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카사트킨(Nikolai Alexeyevich Kasatkin), 1890.

니콜라이 카사트킨 (Nikolai Alexeyevich Kasatkin 1859~1930)은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자작농이자 석판화가였던 아버지의 지도 아래 그는 처음으로 그림을 배웠다.​
학교에서 10년 넘게 공부를 하는 동안 

카사트킨을 지도한 선생님 중 한 명은 바실리 페로프였다. 
페로프는 카사트킨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페로프 자신이 부르주아 계급의 비도덕성에 대해 
엄정한 눈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카사트킨 역시 스승의 그것을 배웠다 .

학교에 재학 중이던 1878년에는 초상화로, 
1882년에는 자연을 묘사한 드로잉으로 은메달을 수상한다. 
1883년에는 ‘교회 광장의 걸인들’이라는 작품으로 또 은메달을 수상하는데 
요즘 말로 옮기면 이 때 학교 대표 화가 정도의 영예를 얻었다. 
메달이 꼭 실력의 우열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림에 대한 재능은 확실히 남달랐던 모양이다.​

1878년 처음 은메달을 수상한 때부터 카사트킨은 

출판협회에서 만든 학교에서 학생을 지도한다. 
1891년, 그 유명한 이동파의 멤버가 되는데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가입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 시대를 1880년대 후반부터 1890년 초기까지라고 한다면 
이 시기 그의 그림 주제는 일상의 장면들을 묘사한 것으로 이야기가 담긴 것들이었다.

1890년대 중반부터 카사트킨의 작품에 변화가 오는데, 
산업 현장들을 주제로 방향을 돌린 최초의 러시아 화가 그룹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작품에 적갈색과 청색이 많이 등장했고 붓 터치에는 힘이 넘치기 시작했다. 

1894년, 서른 다섯의 나이로 카사트킨은 자신이 졸업한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의 선생님이 되었다. 
모교에 선생님으로 1890년부터 카사트킨은 모스크바 미술애호가 협회를 비롯 
여러 곳에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했다. 
이 때 톨스토이와 친분을 쌓게 되고 자주 톨스토이가 있는 농장을 방문, 
많은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한 작품으로 은메달을 수상한다. 
카사트킨은 여행을 아주 많이 한 화가이다. 
자주 러시아 전역을 여행했는데 그 범위와 연대를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코카서스와 우랄 산맥을 비롯 파리와 베를린 

그리고 1901년부터는 매년 이탈리아를 찾았다. 
그 외에도 터키와 영국, 오스트리아,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그의 발길이 닿았으니까 대단한 에너지를 가졌던 것 같다.

1905년 1월 9일, 열악한 근무 환경과 낮은 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러시아 황제가 있는 동궁 앞에 모여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곧 이어 군인들의 발포가 이어졌고 수 많은 사람들이 피를 뿌렸다. 
‘피의 일요일’이었고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시작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혁명에 눈을 뜬 카사트킨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그 선두에 서게 된다.  

1917년 10월, 마침내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다. 
카사트킨은 거리에 화실을 차리고 이 혁명 성공을 위한 축제의 디자인에 참여한다. 
1924년, 영국 내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묘사하기 위해 영국과 웨일즈를 찾기도했다. 
화가와 혁명가가 동시에 그 몸 안에 있었다.

1929년,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 해, 
생애 처음으로 모스크바에서 개인 전시회를 개최했다. 
아마 그에 대한 세상의 축하가 아니었을까 싶다. 
카사트킨은 19세기 비평적 사실주의와 
혁명 러시아의 예술을 연결하는 고리라는 평을 받고 있다. 
끝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움직이는 것이 
예술의 속성 중의 하나라고 보면 예술가도 혁명가라고 할 수  있다.

 

Rival Ladies, 라이벌 여인들. 1890. oil on canvas. 71 x 106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눈 쌓인 길 위로 물 지게를 든 두 여인이 나타났다. 

그런데 두 여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한 여인은 몹시 흥분한 듯한 얼굴이고 다른 여인은 

그저 듣고만 있는데 수세에 몰린 느낌이다.

말을 하는 여인은 손을 호주머니에 넣었지만 

젊은 여인은 손을 앞으로 했기 때문이다. 
아마 동네에 떠 도는 소문이 있었겠다. 
물을 길으러 가는 길에 소문의 발원지로 생각되는 여인을 딱 만났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소문을 따지는 것 아닐까 싶다. 
머리채를 잡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겠지.
흰 눈으로 덮인 건물 위로 파란 하늘이 가뜩이나 추워 보이는데, 
한 여인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고 또 다른 여인은 차갑게 식고 있다.
아주머니들, 이제 그만 하시죠. 한 동네 살다 보면 별 일 다 있다.

카사트킨은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자작농이자 석판화가였던 아버지의 지도 아래 그는 처음으로 그림을 배웠다. 
아버지의 재능이 아들에게 흘러가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열 네 살이 되던 1873년, 카사트킨은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 
(Moscow School of Painting, Sculpture and Architecture)에 입학한다.

 

In the worker family, 노동자 가족. 1890~1900. oil on canvas. 75.5 x 71.5 cm. 

노동으로 먹고 사는 가난한 집 저녁 풍경이다. 
탁자 위에 켜진 촛불 하나가 식구들을 비추고 있는데,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내려 앉았다. 

아이에게 모든 시선이 모여 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관객을 보는 아이의 눈은 불안함이 가득 차 있다. 
저녁을 먹고 아이에게 노래라도 시키는 것이라고도 생각해 봤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아이의 눈과 자세를 보다가 
혹시 어른들이 아이를 추궁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온 몸으로 사는 부모들과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10년 넘게 공부를 하는 동안 

카사트킨을 지도한 선생님 중 한 명은 바실리 페로프였다.  
페로프는 카사트킨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페로프 자신이 부르주아 계급의 비도덕성에 대해 
엄정한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카사트킨 역시 스승의 그것을 배웠다.

 

Girl near Fence, 울타리 근처의 소녀. 1893. oil on canvas. 
97 x 49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전에 사진을 찍자고 하면 많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찍힌 사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진 속 나의 모습은 늘 굳어 있다. 
누군가를 정면으로 본다는 것은 적당한 뻔뻔함과 함께 용기도 있어야 했다. 
아마 그림 속 소녀는 아직 그것을 배우지 않았겠지. 
손에 든 나뭇잎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살다 보면 언젠가는 관객을 향해 나뭇잎을 당당하게 들고 

활짝 웃는 얼굴로 서는 날이 오겠지. 
그렇다고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카사트킨은 학교에 재학 중이던 1878년에는 초상화로, 
1882년에는 자연을 묘사한 드로잉으로 은메달을 수상한다.
졸업하던 1883년에는 ‘교회 광장의 걸인들’이라는 작품으로 또 은메달을 수상하는데 
요즘 말로 옮기면 이 때 학교 대표 화가 정도의 영예를 얻는다. 
메달이 꼭 실력의 우열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림에 대한 재능은 확실히 남달랐던 모양이다.

 

Seeking Coal at an Exhausted Mine, 폐광에서 석탄을 줍는 여인들, 1894, 
oil on canvas. 80.3 x 107 cm. 러시아 미술관, 상트 페테르부르크.

산업 발달로 인해 문명은 발전하지만 그에 비해 

자연환경은 파괴되고 훼손 되는 현실을 꼬집고 있으며 
그 속에서 석탄을 주워 연명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아프게 그리고 있다.

이제는 캘 것이 없는 노천 광산에 집에서 쓸 석탄을 줍기 위해 아이들과 여인들이 모였다. 
거대한 자본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이 있을까? 
그래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또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남아 있는 것들을 줍고 있다. 
마차에 앉아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과 작은 몸으로 열심히 석탄을 줍는 아이의 등이 눈물겹다. 
밀레의 작품 속 여인들은 이삭을 줍고 있었지만 그림 속 여인들은 석탄을 줍고 있다.

1891년부터 카사트킨은 매년 도네츠크 지역에 있는 광산 지대를 찾아간다. 
도네츠크는 1870년 러시아의 철도용 레일을 만들기 위해서 공장이 들어선 지역이다. 
그의 작품 중에 노동자와 광부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가 자주 보이는데 아마 이 무렵 여행의 결과였겠다.

1878년 처음 은메달을 수상한 때부터 카사트킨은 출판협회에서 만든 학교에서 학생을 지도한다. 
1891년, 그 유명한 이동파의 멤버가 되는데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가입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 시대를 1880년대 후반부터 1890년 초기까지라고 한다면 
이 시기 그의 그림 주제는 일상의 장면들을 묘사한 것으로 이야기가 담긴 것들이었다. 
1890년대 중반부터 카사트킨의 작품에 변화가 오는데, 
산업 현장들을 주제로 방향을 돌린 최초의 러시아 화가 그룹 중 한 명이 된다. 
그의 작품에 적갈색과 청색이 많이 등장했고 붓 터치에는 힘이 넘치기 시작했다.

 

A Miner's Wife. 여자 광부, 1894. oil on canvas. 65.4 x 4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아마 탄을 캐고 난 뒤 대충 세수를 한 모습이다. 
얼굴과 손에 남아 있는 석탄 흔적과 달리 얼굴은 아주 맑다.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그녀의 얼굴을 밝게 했을까? 
노동의 고단함 보다는 건강함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미소가 참 곱다. 
자세는 또 얼마나 당당한가? 
이런 미소와 눈매가 시간이 흘러 이데올로기를 품게 되면 웃음은 사라지고 
굳게 다문 입술과 부릅뜬 눈으로 등장하게 된다.

1894년, 서른 다섯의 나이로 카사트킨은 자신이 졸업한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의 선생님이 된다.
모교에 선생님으로 부임하는 화가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정말 부럽다. 
선전 문구를 흉내내면 ‘기쁨 두 배’가 아닐까 싶다. 
1890년부터 카사트킨은 모스크바 미술애호가 협회를 비롯 

여러 곳에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한다. 
이 때 톨스토이와 친분을 쌓게 되고 자주 톨스토이가 있는 농장을 방문, 

많은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In the Corridor of the District Court, 지방법원의 복도에서. 1897. 
oil on canvas. Sevastopo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evastopol)

재판정 복도에 재판을 앞둔 두 사람이 군인들 감시를 받으며 앉아 있는데, 
면회를 온 아내는 남편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여인의 손과 허리를 잡은 남편의 표정은 참담하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여인의 자세를 보면 

재판 결과가 예상 되었던 모양이다. 
왼쪽의 두 사람은 애써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인을 바라보는 군인의 표정은 복잡하다. 
강하게 여인을 제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심정적으로는 동정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겠다. 

사람들이 앉아 있는 의자는 복도의 어둠 속으로 녹아 들었고 
그 어둠 위로 날카로운 칼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살아만 돌아 오세요.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시간은 참을 수 있습니다.
여인의 울먹임이 이렇지 않았을까?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한 작품으로 은메달을 수상한다. 
카사트킨은 여행을 아주 많이 한 화가다. 
자주 러시아 전역을 여행했는데 그 범위와 연대를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코카서스와 우랄 산맥을 비롯 파리와 베를린 

그리고 1901년부터는 매년 이탈리아를 찾았다. 
그 외에도 터키와 영국, 오스트리아,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그의 발길이 닿았으니까 대단한 에너지를 가졌던 것 같다.

 

Who? 누구? 1897.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이 작품을 한참을 드려다 봤다. 
그림 속 남자와 여인의 관계를 설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부부라고 가정하면 상상이 너무 천박스럽게 흐른다.
지금 이야기 하면 사실 이 아이는 당신 아이가 아니에요...
누구라고???

또 다른 설정으로 여인의 남편을 체포하기 위해서 

집을 찾은 군인이라고 보면 이야기 하나가 만들어 질 수 있다.
당신 남편 어디 있어?
나는 모르는 일이에요. 

어제 저녁 친구가 와서 같이 나간 뒤로 소식이 없어요...

누구라고?
이야기 만들기 릴레이라도 하고 싶다. 
그나저나 저 남자, 조금 있으면 눈이 튀어 나올 것 같다.

1905년 1월 9일, 열악한 근무 환경과 낮은 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러시아 황제가 있는 동궁 앞에 모여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곧 이어 군인들의 발포가 이어졌고 수 많은 사람들이 피를 뿌렸다. 
‘피의 일요일’이었고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시작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혁명에 눈을 뜬 카사트킨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그 선두에 서게 된다.

 

​Worker. 1901.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굵은 붓터치 사이로 떠 오르는 여인의 눈빛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조금 피곤하고 지친듯한 모습이다. 
그러다 보니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체념 같아 보인다. 
살기 위해 목숨을 건다고 했던가?
이제 남은 것은 어쩌면 목숨을 담보로 살아야겠다는 앙상한 결심뿐일 수도 있다. 
가끔 삶은 우리를 이렇게 저렇게 쥐고 흔든다. 
결심마저 없다면 우리는 아마 세상 밖 어딘가로 팽개쳐졌겠지.

1917년 10월, 마침내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다. 
카사트킨은 거리에 화실을 차리고 이 혁명 성공을 위한 축제의 디자인에 참여한다. 
1924년, 영국 내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묘사하기 위해 영국과 웨일즈를 찾기도 한다. 
화가와 혁명가가 동시에 그 몸 안에 있었겠다. 
1929년,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 해, 생애 처음으로 모스크바에서 개인 전시회를 개최한다. 
아마 그에 대한 세상의 축하가 아니었을까 싶다.

카사트킨은 19세기 비평적 사실주의와 

혁명 러시아의 예술을 연결하는 고리라는 평을 받고 있다.
끝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움직이는 것이 예술의 속성 중의 하나라고 보면 

예술가도 혁명가라고 할 수 있겠다.

 

Moving to a New Place. 1881. oil on canvas. Lviv National Art Gallery (Ukraine - Lviv)

 

The Worker's Family. 1891. oil on canvas. Kharkov Museum of Art (Ukraine - Kharkov)

 

Miner. 1894. oil on canvas.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The Tram Has Arrived. 1894. oil on canvas.

 

At the Mine. 1894-1895. oil on canvas. Donetsk Regional Art Museum (Ukraine - Donnetsk)

 

Coal Miners. 1895.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The Letter. 1901. oil on canvas.
Art Museum of Dnepropetrovsk (Ukraine - Dnepropetrovsk)

 

Worker's Wife. 1901. oil on canvas. Odessa Fine Art Museum (Ukraine - Odessa)

 

The Hostess. 1904. 

 

Weaver. 1904. oil on canvas. Alupka Palace Museum (Russian Federation - Alupka)

 

Peasant Women Breast-Feeding a Puppy. Date unknown. 

 

[영상] Nikolay Alexeyevich Kasat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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