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 레핀 (Ilya Yefimovich Repin)의 작품 세계

 

18세기의 미술

표트르 대제의 사회개혁 및 새 수도의 건설과 더불어 러시아의 건축은 곧바로 근대화의 길로 접어든다. 

외국에서 온 건축가들의 협력을 얻어 초기 건축의 많은 시작(試作)이 있은 후 18세기 중엽인 

엘리자베타 여제(女帝) 때에 이르러 건축가 B.F.라스트렐리의 독창적 재능은 여러 가지 빛나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페테르부르크의 동궁(冬宮), 스몰리누이수도원, 페테르고프(현재의 페트로드보레츠)의 대궁전, 

차르스코예 셀로(현재의 푸슈킨)의 예카테리나궁전 등이 바로 그의 업적인데 

여기에는 바로크의 여러 요소가 새로운 국민적 양식 속에 교묘하게 소화되어 있다.

 

1770∼80년대에는 많은 건축가들이 신고전주의 구축미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회화 분야에서도 바로크 · 로코코 · 신고전주의가 도입되어 1758년의 미술아카데미 창설 이래 

그것이 궁정취미를 배경으로 전아(典雅)한 양식을 배양하게 되지만 그 한계를 넘어 

인간적 개성의 진실에 육박하는 것은 화가 안트로포프, 로코토프, 레비츠키, 아르구노프, 

보로비코프스키와 조각가 슈빈의 초상작품들이다.

 

19세기 이후의 미술

19세기 초에 나타난 중후한 신고전주의 작품으로 페테르부르크의 해군부(자하로프 설계) · 

알렉산드라극장(로시 설계) 등이 있으나 그 후에는 활기찬 건축활동을 볼 수 없다.

 

회화의 세계에도 아카데믹한 고전주의가 우세하였으나 나폴레옹전쟁(1812)이 민족감정을 뒤흔들고 

또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25)에서 시작된 반절대주의(反絶對主義) 사회투쟁이 소용돌이치기에 이르자 

일부 화가들은 이미 귀족적인 아카데미즘의 안일 속에 잠겨 있을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서구 낭만주의의 새로운 동향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대상에 대해 정열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창조 의욕은 키프렌스키와 트로피닌의 초상화에서, 베네치아노프의 농촌정경화(農村情景畵)에서, 

브률로프의 《폼페이 최후의 날》이나 이바노프의 《그리스도의 민중에의 출현》 등의 화면에서 

뚜렷하게 읽을 수 있다. 페도토프의 《소령의 구혼》 《귀족의 조반》, 그 밖의 일련의 작품은

고골리적인 풍자정신과 예리한 비판의식에 의하여, 비판적 리얼리즘의 선구가 되었다.

 

1870∼80년대에 회화 발전의 주축이 된 것은 미술 아카데미에 항의하고 퇴학한 젊은 화가들의 단체를 모체로 

1870년에 ‘이동파’운동을 일으킨 화가들 (페로프, 크람스코이, 니콜라이 게, 시슈킨, 사프라소프 등)과 

조금 뒤에 참가한 탁월한 세 화가 레핀, 수리코프, 레비탄이다.

 

그들은 당시의 사건이나 풍속을 직접 묘사한 작품 외에도 먼 과거의 사건을 주제로 한 역사화나 

조용한 관조에 몰두한 풍경화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표현 기술면에서는 아카데믹한 훈련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야로셴코, 베레시차긴, 폴레노프, 아이바조프스키 등의 창작도 이동파와 공통된 방향을 나타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활약했던 이동파가 후퇴하고 그 대신 근대주의의 여러 세력이 대두하기 시작한 

과도기를 대표하는 사람은 사실의 깊이를 잃지 않고 담담하게 기발한 새 형식을 탐구한 세로프와, 

비극적 심정을 우의적(寓意的) 이미지에 실어 표현한 환상의 화가 우루베리 등의 이색적인 두 화가이다.

 

한편 19세기 말에 탄생한 새로운 단체로는 코로빈, 아르히포프, 바스네초프, 기타 많은 인상주의 

또는 상징주의의 동조자들이 가담한 러시아 화가동맹과, 이동파 아류의 천협(淺狹)한 

교훈성 · 지방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한 미르 이스쿠스토바(藝術世界:1898∼1904)가 있고, 

이어서 한층 더 급진적으로 형식을 개혁하려고 한 다이아몬드의 잭, 푸른 장미, 

금빛 양털, 기타 많은 단체가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이런 와중에서 당시의 국제적인 전위예술의 첨단을 걷는 사람들에 의하여 여러 실험이 행해졌는데, 

17년의 혁명을 전후하여 이 미술가들의 일부는 국외로 빠져나갔고, 일부는 남아서 새 정권에 협력하였다. 

이와 같이 소비에트연방으로 옮겨가기 전의 세기말부터 20년대에 걸친 러시아 미술은 

예술의 전 역사를 통해서도 보기 드문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10월혁명 후부터 소련 붕괴까지의 미술

20세기 초부터 1917년의 혁명을 거쳐 20년대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미술단체들이 등장한 가운데 서로 얽히고 설키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모험과 파란에 찬 전위예술의 역사를 형성해 나갔다. 

이와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활동이 혁명 후에도 한동안 가능하였던 까닭은 초기의 볼셰비키혁명 정권이 

이들의 활동을 방관하거나 호의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W.칸딘스키를 비롯, K.말레비치, M.샤갈, V.타틀린, N.가보 등의 모더니스트들에게 

대학의 미술교수라든지 지방정부 미술장관 등의 공직이 부여되고 활동무대가 제공된 사실로도 입증된다. 

그러나 얼마 뒤 샤갈은 프랑스로 망명하여 유럽에서 활로를 찾게 되고, 칸딘스키도 21년에 독일로 가서 

바우하우스 설립에 참여했는가 하면 가보 역시 국내에서의 정치적 충돌로 설 땅을 잃고 

베를린의 바우하우스에 합류하였다.

 

이렇듯 망명의 길을 택하여 서유럽 미술계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전개한 전위파 미술가들과는 대조적으로 

국내에 잔류한 일파는 결국 현실에서 유리된 관념주의라는 낙인이 찍혀 미술계에서 축출당하였다.

 

21년 소련정부의 통제경제정책이 실시되자 문학과 미술을 비롯한 모든 예술활동의 내용은 

낱낱이 통제받기 시작하고 추상예술은 배척되어 미술의 현장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소련정권이 요구하는 미술이란 오로지 공산주의 이념에 입각한 사실주의적인 미술이어야 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교육하기 위한 미술인 동시에 그들이 말하는 ‘생활의 진실’을 전달하는 미술로 귀일되었다.

 

이처럼 공산정권과 미술사조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벌어진 이념전쟁의 결과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치 아래 획일화되었다. 

혁명이 일어난 뒤 몇 해 동안은 혁명기념일마다 기념행사를 위한 장식용 패널이라든지 

플래카드, 선전용 포스터 따위를 만드는 것이 미술가들에게 주어진 모든 과업이었으며, 

그 후 여기에서 새로운 응용미술의 분야가 개척되었다.

 

전위예술시대의 기수였던 구성주의자들은 대부분 타블로 (tableau:벽화 등을 포함하지 않는 회화의 뜻)의 

세계를 벗어나 설계나 디자인 등 응용미술의 분야로 활동무대를 옮겨갔다. 

스탈린시대의 가혹한 사상통제의 반영으로서 점차 격심해진 형식주의 배격의 정치선전은 

근대주의 내지 전위예술의 경로를 거쳐 어용적인 노선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던 

소련 미술가들에게 있어 개성을 말살시키는 혹독한 시련이었다.

 

이와 같은 소용들이 속에서도 28년에는 베네치아의 국제미술전(비엔날레)에 

그들의 작품이 참가하는 등 해외에 소련미술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32년에는 소련미술의 다민족적(多民族的) 특성을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구호 아래 

소련미술가동맹이 결성되고 건축 · 회화 · 조각 등 각 부문에 걸친 통제가 본격화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47년에는 ‘소비에트연방미술아카데미’가 창립되었지만, 

그들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획일적인 미술 보급과 미술교육은 여전히 강화되었다. 

53년 스탈린시대가 마침내 종말을 고하고 예술 각 분야에도 해빙분위기가 점차 감돌기 시작한 

50년대 말~60년대 초에는 모이세엔코, 이루토넬, 사라호프 등 일군의 청년미술가들에 의해 

스탈린기(期) 미술에 대한 타파운동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들이 등장한 이래 주제에 대한 교조적(敎條的)이고 교훈주의적인 해석은 후퇴하고 

기법적으로도 갖가지 새로운 시도가 있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그와 같은 활동이 

뿌리 깊은 종전의 이념적 패턴에서 과연 탈피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소련미술이 어떤 변화를 치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타블로 형식의 예술에 관한 한 아직도 그 체질에 근본적인 변화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한편, 60년대와 70년대는 도시개발과 조형예술의 부문이 새로이 각광받은 시기였다. 

모스크바 칼리닌가(街)의 조성, 지진을 겪은 후의 타슈겐트시(市)의 재건, 

제르노그라드(모스크바의 위성도시) · 트리아치(볼가강 기슭) · 노보이(우즈베크) · 세프쳉코(카자흐) 등 

신도시 건설에서 획기적인 구상과 웅대한 규모로 기술과 예술이 제휴하였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프로젝트의 특질과 관련하여 건축앙상블 중의 회화나 조각의 

존재 양식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로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1993년에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개최된 ‘러시아 · 소련의 아방가르드, 1915-32’ 전시회는 

러시아에서 근대예술의 성과가 나왔다는 사실과 문화에 의한 외화획득에   적극적인  러시아의 태도를 의미한다.

 

 

Reception for Local Cossack Leaders by Alexander III in the Court of the Petrovsky Palace in Moscow. 1885.

 

모스크바의 페트로프스키 궁전에서 알렉산더 3세가 지역 코사크 지도자를 맞이하다.

 

 

Refusal of the Confession. 1879~1885. oil on canvas. 58 x 4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Courtyard of Petrovsky Palace. 1885. oil on  wood. 23 x 1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leksander III receiving rural district elders in the yard of Petrovsky Palace in Moscow. 

 

1885~1886. oil on canvas. 58 x 4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the Artist Grigory Myasoedov. 188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Leo Tolstoy. 레오 톨스토이 초상화. 1887. oil on canvas. 88 x 12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Leo Tolstoy as a Ploughman on a Field. 쟁기로 밭을 가는 레오 톨스토이

 

1887. oil on canvas. 40 x 2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Leo Tolstoy in the forest. 숲에서 휴식을 취하는 톨스토이. 

1890. oil on canvas. 50 X 60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이름만으로도 존재감 가득한 대문호 톨스토이. 

책을 가까이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활』이나 『전쟁과 평화』의 첫 페이지를 넘겨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일리야 레핀은 톨스토이와 가까이 살며 30여 년 간 우정을 나눈 친구였다.  

종종 만나 한적한 모스크바의 골목길을 산책하며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는 두 사람은 

여름 휴가를 함께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 그림도 톨스토이의 영지에 같이 머물며 그린 초상화 중 한 점이다.

 

나무 그늘 아래 편안하게 누워 책을 읽는 톨스토이의 모습은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했던 엄격한 작가의 모습이 아닌 옆집 할아버지 같은 친근함을 보여준다.  

레핀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체류 시절 경험했던 야외의 빛을 화폭에 담아내는 기법이 살짝 보이는 

이 작품에는 러시아 미술계의 톨스토이로 불렸던 일리야 레핀의 

대문호에 대한 존경심과 친분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그림의 색채는 다분히 안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톨스토이와 레핀이 친교를 맺은 것은 1880년 모스크바에 있는 레핀의 아틀리에서이다.

레핀과 톨스토이는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살았으므로 종종 만나서

한적한 모스크바의 골목길을 산책하며 뜨거운 논쟁을 벌이곤 했다.

레핀은 여러차례 톨스토이의 영지 야스나야 폴라야에 머물렀으며

그때마다 레핀은 이 위대한 작가나 그 가족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이들의 우정은 톨스토이가 사망 할 때까지 30년 간이나 계속되었다.

 

 

Leo Tolstoy reading. 1891. pencil. 24 X 3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Leo Tolstoy working at the round table. 1891.Private collection

 

 

Sketches of Leo Tolstoy. 1891.sketch and study.

 

 

Leo Tolstoy Barefoot. 맨발의 톨스토이. 1901년. 캔버스에 유채, 

 

207 × 73 cm. 국립 러시아 박물관

 

 

Portrait of Leo Tolstoy in peasant dress. shoeless. 1901. oil on canvas.

 

207 X 73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rg.

 

 

Portrait of Leo Tolstoy. 레오 톨스토이 초상화. oil on canvas.

 

 

Portrait of pianist and professor of Saint Petersburg Conservatory Sophie Menter. 1887. 

 

oil on canvas. 115 x  107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the Composer Mikhail Glinka. 1887. oil on canvas. 117 x 9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Self-Portrait. 1887. oil on canvas. 62 x 7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painter and sculptor Mikhail Osipovich Mikeshin.  1888.

 

oil on canvas.87 x 10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The Surgeon E. Pavlov in the Operating Theater. 1888. oil on ardboard.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Il'ia Efimovich Repin: They Did Not Expect Him. Unexpected Visitors. 1884~1888. 

 

oil on canvas. 160.5 x 167.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거실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여기는 그의 집이다. 이 비쩍 마른 남자는 퀭한 눈으로 가족을 바라본다. 
모자를 든 손을 몸 안쪽으로 붙인 경직된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위축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한 노파가 그를 보고 엉거주춤 일어난다. 놀란 모습이 역력하다. 이 노파는 그의 어머니다. 
거실 구석에서 피아노를 치다가 뒤를 돌아본 여인은 이 상황에 경악하는 모습이다. 이 여인은 그의 아내다. 
테이블 한쪽 구석에서 어린 여자아이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경계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어쩌면 이 아이는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 같다. 반면에 그 옆에 앉아 있는 소년의 표정은 한결 밝다. 
이 아이는 기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본다. 
 
하녀로 보이는 여성은 문고리를 붙잡고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예기치 않았던 한 남자의 갑작스러운 출현. 그 긴장의 순간. 
창문에서 들어온 은은한 햇살이 이 가족과 축축한 실내를 감싼다.  
거실로 보이는 공간 좌측의 큰 창문과 정면으로 열린 문 뒤쪽 작은 창문을 통해 밝은 빛이 들어온다.
빛으로 인해 그림의 전체적인 색조는 밝고 따뜻하고 부드럽다.
이렇게 채색함으로써 돌발 상황이지만 이 순간이 기본적으로 기쁘고 행복하다는 걸 암시한다. 
 
​목에 스카프를 매고 낡고 긴 모직 코트를 걸친 초췌한 남자가 한 손에 모자를 움켜쥐고 거실 안으로 들어온다.
지나치게 길어 구겨진 코트의 소매가 두 손목 아래를 덮었다. 
낡은 부츠와 다듬지 않은 턱수염, 마른 얼굴은 그의 모습을 더욱 초췌해 보이게 만든다.
약간 머뭇거리며 서 있는 남자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확신하지 못하는지 눈빛에 불안한 기색이 스친다.
 
​의자에서 황급히 일어나 엉거주춤 서 있는 검은 옷의 노파는 돌아온 남자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남자가 자신의 아들임을 바로 알아본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그녀의 얼굴 전체를 볼 순 없지만, 지금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는 헤아리고 남는다.
그녀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귀환이 몰고 온 놀람과 흥분에 휩싸여 
떨리는 왼손을 의자로 가져가 몸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 같다.
어머니는 곧 늙은 몸을 천천히 가누며 아들에게로 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림 오른쪽 테이블에 두 아이가 앉아 있다.
어린 여자아이는 뜻밖의 남자의 등장에 어리둥절해 하고, 
또 겁을 먹은 듯 숙제를 하다 말고 낯선 방문자를 유심히 지켜본다.
이 아이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아마 아이가 엄마 태중에 있을 때 아버지가 집을 떠났거나, 
아니면 너무 어릴 때 헤어져 그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불안감에 어깨를 움츠리고 사태를 파악하려고 애쓴다.
이 아이의 태도와는 아주 다르게 아이 오빠는 곧바로 반가움에 겨워 활짝 웃는다.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아버지임을 확인하자마자 소년의 두 눈에는 기쁨의 빛이 가득하다. 
 
​아이들 뒤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던 젊은 여인은 오래전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던 남편이 
불쑥 찾아오자 깜짝 놀라 급히 연주를 멈추고 몸을 돌려 그를 응시한다. 
그녀의 표정에는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가족들 중  아무도 그가 돌아오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남자 뒤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하녀로 보이는 인물이 거실 쪽 문을 열고 서 있다.
아마 남자에게 문을 열어준 사람이 이 하녀일 것이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문 손잡이를 잡고 있는데, 주인집 가족들이 집안으로 들어간 낯선 남자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고 살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녀 뒤로 빼꼼히 얼굴만 보이고 있는 사람은 요리사로 생각된다. 
그녀는 단지 이 상황이 무얼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레핀은 그림의 주인공 격인 혁명가 아들과 그의 노모를 세로줄 마루에서 출발해 하녀와 요리사, 
열린 거실문을 통과해 창문으로 이어지는 축선의 중심에서 좌우로 조금 벗어나게 배치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인물에 더 집중시키고, 
정서적인 공감의 강도를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노렸다. 
끝으로 이 그림의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그림 속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 표정과 눈빛이 보여주는 느낌일 것이다. 
레핀은 그가 만족할만한 인물들의 표정과 감정 표현을 얻기 위해 
주요 인물들을 네 번이나 고쳐 그렸다고 한다.
 
​그림을 통해서 레핀은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진리를 위해 몸 바친 그리스도에 
비견될 수 있다고 진술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의 대의(大義)가 옳고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혁명가들 역시 
가족들의 반응이 어떨까 걱정하며 서 있는 그림 속 남자처럼 결국 러시아 민중들의 
평가와 검증에 직면해 있다는 점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오랜 유형(流刑)에서 어느날 갑자기 집에 나타난 혁명가.
유형지는 분명 춥고 황량한 머나먼 시베리아였을 것이다. 
 
레핀의 그림을 통해 그는 어떤 출신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을까를 추정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피아노를 포함한 집안의 집기와 거실 내부의 인테리어, 하녀와 요리사를 부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진 걸 보면 그는 최상류층의 귀족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중류 이상의 사회경제 기반을 가진 계급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인민주의주의자, 공화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로 상당한 지식과 문화적 소양을 지닌 
인텔리겐차였을 거라는 단서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러시아의 역사를 보면 초기의 혁명운동인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으로부터 시작해서 나로드니키들, 
그리고 이후의 직업 혁명가들은 대부분 귀족이나 혹은 중류 이상의 출신 성분을 가진 
인텔리겐차 (러시아의 특수한 지식계급 집단)들이 많이 분포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그림은 혁명가가 먼 유배지에서 가족에게 돌아온 광경, 그 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시대적 정황을 감안하면 이 남자는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반체제 농민운동과 관련된 혁명가일 것이다. 
그는 체포되어 아주 오랜 시간 유배지에서 고생한 후 집에 돌아왔다.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는 작품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나는 타라스 셰브첸코(Tarasa Shevchenka, 1814~1861)의 초상화이고, 
다른 하나는 니콜라이 네크라소프(Nikolay Nekrasov, 1821~1878)의 초상화다. 
두 사람 모두 러시아 차르 체제 하에서 고통받던 농민을 위한 계몽 운동에 헌신했던 시인이다. 
특히 셰브첸코는 10년 간의 유배 생활 끝에 사면되어 집에 돌아왔으나 
유배 생활에서 얻은 중병으로 인해 외로움 속에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이 두 시인으로 대표되는 혁명가를 위한 일종의 헌사가 될 것이다. 
 
벽면에 걸린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두 초상화 사이 가운데 있는 그림은  ‘골고다(Golgotha)’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가 두 초상화 사이에 존재하게 함으로써 
레핀은 러시아 혁명가들의 투쟁과 고통을 순교자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이 가족이 이 그림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혁명가는 가족과 떨어져 있었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자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긴장된 그 순간에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은 
이 가족과 러시아의 미래가 밝아질 것이란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못 박히심’의 순간을 묘사한 그림이다. 
화가는 러시아 혁명가들의 투쟁과 고난에 종교적 순교의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레핀은 1885, 1887, 1888년 3차례에 걸쳐 방으로 들어오는 주인공의 얼굴이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이 그림에 심혈을 기우려 이동파 전시회에 출품하였다.
 
직접적인 사회 상황 반영과 간접적인 심리 표현이 돋보이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에서
레핀은 그 다음을 철저히 감상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우리가 이 그림에서 마주치는 상황은 오랫동안 부재하던 가족 누군가의 급작스러운 출현과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으로 인해 아직 긴장이 깨지지 않은 상태일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 그림의 결론은 해피엔딩이다.
가족들은 기다리지 않았지만 갑작스레 돌아온 아버지 또는 언니를 
가슴으로 맞이할 준비로 곧 부산해질 것이다.
딸 아이는 재빨리 가방과 코트를 받아들 것이고, 막내 아들은 편안한 자리를 권할 것이고, 
부인은 따뜻한 차를 준비할 것이다.
물론 당분간, 아니 어쩌면 영원히 언니와 아버지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할 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의 근거는 이들이 정치적, 사회적 신념 체계를 초월해 
하나가 될 수 있는 가족이라는 위대한 사실에 기인한다.
 

 

일리야 레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부분)

 

예기치 않은 방문객’은 레핀의 심리 묘사가 화폭에 그대로 펼쳐진 작품이다. 

1883년 알렉산더 3세가 즉위하면서 정치적인 이유로 유배를 갔던 사람들에 대해 사면령이 내려졌다. 

니콜라이 체르니세프스키가 21년 만에 시베리아에서 집에 온 것을 맞는 

식구들의 표정과 시선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긴장감이 다 드러나 있다.

 

유형지에 고생을 한 주인공은 창백하고 야윈 얼굴이지만 눈빛은 아직 살아 있다. 

그를 유형지로 몰아넣은 이념이 아직도 그의 눈빛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문을 열어 준 하녀의 표정은 놀람과 황당한 표정이 함께 떠 있다.

 

농노 제도의 폐지 이후, 러시아 농민의 삶은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이에 진취적인 성향의 교사, 의사, 점원, 노동자가 앞장서서 러시아의 독자적인 농민 자치 공동체를 기초로,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로 이행이 가능하다고 믿고 '브 나로드(v narod)'운동을 펼쳤다.

그림 속의 아버지 또한 브 나로드 운동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당했고, 

어느 날 예고 없이 집으로 불쑥 들어온 것이다.

 

초췌한 몰골로 집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온 이 사람을 누가 이 집안의 가장으로 생각했겠는가.

가족들은 마치 낯선 이방인처럼 자신의 아들을, 자신의 남편을,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맞이하고 있다.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이 치열하게 교차하고, 경계심과 놀라움이 분주히 섞이는 지점에서

우리도 서서히 상황을 공감하게 된다. 

어떤 예술 장르가 이처럼 단시간에 이와 같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일리야 레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부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 늙은 어머니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있고 

피아노 앞의 아내는 아직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이 안 된 듯한 표정이다. 

 

 

일리야 레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부분)

공부를 하다가 낯 선 사람 그러나 처음 보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어린 딸의 표정은 차라리 공포에 가깝다.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밝은 표정의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눈빛이다.

 

 

일리야 레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부분)

거실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여기는 그의 집이다. 이 비쩍 마른 남자는 퀭한 눈으로 가족을 바라본다. 

모자를 든 손을 몸 안쪽으로 붙인 경직된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위축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No one Waited For Her(Not expected). 1893~1898. oil on wood. 44.5 X37 cm.

The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Russia.

 

이 그림은 남자가 아닌 여자, 언니 또는 딸의 귀환을 그린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이다.

1870~1880년대 러시아 혁명기에 한 여대생이 유형지에서 집으로 돌아온 순간을 극명하게 묘사한 작품이라고 한다. 

혁명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가 형벌을 받고 돌아온 그녀의 등장에 반가움과 동시에

그녀로 인해 앞으로 가족에게 다가올 또 다른 위기 때문에 무조건 환영할 수만은 없는 가족들의 입장을

너무도 생생한 표정 묘사와 팽팽하게 대립하는 긴장된 구도를 통하여 잘 표현해 내고 있는 작품 있다.

 

집으로 돌아갈 순간만 기다리며 온갖 고생을 참아오다 마침내 기쁘고 설레는 마음을 한껏 품고 집안 문을 열었으나 

돌아온 그녀를 바라보는 형제들의 모습에서 현실을 직시하고는 귀환의 기쁨과 가족에 대한 실망,

자신이 겪은 인고의 세월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을 자아내는 돌아온 자의 생생한 표정 묘사와

언니가 돌아온 사실에 놀라움과 반가움이 앞서지만, 연이어 따라 나오는 언니라는 존재 때문에 다가올 위기감과 두려움

언니가 없을 때 만들어진 새로운 가족 질서의 파괴(그 옛날 언니의 의자는 방 안쪽이 문밖에 내몰려 있다)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남은 자의 생생한 표정 묘사가 백미인 작품이다.

 

아울러 이러한 긴장된 순간의 표정에 전체적으로 더더욱 강한 긴장감을  불어 넣는 것은

등장 인물들간의 적절한 구도와 등장인물의 적절한 배치라고 할 수 있다.

마치 그들 사이에는 건드리면 그림 전체가 폭발해 버릴듯한 보이지 않는 실로 엮여있는 것 같다. 

특히 이러한 긴장감은 앞에서 계속 이어진 것이 아니라 돌아온 자가 문을 여는 그 짧은 순간에 

갑자기 매우 강하게 형성되었고 그 순간을 올가미로 묶어 버려서 

더더욱 팽팽한 생동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방안 가득 긴장감이 팽팽하다. 유형지에서 막 돌아온 누나를 놀란 눈으로 맞이하는 가족들. 

예고도 없이 돌아온 그녀 또한 주저하기는 마찬가지다.

 

리얼리즘의 거장 일리야 레핀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며 1884년 동명작의 첫 번째 버전인 이 그림은 

혁명의 기운으로 가득 찼던 19세기 후반 실존인물인 혁명가 대학생의 뜻하지 않은 귀향과 

그녀를 맞는 가족의 망설임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다.  

 

​혁명에 몸 바치다 유형 생활까지 한 그녀는 집안에 또 어려움을 몰고 올까 두려워하는 가족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한 그녀의 신념은 이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작은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직한 질문이 이 작품을 러시아 미술사 전체의 걸작으로 일컬어지게 한다.

열린 문틈 뒤 창문에서 시작되어 화면 앞까지 유려하게 휘어지는 공간의 연결은 

바라보는 관객에게까지 이어져 마치 이 극적인 장면에 동참하는 듯 한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한다. 

 

가족들의 이러한 돌발적인 만남을 놀랍도록 사실적으로 그린 일리야 레핀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라는 제목으로 동일한 주제를 반복해 그렸다.

일리야 레핀은 이 그림을 여러 차례 수정해가며 방안에 있는 여성들의 표정을 세심하게 수정했다.

 

레핀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 내면의 본질에 대한 탐구였고,

이러한 탐구의 최종 목적은 19세기 러시아의 현실과 시대 정신에 대한 발언이었다.

레핀은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드로잉과 유화를 밑작업으로 남겼다.

우리는 이를 통해 그림이 어떻게 구성되었고, 어떻게 수정되었나를 한눈에 살필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모델의 시선과 표정, 복장과 태도 그리고 배경에 대한 작가의 철저한 작업 절차도 알 수 있다.

 

1884년에서 1888년 사이에 그린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의 주인공 남자는

1885년, 1887년, 1888년에 세 차례의 수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고

1893년 그린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의 주인공 여대생은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자신의 딸 나쟈 (Nadya Repina)를 모델로 완성한 것이다.

 

[그림 속으로 한 걸음] 일리야 레핀 -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Portrait of Baroness Varvara Ikskul von Hildenbandt. 1889. oil on canvas. 71 x 169.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Ivan Mikhaylovich Sechenov, Russian physiologist. 1889.

 

oil on canvas. 67 x 87.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the Art Critic Vladimir Stasov. 1889.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Boris Godunov with Ivan the Terrible. 1890. oil on canvas. 168 X 50.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Composer Cesar Antonovich Cui. 1890. oil on canvas. 98 X 120.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Luiza Mersi D'arzhanto. 1890. oil on canvas. 100 X 8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the philanthropist Olga Sergeyevna Aleksandrova-Heinz. 1890.  

 

oil on canvas. 106 X 124 cm.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writer Vladimir Grigorievich Chertkov. 1890. oil on canvas. 52 X 61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actress Eleonora Duse. 1891. charcoal.  139 x 10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Portrait of poet Grand Prince Konstantin Konstantinovich Romanov. 1891.

 

oil on canvas.76 X 9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utumn Bouquet. Portrait of Vera Repina. 1892. oil on board. 

 

65 x 111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utting a Propagandist Under Arrest. 1890~1892. oil on canvas. 55 x 3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어느 선동가의 체포>
1861년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를 해방했음에도 당시 인민주의자(니로드니키)들은 
산업혁명으로 값싼 노동력을 대체하고자 농노를 해방했다며 강력히 비난했다. 
즉 서유럽 유학을 통해 자본주의 병폐를 본 니로드니키들은 이를 방해하고 
인민들에게 알리고자 '농민(해방 농노) 속으로'라는 브나로드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농노해방을 반대한 농민들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노로드니키들을 황제의 경찰에게 고발했다.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빨간 옷을 입은 니로드니키가 압수수색을 당하며 체포되는 장면이다. 
해방시키고자 했던 민중은 뒤로 숨은 채 오히려 니로드니키를 고발해서 잡혀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니로드니키는 강렬히 저항하며 굳은 신념을 눈과 얼굴에서 표출하고 있다.
 
브나르도 운동을 하던 일리야 레핀은 이들 니로드니키의 저항 정신을 1차 러시아 혁명 그림으로 확대했다. 
바로 <1905년 10월 17일>이다.
그런데 레핀의 특징이 뛰어난 인물 묘사란 점을 알았다면, 
<1905년 10월 17일>에서 이상한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입만 벌이고서 '전진하는 노동자'의 사회주의적 모티브로만 자세를 취할 뿐 좀비 같다. 
레핀이 사회주의 혁명을 대하는 시각이 여실히 드러난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핀란드로 이주한 뒤 소련의 귀국 요청도 거부한 채 1930년 사망까지 
귀국하지 않은 것으로도 이념을 달리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동파의 계몽주의자였지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일리야 레핀의 갸우뚱한 모습이다.
 
러시아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는 일리아 레핀의 <어느 선동가의 체포>(1880~1889)와 
수티코프의 <대귀족 부인 모르조바> 이 두 작품의 배경은 200여 년의 차이가 나지만 
차르 체제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두 주인공의 강렬한 눈빛은 겹친다. 
 

Putting a Propagandist Under Arrest

 

 

State Russian Museum. 1905년 10월 17일 시위대, 1907-1911년, Ilya Repin, 

캔버스에 유채, 184x322,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In the hut. 1895. oil on canvas. 57 x 41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M.K. Tenisheva at work. 1897. oil on canvas. 49 X 57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the Artist D.N. Kardovskiy. 1896~1897.  oil on canvas. 71.5 x 79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lawyer Anatoly Fyodorovichm Koni. 1898. oil on canvas. 49 x 6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Nadezhda Repina, the Artist's Daughter. 1900. oil on canvas. 67 x 9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Portrait of Pavel Tretyakov, Founder of the Tretyakov Gallery. 1901. oil on canvas.10 X 132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Portrait of the Artist Valentin Serov. 1901. charcoal on canvas. 116.5 X 63.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Portrait of the Artist Ilya Repin by Valentin Serov. 1901 ​. atercolo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members of State Council Ivan Logginovich Goremykin and Nikolai Nikolayevich Gerard. Study.

1903. oil on canvas. 45 x 6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the Author Leonid Andreev. 1904.  oil on canvas.  66.5 x 76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piano. 1905. sketch and study.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9. 일리야 레핀 작품 전시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30. 일리야 레핀 작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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