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키맨’ 홍도, 베일 속 불꽃같은 삶

초기 사회주의 운동사 의문점 열쇠 쥔 홍진의,

1935년 러시아에서 반혁명 활동 체포 뒤 기록 찾을 수 없어…

해방 뒤 61년 만인 2006년 애국장 받아

 

홍도의 사진, 1921년(27살)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코민테른 파견 대표로 활동하던 시기.

 

노년기의 김철수는 국내 첫 사회주의 단체에 대해 구술 기록을 남겼다. 그에 따르면, 3·1운동 다음해인 1920년 가을에 사회혁명당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우리 조선 안에 공산주의 비밀결사로는 처음” 조직된 것이었다. 절대 비밀이었다. 어지간한 동지는 다 떼어내버렸다. 3·1운동에 헌신한 이 중에서도 결심이나 각오가 평균보다 약간 더한 수준의 동지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직 ‘사생을 같이할 사람들’만 들였다. 죽음마저도 기꺼이 함께할 수 있는, 가장 신뢰하는 동지들만 규합했다.

 

김철수 회고담 “오직 사생을 같이할 사람들의 앞자리”

 

구성원은 열대여섯 명이었다. 김철수는 기억을 더듬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밝혔다. 그중 앞자리에 호명한 한 사람에게 눈길이 간다. “저 홍진이라고, 시베리아에서 죽었어. 홍도라고 별명을” 불렀다고 한다.1

 

‘홍진이’라고 적은 것은 구술을 녹취한 사람의 착오였다. 김철수가 의도한 발음은 ‘홍진의’였다. 기록에 따라서는 더러 홍진의(洪鎭義)라고도 표기됐지만, 그의 본명은 ‘홍진의(洪震義)’이다. 동지들 사이에서는 홍도(洪濤)라는 가명으로 즐겨 불렀다. 본명은 아버지가 지었으므로 자식의 의중이 실리지 않는다. 하지만 가명은 자신이 직접 지으므로, 그의 내면 의식이 담기기 마련이다. ‘큰물 홍’ ‘큰 물결 도’라는 글자를 선택한 데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일제의 식민통치 체제를 쓸어버리는 대혁명의 큰 파도를 염두에 뒀던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그 큰 물결이 되려 했다.

 

김철수의 회고담에 따르면, 홍도의 역할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국외 연락이었다. 비밀 사명을 띠고서 “홍도라고 하는 사람이 상해를 갔다 왔”다고 한다. 국외의 한인사회당과 연락해 전국 규모의 통일된 공산당을 조직한다는 사명을 띠고서 왕래했다는 말이다.

 

김철수의 회고담을 다른 관점의 자료로 검사할 가능성은 없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홍도가 작성한 자필 이력서가 남아 있다. 그 속에 홍도 자신의 시선으로 본 전후 사정이 적혀 있다. 왜 중국 상하이에 왕래했는지, 그 의미를 뚜렷이 보여준다.

 

“1919년 2월에 다시 내지에 들어가서 내외지간의 연락 급 3·1운동에 직접 노력하다가, 체포를 피키 위하여 이해(그해) 5월에 다시 상해에 망명함. 1919년 9월에 해삼(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가 이곳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제2차 당대회에 참가하였으며, 또 입당하였음. 1920년 6월에 한인사회당의 사명을 가지고 비밀히 내지에 들어가서 한인사회당 내지부 조직에 대하여 일하다.”2

 

1919년 2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1년4개월 동안의 행적을 썼다. 인용문에서 말하는 ‘내지’란 바로 조선 국내를 가리킨다. 국경을 넘어다니면서 참으로 분주하게 투쟁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1930년 작성된 홍도의 이력서 러시아어 번역본 첫 페이지.

 

한자, 러시아어 등 3개 언어로 쓰인 홍도의 1930년 3월20일치 자필 서명.

 

한인사회당과 사회혁명당 연대의 매개 역할

 

이 기록에는 기왕에 어느 역사책이나 논문에서도 밝힌 적이 없는 미지의 중요 사실이 포함돼 있다. 홍도가 1919년 한인사회당 제2차 당대회에 참석했고, 또 한인사회당 내지부 조직을 위해서 국내로 다시 잠입했다는 진술에 유의하자. 초기 사회주의운동사의 한 비밀을 드러내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독립운동사상 전환점이 되는 결정을 여럿 채택했다. 박진순·박애·이한영 3인 대표단을 러시아 모스크바에 파견해 코민테른(국제공산당)에 가입하게 한 점, 책임비서 이동휘 등을 중국 상하이로 파견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게 한 점, 활동의 중점을 조선 내지에 두려고 노력한 점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주의할 점은 세 번째 사안이다. 종래에는 이 결정 사항이 어떻게 실행에 옮겨졌는지 알지 못했으나, 이제 홍도의 기록을 통해 실마리를 얻게 됐다. 서울 복판에 한인사회당의 내지부를 조직하기 위해 홍도가 직접 파견됐다고 한다. 김철수가 회고한 국내 최초의 사회주의 비밀결사 사회혁명당이 곧 한인사회당 내지부의 위상을 가짐을 시사한다.

 

이로 인해 초창기 사회주의운동사의 큰 의문점이 해소됐다. 1921년 5월 상하이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대의원을 파견한 두 개의 단체, 한인사회당과 사회혁명당이 어떻게 연대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사회혁명당은 성립 당초부터 한인사회당과 연계했을 뿐 아니라 그 내지부라는 조직 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관계를 매개하고 실행에 옮긴 이가 바로 홍도였다.

 

홍도의 자필 이력서는 역사학자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흥미롭기 짝이 없다.

 

그는 20살 되던 1914년 서울에서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비밀결사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928년 러시아로 망명할 때까지 쉼 없이 혁명운동에 참여했다. 배달모듬, 신아동맹단, 신한청년당, 한인사회당, 사회혁명당, 고려공산당, 적기단, 조선공산당. 이것이 그가 가담했던 비밀결사 목록이다.

 

이 단체들의 근거지는 러시아를 포함해 동아시아 4개국에 널리 분포했다. 홍도의 동선을 뒤따라가보자. 함경남도 함흥(보통학교), 서울(보성고등보통학교, 배달모듬), 도쿄(메이지대학, 신아동맹단), 상하이(신한청년당), 서울(3·1운동), 상하이(임시의정원), 블라디보스토크(한인사회당), 서울(사회혁명당), 상하이(고려공산당), 모스크바(국제당 파견 대표), 베르흐네우딘스크(고려공산당 연합 당대회), 상하이(국민대표회), 함흥(노동동무회), 서울(적기단 사건, 서대문형무소), 함흥(조선공산당, 함흥농민조합), 블라디보스토크(망명) 등의 도시가 줄을 잇는다. 어지러울 정도다. 그가 불꽃같은 삶을 영위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출옥 후 조선공산당 최고위 간부 대열에

 

30살 되던 해에 홍도는 시련을 겪었다. 1924년 8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북간도에 본부를 둔 비밀단체 적기단에 연루된 혐의였다. 함흥의 부호 고형선에게서 거액의 군자금을 받아낸 적기단원 이정호를 후원했다는 죄목이었다. 불행한 일이었지만, 다행스러운 점도 있었다. 상하이파 공산당의 비밀 당원이던 홍도는 일본 경찰의 가혹한 취조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당 조직의 노출을 막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으로 홍도는 감옥살이를 겪었다.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서 1927년 8월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옥 뒤 얼마 안 돼 홍도는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1927년 12월 비밀리에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당대회에서 중앙간부 9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3 당의 최고위 간부 대열에 올랐다. 그는 합법 운동 내에도 거점을 구축했다. 고향인 함흥으로 되돌아가 현지 사회운동에도 참여했다. 함흥농민조합 위원장에 취임했고, 신간회 함흥지회에서도 위원으로 선출됐다. 합법·비합법 양 방면으로 국내 사회운동에 뿌리를 내리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출옥 1년 만에 홍도는 다시 체포될 위험에 처했다. 이번에는 공산당 조직 자체가 노출됐다. 1928년 4월부터 몇몇 당 간부가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수사망이 조여들었다. 수사망을 피해가며 비밀조직을 지휘하던 홍도는 부득이 그해 7월에 국외 망명길에 올랐다. 목적지는 소비에트러시아였다. 8월1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는 환대받았다. 한글신문 <선봉>의 기자로 일한 데 뒤이어,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혁명 이론과 전술을 본격적으로 연수할 기회를 가졌다.

 

다시 김철수 노인의 회고담에 주목해보자. 그는 홍도가 시베리아에서 사망했노라 말했다. 도대체 소비에트러시아로 망명한 홍도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홍도의 러시아 망명 사실은 조선 국내의 지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1932년 3월 서울에서 간행된 월간지 <동광>에는 망명자 홍도의 안부를 묻는 기사가 실렸다.

 

“러시아에는 조선의 선배인 이동휘씨도 있거니와, 청년 활동가로서도 상당한 인재가 집중되어 있으니, 필자가 아는 이름만 얼른 열거하여 보면 윤해, 박진순, 주종건, 홍진의(홍도) 등 제씨가 그것이다. …앞으로 세계전쟁이 인다면 그것은 소비에트러시아의 소위 세계혁명에 대하여는 일대 호기회일 것이므로, 동양 방면에 대한 재러시아 동포의 활동이 상당히 유력시될 것을 넉넉히 추측할 수 있다.”4

 

적기단 사건으로 3년 복역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홍도. 1927년 8월.

 

기대 속에 러시아 망명, 반혁명 활동 혐의로 체포

 

러시아에 망명한 사회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홍진의(홍도)의 이름이 거론됐다. 이들 망명자에게 거는 국내 지인들의 기대는 컸다. 앞으로 자본주의 열강의 모순이 격화돼 세계대전이 도래한다면, 세계적 범위의 혁명적 위기가 고조될 것이다. 러시아는 세계혁명의 참모부를 자임했으므로, 그때는 소비에트러시아에 망명한 조선인 혁명가들의 역할이 강력하게 작용할 것이다. 이렇게 기대하고 있음을 본다.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1935년 12월 홍도가 연해주 포시에트 지구 우스치시디미 마을에 거주할 때였다. 두만강 건너 조선~러시아 국경선에 가까운 곳이었다. 이웃 마을 베르흐네시디미에 있는 트랙터정비소 정치부 보조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달 19일 홍도는 비밀경찰 기구인 내무인민위원부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반혁명 활동 혐의였다. 스탈린 시기 소비에트 국가폭력이 맹렬하던 때였다. 홍도는 항변이나 해명도 변변히 하지 못한 채 취조를 받았다. 그리하여 체포된 지 11개월 만에 내무인민위원부 처분으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5

 

그 뒤 홍도의 삶에 관한 정보는 발견되지 않았다. 시베리아 깊은 곳 케메로보 수용소에서 복역했다는 기록 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형기를 무사히 마쳤다면 아마 1940년 12월에는 출옥했을 텐데, 과연 그러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홍도가 시베리아에서 사망했다는 김철수의 증언은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아마 사실일 것만 같다.

 

그에게 들씌워진 반혁명 혐의는 근거 없는 것이었다. 홍도는 스탈린 사후 소련 정부에 의해 무혐의로 인정받았다. 1955년 10월 범죄구성요건 부재로 판정받아 복권됐다. 그의 조국에서는 훨씬 더 늦게야 명예가 회복됐다.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던 한국 정부는 마침내 해방된 지 61년이 지나서야 태도를 바꿨다. 한국 정부는 2006년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애국장을 수여했다.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지운 김철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1999년

2. 洪濤(Мальцев), ‘리력서’, 1930년 3월20일, 1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384 л.25-26

3. 김영만·김철수, ‘중앙집행위원 명부’ 1928년 2월24일,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5 л.9

4. ‘國際波瀾에 부대끼는 海外同胞의 安否’, <동광> 제31호, 1932년 3월

5. ‘홍도 Хон До, 말리체프 Мальцев’,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 (인명편2)>, 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 제47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601쪽, 2019년

 

 


임경석의 역사극장

우물 속 주검을 둘러싼 교활한 각본

‘살모사건’으로 불렸던 송하살인사건, 농민조합을 집단범죄자로 만들기 위한 일제의 계략

1931년 성진농민조합의 메이데이 기념사진. 구성원 가운데 여성이 다수를 차지한 점이 이채롭다. 임경석 제공

 

이른 아침 동네 우물에서 주검이 발견됐다. 1932년 5월23일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송하마을에서였다. 170가구쯤 있는 큰 동네였다. 철길 건너 송상마을까지 합하면 300가구가 넘는 번성한 농촌 마을이었다. “성진농민조합운동의 가장 강력한 근거지요, 검거 바람이 그칠 줄 모르는” 동네로 이름난 곳이었다.

 

주검을 발견한 사람은 이웃집 아낙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코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뜨린 여성은 으레 듣던 출렁하는 물소리가 아니라 둔탁한 충돌음을 들었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레 우물 속을 내려다봤으나,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았다. 우물 귀틀 안에 얼굴을 박은 채 한참 동안 내려다보려니까, 그제야 희멀끔한 것이 시선에 들어왔다. 머리칼이 쭈뼛이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1

 

성진농민조합 검거에서 아들 구하려

 

주검의 주인공은 동네 주민인 농부 허간씨의 아내 김씨였다. 54살의 초로에 접어든, 평범한 농촌 여성이었다. 남편도 있고 다 자란 아들딸을 거느린 유복한 가정의 안주인이었다. 집에는 28살 아들 허철봉을 비롯해서 큰딸 허어금(19)과 작은딸 허주화(17)가 함께 거주했다. 김씨 부인은 조선 여느 집안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특히 아들 사랑이 지극했다.

 

아들 허철봉은 열성적인 운동권이었다. 20살이 되자 청년운동에 참여했고, 민족통일전선 단체인 신간회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머지않아 면 단위 조직의 간부로 성장했다. 1928년 3월11일 열린 성진청년동맹 학중면 지부 설립대회에 참석해 집행위원 24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이듬해 12월24~25일 신간회 성진지회 제4회 대회에서 집행위원 후보로 선출될 만큼 비중이 커졌다. 군 단위 운동단체의 간부 반열에 이름이 오른 것이다. 1931년 사회운동이 농민조합 중심으로 개편될 때도 허철봉은 그 흐름의 한가운데 있었다. 5월30일 성진농민조합 창립대회에서 집행위원 2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성진농민조합은 조합원 수만도 2천 명에 이르는 큰 단체였다. 지부 조직이 14개고, 기층 세포단체인 반의 수가 45개였다.2 1930년대 격렬한 함경도 농민운동을 대표하는 유명한 농민조합들 가운데 하나였다.

 

김씨 부인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그해 12월 말 어느 새벽이다. 아들 허철봉이 성진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덜컥 체포되고 말았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눈이 펑펑 퍼붓는 날 해가 뜨기도 전인 새벽 5시께 패검(차는 칼) 소리를 요란스레 쩔렁거리며 정복 경찰대 30명이 송하마을을 습격했다.3 이날 청년 30여 명이 체포됐고 그 속에 허철봉이 포함됐다. 검거는 계속됐다. 이른바 ‘성진농민조합 제1차 사건’이다. 1931년 9월에 개시된 검거가 해가 바뀐 뒤에도 계속됐다. 성진군 전역에서 젊은이 700여 명이 체포됐다.

 

김씨 부인은 노심초사했다. 아들의 석방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면 주재소와 읍내 경찰서를 연거푸 찾아다녔고, 경찰에 선이 닿는 사람을 만나려고 노력했다. 어머니의 노력 덕분일까? 허철봉은 성진경찰서 유치장에서 석방됐다. 여전히 갇혀 있는 다른 수감자의 처지에 비하면 이례적인 조치다. 1932년 5월 초순의 일이다.

 

소설 <설봉산>(1958년 재판)의 마지막 페이지, 탈고 날짜 ‘1955.11.5.’가 기재돼 있다. 임경석 제공

 

일제 경찰은 “딸들이 살해했다”

 

경찰은 김씨 부인 죽음을 살인으로 간주했다. 경찰이 타살로 보는 관점은 사건 당일이 아니라 그 이튿날에야 수립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일 오전 현장에 나타난 주재소 순사는 이 사건을 심드렁하게 대했다. 그런데 하루 만에 태도가 바뀌었다. 이튿날 경찰은 주검 확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주검은 면 주재소를 거쳐 읍내에 있는 성진도립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사의 검시 소견을 얻으려는 목적이다. 시신 이송 과정에 성진경찰서 고등계가 개입했음을 시사한다. 의사는 경찰의 요구에 호응했다. 육안 검시에 더해 해부까지 했다. 그 결과 주검의 옆구리와 후두부에 타박상이 있고 그것이 치명상이라는 검시 소견을 냈다.

 

경찰은 이 소견을 근거로 주검이 타살의 결과라고 못박았다. 남은 문제는, 누가 왜 죽였느냐를 밝히는 것이었다. 경찰은 가족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허어금, 허주화 두 딸이 혐의를 받았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두 자매가 힘을 합해서 곤봉과 기타 흉기로 어머니 김씨를 난타해 기절시킨 뒤, 부엌에 들여다 눕혔다. 그곳에서도 난타를 그치지 않아 결국 22일 밤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그 뒤 범죄 사실을 감추기 위해 주검을 동네 우물 속에 버렸다고 했다.4

 

왜 죽였는가. 경찰 조사에 따르면 김씨 부인이 아들의 석방을 위해 농민조합의 비밀을 경찰에게 누설했음이 알려졌기 때문이란다. 피신 중이던 다른 농민조합 간부의 체포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허철봉은 어머니의 행위를 비난했고, 동지들에게 차마 얼굴을 들고 대할 수 없다며 집을 떠나버렸다. 5월17일 일이다. 그 뒤 어머니와 두 딸의 갈등이 깊어졌다. 딸들은 오빠를 동정하고, 어머니를 비난했다. 경찰 취조에 따르면, 갈등은 언쟁에 머물지 않고 폭행 양상으로 번졌으며 급기야 살인사건으로 나아갔다.

 

자매는 살해 혐의를 부인했다. 어머니와 갈등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폭행을 가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아니라고 항변했다. 어머니는 스스로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처가 왜 났는지는 자신들도 모르고, 아마 투신 중에 부딪쳐서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자매는 법정 심문에서도 일관되게 그와 같이 진술했다.

 

그러나 총독부 판사는 자매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피고인들의 유죄를 인정했다. 그리하여 두 자매는 청진지방법원 공판에서 각각 징역 10년형과 7년형을 선고받았다. 살인사건치고 형량이 매우 낮다는 여론 때문이었을까. 경성복심법원에서 행한 공소(항소) 재판에서는 자매의 형량이 더 늘었다. 큰딸에게는 징역 15년형, 작은딸에게는 징역 10년형이 선고됐다.

 

해방 전 함경북도 성진군 지도. 붉은 점 찍은 곳이 성진군 학중면 송하마을이다. 임경석 제공

 

농민운동 추락시킬 호재

 

송하살인사건은 농민운동의 위신을 추락시킬 수 있는 호재였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밀정이라고 어머니를 때려죽이는 것이 주의상으로 보아 옳은 일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저주받을 죄’ ‘뱀같이 쌀쌀한 태도’ ‘동정할 길이 없는 대죄악’ ‘저주하는 분노성’ ‘말세가 된 세상’ 등의 수사로 농민운동과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를 부추겼다.5

 

사건 자체가 갖는 센세이션 때문일까. 다른 신문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논조를 보였다. 언론 보도는 이 사건을 ‘살모사건’이라고 불렀다. 두 자매는 어머니를 살해한 악녀로 지목받았다. 손가락질의 대상이 됐고 사회적으로 고립됐다. 형기를 다 마치고 출소했다면 큰딸 허어금은 34살에, 작은딸 허주화는 27살에 세상에 다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후 삶이 어떠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 경찰과 재판부의 시선이 아닌, 농민운동 쪽 기록은 없을까? 송하살인사건의 진실을 보여주는 자료 말이다. 다행히 있다. 허성택이 1936년에 작성한 성진농민조합 활동에 관한 자전적 기록이다. 허성택은 성진에서 나고 자랐으며, 1931~1933년 성진농민조합에 주도적으로 참가했고, 뒷날 소련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유학했다. 그에 따르면 “송하스파이사건 검속자 구원으로 각 동에서 구조사업”을 행했다.6 ‘송하스파이사건’이란 곧 송하살인사건을, ‘검속자’란 허어금과 허주화 자매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성진군의 여러 마을에서 그들을 돕기 위해 구조사업을 수행했다고 한다. 이 기록 안에 두 자매에 대한 비난의 함의는 없었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또 있다. 작가 한설야가 집필한 <설봉산>이라는 장편소설을 주목할 만하다. 1956년 북한에서 간행된 이 작품은 일제하 성진농민조합운동을 소재로 다뤘다. 특히 송하살인사건 관련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소설 형식을 띠고 사건이 일어난 지 2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나왔음에 유의해야 한다. 다만 일정한 조건하에선 사실을 반영한다고 봐도 좋으리라. 왜냐하면 작가가 집필에 앞서 성진농민조합운동 자료를 조사하고 참가자들의 증언을 널리 청취했기 때문이다. <설봉산> 내용에서 경찰 자료와 신문 보도 등으로 교차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실로 간주해도 좋다고 본다.

 

예를 들면 이런 정보다. 김씨 부인은 자살하기 며칠 전 농민조합 사문위원회에 출석했다. 마을 뒤 산중에 구축한 대형 토굴에서였다. 50~60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그 자리에 여러 마을의 농민조합 간부와 열성자들이 모였다. 불을 켜지 않아서 서로 얼굴도 볼 수 없고, 어디에 누가 앉아 있는지도 알기 어렵게 만든 조건에서 문답이 이뤄졌다. 농민조합 간부를 하나 잡아주면 아들을 석방해준다는 약속을 받은 일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김씨 부인은 그 사실을 끝내 부인했다.

 

오욕을 짊어질지언정

 

성진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은 교활한 취조 전략을 구사했음이 드러났다. 그들의 첫 노림수는 농민조합을 집단범죄자로 낙인찍는 것이었다. 김씨 부인의 밀정 행위를 알아챈 조합원들이 작당해 그를 타살했다는 각본을 짰다는 것이다. 그러나 딸들은 끝내 이 각본에 응하지 않았다. 아무리 고문해도 바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경찰은 부득이 차선의 계책을 택했다. 딸들을 살해범으로 만드는 길이었다. 요컨대 허씨 자매는 스스로 오욕을 짊어질지언정 무고한 농민조합에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은 결단코 거절했던 것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한설야, <설봉산>, 조선작가동맹출판사, 355쪽, 1958년(재판). 이 자료를 성균관대 김성수 교수에게서 받았다. 감사드린다.

2. ‘성진농민조합 사건 81명, 10일 송국’, <동아일보> 1932년 9월14일

3. ‘경관과 지주협력 50여 촌민 검거’, <조선일보> 1932년 1월3일

4. ‘친모 살해한 양 자매, 控訴公判 금일 개정’, <동아일보> 1932년 11월15일

5. <매일신보> 1932년 11월19일

6. 김일수, <연역(이력서)>, 6쪽, 1936년 4월3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40 л.12-20о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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