도립병원장으로 가라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제안 받지만 그를 정중히 거절하고 평양의 후미진 병원으로 향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었다. 


“나를 본 한 할머니는 청진기만 대면 병이 낫는 줄 알고 가슴에 청진기를 한 번만 대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치료비가 없어 평생 의사 얼굴 한번 못 보고 죽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 


예수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감화시켰지만 그는 의술로서, 그리고 더 크게 인술(仁術)로서 사람들의 가슴에 사랑을 심었다. 해방 이후 김일성의 외삼촌 강양욱이 조선 기독교 연맹을 조직하고 그에 반대하는 목사들이 탄압받던 시절, 김일성대학에 재직하던 그 역시 북한 보위부의 뒷조사를 받지만 보위부 일꾼들이 감동할 만큼 그의 행적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전쟁이 터지고 국군이 평양에 육박할 무렵, 김일성대학 병원 근처에 떨어진 포탄에 놀란 의사들이 사색이 되어 피할 것을 청했을 때 “의사가 되어서 환자들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고 불같은 호령을 내렸던 의사로서의 열정은 기독교를 마뜩지 않아 하던 공산주의자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먼 훗날 뒤통수에 난 혹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던 김일성 주석이 “장기려가 있었으면 내 몸을 맡길 수 있었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는 전언이 전해지니 미루어 짐작이 간다. 


긴박한 전쟁통에 그는 아내와 다섯 아이를 북에 남긴 채 둘째 아들 하나만 데리고 월남해야 했다. 이윽고 그의 외롭지만 의롭고, 고되지만 거룩한 인생의 후반전이 시작된다. 1951년 1월 부산에 복음병원을 세워 전쟁과 가난에 신음하는 바닥의 사람들을 잡아 준 것은 그 시초였다. 


“무엇보다 잘 먹는 게 중요합니다. 꼭 잘 먹어야 해요.” 의사의 신신당부를 들은 환자는 의사가 써 준 처방전을 들고 원무과로 갔다. 그런데 원무과 직원은 그 처방전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이 사람에게 닭 두 마리 값을 주고 보내시오.”


 환자에게 돈 받을 생각보다는 돈 내줄 궁리를 하는 의사는 일단 경영자로서는 실격이다. 직원들의 불만도 있을 법했다. "당신은 처자식이 북에 있지만, 우리는 주렁주렁 남쪽에 달고 살고 있단 말이다! " 투덜거리며 입을 내밀었으리라. 그래서 적잖은 하소연도 하고 압박도 이뤄졌으리라. 

 그때 한 환자가 원장에게 자신의 빈한함을 호소했고 원장은 또 한 번 기가 막힌 처방전을 내린다. “직원들이 퇴근한 뒤 뒷문으로 오시오. 내가 문을 열어 두겠소.” 어떤 가난한 여인에게는 아예 탈출을 사주하기도 한다. 치료비가 없다고 호소하는 여인의 손을 잡고 짤막하게 기도를 한 뒤 장기려는 눈을 빛내며 말했던 것이다. “기회를 봐서 환자복 갈아입고 탈출하시오.” 


장기려는 왜 이런 행동을 했는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의사가 된 날부터 지금까지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위한 책임감을 잊어버린 날은 없었다. 나는 이 결심을 잊지 않고 살면 나의 생애는 성공이요, 이 생각을 잊고 살면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다.”


장기려는 그렇게 인자한 의사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선포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짖은 예수를 대신하여 한국 기독교계에 침투한 맘몬신을 일생 내내 혐오한 지사이기도 했다. 


 “고층 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되고, 특히 하늘을 찌를듯한 고딕건물 예배당도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대리석으로 으리으리하게 지어지고 그 종탑이 바벨탑같은 한국의 교회들에게서 그는 맘몬의 악취를 맡고 있었다. 그의 말을 계속 옮겨 본다. 


“나는 무신론, 사회주의를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자계급에 대한 가난한 자들의 외침은 실로 인류의 여론이다. 부자들이 고통을 당할 때가 오리라. 이 문제는 다만 부자 계급만의 일이 아니다. 부족하다고 해도 우리도 어느 정도 재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는 일은 없는가? 아, 크리스챤이 믿음의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단순한 동정심조차 일으키지 않고 조금의 기부금도 내는 사람이 적은 것은 이 얼마나 저주받은 사회인가.” 


성전 앞에서 비둘기 파는 자들을 징치한 예수처럼, 그는 이 말로 우리들 마음 속에서 활개치는 탐욕의 멱살을 잡는다. 그리고 이미 배부른 제사장들의 전유물 , 로마 제국의 무기로 전락해 버린 한국 기독교를 들어 메친다. 


그는 평생 버는 것보다 주는 것이 많은, 가불투성이의 인생을 살았다. 당뇨병으로 고생하면서도 기력이 있을 때까지 무의촌을 돌면서 자신이 평생 믿고 따른 예수의 사랑을 전했던 그가 60년 의사 생활에서 남긴 것은 천만원이 든 통장 하나. 그는 그 통장마저 자신을 마지막으로 간호했던 간병인에게 전한다. 


 북에 두고 온 아내를 위해 평생 동안 수절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를 ‘특혜’라고 거부하는 바람에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떠난 날은 예수가 이 땅에 온 날이었다.  여기에는 뭔가 뜻이 있을 것만 같다. 


그의 말 하나만 더 인용해 보자. 그는 예수가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하고 싶어 좀이 쑤실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세워 두거나 달아 놓거나 달고 다닐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과 싸우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


ㅡ From 후배 김형민PD


주검의 신비



구상도(九相圖)
일본 불교에서 간헐적으로 그리는 불화중 하나.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들에 방치하여 들짐승으로 하여금 쪼아 먹도록 하는 풍장(風葬)을 지낼 때,
이 과정을 9단계로 나눠서 그리는 그림이다.


1. 신사상(新死相)
시체가 갓 죽어서 눕혀진 모습.


2. 방창상(肪脹相 / 팽장상 膨腸相)

시체가 죽은 뒤, 시간이 지나면 내장과 혈관에 가스가 차고 온 몸이 부풀어 오른다.
가스가 많은 경우, 이때 복부가 폭발하기도 한다.


3. 혈도상(血塗相 / 농란상 膿爛相)

시체의 부패가 활성화 되기 시작하면, 시체의 내장, 지방, 혈액이 체내의 높은 온도에 녹아서
구멍으로 그 지방들이 흘러나오게 된다.
(인간의 시신은 가스화 진행시 화학 작용에 의해 40 ~ 50도의 고온을 발산한다.)


4. 방란상(肪亂相 / 봉란상 蓬亂相)

살속의 모든 피하조직이 흘러나오게 되면, 다음으로 살갗이 녹아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5. 5. 담식상(噉食相/ 충담상 蟲啖相)
남은 살거죽과 썩어 문드러진 내장에 구더기가 끼고, 들짐승과 날짐승이 고기를 뜯어먹는다.


6. 청어상(靑瘀相)
부패를 마친 시체는 전신이 검고 푸르게 물들게 된다. 


7. 골련상(骨連相/ 백골상 白骨相) 

 들짐승에게 뜯어 먹혀, 몸에 가죽이나 살은 거의 남지 않게 된다.


8. 골산상(骨散相/ 분산상 分散相)
이제 살가죽은 하나도 남지 않고, 오직 뼈만 남아서 백골의 모습으로 남게된다.


9. 골산상(骨散相)
뼈도 더이상 온전하지 않고, 산산히 흩어지거나 땅에 동화된다.


9-1. 고분상(古墳相) : 흐트러진 뼈를 모아 무덤을 만들어 완전히 흙으로 돌아간다.(풍장의 경우)

9-2. 화소상(火燒相) : 남은 뼈를 불에 태워버리고 뼈를 수습한다.(화장의 경우)


구상도는 크게 9단계로 구분되나 분류에 따라 조금씩 달라서
신사상 앞에 살아 고인의 생전의 모습을 그린 생전상(生前相) 넣거나
골산상 뒤에 시신을 수습하여 무덤을 만든 그림인 고분상(古墳相)을 넣는 경우도 있으며
(고분상과 골산상을 합쳐서 하나의 그림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위의 그림처럼 방란상을 두 개로 나누어 그리는 경우처럼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그림이 그려진 시대의 승려는 대부분 남성이었기에
구상도에 그려진 시신은 번뇌의 대상이었던 여성이 많았다.

구상도의 소재로 사용된 인물 중에 가장 유명한 이는
52대 사가(嵯峨) 덴노의 정실이었던 단린황후(檀林皇后)가 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단린황후는 살아있던 사람도 죽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가르침을 남기기 위해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방치시키고 구상도를 그리게 하였다.




국가안전기획부 특수공작원 출신 박채서씨의 일대기가 영화와 책 <공작> 으로 나왔다.

그는 20년간 공작원으로 활동했지만 이명박 정부 때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특수공작원 출신 박채서씨는 ‘흑금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특수공작 일대기를 담은 영화 <공작>이 개봉되었다. 2권짜리 책 <공작>도 출간됐다. 저자는 박씨를 원 <시사저널> 때부터 취재했던 김당 〈UPI 뉴스〉 선임기자다. 박씨는 원래 국군정보사령부 대북 공작관이었다. 박씨의 공작 능력에 주목한 국정원이 그를 스카우트했다. 그는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에 위장 침투해 1997년 6월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까지 만났다. 그를 만나 파란만장한 생애와 대북 특수공작 활동의 이면을 들었다.

박씨는 충북 청원 출신으로 1977년 육군 제3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육군 소위로 임관했고 육군대학 졸업식 때는 참모총장상을 받을 만큼 뛰어났다. 1990년 소령 계급장을 달고 국군정보사령부 공작단 본부에 배속됐다. 그는 정보사에서 한미합동공작대(902정보대)에 파견된다. 당시 그는 미국 정보 요원들과 함께 북한 핵개발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했다.

ⓒ시사IN 윤무영 북한에 군의 작전교범 등을 전달한 혐의 등으로 구속된 박채서씨는 2016년 6월 만기 출소했다. 그는 재심을 청구할 계획이다.

“3년 공작 끝에 1992년 4월경 중국과학기술대학에 적을 둔 조선족 출신 핵물리학자 김상헌 교수를 포섭했다. 그로부터 북한이 저급한 수준의 핵탄두 2개를 개발했다는 정보와 근거자료를 입수했다.”

박씨는 김 교수에게 공을 들여 접근한 뒤 남한에서 열린 한반도 세계평화포럼에 초청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공조한 포섭 공작이었다. 당시 CIA는 북핵 개발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김 교수에게 현금 100만 달러와 두 자녀의 미국 시민권 및 유학을 제공했다고 한다. 박씨는 미국 정부가 북한 핵개발 정보를 한국 정부와 공유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숨겼고, 그 결과 김영삼 대통령(YS)은 2년 뒤인 1994년 6월 1차 북핵 위기가 터질 때까지 북핵에 대해 몰랐다.

“한미합동공작대에서 한국 측은 권한이 없었다. 상부에서 양국이 정보를 공유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미국 말 잘 듣는 안기부 측이 차단한 것으로 의심된다. YS가 핵개발 정보 알았다면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다.”

정보사 요원들의 해외 파견은 지금도 계속된다. 2016년 류경식당 여종업원 12명 탈북 사건 때도 정보사 공작원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에 대해 박채서씨는 해외 공작에 파견된 정보사 요원은 국정원 소속이라 속이고 활동한다고 밝혔다. “정보사는 해외 공작을 하면 안 된다. 장교들이 해외에 나가 공작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고, 자칫하면 복잡한 외교 문제가 발생한다.”

박씨는 한미합동공작대에 3년여 근무하는 동안 일부 한국 지도층의 추악한 실상도 목격했다. “한국 각계각층 저명인사 380명이 미국 공작원으로 일하더라. 미국은 그들을 시민권으로 포섭했다. 그 실태를 은밀히 조사해 정보사에 보고했더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가 주력한 공작 사업은 중국을 무대로 벌인 북한 ‘포대갈이 사업’과 조총련계 재일동포를 통한 우회침투 공작이었다. 포대갈이 사업이란 중국산 농산물을 북한 남포항으로 싣고 가 포대만 북한산으로 바꾼 뒤 국내로 들여오는 공작을 말한다. 박씨는 이 과정에서 당시 북한 실세 장성택의 조카 장현철과 라인을 구축했다. 장현철은 장성택의 형 장성우(2009년 사망)의 아들이다.

박씨는 장성택·김경희를 공작 목표로 접근하면서 안기부 도움으로 포대갈이 사업을 적극 이용했다. 장현철한테 16만 달러어치 농산물을 수입한 뒤 인천세관에서 통관 불허토록 조치했다. 이 일로 장현철은 중국 공안에 구금됐다. “장성택·김경희 집안이면 16만 달러 정도는 쉽게 만들어 구금을 막을 거라 생각했는데 못 만들더라. 북에서는 아무리 고위직이라도 외화를 맘대로 못 만지는 걸 확인한 것이 공작 성과였다. 우리가 그걸 해결해주는 조건으로 중국 공안이 장현철을 풀어줬다. 당시 북한군 중장 장성우는 자기 아들을 살려줬으니 얼마나 고마웠겠나. 나중에 그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 내 평양 방문이 성사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남북 양측으로부터 신임 얻어


이런 박씨의 공작을 안기부가 눈여겨보았다. 1995년 3월 안기부는 그를 스카우트하고 정보사로부터 사업 전체를 턴키방식으로 넘겨받았다. 박채서씨는 이때부터 안기부 해외공작실 소속 공작원(암호명 흑금성)으로 대북 특수공작에 투입됐다. 정식 인가 공작이었다. 인가가 난다는 건 대통령 또는 안기부장 승인 아래 국가 예산과 행정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사업으로 추진한다는 뜻이다. 공작 전반이 국내법상 보호를 받는다.

박씨는 ‘아자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광고회사 전무로 위장 취업했다. 사업가로 위장한 그는 남북 합작 광고를 찍는 사업을 추진하며 북한을 오갔다. 그리고 북한 보위부에 포섭당해 ‘이중 스파이’로 공작을 벌일 계획이었다. 그는 보위부에 위장 포섭되면서 남북 양측으로부터 신임을 받아나갔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는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 별관에 소장돼 있던 골동품 처분을 관장하고 있었다. 이를 제값에 매각해줄 신뢰할 만한 파트너를 찾던 중 장성택 라인에 선을 댄 박채서씨가 눈에 띄었다. 박씨는 고려청자 등 골동품 6점을 받아 서울로 반입해 비싼 값에 처분해주었다. 또 감정사를 데리고 북한으로 가서 감정 능력에 신뢰를 심어주었다. 이 모든 과정이 안기부 협력 속에 이뤄졌다.

박채서씨의 특수공작 성과에 청와대와 안기부는 고무됐다. 결정적으로 북한 수뇌부에 정보기관의 공작이 접근되지 않던 전례를 깼기 때문이다. 1996년과 1997년 연속 안기부가 공작원들을 평가해 수여하는 포상에서 박채서씨가 최우수자로 선정됐다. 각각 4000만원과 5000만원의 포상금을 받았다. “묘향산 골동품 처분 공작은 안기부에 엄청난 성과였다. 통치 비자금을 만들려는 김정일 위원장 입장에서는 보위부를 통한 나에 대한 검증뿐 아니라 내가 골동품을 받아다 처리하는 과정을 확인하고 ‘틀림없는 우리 사람이다’는 보고가 위로 올라가니 한번 보자고 했다.”

박씨는 1997년 6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접견했다. 남한 정보기관의 공작원이 북한의 최고위층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김 위원장은 박씨에게 30분에 걸쳐 세 가지 사항을 얘기했다. 아자커뮤니케이션 광고사업과 묘향산 골동품 처분에 대한 격려와 치하였다. 나머지 한 가지는 뜻밖에도 남한 대선 이야기였다. “남조선의 12월 대선이 공화국을 위해 매우 중요하니 관계 사업일꾼들과 합심해서 열성적으로 공작해달라고 주문했다. 그 뒤 조평통 안병수 부위원장과 강덕순 참사를 만나 대선 토론을 했다.”

이 과정에서 박씨는 북한 수뇌부가 한국 대선에 개입하려 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북한은 예상과 달리 김대중 후보를 가장 껄끄러워했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김 후보는 북한이 다루기 어려울 정도로 노련한 인물이고, 둘째, 김 후보가 당선하면 용공분자 이미지를 불식하려고 더 강한 반공정책을 펼 가능성이 높다는 점, 셋째, 북한 인민들에게 김대중 후보를 민주투사로 선전해왔는데 그가 대통령이 되면 비방할 명분이 줄어든다는 점이었다. 이회창 후보도 아버지가 골수 친일파였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강하게 보였다. 북한은 당시 이인제 후보를 가장 선호했다.

박씨는 귀국 후 안기부에 김정일 위원장 면담 결과와 대선 개입 의지를 보고했다. 그런데 권영해 안기부장은 이회창 후보를 밀고 있었다. 김영삼 청와대는 이인제 후보를 지원했다. 특히 권영해 부장의 이회창 후보 지지 배경에 미국이 있다는 첩보가 나돌았다.

박씨는 고민에 빠졌다. 남북 수뇌부 양쪽에서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대선 공작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박씨는 평소 잘 아는 기자를 통해 김대중 후보 캠프 대변인 정동영 의원을 소개받았다. “정동영씨한테 북한이 왜 김대중 후보를 싫어하는지, 그리고 김대중 낙선을 위한 첫 번째 공작으로 천도교 교령 오익제 월북사건부터 줄줄이 터지게 될 것이라고 귀띔해줬다.”

그러나 정동영 의원은 처음에는 그의 제보를 안 믿었다고 한다. 아무 연락이 없다가 그해 8월 오익제 천도교 교령이 월북했다는 뉴스가 뜨자마자 정 의원이 박씨를 찾았다. 당시 박채서씨는 광고사업 협의차 평양에 있었다. “보위부 안내로 만경대에 갔는데, 오익제가 거기 와 있더라. 북한 보위부장이 오익제를 소개해줘서 같이 기념사진을 찍은 뒤 돌아왔다. 와보니 김대중 후보 쪽은 안기부의 기획 월북이라 하고, 권영해 부장은 정동영 의원을 고소한다고 하고 난리도 아니더라.”

정동영 의원과 박채서씨는 다시 만났다. 이 자리에 정동영 의원은 군 출신인 천용택 의원을 동반해 나왔다. 천 의원이 박채서씨의 신분을 안기부에 확인하는 과정에서 안기부 감찰실에 박씨가 야당 의원을 만난다는 사실이 노출되기도 했다. 박씨의 윗선이었던 안기부 공작관은 야당 의원과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무마해줬다.

선거가 임박할수록 박씨가 처음 제보한 안기부발 북풍 공작 시나리오가 하나씩 실체를 드러냈다. 김대중 캠프는 다급해졌다. 1997년 11월5일 밤 김대중 후보가 직접 박씨를 만났다. 김 후보는 북풍 공작을 막아달라고 그에게 요청했다.

“김대중 후보가 탄 차에 오르자마자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박 선생, 대통령이 되고 싶소. 그런데 북풍을 못 막으면 난 안 되오. 박 선생이 도와주시오.’ 그 말만 김대중 후보가 하더라. 나는 ‘알았습니다’ 외에는 아무 말 안 했다.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본심 이상 솔직한 게 어디 있나. 만약 김 후보가 국가와 민족 이런 거창한 말 꺼냈으면 안 나섰을 거다.”

박씨가 수집한 안기부의 대선 공작 관련 정보는 1997년 대선 때 북풍을 막는 데 기여했다.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쪽이 북한에 무력시위를 제안한 총풍(銃風) 사건 정보를 파악해 김 후보 쪽에 알렸다. 박씨는 또 안기부의 김대중 후보 낙선을 위한 북풍 공작이었던 ‘아말렉 공작(재미동포 윤홍준의 김대중 후보 비방 기자회견)’도 사전에 알려 무력화했다.

“북풍을 막으려면 권영해 부장을 막아야 한다고 김대중 캠프에 조언했다. 내가 북한 묘향산 골동품을 받아 처리할 때 그 비용 가운데 일부가 권 부장과 관련한 뒷돈이 있었다. 천용택 의원이 당시 권영해 부장을 찾아가 북풍 공작에서 손 떼지 않으면 묘향산 골동품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담판해 결국 막아냈다.”

1997년 12월 대선에서 근소한 표 차로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했다. 하지만 박씨는 공작원으로서 활동을 더는 할 수 없었다. 김대중 정부 초기 1998년 3월 북풍 공작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권영해 안기부장과 이대성 해외공작실장 등이 자신의 공작을 은폐하려고 ‘해외공작원 정보 보고’를 짜깁기해서 만든, 이른바 ‘이대성 파일’을 언론에 공개했다. 이 파일 공개로 안기부 수뇌부가 인가한 대북 특수공작원 흑금성 신분도 노출되었다. 신분을 가리고 활동하던 ‘블랙 요원’이었던 그의 신원이 노출된 것이다. 결국 박채서씨는 1998년 6월 위로금을 받고 안기부에서 해직되었다.


“재심을 청구하겠다”

 

공작원이 사회에 나와서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박씨는 중국으로 건너가 사업을 모색하는 한편 한때 자신의 보위부 연락책을 만나 남북 협력 광고 사업을 재추진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에는 남한 톱스타 이효리와 북한 무용수 조명애가 함께 등장한 남북 합작 광고 제작에도 관여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6월10일 새벽 그는 자택에서 국정원 요원들에게 체포되었다. 북한에 군의 작전교범 등을 전달한 혐의 등으로 2010년 6월 구속 수감돼 이듬해 징역 6년 형이 확정됐다. 박씨는 2016년 6월 만기 출소했다.

기자에게 6시간 동안 공작 활동의 비화를 털어놓은 그는 재심을 청구하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공작원으로서 본분을 어기고 ‘간첩질’을 했다는 얘기는 진실도 아니고, 내 인생과 자존심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공작원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으면 어떤 공작원이 사명감을 가지고 국가를 위해 음지에서 일하겠는가?”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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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평
 ● 1956년 대구 출생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석사, 영남대 박사(헌법학)
 ●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 합격, 인천지방법원·서울가정법원·대구지방법원 경주지원·대구지방법원 판사
 ● 일본 최고재판소 외국재판관 연수, 히토쓰바시대·게이오대 객원연구원, 미클리블랜드주립대 수학
 ● 現 경북대 법학부 교수, 앰네스티 법률가위원장, 한국비교공법학회 부회장
 ● 저서 및 논문 : ‘사법개혁을 향하여’ ‘명예훼손법’ ‘한국 사법부의 근본 문제점 분석과 그 해소방안의 모색’ 등


1993년 대구지법 판사로 근무하던 중 사법부 개혁을 요구하는 글을 썼다가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한 신평 경북대 법대 교수. 그가 로비가 횡행하는 사법부의 세태를 고발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한 원고를 ‘신동아’에 보내왔다. 신 교수의 판사 재임용 탈락은 당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킨 끝에 국정감사로 이어진 바 있다. 그는 이후 변호사 생활과 농사를 병행하다 몇 년 전부터 대학 강단에서 헌법학을 강의하고 있다.


● 나도 판사 때 골프접대 받고 기생방 드나들었다, 그러나…
● 엄동설한 판사실에서 판결만 고민하는 ‘성자(聖者) 판사’
● 재판에 국민참여 배제하는 사법부의 오만불손
● 전관예우는 ‘아름다운 법조 질서’?
● 청탁 일삼는 ‘고문판사’와 ‘관선변호 판사’
● 법관징계제도 개혁으로 사법부 ‘과거청산’ 시작해야
● ‘비리 재판’ 막을 통제 시스템을 許하라!



올해 장마는 유난히 길었다. 수해를 입은 곳도 많다. 20년 가까이 경북 경주의 농촌에 살면서 논농사도 짓고 밭농사도 지어봤다. 올해처럼 큰물이 지거나 태풍이 닥쳐 쓰러진 벼를 다시 일으키는 작업을 할라치면, 그 노역은 끔찍스러움을 넘어 공포로 다가온다. 진창에 빠진 두 다리를 어렵사리 옮겨가며 하는 작업은 도시인이 상상하기 힘든 중노동이다. 한 시간 꼬빡 해봐야 한두 평밖에는 벼를 묶어세우지 못한다. 진흙물이 이리 튀고 저리 튀어 온몸을 덮는다.
 
올해는 장마만 길었던 게 아니다. ‘윤상림 게이트’가 터져 온갖 추문이 쏟아지더니 뒤이어 ‘김홍수 게이트’가 터졌다. 국민은 김씨가 로비 대상인 판사들을 가리키며 “그들은 술과 돈에 취해 있었다”고 한 말을 듣고 소름이 끼쳤을 것이다. ‘판사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의 ‘착한’ 국민은 지긋지긋한 장맛비가 끝나 맑은 날이 찾아오면 쓰러진 벼를 일으켜세우며 새로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청청한 하늘 아래 풍성한 계절의 회귀를 기다린다. 그때쯤이면 그들의 미간을 찌푸리게 했던 불쾌한 소식들은 망각의 조각으로 흩어질 터이다. 언론도 그저 그런 일과성 사건이 되어버린 ‘…게이트’라는 아이템을 재빨리 내던지고 대중의 눈을 끌 만한 사건으로 말을 옮겨탈 것이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는 사법부의 부정에 분노하면서도 왜 이렇게 빨리 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런 부정이 생겨나는 근본원인을 작심하고 파헤쳐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법부의 부정에 대한 국민의 큰 오해 가운데 하나는 윤상림, 김홍수 같은 법조 로비스트들이 법의 심판을 받고 나면 사법부가 제자리를 찾아가리라고 기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법 부정 혹은 사법 부패는 결코 일과성 현상이 아니다. 윤상림, 김홍수라는 인물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사법 부정은 한국의 사법부나 법조(사법부와 검찰, 변호사회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보통 ‘법조 삼륜’이라 부른다)에 내재한 구조적 결함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또 바깥으로 터져 나오든 그렇지 않든 그 안에서는 이런 일이 끊이지 않는다. 윤상림, 김홍수 게이트는 빙산의 일각이다.


‘사법 부정’에 대한 오해


우리나라에서 재판은 국민의 재산, 생명, 신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막강한 힘을 행사한다. 문제는 그런 재판의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적절한 제어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이 항상 올바르게 행해진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사법제도는 다른 나라 사법제도에 비해 거의 낙제점에 가깝다. 법관이 자발적으로 올바른 재판을 하기를 막연히 기대하는 것말고는 공정한 재판이 이뤄지도록 강제하는, 실효성 있는 제도적 장치가 거의 없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그나마 각종 법조비리 게이트가 불거져 나오는 것이 우리 사회가 그간 꾸준히 진일보해온 덕이라고 보면 된다.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구속되는 일이 어찌 일어날 수 있었으랴! 국민 여론의 압력이 노도처럼 밀려들어 까딱 잘못하다간 큰일 날 듯하니 그를 구속시키고 국민들에게 사과도 하는 것이다. 옛날 같았으면 이런 게이트들은 십중팔구 법조 내부에서 은폐되고 말았을 것이다.

과거 이토 히로부미가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4자성어를 농락하며 조선 병탄(倂呑)을 정당화했듯, 우리의 사법부는 ‘법조의 세 수레바퀴는 하나’라고 그 동지적 유대성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며 자신의 부정과 부패를 가려왔다. 대개 이러한 유의 동질성 강조는 그 속에 음침한 함정을 품고 있는 법이다. 그래서 법조부정이 발생해도 서로 쉬쉬하면서 사건 유발자에게 은밀히 정보를 흘려 사표를 내도록 한 뒤 입을 싹 닦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해왔다. 물론 그들에겐 그렇게 해나갈 분명한 이익의 공유가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내게 과연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판사생활 동안 접대골프나 기생방 출입에 찌든 적도 있었고, 돈 봉투도 여러 번 받았다. 사건에 직접 관계된 돈을 받지 않았노라고, 또 그런 잘못된 법조문화에 저항하며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다며 호소하고 싶지만, 이 또한 알량한 자기변명임을 잘 안다. 훗날 변호사를 할 때는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며 자존심을 굽히고 열심히 판·검사를 접대하기도 했다.

필자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의 비리를 고발한 판사’로 낙인찍혀 사법부에서 쫓겨난 뒤 변호사 사무실의 직원을 구하는 데조차 애를 먹고, 개업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고작 한 건의 사건밖에 수임하지 못해 참담해했다. ‘이 모든 것이 어쩌면 판사로 있을 때 억울한 판결을 내린 나 자신의 업보 때문이 아닐까’라며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날이 그 얼마였던가.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그 업보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미치게 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 자존심이니 뭐니 하는 생각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사법부의 변화를 갈망하는 글을 쓰는 이 자리에서 ‘적어도 나는 약정한 액수 이외의 수임료는 절대 받지 않는 변호사였다’ ‘사건과 직접 관련된 판·검사 접대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따위의 변명을 하고 싶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오십보, 백보다. 그런 부패구조와 완전히 단절하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이 져야 한다는 사실을 필자는 너무나 잘 안다.

또한 갖은 악조건 속에서 훌륭한 판결을 내놓는 판사,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변호로 귀감이 되고 있는 변호사가 더 많다는 사실도 잘 안다. 필자는 언제나 그런 분들을 존경하며 사법부에서 같이 일하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했다. 엄동설한에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판사실에서 두꺼운 옷을 몇 벌씩 껴입고 세상일을 모두 잊은 채 오직 사건을 파악하고 판결문을 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던 판사도 지근에서 보았다. 세상에 저런 성자(聖者)가 다시 있을까 하고 탄복하던 기억이 새롭다. 비록 그 정도는 아니어도 열과 성을 다해 판사로서의 직분을 대과(大過) 없이 수행하기 위해 청춘을 바쳐온 많은 판사에게 필자가 지금 쓰는 이 글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것인 줄 잘 안다.

그러나 감히 부탁하자면, 이 글을 사법부에서 늘 말하는 “인격체계가 그릇된 자가 근거 없이 사법부의 ‘염결성(廉潔性)’을 해치는 행위” 따위로는 취급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필자 또한 사법부의 염결성 운운하는,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려가며 사법부를 위한 항변을 늘어놓는 사람 못지않게 사법부에 애정을 품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속한 조직을 보호하려는 맹목적·방어적 의식에 사로잡혀, 그렇게 하는 것만이 과거의 영화롭던 사법부를 다시 회복시키는 지고(至高)의 일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사법개혁이 실패한 까닭


어느 부장검사가 판사, 검사, 변호사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이런 말로 건배를 제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내가 속한 조직의 이익을 위하여 언제라도 이 한 몸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가 말한 조직은 진정한 검찰조직일까, 아니면 자신이 마음대로 생각해낸 왜곡된 마피아식 조직일까.

권위주의 정권이 해체되고 민주화의 열풍이 거세지며 사회 곳곳에서 상당부분 민주화의 결실이 주어졌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과연 ‘민주화된 사법부’를 가졌을까 하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일례를 들어보자. 지금껏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배심제(陪審制) 혹은 참심제(參審制)의 형태로 재판과정에 직업 법관뿐 아니라 일반 국민도 참여시키고 있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만 재판과정에 국민의 참여가 배제되어왔다. 한국을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가 그렇게 해왔다면 거기에는 분명 그만한 근거가 있고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우리 대법원은 2003년 상반기까지 ‘우리 국민은 아직 이를 도입할 만한 수준이 되지 못한다’는 투로 완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이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오만불손한 자세인가.

과거 사법개혁을 주장하는 측에서 상투적으로 내건 슬로건은 ‘외부의 부당한 간섭 때문에 사법부의 독립이 훼손되어 왔으니 이를 시정함이 사법개혁의 본령’이라는 것이었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인가. 결과를 보자. 지금 사법부의 공정한 재판을 저해하고 부당한 지시를 할 만한 자가 있는가. 또 이들 때문에 이런 ‘파렴치한’ 일이 계속 발생하고 사법부가 국민으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는 또 다른 집단이기주의의 발로다. 사법부의 독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 사법부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려는 의도일 뿐이다. 여전히 ‘철밥통’을 누리며 과거에 가졌던 것 이상으로 더 가지며 살겠다는 혐오스러운 의식이다. 사법개혁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재판권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 적정하게 행사되도록 조율하는 것이다.

재판의 공정성을 해치려는 유혹은 그 재판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끝나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일반적 감정이다. 그 재판으로 자신의 인생 전체가 바뀔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거기에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연고주의가 강하게 지배한다. 판사건 누구건 연고를 무시하고 처신하면 거만하고 무례한 인간으로 매도당하기 십상이다. 한국에서 판사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때문에 곤혹스러운 처지에 몰린 경험이 몇 번씩은 있다.


지독한 연고주의, 서열주의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인이 설사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더라도 법관이 되는 것을 막았고, 또 법관으로 발령했더라도 중요한 자리에는 배치하지 않으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에 대한 일제의 변명은 ‘반도 출신들은 연고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연고주의의 실상은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도 읽을 수 있다. 다산은 이 책에서 자신이 고을 수령이 된 후 일가친척이 찾아왔을 때 그들을 어떻게 접대해 인심을 잃지 않았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도대체 일가친척 접대가 고을수령의 직무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필자가 일본에 유학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우리와 비슷한 문화를 가졌을 법한 일본사회가 연고주의에서만큼은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일본도 우리처럼 수직적 네트워크를 가진 사회이다.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를 엄격하게 구별해 네 편, 내 편 가리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사회이다. 그럼에도 그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원칙과 상식이 건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연고 같은 것을 이용해 그런 원칙과 상식을 깨려는 측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게 대응한다. 그래서 사회는 언제나 예측가능하다. 거기에 맞춰 살아가면 되니 다른 데 신경 쓰지 않아도 살아가기 편하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이런 점을 더욱 깊이 느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우리처럼 법조 브로커가 설쳐서 재판과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 최근 들어 우리도 연고주의를 극복하고 원칙에 따라 사회가 움직이도록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또 상당히 좋아지긴 했으나,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렇게 솔직히 인정하며 더 노력해야 우리 사회의 장래가 보장될 것이다.

사법시험은 왕조시대의 과거(科擧)를 연상시키며 치러져왔다. 지금은 상당부분 퇴색했지만 사법시험, 흔히 말하는 고등고시에 합격하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는 인증으로 치부됐다. 그런 가운데 극심한 특권의식이 자리잡았다. 사법부에서 하는 일은 절대 오류가 없고, 설사 조그마한 잘못이 있어도 이는 사법부 내부에서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으니 외부인은 여기에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일관했다. 등산을 할 때도 서열에 따라 발걸음을 맞춰야 한다는 그 지독한 권위주의와 서열의식이 자신의 양심과 법률에 따라서만 재판을 해야 한다는 헌법상의 원칙과 결코 상종할 수 없다.


철밥통 ‘법조 3륜’


그뿐만이 아니다. 법관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용이 터무니없이 베풀어졌다. 사법부에는 어떠한 결함도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달리 대안이 없었다. 분명히 법관의 잘못 때문에 재판이 그르쳐졌는데도, 재판은 정당했고 법관은 잘못을 전혀 범하지 않았다는 상투적인 회답이 민원인에게 돌아갔다. 이런 사건에는 국가배상청구도 허용되지 않았고, 검찰청에 고소해봤자 결과는 늘 뻔했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으로 사건 당사자가 입는 손해는 너무 쉽게 무시됐다.

오직 반복되는 것은 ‘사법부는 완전무결의 조직체’라는 떠벌림이었다. 설사 부패사건이 생겨 문제의 일각이 불거져도 사건 초기단계에서 은폐하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했다. 언론도 협조했다. 검찰은 당연히, 협조 정도가 아니라 ‘공범자’로서 사건의 무마와 은폐에 무소불위의 힘을 기꺼이 빌려줬다.

최근 들어 검찰이 제대로 의식을 갖춘 법무장관들 밑에서 많이 변화했지만 아직은 멀었다.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지 않은 사건, 검사 자신에 대한 평가가 상부로부터 직접적으로 내려질 수 있는 사건을 제외한 일반 사건에서는 과거와 별로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우리 판사들은 다른 나라 사법부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왜곡된 질서에 순응하기를 강요당한다. 하지만 순응하기만 하면 장래는 보장됐다. 처음에는 숨 죽이고 발걸음 하나에도 신경을 쓰며 조심해야 하지만, 엄격하게 설정된 관료체계의 순서에 따라 점점 지위가 올라간다. 후배 법관들은 선배가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웬만한 잘못은 조직이 알아서 감싸준다. 기계적으로 한번 정해진 서열은 해당 법관의 잘잘못에 따라 바뀌지 않는다. 철저하리만큼 ‘철밥통’ 구조이다. 이에 판사들은 점점 편안함을 느끼며, 그 조직이 안겨주는 끝없는 안정감에 그게 바로 최선의 조직인 양 환상에 빠진다.

변호사 개업을 해도 전관예우 관행에 따라 한솥밥을 먹는다는 의식 속에 동료 및 선후배 법관에게서 십시일반으로 특별대접을 받으며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이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기득권이었다. 여기에는 검찰이건 변호사회이건 뜻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다. 재조(在曹) 경험이 있건 없건 많은 변호사는 이런 체제에서 최대의 경제적 수혜자였다. 사건을 처리하는 판·검사와 사법연수원 동기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의뢰인에게 높은 수임료를 당당히 요구하는 게 우리 법조의 현실이다.

이런 문화 양식과 생존 방식에 의문을 품고 어설프게 비판에 나서는 사람은 범법조(汎法曹)의 아름다운 질서를 파괴하는 질서 문란자로, 용서받지 못할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한국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괘씸죄’라고 하지 않는가. 법조계에선 이것이 우스개 말이 아니라 냉엄한 현실이다. 그들은 서로 끊임없이 속삭인다. ‘법조 3륜의 어느 하나라도 타격을 입으면 안 된다’고.


현대판 유민, ‘사법 피해자’


이 거대한 기득권체계에 저항하는 자는 지고지순의 사법부가 생각하는 정의, 어쩌면 초헌법적 정의에 따라 처단돼야 할 대상이 됐다. 국민의 처지를 생각하며 사법부가 이래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표시했다는 이유로 판사가 자격을 박탈당하는 게 우리 사법부의 현실이다. 그들은 해당 판사의 자격을 박탈하는 과정에서 헌법 제12조에 따라 보장된 적법절차의 원칙을 무시하고, 단 한 번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기회조차 봉쇄했다. 나아가 언론사 법조 출입팀에 그 판사의 사생활을 조작해 알려주고, 그가 쓴 글은 ‘인격적으로 형편없는 인간의 믿을 수 없는 말’로 둔갑시켜 문제의 확대 재생산을 봉쇄했다. 기자들은 ‘설마 대법원 공보관이 거짓말을 하겠냐’며 그들의 공작에 말려들었다. 속내는 부조리와 모순으로 팽배해 있으면서도 위선과 가식으로 허우대만 잘 챙긴, 그야말로 ‘회칠한 무덤’이다.

이런 도착된 현실에서 많은 ‘사법 피해자’가 생겨났다. 그들은 피를 토하듯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국가인권위원회도, 국민고충처리위원회도 그들에겐 손을 든 지 오래다. 사설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봤자 대답은 뻔하다. 사법 피해자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막막한 투쟁을 오늘도 계속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재판을 통해 재산을 다 잃고 가정이 풍비박산났다는 것, 그리고 거대한 공권력과 싸우며 이 사회의 편견에 휘감겨 살아오느라 정신이 극도로 피폐해졌다는 점이다. 기존 법질서에 대한 끝 간 데 없는 불신감으로 그들 옆에 서면 살의(殺意)가 느껴질 정도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관련 사법부가 가식을 벗어던지고 조금은 진실해질 것을 요구한다. 필자의 눈에 비친 사법부의 관행을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한 끼의 맛있는 식사를 위해 판결을 팔아버리는 일도 왕왕 있지 않았던가. 재판 날 점 찍어둔 변호사를 가장 뒤에 남게 해 그로부터 식사를 대접받으며 한잔 술로 그날의 피로를 잠시나마 잊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 회합에서 해당 변호사가 바로 그 날의 사건에 대해 ‘소정외(所定外) 변론’을 행할 때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판사도 인간인 이상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실비(室費)니 떡값이니 전별금이니 하는 명목으로 받아들인 돈봉투는 과연 재판부의 노고를 헤아린 순수하고 갸륵한 심정에서 나오는 무채색의 기부일까? 필자가 법관으로 발령받은 후 처음으로 맞은 추석 무렵에 노(老) 변호사 한 분이 봉투를 들고 왔다. 내가 한사코 받지 않으려 하자 그 분이 보여주던 처량하고 난감한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결국 봉투를 받고 말았다. 그런데 점점 봉투를 받는 데 맛을 들였다. 그 후로는 힘든 사건을 잘 판결해줬는데도 인사 한번 오지 않는 변호사는 ‘예의 모르는 변호사’로 낙인찍는 어리석은 판사로 변해갔다.


철면피 판사들


‘김홍수 게이트’에서 적나라하게 불거진 ‘관선변호’는 또 어떤가. 이 용어는 판사 세계에서 은어로 통용된 지 오래다. 사법부에서 선배나 동료 법관이 사건과 관련해 청탁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심심찮게 볼 수 있다’는 말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 그런 선배, 동료, 후배 법관의 등에다 ‘관선변호인’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는 있어도, 현실적으로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기란 소위 한솥밥을 먹는 처지에서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고문(顧問)판사’란 은어도 있다. ‘고문변호사’에 빗대어 쓰는 말로, 어떤 개인이나 기업의 이익을 위해 법원 내에서 설치고 다니며 청탁을 일삼는 판사를 가리킨다. 고문변호사보다는 고문판사의 말이 더 잘 먹혀들어가리라는 것은 뻔한 이치다. 우리가 좀더 솔직해지자면 법관들의 비리 연루는 이런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다르고 요즘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판사실에서 구체적인 사건과 관련해 돈 봉투가 오가는 등 판결거래를 하는 형편없는 판사도 있다. 이번에 부장판사가 판사실에서 돈을 받은 사실이 보도됐으나, 그런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판결을 놓고 노골적인 ‘거래’를 행하는 판사도 있다. 피고인을 보석으로 풀어주면 변호사 사무실에 연락해 변호사가 성공보수금을 제대로 챙길 기회를 주고, 판사실에는 봉투를 갖고 오게 한다. 이런 순환적 거래 패턴을 따르지 않는 변호사에게는 더 이상 은전(恩典)이 베풀어지지 않는다. 혹여 변호사가 깜빡해 실수라도 하면 그 뒤 몇 사건은 ‘각오’해야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절대 그냥 생겨난 말이 아니다. 조관행 부장판사의 혐의사실을 살펴봤더니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사건과 아무 관련 없으면서도 새 차를 샀다면서 변호사들을 하나씩 호출해 대금 일부를 부담하라고 요구하는 ‘철면피 판사’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사건과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 돈, 적어도 몇 백만원의 돈을 들고 들어간 변호사는 그 판사가 아주 중요한 사건에서 틀림없이 좋은 판결을 내려줄 것이라 확신한다.

조직의 보호막은 이런 이들에게도 자애롭게 펼쳐졌다. 징계절차는 개시된 적이 없고, 민원인에 대한 회답은 언제나 똑 같았다. 사법부는 여전히 순백(純白)의 청렴한 조직체로 누구도 이에 대해 반론을 감히 제기할 수 없는, 쇳소리 쩡쩡 나는 기관으로 남아 있다.


새로운 사법지도자의 출현


다행히 최근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한 이래 사정이 많이 변했다. 그는 취임 전 “우리 사법부가 과거에 잘못한 일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이 당연한 말을 쉽게 보아서는 안 된다. 사법부의 수장(首長)이 이 말을 해주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선생 이래 수십년 세월을 기다렸다. 사법부에는 절대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허황된 논리 속에 부패를 은폐하고 기득권을 챙기기에 급급해온 세월이 그토록 길었다. 이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말을 다름 아닌 사법부의 수장 될 사람이 했으니 놀라울 수밖에. 그는 또 우리의 사법부가 이제 국민의 사법부로 거듭나야 함을 누누이 말했다. 참으로 옳은 얘기다.

그러나 사법부는 대법원장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모든 법관에게 소신에 따라 재판할 수 있는, 거의 절대적인 헌법상의 보호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대법원장이라고 해서 재판과 관련해 법관에게 구체적 지시를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헌법 원칙이고 법치주의의 요체다.

문제는 사법부의 잘못된 관행이 너무 오래 계속됐고, 적지 않은 법관이 여전히 이에 물들어 있다는 점이다. 대법원장 혼자 깨어 있다고 해서, 그리고 몇몇 훌륭한 법관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사법부가 환골탈태하리라는 믿음은 너무나 나이브(naive)하다. 결국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집단은 국민밖에 없다. 국민이 나서서 ‘열린 사법부’, 그 구성원들의 집단이익보다 국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법부로 바꿔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시급한 과제가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이다. 일제 강점기 과거사 청산은 그 기간이 너무 길다는 점에서, 그리고 광복 후 지금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은 사정이 다르다. 사법부의 일그러진 구조 아래 피해를 본 많은 사람이 아직도 구제를 호소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있다. 일제 강점기 과거사 청산과는 달리 관련 증거도 많이 남아 있다. 혹자는 민사소송법이나 형사소송법 절차에 따라 재심을 청구하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소송법상의 재심 절차는 그 사유나 기간에서 극히 제한적으로 인정될 뿐이다. 기존의 재판이 모두 공정하게 행해졌다는 것을 전제로, 그 재판 후에 형성된 법률관계를 우선하겠다는 법적 안정성을 중시하는 시각이다.

우리도 이제 저 불쌍한 사법 피해자들의 말에 한번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인혁당 사건과 같이 정치적인 사유로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구제도 하루 빨리 이뤄져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우리 사회에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시국사건이 아닌 일반의 재판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관심의 영역 밖에 있다. 대법원장의 인식대로 우리 사법부가 때때로 잘못된 재판을 한 게 사실이라면 그 사건이 정치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은 일반 사건이든 똑같이 바로잡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사법부 정화를 위한 5대 제안

그래서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국가에서 사법 피해자들을 심사하는 위원회를 구성해 이 위원회가 여러 모로 판단해 정말 억울하다고 인정하는 사건에 한해 특별히 바로 재심이 허용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다만 그 위원회의 구성원들은 기존의 탈 많은 법조체계와 별로 연이 닿지 않은 젊은 법조인들과 건전한 상식을 갖춘 시민으로 구성해야 한다. 물론 재심을 허용한다고 해서 바로 구제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법원의 재판을 통해서 그 정당성이 인정돼야 최종적으로 오류가 시정되는 것이니, 현행 헌법상의 사법국가주의에도 어긋남이 없다.

그리고 과거 사법부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제기했다는 이유만으로 헌법정신에 어긋나게 쫓아낸 법관들에게 다시 한번 그 사유를 심사받을 기회를 줘야 할 것이다. 헌법상의 지위에 있어 법관보다 더 보장된다고 할 수 없는 대학교수에게도(비록 형식적이지만 소명의 기회 등이 이미 주어졌음에도) 재심사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새로운 법 제정을 통해 부여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는 사법부가 취해야 할 당연한 조치라고 본다.

대법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을 내걸었으나 지금껏 진척된 것은 하나도 없다. 더 이상 ‘사법부=무흠결의 완전한 조직체’라는 사법무결점주의가 통용되지 않게 하려면 비위를 저지른 법관에 대한 공정무사한 징계절차가 행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법관징계위원회가 사실상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법관의 비위은폐를 도와왔던 점에 대해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 따라서 법관징계위원회의 구성원을 대폭 바꾸어야 한다. 법관 외의 외부인사가 다수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법관의 비위 신고가 접수되면 반드시 법관징계위원회가 소집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

지금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채 지루하게 시간을 끌고 있는 사법개혁 작업의 소산물인 법안들은, 일부 부족한 점이 있지만 실은 과거의 사법개혁 작업과는 그 틀에 있어 차원을 달리한다. 요점은 두 개다. 한국식 로스쿨 창립과 한국식 배심원제 채용이다. 전자는 우리 법조계에 아직 어두운 구름을 드리우고 있는 연고주의를 극복해 나간다는 점에서나, 법조인의 지나친 특권의식을 깨뜨리고 시민사회 구성원들과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 그리고 급변하는 글로벌 세상에서 우리 법조계가 경쟁력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다른 대안이 없을 만큼 꼭 필요한 제도다. 후자의 중요성 또한 재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이 제도를 채용했거나 채용하고 있는데 왜 우리만 오직 직업 법관들에게 법적 분쟁의 해결을 맡겨야 하는가.

나아가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에 대한 야당의 완고한 반대 방침에 재고가 있기를 기대한다. 사실 이 기관이 설치되면 비리를 저지른 판·검사에 대한 진정이 봇물 터지듯 접수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시 말해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는 앞으로 법원과 검찰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강력한 기관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크다. 야당이 역으로 제안한 특별검사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야당이 왜 이 법안에 굳이 반대해, 로비에 취약한 우리 사법체계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사법 피해자들의 한을 외면하려 하는지 알 수 없다. 혹 과거에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한 일에 대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니냐는 판단 때문이라면, 그 법에다 시행일 이후의 행위에 대해서만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가 권한을 갖는 것으로 못박아도 되지 않을까 한다.


개혁을 위한 배려

숨 가쁘게 얘기를 이어오다 보니 마치 사법부가 ‘비리의 온상’이라는 인상을 주지나 않았을지 덜컥 겁이 난다. 물론 그렇지 않다. 처음에 말한 대로 사법부에는 올곧게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해온 수많은 법관이 있다. 전체적으로 평가한 사건처리 능률도 뛰어나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현대 민주주의 제도 아래 사는 이상 몇몇 사람의 선의와 헌신에 기대어 훌륭한 조직운용을 기대하는 대신, 제도적으로 우리 사법부를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하게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또 사법부 역시 국민 전체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원칙하에 위선과 가식의 탈 안에 온존시켜온 모순과 부조리를 도려내서 우리 모두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법부를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다른 나라와 견주어 우리 사법부에 결여된, ‘올바른 재판을 위한 통제 시스템’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작업의 과정에는 사법부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 사실 법관만큼 격심한 정신 노동을 하는 직업을 우리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최소한 대학교수에게 인정되는 안식년 제도를 법관에게도 인정해주고, 그들의 열악한 근무환경도 개선해야 한다. 가령 일본에서처럼 재판부 하나에 법정 하나(일본의 재판부 개념은 우리와 조금 다르기는 하다)가 허용된다면, 법관들은 훨씬 효과적으로 재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법부의 자정(自淨) 노력과 시스템의 개선 외에 법관이 긍지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데 소요되는 재원을 꼭 필요한 사회적 비용으로 선선히 수용하는 자세가 요청된다.

지루하게 계속된 장마의 축축한 불쾌감이 사라지고 청명한 가을하늘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듯 우리의 사법부도 상쾌한 가을바람 같은 존재로 국민에게 다가가기를 염원한다.


신동아 2006년 9월 호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2/13/105689/1

‘로비 안 통하는 법정’ 꿈꾸는 전직 판사의 참회록 / 신 평




타인의 감정을 잘 이용하는 ‘소시오패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알고 보면 사이코패스보다 더 무서운 유형이 소시오패스입니다. 소시오패스는 우리의 일상 속에 함께 있는 무척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에요. 인구의 25명 중 1명이 소시오패스예요. 내 친구 중에, 직장 동료 중에도 소시오패스는 항상 있어요. 사교성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잘하는, 얼핏 보면 매우 매력적인 ‘비폭력적 소시오패스’가 사실은 사이코패스보다 더 무서운 존재죠. 소시오패스 중에는 사회에서 전문가, 능력자로 활동하는 유능한 직업인들도 많습니다. 


타인의 감정을 잘 이용하는 소시오패스 

소시오패스는 매우 친절하고 많이 베푸는 사람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매우 사교적’인 사람으로 느껴지죠. 언변도 뛰어나서 사람들을 유혹하는데 유리합니다. 카리스마 있고, 대화를 잘 이끌어나가는 능력이 탁월하기에 쉽게 호감을 얻어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이용하기 때문이죠. 그들은 공감 능력이 뛰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정서적 공감’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이득을 위해 타인의 감정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인지적 공감’ 능력이 탁월합니다. 


소시오패스는 우리를 조종하기 위해 과한 칭찬을 하며 환심을 삽니다. 자신을 성격 좋은 사람, 화끈한 사람, 선심을 베푸는 사람으로 잘 위장합니다.

 

그 사람, 혹시 소시오패스일까? 

의심이 간다면 다음 항목에 체크해보세요. 

1. 베푸는 사람 같지만, 알고 보면 매우 계산적이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타인을 교묘하게 잘 이용합니다. 얻을 게 있을 때는 정말 친한 척하지만, 더 얻을 게 없을 때는 냉정하게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2. 상대를 반드시 이겨야 하는 대상으로 여긴다. 
그들은 어떤 싸움에서건 지지 않으려 합니다. 만약 타인과의 감정싸움에서 지거나, 자신이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어떤 방법이든 동원해서 복수하려 합니다. 

3. 자주 약속을 어긴다. 
나에게 더 이익이 되는 사람을 만나고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에, 자주 약속을 어깁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온갖 이유를 들어가며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습니다. 

4. 카리스마 있고 리더십이 강한 것 같지만,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데 능하다. 
언변이 뛰어나고 환심을 사는데 능하므로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으면서 쾌감을 느끼지만, 거짓말과 허세가 심합니다. ‘사기’로 복역하는 사람 중엔 소시오패스가 많습니다. 

5. 자신의 잘못이 들통나면 동정심에 호소한다.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작합니다. 자신은 남을 이용하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며 자신은 결백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자신이 오히려 얼마나 상처 입었는지’를 강조하면서 타인들의 동정심을 호소합니다. 

6. 반드시 복수한다. 
잘못이 들통나면, 자신보다 온순한 사람, 자신의 허물을 들켜버린 사람을 오히려 가해자로 지목합니다. 그리고 온갖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소문을 내기 시작합니다. ‘복수’의 시작입니다. 

7. 거짓말에 능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 느낀다. 
타인을 이용하고 거짓말을 만들어 내지만,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자신이 만든 거짓말에 스스로가 속아서, 본인이 정말 피해자라고 믿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줄 모릅니다. 자신의 행동이 반윤리적 행동이라는 사실을 판단하는 능력은 있지만, 진정한 반성을 모르는 사람이 소시오패스입니다. 

8.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믿는 ‘병적인 자기애적 인격장애’를 갖고 있다. 
남을 칭찬하며 환심을 사지만, 사실은 ‘내가 제일 잘났다’는 자만심이 강합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존경하거나 좋아하지 않아요. 나의 능력이나, 성격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하는 사람은 바로 처벌의 대상이 됩니다. 


사이코패스 VS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는 끔찍한 범죄를 충동적으로 저지르며 자신의 무서운 기질을 드러내기 때문에 미리 경계할 기회가 많아요. 하지만 소시오패스는 정말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내 곁에 함께 지내면서 반윤리적·반사회적인 일들을 저지르기 때문에 잘 대처하지 않으면 피해는 고스란히 내가 보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생각보다 많이 포진해있는, 소시오패스가 더 무서운 이유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꼭 만나게 되는, 나를 화나게 하는 그 사람이 소시오패스가 아닌지 살펴보는 건 중요해요. 알아야 상처받지 않고, 스트레스를 줄이고, 대처 할 수 있으니까요. 경계 없이 가까워졌다가는 그들의 ‘밥’이 됩니다. 상처는 고스란히 나의 것이 되고 맙니다. 

‘나는 왜 맨날 당할까?’, ‘혹시 내가 문제 있는 게 아닐까?’ 자괴감에 빠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가 소시오패스라, 심각한 ‘성격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대응하면,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일을 많이 줄일 수 있습니다. 

소시오패스 성향을 가진 사람과는 관계를 맺지 마세요 

일과 관련이 없다면 관계를 끊으세요. 하지만, 일 때문에 계속 만나야만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제 주변에도 소시오패스가 여러 명 있고, 일이나 친분 때문에 지속해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땐 어떻게 관계를 맺고 내 감정을 조율하면서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까요? 


소시오패스와 관계 맺어야 할 때 대처법 

첫째, ‘내 주변에도 많고, 평생 만나게 된다’는 걸 기억하세요. 
인구의 4%가 소시오패스이므로 25명 중에서 24명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고, 상처받은 경험이 있어요.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소시오패스’는 드러나기 때문에, 사람들도 그들을 경계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만 당하는 게 아닙니다. 

둘째, ‘나는 능력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하고 마음에 상처 입지 마세요. 
소시오패스는 자기 이득에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만 접근하므로, 능력 없는 사람에게는 접근하지 않습니다. 만약 소시오패스가 많이 접근한다면 ‘나는 능력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상대를 대해야 기선 제압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소시오패스인 줄 모르고 관계를 맺었다가 상처를 입더라도, 이렇게 생각하면 금방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셋째, ‘감정’에 반응하지 말고 무표정으로 바라보세요. 
그들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활용합니다. 매우 친근하게 다가오고 상대의 감정에 공감하며 감정적 교류를 하며 접근하려 합니다. 그에게 나의 감정을 드러내지도 말고, 그의 감정에 반응하지도 마세요. 그러면 쉽게 접근하지 못합니다. 

넷째, ‘칭찬’에 속지 말고, ‘고맙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가 내게 보내는 칭찬이 진심인지 냉정하게 파악해야 하세요.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칭찬의 수법을 쓰는데 넘어가지 마세요. 칭찬 세례를 퍼부은 뒤, 자신에게 필요한 이득을 나에게서 뽑아 먹으려 할 게 뻔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칭찬하면 ‘고맙다’고 말하기 쉽죠. ‘가식적 아부’라는 판단이 들면, 무표정으로 ‘아휴, 저는 그런 장점 없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무표정으로 건조하게 대응하세요. 

다섯째, 동정심을 유발하는 ‘피해자 코스프레’에 속아서 ‘연민’을 느끼지 마세요.
사이코패스처럼 ‘공포’가 아니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동정심’을 유발하는 그에게 속지 않아야 합니다. 소시오패스들에게 여러 번 속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은 연기력도 뛰어나요. ‘본질’을 들키면 동정심을 유발하죠. 여기에 속아서 ‘연민’을 느끼고, ‘내가 잘못 봤겠지’ , ‘이제는 변하겠지’ 헛된 기대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고 냉정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습니다. 

여섯째, 침묵하거나, ‘나는 잘 모르겠다’고 답하세요. 
자신이 옳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의 동의를 구합니다. 침묵하고 무시하세요. 윗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죠. ‘잘 모르겠다’고 답하세요. 바위처럼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들은 접근하지 않습니다. 

일곱째, 함께하는 사람들과 대응 방법을 모색하세요.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속았던 사람들도 그들의 본질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됩니다. 내가 먼저 나서서 그의 성격장애를 비판할 필요는 없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나오면, 그의 ‘피해자 코스프레’에 동조하지 말기, ‘복수의 대상’이 된 사람 보호해주기, ‘거짓말’에 속지 말기, ‘악의적 소문’에 동조하지 말기 등 대응방법을 함께 모색하세요.


소시오패스는 치료할 수 있을까? 

소시오패스의 경우 치료하면 어느 정도 관리가 되지만, 소시오패스인 사람이 자기 증세를 파악하고 의료진에게 도움을 구하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피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입니다. 사이코패스는 선천적 성격장애인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소시오패스는 자라면서 양육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후천적 성격장애를 갖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사이코패스는 선천적으로 충동적이고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소시오패스는 유년기 시절에 양육자로부터 당한 폭력과 같은 환경적 요인으로 얻은 트라우마 때문에 후천적인 성격장애를 가지게 됩니다. 소시오패스 성향을 보이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소시오패스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견해도 많아요. 성격장애가 대물림되는 것이죠. 

소시오패스가 인구의 4%나 되고, 어린 시절 양육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면, 예방에 힘써야 하지 않을까요? 가치관이 성립되는 유년기에 부모부터 애정을 충분히 받고 도덕 교육이나 타인에 대한 공감과 소통 교육을 지속해서 받는다면 예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착하고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이 힘들게 사는 반면 타인을 이용하고 거짓과 폭력을 일삼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잘사는 현대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는 소시오패스가 많아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소시오패스 대처법’을 알아야 해요. 그로 인해서 분노하고, 화나고, 짜증나는 내 감정을 조율할 수 있으니까요.


[글 : 박상미 경찰대학교 교양과정 교수] 

박상미의 슬기로운 감정생활 
1편 내 속의 ‘분노’와 대화하는 법 http://sebasi.co.kr/journal/181





"양승태 사법부, 민주화운동 국가배상 거부로 일관했다"


[인터뷰] '한울회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고 치른 박재순 박사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자신의 자택 인근에서 대법원장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의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 거래 의혹' 등 사법행정권 남용 논란에 대해 입장을 발표를 마치고 자리를 떠나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자신의 자택 인근에서 대법원장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의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 거래 의혹' 등 사법행정권 남용 논란에 대해 입장을 발표를 마치고 자리를 떠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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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으로 온 나라가 충격에 싸여있다. 하지만 정작 전 대법원장 양승태씨는 재판 뒷거래 '말씀자료'가 '덕담'이라는 둥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더욱이 '말씀자료' 문건을 만든 당시 임종헌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양 전 대법원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만난 다음 날인 2015년 8월 7일 행정처 차장으로 승진했다.

양씨는 자신이 이번 '사법농단'에 대해 결백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특별조사단의 조사를 거부했고 오히려 기자들에게 "내가 (조사받으러) 가야 하나?"라며 되물었다. 자신이 정말 결백하다면 진실을 규명하는 사법부의 조사에 적극 협조하고 참여하여 자신의 결백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신성한 사법부'니 '사법부의 신뢰'를 목청껏 높이는 양씨가 정작 '신성한' 사법부의 조사는 거부하고 회피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평생을 법조인으로 살았다는 양씨가 최소한 논리적으로라도 앞뒤가 맞는 답변을 국민 앞에 보여주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한 조직의 수장은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또한 합리적, 논리적, 상식적으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일반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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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순 박사는 전두환 정권 당시 '한울회 사건'으로 2년 반 넘게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이 한울회 사건의 1심 판사는 이인제씨였고 대법원 판사는 이회창씨였다. 지난 김대중 정부에서 박재순 박사는 한울회 사건 때문에 옥고를 치른 것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표창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 2015년 박근혜 정권의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박재순 박사는 한울회 사건으로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다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러한 유죄판결에 대해 박재순 박사는 "양승태가 지배하는 사법부는 박근혜 정권과 함께 군사독재시절의 국가주의적 폭력과 만행을 정당화하고 옹호함으로써 역사의 시곗바늘을 군사독재의 국가폭력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고 평가한다. 한울회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고 '양승태 대법원'에서 또다시 유죄판결을 받은 박재순 박사와 지난 5월 30일부터 6월 4일까지 이메일과 전화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여 싣는다.

 박재순 박사
 박재순 박사
ⓒ 박재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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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전심 묵시적으로 결의하여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

- 위키백과에서는 '한울회사건'을 "1979년 7월 충남 대덕군에서 기독교 청소년 33명이 모여 수양회를 열고 같은 해 12월 30일부터 3일간 서울에서 열린 2차 수양회에서 이규호가 '자본주의 사회는 구조적 모순으로 한계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사회를 개혁해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된 <현대의 공동체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에 대해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건한 전두환 정부의 공안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런 '한울회사건'에 대한 정의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나?
"검찰 공소장에 나온 문구인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기독교 예배 모임이었던 한울회는 전두환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자본주의의 비리와 모순을 비판하면서 신앙 생활공동체를 모색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사회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군부정권에 비판적인 세력들을 잡아들일 때 아람회, 오송회 등과 비슷한 시기에 한울모임 사람들도 잡혀들어갔다. 한울모임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전두환 독재정권을 비판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주장은 한 적도, 들은 적도 없으며 결의한 적은 더욱 없다. 그래서 검사의 공소장에서도 '이심전심 묵시적으로 결의하여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고 기소하였다.

1차 대법원 판결(1982년 6월)에서 5인 법관 전원합의로 무죄 취지의 원심파기 환송 결정을 했다. 이때 대법원 판결문도 검찰심문조서, 경찰 조서, 진술서, 증인 진술 모두 살펴보아도 공산사회 건설을 위해 반국가단체를 결의한 사실이 없고 피고인들이 한결같이 부인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이 판결문은 반국가단체에 대한 개념을 규정하면서 반국가행위를 구체적으로 수행, 계획, 준비하지도 않았으며 실체적으로 국가사회에 대한 위협이 될 만한 단체를 구성하지도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파기환송심을 맡은 고등법원에서 새로운 증거나 증인 없이 또다시 유죄판결을 내리고 2차 대법원에서 다시 전원일치로 유죄판결(1983년 2월)을 내렸다. 지난 1997년 한울회·아람회·오송회사건 피해자들이 공동으로 <역사의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를 출간하고 출판기념회를 했을 때 이석태 변호사가 서평을 통해 '1차 대법원에서 반국가단체 개념규정까지 하면서 전원일치로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한 사건을 고등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내리고 2차 대법원에서 다시 전원일치로 유죄판결을 내린 것은 사법부 역사상 큰 오점과 흠결을 남긴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출판기념회, 박재순 박사 앞줄 우측에서 4번째
 출판기념회, 박재순 박사 앞줄 우측에서 4번째
ⓒ 박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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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 이상 가족도 변호사도 만나지 못했다"

- 지금은 회상조차 하고 싶지 않겠지만, 후진들을 위해서, 한울회사건을 겪으면서 가장 힘들고 괴로웠던 순간들은 언제였는지?
"한울회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가 운영하던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번역실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학문에만 전념하기로 작정했던 나는 나름대로 조심하며 살았기 때문에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잡혀갈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1981년 3월 말경에 서대전경찰서로부터 수사에 협조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서울에 사는 한울모임 사람들과 함께 대전으로 내려갔다.

서대전경찰서는 우리를 2층 강당에 온종일 대기시켜 놓고 밤늦게 한 사람씩 불렀다. 건장한 두 사람이 나를 불러서 따라갔더니,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검은 승용차를 경찰서 앞에 대기시켜 놓았다. 차 뒷좌석 가운데 앉히더니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한동안 차로 이동했다. 알 수 없는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가서 어떤 방에 가두어놓고는 고문과 수사를 시작했다. '북한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북한에서 무슨 지원을 받았느냐'고 다그쳐서 내가 그런 일 없다고 부정하자 욕하고 때리며 온갖 모욕을 주었다.

그리고 무릎 사이에 작은 병을 끼워놓고 오랫동안 꿇어앉아 있게 했다. 후에 알고 보니 내가 처음에 갇혀 있던 곳은 대전의 한 여관방이었다. 밥은 주다 말다 했고 8일 동안을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세수도 못 하고 머리도 감지 못하게 했다.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은 눈은 시뻘겋고 머리와 수염은 더부룩하여 참혹하게 보였다. 보름쯤 여관에 갇혀 있다가 도경 대공 분실 지하 감방으로 끌려가서 한 달쯤 조사를 받으며 시달렸다. 1심 재판을 받을 때까지 6개월 이상 가족도 변호사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한울회 사건과 관련해서 한 일이 있다면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수양회 설교와 성경공부시간에 광주시민을 학살한 군인들과 전두환을 비판한 것밖에 없다. 특별히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오래 가두어 놓고 '이심전심으로 묵시적으로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기소한 검찰은 1심에서 나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하였다. 그래서 외국 유학의 큰 꿈을 꾸었던 나는 한 일도 없이 감옥에 갇혀서 학자로서의 길이 막히게 된 것이 가장 불안하고 괴로웠다. 몸이 약했던 나는 10월쯤 되니 감옥에 습기가 차고 냉기가 돌며 계속 기침을 하게 되어 오래 살 것 같지 않았다. 그 후 서울과 대전을 오르내리며 고등법원, 대법원, 다시 고등법원, 대법원을 거치며 지겹도록 오래 재판을 받아야 했다. 당시 악독한 검찰과 비겁하고 무기력한 판사들을 보면서 깊은 절망을 느꼈다.

터무니없이 날조된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2년 반 이상 옥고를 치렀지만, 진실을 바로 잡을 길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힘들고 괴로웠다. 경찰, 검사, 판사는 허위사실을 날조·조작하여 법과 권력으로 짓밟을 뿐 진실을 밝히는 데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이들도 사람인데 사람들에게서 진실과 양심, 이성과 정의를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다. 불의하고 비합리적이고 오직 폭력뿐인 공권력을 오랜 세월 지켜본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고문이었다.

김대중 정부 때 한울회 사건으로 민주화운동 유공자 표창을 받았는데 2010년 이명박 정권 때 재심을 청구했더니 5년 이상 끌다가 박근혜 정권 때 일부 재심 허락을 받았다. 그 후 2015년 5월~2017년 1월 사이에 2년 가까이 재판을 했다. 그러나 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배하는 법정에서 사법농락만 당하다가 결국 다시 반국가단체 유죄판결을 받았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고 기가 막혔다. 더욱이 촛불혁명이 한창 일어날 때 이런 판결을 받은 것이 더욱 아프고 괴롭게 여겨진다. 나는 사법부의 적폐를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내가 참으로 괴롭고 가슴 아프게 생각한 것은 한울모임과 관계했던 어린 학생들의 고통과 시련이었다. 내가 반년 이상 가족면회를 하지 못하고 한 달 이상 불법구금 상태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른 것은 오히려 큰 고통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당시 20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경찰, 검찰로부터 그리고 학부모와 학교로부터 협박과 고통을 당한 것이 내게는 괴롭고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심리적, 사회적으로 겪은 압박과 고통은 이들의 삶에 평생 무거운 짐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신앙과 진리, 인생과 역사를 가르치며 순수하고 진실하게 만났던 어린 학생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겪게 했다는 자책감이 오랫동안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큰사진보기 1982년 일간지에 실린 한울회사건 관련 기사
 1982년 일간지에 실린 한울회사건 관련 기사
ⓒ 박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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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랜 세월 연락도 되지 않고 갇혀 있을 때 가족들, 특히 늙으신 어머니의 심적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가장 맘 졸이며 걱정했던 사람은 어머니였다. 한겨울이 되면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었던 어머니는 감옥에 있는 나를 생각하시며 추운 밤중에 부엌에 홀로 서 있어 보기도 하시고 온기 하나 없는 담벼락 아래 서 있어 보기도 하셨다. 어디에 서 있어 보아도 어머니는 추운 겨울밤을 견디어 낼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렇게 나를 걱정하고 염려하던 어머니는 결국 입에서 피를 토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추운 감옥에서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나를 걱정하는 어머니가 아주 걱정스러웠고 안타까웠다."

"광주시민 학살한 군인들과 전두환을 비판한 것이 유죄"

- 지난 김대중 정부에서 선생님은 이 한울회 사건으로 민주화운동 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이 사건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지 못했다. 대통령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표창한 사건을 어떻게 법원에서는 무죄판결을 받지 못하는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고 보나?
"만일 노무현 정부 이후에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민주화운동유공자로 표창을 받았기 때문에 사법부에서 다시 유죄판결을 내릴 것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진실화해위원회에 한울회사건의 조사를 신청하는데 게을렀다. 같은 시기에 재판을 받았던 아람회, 오송회가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고 배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한울회도 재심 청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 시절인 지난 2010년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지난 2013년 서울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충격이 너무 커서 믿기지 않았다.

더욱이 고등법원의 기각 사유가 황당하고 기이했다. 내가 재심을 청구한 가장 큰 이유는 한울회가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사실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또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내가 한울회모임에서 한 발언으로 나는 김대중 정부에서 민주화운동유공자로 표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등법원 판사들은 반국가단체구성은 유죄이고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내가 한울회모임 때 발언한 것도 민주화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저희끼리 해 본 소리'라면서 유죄라고 판결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 광주시민을 학살한 군인들과 전두환을 내가 비판한 것이 유죄라는 것은 사리나 법리에 전혀 맞지 않는 소리다. 이미 전두환·노태우는 국가변란을 일으킨 반역죄로 처벌을 받았고 이들이 저지른 광주시민 학살은 범죄이고 이들이 선포한 계엄령은 불법 무효라는 판결이 사법부에서 내려졌다. 그런데 광주시민을 학살한 군부정권과 군대를 비판한 것이 유죄라고 서울고등법원이 내린 재심 기각판결은 어이없고 터무니없는 사법적 만행이라고 생각된다. 담당 변호인들도 재심 기각 판결문을 받아보고 말이 되지 않는 판결이라고 상고하겠다고 하였다.

서울고등법원에서 이렇게 황당한 판결을 한 것은 내가 우리를 기소했던 정용식 검사를 통렬하게 비판했고 대법원을 두 차례 오가며 결국 유죄판결을 내린 사법부의 책임과 잘못을 강력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검찰과 사법부의 치명적인 잘못과 불의를 강력하게 고발하고 규탄했기 때문에 사법부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서 이런 무리한 판결을 내렸다고 짐작한다. 또한 진실화해위원회에 한울회 사건의 조사를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과 검찰의 불법과 한울회 사건의 진상을 드러내는 새로운 자료와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 법원에서 새로 다룰 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것도 재심을 기각하게 하는 빌미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대법원에 상고한 결과 지난 2015년 초에 대법원은 반국가단체 부분은 유죄이나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내가 발언한 것은 유죄라고 할 수 없으니 재심을 허락한다고 판결하였다. 유죄판결을 받았던 6인 가운데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발언을 했던 이규호 선생과 나만 재심이 허락되고 다른 4인은 재심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하여간 2015년 5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재심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등법원 판사들은 대법원이 제시한 지침대로 반국가단체 부분은 유죄로 하고 광주민주화운동 발언만 심리하자고 주장하였다.

나와, 다른 피고인들과 변호인들은 강력하게 사건 전체를 재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그래서 나와 이규호 선생은 강력하게 무죄를 주장하며 34년 전에 우리를 재판한 검사와 판사들이 직권을 남용하여 불의와 불법을 저질렀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한울회 사건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아 사법부의 정의를 세울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법정에서 판사들은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검사들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못 했다.

2015년 5월에 재판이 시작되어 2017년 1월에 재판이 끝날 때까지 판사들이 세 차례 바뀌었다. 첫 번째 판사는 맡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이동으로 바뀌었다. 두 번째 부장판사는 변호사들을 압박하면서 형량을 감경해주겠다며 재판을 속히 끝내자고 하였다. 피고들의 말을 들어주는 듯이 하다가는 피고들의 주장일 뿐이라며 재판을 끝내려고 했다. 나는 몹시 화가 나서 크게 싸워보려고 하다가 변호인과 의논하여 판사들의 재판을 거부하기로 했다. 이규호와 함께 재판에 항의하는 글을 써 보내고 그 무렵 몸을 다쳤던 나는 법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두 번째 재판부도 인사이동을 하게 되어 재판부가 바뀌게 되었다. 새로 배당된 재판부는 부담을 느꼈는지 우리 재판을 다른 재판부로 넘겨버렸다. 네 번째 맡은 재판부는 우리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우리가 신청한 증인 4인의 증언을 듣기로 하였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예아무개, 임아무개는 50 중년이 되어 증인으로서 35년 만에 법정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35년 전을 회상하며 눈물을 철철 흘렸고 당시 경찰, 검사, 학교의 압박과 회유로 말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겪었다고 호소하였고 그때 그들의 선생이었던 나와 이규호에 대해서 당시 제대로 증언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사죄한다고 하였다. 당시 대학생이었고 현재 공주사범대학교 교수인 장수명도 눈물을 흘리며 한울모임이 얼마나 순수하고 진지했는지를 증언하였다. 당시 방위병으로서 군사재판을 받았던 김종생은 증언 당시 큰 교회 목회자였다. 김 목사도 눈물을 흘리며 한울모임이 순수하고 진지했던 신앙 생활공동체였음을 증언하고 당시 군 검찰의 고문과 압박, 모욕과 학대가 극심하여 화장실에서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고 하여 충격을 받았다. 이 자리에 다 쓰지 못하지만 네 사람의 증언은 진실하고 감동적이었다.

증인들이 그처럼 절절하고 감동적으로 진실을 말하고 피고인과 변호인이 아무리 간절하고 절실하게 양심과 법에 따라 재판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대법원의 지침대로 반국가단체 부분은 유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발언은 무죄로 보고 징역 2년 6개월을 집행유예로 판결하였다. 집행유예로 형량을 감경하면서 국가배상신청서를 주면서 배상신청을 하라고 하여 배상신청을 했으나 결국 그마저 배상 불가 판정을 받았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과 고등법원이 철저하게 한통속으로 움직였다"

- 한울회 사건으로 6명이 재판받고 옥고를 치렀는데 2015년 재심 신청 결과 4인은 기각되고 선생님과 이규호 선생 두 분만 재심이 허락되어 재심 절차를 밟았다. 당시 고등법원과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을 받으면서 느낀 점은?
"한울회 사건의 재심과 관련하여 내가 느낀 것은 적어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에는 대법원과 고등법원이 철저하게 한통속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검사동일체라는 말이 있듯이 법관동일체 원칙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한울회 재심 사건에 대해 대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은 헌법정신과 민주정신을 파괴하는 사법적 폭력이고 농단이라고 느꼈다. 양승태가 지배하는 사법부는 박근혜 정권과 함께 군사독재 시절의 국가주의적 폭력과 만행을 정당화하고 옹호함으로써 역사의 시곗바늘을 군사독재의 국가폭력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전두환 군사독재 시대의 사법부와 박근혜 정권과 코드를 맞춘 양승태 대법원의 차이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였다. 물론 차이가 없지는 않았다. 아니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35년 전 대전에서 1심판결을 받을 때는 법정에서 검사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고 판사들은 고양이 앞의 쥐보다도 더 무기력하고 위축되어 있었다. 판사들은 고개도 들지 못했고 검사가 완전히 법정을 지배했다.

그러나 2015~2016년 한울회 재심을 다루는 서울고등법원의 법정에서는 판사들의 권세와 위력이 검사와 변호인에 대하여 강력하고 위압적임을 느꼈다. 피고들이 과거의 검사를 심하게 규탄하고 책망하자 검사들은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떤 검사는 재판이 끝날 때마다 우리를 따라오면서 우리에게 사과하고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기도 했다. 불의하고 위선적인 사법부에 국민의 통제에서 벗어난 권력을 주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느꼈다." 

- 지난 2013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로 긴급조치를 포함한 수많은 과거 국가폭력사건 피해자들의 국가배상소송은 소멸시효 등 문제로 패소했다. 게다가 배상금을 삭감하는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국가가 희생자 유족을 상대로 '부당이득금'을 반환하라는 소송까지 제기하면서, 피해자와 유족들은 지금도 이중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 지금도 국가폭력 피해자보다는 가해자 입장에 서 있는 (대)법원과 '국가'에게 하고 싶은 말은?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배상 소송의 시효를 갑자기 엄격히 제한하고 시효가 소멸되었다는 핑계를 내세워 국가소송을 기각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국민의 권리를 부정하고 국민을 보호하고 보살필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국민을 국가의 노예나 자원으로 생각하는 군국주의, 국가주의의 낡은 국가관을 가지고 사법부가 재판해 온 것으로 판단된다.

국가는 국가가 저지른 불법과 범죄를 바로 잡을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다. 사법부가 법을 악용하고 조작하여 국가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을 면제해 준 것은 사법부가 헌법정신과 민주정신을 짓밟는 국기문란을 일으킨 것이고 국민주권을 기본으로 하는 헌정질서를 파괴한 것이다. 사법부와 국가는 그동안 양승태가 지배한 사법부가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에게 저지른 사법적 농단과 만행을 바로 잡을 책임과 의무가 있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국가로부터 불법적인 폭력을 당한 국가폭력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배상하는 것은 헌법정신과 민주정신을 지켜야 할 국가와 사법부의 마땅한 도리이고 책임이다.

국가가 불법 부당하게 국민에게 폭력을 저질렀다면 당연히 국가는 국민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배상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국가폭력 희생자들이 명예를 회복하고 배상을 받도록 국가는 적극적으로 알리고 안내하고 권유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더 나아가 국가는 과거 자신의 잘못과 불법을 국가 스스로 바로잡아 가야 한다. 따라서 국가는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위해서 배상신청의 시효를 없애고 피해자들이 배상신청을 하도록 협력할 뿐 아니라 국가가 피해자들을 대리해서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배상을 받도록 법적, 행정적 절차를 밟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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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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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만은 홀로 군사독재를 체화한 낡은 시대의 유물로 남은 것인가!"

- 지난 2015년 '한울회 사건'과 관련하여 '34년 만에 법관들께 다시 보내는 탄원서'에서 "저는 지난 34년 동안 한울회 사건의 재판이 불의할 뿐 아니라 부적절하고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라고 했는데, 그 사유를 좀 더 풀어 밝히면?
"한울모임은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순수하고 소박한 신앙인들이고 지식인들이었다. 내가 20대 후반에 어떤 이해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신앙과 진리를 생각하며 따뜻한 정을 가지고 만났던 이들이다. 게다가 20여 명의 중고등학생들과 신앙과 진리를 말하면서 만남을 이어간 것은 참으로 순수하고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그 무렵 독재자 박정희가 갑자기 죽고 정치군인 몇이 국가변란을 일으켜서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광주의 사건에 대해서 전해 들은 소식도 있고 미국의 <뉴스위크> 잡지를 통해 자세한 내막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한울모임 수련회 때 성경공부를 하면서 시민을 학살한 군인들을 비판하는 말을 했던 것이다.

이런 한울회 사람들에게 국가보안법과 계엄법을 적용해서 반국가단체구성죄와 계엄법 위반죄로 기소하고 어린 고등학생들을 경찰, 검사, 학교에서 위협하고 괴롭힌 것은 지금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이심전심으로 묵시적으로 공산사회를 건설하는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기로 결의했다'는 코미디 같은 검사의 공소장이 1심, 2심, 그리고 대법원판결을 두 차례나 거치고도 법적으로 유죄판결을 내리는 근거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런 공소장의 내용이 35년 후에도 다시 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의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 사법부는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배운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일까? 3·1혁명,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월시민항쟁, 촛불혁명이 일어나는 동안 이 나라 사법부만은 홀로 박물관 골동품처럼 일제식민통치의 군국주의, 해방 후 군사독재를 체화한 낡은 시대의 유물로 남은 것인가! 나의 양심과 이성으로는 한국 사법부의 이런 행태를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한울모임은 정의감을 가진 이들이 있었지만 순수하고 소박한 신앙모임이었다. 1981년도에 불의하고 악독한 군부정권에 의해 옥고를 치렀지만, 이 사건의 진실이 이렇게 오래 묻혀 있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더욱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죄목으로 재판을 받은 다른 사건들 아람회, 오송회는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고 배상까지 받았는데 한울회만은 재심이 기각되었다가 부분적으로만 재심의 허락이 났고 다시 유죄판결을 받고 보니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이렇게 된 것은 오로지 노무현 정부 다음에 반민주적인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들어섰고 그 정권에 빌붙은 양승태 대법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35년 전에도 대법원을 두 차례나 오가면서 한심하고 어이없는 재판과정을 겪었는데 이번에 다시 고등법원과 대법원의 사법 농단과 장난을 당하고 보니 더욱 한심하고 기가 막힌다. 한국 사회가 민주화를 위해서 그렇게 오랜 세월 시련과 고통을 겪으며 애를 써 왔는데 내가 관련된 한울회 사건은 1981년 전두환 정권 초기 사법적 폭력과 불의의 상황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판결을 받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한스럽다."   

* 박재순 박사는 1950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철학과를 마친 후 한신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 함석헌 선생을 만나서 성경과 동양고전을 배우며 씨알사상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으로 일했다.(1980~1985) 한신대와 성공회대에서 연구교수와 겸임교수로 1992년에서 2006년까지 가르쳤다. 씨알사상연구회 초대회장(2002~2007), 씨알재단 상임이사(2007~2014), 씨알사상연구소장(2007~)으로 평생 민주생활철학인 씨알사상을 연구하고 알리는 일에 힘써왔다. 안창호와 이승훈, 유영모와 함석헌의 정신과 사상을 연구하면서 한국근현대의 민주정신과 사상으로서 씨알사상을 정립하고 알리려 한다. 중요한 저서로는 <씨알사상>, <다석 유영모>,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생명의 길 사람의 길>,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이 있다.


'주진우의 현대사' 2화 - 인혁당, 법의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르다




조순제 녹취록과 사망원인?

국정농단의 주역, 최순실의 의붓오빠이자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 그는 사망하기 1년 전에 한나라단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MB 캠프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녹취록을 남기게 됩니다. 이를 조순제 녹취록이라고 하는데요. 녹취록의 내용도 궁금하지만 왜 그렇게 급작스럽게 사망했는가 하는 사망원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데, 원래 지병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JTBC의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라는 프로그램에서는 녹취록의 전문을 입수하여 공개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재벌들이 돈 다 냈어요", "돈은 철저히 최태민이 다 관리"

"10월 26일 후에 뭉텅이 돈이 왔으니까, 최순실도 돈 심부름을 꽤나 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조순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구국선교회(구국봉사단)과 영남대, 육영재단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이었으니,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아는 사람일텐데, 위 몇 마디의 말만으로도 어떻게 최순실, 최태민 일가가 돈을 그렇게 많이 축적할 수 있었는가의 시발점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총 19장으로 이뤄진 조순제 녹취록은 존재만으로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내용은 최순실, 최태민, 조순제,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간의 20년의 관계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이 내용중에는 방송중에 공개하기 힘든 사생활까지도 담겨있다고 합니다.


현재의 최순실 사태와 관련해서 근본을 설명해줄 수 있는 중요한 문건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10.26 사태이후 뭉칫돈이 최태민 일가로 들어가게 되고, 돈 심부름을 여동생들이 했다"라고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10.26 사태는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서 살해당했던 날입니다.


<조순제가 2007년 한나라당에 제출되었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위증 진정서>


조순제가 "아버지 최태민의 지시로 박근혜 대통령의 업무 지원을 했는데, 자신의 의존도(조순제)가 컸다. 내가 박대통령이 얘기하면 한자 한획도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됐다."라는 말도 녹취록에 들어 있었는데, 녹취록을 남겼던 2007년도 한나라당 대선 경선과정에서 박근혜 후보가, 자신은 "조순제라는 인물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을 듣고, 배신감이 들었기 때문에 이 녹취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차례에 걸쳐서 "박근혜 후보는 절대 대통령이 되서는 안되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최태민의 집인 역삼동에 자주 갔었고, 10.26사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 후에는 최순실과 급속도록 가까워졌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최태민과 박근혜 대통령의 일명 부적절했던 관계를 폭로하였다고 합니다.


"아이고, 그 전부터도 둘은 아주 불가분의 관계라고 봐야지" "하여튼 자주 왔어요. 사람들 다 피하게 하고 눈에 안 띄게." "온다고 연락이 오면 다 피하고"

"둘이 들어갔다 하면 밥은 문간에 갖다놓으면 영감(최태민)이 갖고 들어가고"

"저 사람(최태민)은 여자라 하는 건 그냥 무사히 통과되는 경우를 본적이 없어. 아 대단하죠, 여자에 대해선."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최태민에 대해서는 반감을 드러내는 말도 하였다고 하네요. 즉

"엉망이었던 사람이 본인의 엄마를 만나면서 인간이 되었다는" 


<정두언 회고록>


한편 정두언은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19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자신은 박근혜 대통령을 찍지 않았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유신시절 의부 최태민이 국정농단의 실제 인물이었는지를 가려내는 것은 검증위으 몫입니다."라는 그의 글을 보니, 대를 이어 국정농단을 하고 있는 최씨일가, 최순실 씁쓸하네요.


<티비조선 "최순실 의붓오빠 조순제 녹취록 육성 녹음 동영상>


<그것이 알고 싶다 중에서>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과거 정두언의 19금 이야기가 언급 되었다고 합니다.


조웅 목사의 박근혜 마약 중독, 혼외 정사 의혹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

 

어제 주요 일간지와 방송은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청와대가 구입한 약품 중 사용처가 이해하기 힘든 약품 목록을 공개했다. 미용, 안티 에이징 시술에 사용되는 주사제가 수백 개 있었고 불면증 치료를 위한 다량의 수면제, 국소 마취제, 수술 후 지혈제, 수면 내시경용 수면 마취제 등 피부과와 성형외과라도 차린 듯 구매 약품 목록은 의아함을 느끼게 했다. 이 약품 중 백미는 비아그라와 팔팔정이었는데 이 약품은 대표적인 남성 발기 부전증 치료제다. 청와대는 엉뚱하게도 비아그라와 팔팔정을 해외 순방 시 고산병 예방과 치료를 위해 구입했다고 해명했다. 고산병에 대해 전문의들은 5천미터 이상 지역에서 주로 발생하고 비아그라와 팔팔정이 아니라 전문 고산병 예방 치료약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제 청와대에서 구매한 약품 목록을 통해 다시 주목받는 주장이 있다. 조웅 목사라는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안되는 이유라며 박근혜의 숨은 비밀을 밝힌 인터뷰다. 그런데 당시에는 조웅 목사의 주장이 너무 황당하고 노골적이고 근거가 없다하여 박근혜 반대파조차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무시했었다. 근본도 알 수 없는 늙은이가 박근혜에 대한 반감이 끓어오르는 시국을 이용해 헛소리하는 것이라 치부했다. 그런데, 조웅 목사의 당시 주장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그의 주장 중 일부가 사실로 밝혀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웅 목사가 주장한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인터뷰 주인공: 조웅(80세 ; 개명) 목사→박정희 때 5.16쿠데타를 주도한 장본인이며, 중앙정보부 창설멤버이다. 조 목사는 황태성 간첩 사건을 미 CIA에 제보하였다.
 
* 5.16쿠데타에 대한 제보가 방첩대(CIC)에 두 번 올라왔는데 조웅 목사가 당시 방첩대에 있으면서 박정희 김종필 체포를 막았다.
    
* 조웅 목사는 김종필을 한국 중앙정보부에서 몰아냈다.
  
* 박정희는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잡아다가 분쇄기에 갈아 죽였다. 그 외에도 장준하 등 많은 사람을 암살하였고 조웅 목사도 신변의 위협을 받았는데 김형욱이 죽이지 말라고 카바해 주었고, 미 CIA의 보호를 받았다. 
 
* 박근혜는 평양에 가서 김정일과 독대했으며 독대시간은 4시간 30분. 만찬 시 마약을 탄 백두산산삼독사주를 마시고 불륜관계를 맺었다. 박근혜는 3박4일동안 김정일을 만났고. 김정일과 마약을 탄 백두산산삼독사주를 마시고 잤다. 
 
*박근혜가 평양에 갈 때 정윤회. 장자크구로아. 수행비서. 요렇게 넷이었다. 장자크구로아는 김정일에게 전화를 걸어 전용기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김정일이 응하였고 전용기를 타고 넷은 평양에 편하게 도착했다.    
 
* 박근혜는 평양에 갈 때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500억원(4,500만불)을 들고 갔다. 김일성 묘에 참배했고, 고려연방제를 창립하기로 했다. (조웅 목사는 2005년 박근혜를 외환관리법,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 장 자끄 꾸르와라는 주한 EU상공회의소 소장(EUCCK Secretary General)은 북한에서 7년 살았고, 박근혜의 북한 방문도 주선하였는데 북한 첩보원으로 본다.  
 
* 김정일은 박근혜, 정윤회, 수행비서, 장 자끄 꾸르와 4명을 위해 김정일 전용기를 중국 비행장으로 보냈다.

* 박근혜는 최태민과 15년간 동거하였고, 최태민은 늙어서 정력이 딸려 박근혜와 마약하고 성관계했고, 두 번 낙태했다. 조웅 목사는 박근혜 자궁을 조사하면 알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검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태민은 박근혜 재산 3,000억원을 빼먹었다. 
 
* 최태민 사후 최태민의 의붓딸 최순실의 남편인 정윤회(최태민의 의붓사위)와 16년간 마약하고 성관계했다.   
 
*  박근혜 박지만은 마약하고 불륜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폭로하여 박지만이 옥고를 치렀다. 박정희, 박근혜, 박근영, 박지만 모두 마약했다.
 
* 최순실과 정윤회는 박근혜 때문에 법률상 이혼하였지만 동거하고 있고, 박근혜가 정윤회를 부르면 정윤회는 또 박근혜에게 가서 자는 관계이니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다.
 
*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허수아비이며 정윤회가 실세로서 장관 등 인사를 정윤회가 전횡하고 있다.
 
* 조웅 목사는 박근혜를 검찰에 고발했는데 검찰에서는 조웅 목사만 조사하고 박근혜를 조사하지 않는다.  


아프리카TV BJ 등은 2013년 2월 23일 조웅 목사를 만나 다시 인터뷰를 한다. 인터뷰는 생방송으로 스트리밍되고 있었는데 현장을 급습한 형사에 의해 조웅 목사는 명예훼손 혐의로 체포된다. 이날 인터뷰는 아프리카 tv 아이디 '안단테사랑'의 강동진씨가 주최했고 미디어오늘도 동행했다. 인터뷰 장소는 사전에 공지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체포 기소된 조웅 목사는 2013년 11월 정보통신망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명예훼손), 공용서류손상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조웅 목사에게 징역 1년6월을 선고 받았다.

https://youtu.be/3l2MBbDRedg

사건은 대법원으로 올라갔으나, 대법원 제2부(주심 김용덕 대법관)는 박근혜 대통령 등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조웅 목사에 대해 징역 1년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우연히도 대법원의 최종 판결 날짜는 2014년 5월 16일이었다. 



조웅 목사의 주장은 당시 미친 소리로 취급 받았고 조웅 목사를 인터뷰하는 아프리카TV의 BJ조차 조웅 목사의 주장에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조웅 목사가 급습한 형사에 의해 체포된 지 3년 8개월이 지난 2016년 10월, JTBC는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을 뒤에서 조정하며 국정을 농단했다는 주장과 함께 구체적인 증거인 태블릿PC를 제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JTBC의 보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에게 연설문 수정 등 도움을 받았다고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초 사과 이후 한 달 가까이 매일 새로운 국정 농단의 진실이 밝혀지고 있고 이제 모든 의혹은 사실에 기반한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 행적은 광범위하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사생활조차 현행법률을 위반하고 더 나아가 보통의 시민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난잡함이 있는 게 아닌가 의혹을 낳고 있다. 

박근혜가 최순실 이름으로 혈액 조사를 한 것은 마약 성분 검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게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고, 청와대가 구입한 주사제 중 "에토미데이트리푸로주"는 프로포폴과 유사한 작용을 하는데 수면내시경을 할 일이 없는 청와대에서 구입한 건 이상한 일이라고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면역제인 "아이비글로불린에스엔주"를 여러 차례 구매한 점도 마약이나 향정신성 의약품 혹은 약물 중독으로 인해 취약해진 면역력 보강을 위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는 매체도 있다. 심지어 백옥주사의 성분 중 하나인 "글루타치온"이 항마약 작용을 한다며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도 있다. 


조웅 목사의 말도 안되는 상상이 현실이 되고 있다. 조웅 목사의 목소리가 묻힌 이유는 한 가지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조웅 목사의 주장을 무시하거나 우스갯소리로 여겼고 그가 긴급 체포될 때 오히려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체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도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조웅 목사와 같은 사람은 구금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었다. 아니, 조웅 목사의 주장 중 일부가 사실로 드러났다. 그리고 다른 주장들도 헛소리가 아니라 합리적 의심의 수준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왜 청와대는 그 많은 약품을 구입했는가? 왜 청와대는 남성용 발기 부전 치료제를 구입했는가? 왜 청와대는 수면내시경용 마취제를 구입했는가? 왜 청와대는 수백개의 미용 주사약을 구입했는가? 조웅 목사는 주장을 했으나 제시하지 못했던 근거가 지금 튀어나오고 있다. 좀 더 뒤져보면 더 많은 증거가 나올 것이다. 이런 증거는 모두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청와대는 검찰의 기소 내용에 대해 "상상과 추측의 사상누각"이라고 평했다. 조웅 목사의 주장에 대해 상상과 추측이라고 말하던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때와 다르다. 검찰은 99% 입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최순실의 이익을 위해 일하라고 지시한 녹취 파일도 있다고 말한다. 지시 문건도 있다고 한다. 주장이 아니라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천마디의 주장을 뒤집는 게 하나의 증거다. 


조웅 목사가 주장하는 내용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누군가 갖고 있을 것이다. 세계일보 전 사장이 말하는 대통령을 날려 버릴 수 있는 8가지 기사도 어쩌면 조웅 목사의 그것과 크게 차이 없을 지 모른다. 어떤 사건에 대해 목격자나 주변 사람의 증언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변할 수 없는 증거다. 지난 10월 이후 박근혜 정부를 붕괴시키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주장이 아니라 그 주장을 확정하는 증거였다. JTBC가 태블릿PC와 같이 확고부동한 증거에 기반하여 고발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듯 박근혜 대통령이 끝까지 밝히지 않는 세월호 7시간, 혹시 마약이라도 한 게 아니냐는 추측도 이런 증거에 기반해야 한다.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6/23/2015062390047.html


모든 미디어와 시민과 제보자가 함께 한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최초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밝혀낼 수 있다. 모든 의혹에 대해 상식적 의심에 기초하여 추론해야 한다. 다만 박근혜 대통령과 그 주변인, 최순실 일당이 결코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았음을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현재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의혹은 범죄자에 대한 상식 수준에서 의심하고 추론해야 한다. 대통령이 주치의와 청와대 의료진을 두고 외부 약품을 사용한다는 게 이상하지만 범죄자라면 이상할 일 없다. 대통령이 프로포폴이든 마약이든 향정신성 약품을 사용한다면 이상하지만 범죄자라면 이상할 일 없다. 대통령이 국정 관련 자료를 외부인에게 건낸다면 이상하지만 범죄자라면 다 털어 먹기 위함이니 이상할 일 없다. 범죄자의 상식 수준으로 바라봐야지 일반인의 상식으로 바라보면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인물은 우리 상식 속의 대통령이 아니다. 검찰이 기소한 내용만 해도 이미 수십가지 범죄를 저질렀고 헌정을 유린하여 국민 대다수가 하야 혹은 탄핵되어야 한다고 불신하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의 범죄 의혹을 따질 때 일반인의 상식 수준에서 바라본다면 결코 증거를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정말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우리가 상상한 것 그 이상의 범죄가 계속 드러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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