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국민 화가 "일리야 레핀"과 러시아 간략 역사 1부

 

러시아 국민 화가 "일리야 레핀"과 러시아 간략 역사 2부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그림으로 본 러시아 간략역사 3부

 

 

Self-Portrait.1878​, oil on canvas. 70 X 50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일리야 레핀 자화상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은 1844년 러시아의 추구예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그는 15세 때 고향 추구예프의 이콘 화가 부나예프(Bunakov)의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그림을 배웠다. 

그는 종교화와 초상화를 그려 모은 돈으로 19세 되던 18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예술장려협회의 미술학교에서 데생 교육을 받았다. 

이듬해인 1864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그의 평생의 스승인 

이반 크람스코이(Ivan Nikolaevich Kramskoy)를 만났다. 

크람스코이는 이동파를 이끈 지도자이자 시대를 주도하는 예술가로 

그는 레핀에게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각인시켰다.

 

레핀은 1871년 성서를 주제로 한 《야이로의 딸의 부활》로 아카데미 졸업 작품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그는 이것으로 일급 공식화가 자격을 취득했고, 우수 연수생으로 6년간 해외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레핀은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의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고, 

유학을 미룬 채 이 장면을 그리는 데 매달렸다. 

3년 뒤에 탄생한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은 각각의 인물 속에 개성 넘치는 성격과 

다양한 삶의 흔적, 강인함과 절망, 비극적인 러시아의 상황을 담아낸 수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레핀은 1873년 5월 유럽으로 향했다. 

비엔나, 베니스, 로마를 방문한 그는 파리에 자리를 잡았다. 

1874년 파리에서는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레핀은 인상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예술의 흐름과 창작의 자유에 대해서는 옹호했다.

 

레핀은 1876년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여 《성직자》, 《황녀 소피야 알렉세예브나》, 《쿠르스크 현의 십자가 행렬》등 

러시아적 가치와 전통에 바탕을 둔 작품을 발표했다. 

1877년 추구예프에서 모스크바로 온 레핀은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사바 마몬토프(Savva Mamontov))의 영지 아브람체보를 자주 방문했다. 

이곳에는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 모데스트 무소륵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 

파벨 트레티야코프(Pavel Tretyakov) 등 예술가 및 재력 있는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다. 

레핀은 이념적으로 자유로웠던 아브람체보의 분위기를 즐겼고, 이 모임의 가장 활동적인 회원이 되었다.

 

1882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옮긴 레핀은 이동파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이동파는 특정 계층의 사람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여러 도시로 이동해 가며 전시회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러시아 사회를 통찰력 있게 묘사한 이동파 화가들의 작품은 

이후 러시아 미술의 성격을 규정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레핀은 이 시기에 혁명을 주제로 한 역동적인 삶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삶 속에 내재된 다양한 심리에 초점을 맞췄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유형지에서 고향의 집으로 돌아온 

혁명가와 그를 맞이하는 가족들 간의 긴장된 심리 상황이 날카롭게 포착되어 있다.

 

레핀은 초상화의 대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880년대부터 수많은 러시아 문화 엘리트들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Ivan Turgenev), 고골(Nikolai Gogol) 등을 비롯한 문학가,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Rimskii-Korsakov) 등의 음악가, 스타소프(Vladimir Stasov) 같은 예술 비평가, 

그밖에 왕족과 귀족, 우아한 상류사회 여성 등 문화계의 거의 모든 유명 인사들이 레핀의 모델이 되었다. 

레핀은 모델의 특징적인 포즈와 몸동작, 행동 등을 통해 각각의 인물이 지닌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예리한 사색과 관조에 의거한 인물 내면의 심리 묘사에 탁월했다.

 

1894년 레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어 

1907년 교수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학생지도에 전념했다. 

1901년에는 러시아 국가 의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형 프로젝트를 의뢰받았다. 

레핀의 마지막 대작이 된 《1901년 5월 7일 국가의회 100주년 기념회의》를 완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핀은 오른손 관절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왼손으로 그리려고 노력했지만 이전의 명성에 걸맞는 작품에는 미치지 못했다. 

레핀은 생애 말년을 핀란드의 쿠오칼라에서 보냈다. 

그리고 1930년 9월 29일 그곳에서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레핀이 거주하던 쿠오칼라 마을은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념하여 1948년 레핀의 이름을 따 ‘레피노’로 개칭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 Barge Haulers on the Volga》(1870~1873), 

《무소륵스키의 초상 Portrait of Modest Mussorgsky》(1881), 

《쿠르스크 현의 십자가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the Province of Kursk》(1881~1883),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No one Waited for Him》(1884~1888), 《톨스토이의 초상 Portrait of Leo Tolstoy》(1887), 

《터키 술탄에게 편지를 쓰는 자포로지에 카자크들 The Zaporozhye Cossacks Writing a Letter to the Turkish Sultan》(1880~1891), 

《숲에서 책을 읽고 있는 톨스토이 Tolstoy Reading in the Forest》(1891), 

《1901년 5월 7일 국가의회 100주년 기념회의 Ceremonial Meeting of the State Council on May 7, 1901》(1903)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리야 레핀 [Ilya Yefimovich Repin] (두산백과)

 

 

Self portrait. 1878.

 

"어제는 성서를 주제로 그리고, 오늘은 민중이 등장하는 현대적인 장면을 그린다. 

그 다음에는 환상적인 영웅서사시, 외국의 생활 풍속도, 민속학적 그림, 

그리고 경향성 있는 신문 기사, 그 다음에는 심리학적 습작, 그 다음에는 멜로드라마를 그린다. 

그러다가 갑자기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한 장면을 그리는 식이다."

 

자신의 그림이 난해하다는 비난을 받은 러시아 화가 레핀은 일정한 목적성도 없고 

연속성도 없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리고 결론지었다.  "옳은 것도 정당한 것도 좋다. 그러나 자신을 잃지는 않는다. 나는 다양한 것을 좋아한다."

- 일리야 레핀의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영혼> 중에서 -

 

 

Self-Portrait. 1894. oil on canvas. 63 X 90 cm.

 

일리야 레핀의 자화상, 1894년, 캔버스에 유채, 90 x 63 cm.

 

 

Barge Haulers on the Volga. 1870.

 

 

Barge Haulers on the Volga. 1870.

 

 

Haulers cross wade. 1872. oil on canvas.  97 x 62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ussian Federation - Moscow)​​

 

 

Barge Haulers on the Volga. 1870~1873. oil on canvas. 281 X 131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일리야 레핀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 (Бурлаки на Волге)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1870) 23.5x50.5 Oil on canvas 

 

이 작품은 역사화로 잘 알려진 일리야 레핀(1844-1930년)의 출세작이다. 그의 나이 29세에 완성되었다. 

1870년부터 레핀의 스케치들을 보아 왔던 비평가 스타소프는 완성작(1873년)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아주 짧은 시간에 작가는 성숙해서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러시아 미술이 창조해 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그림을 가지고 나타났다. 

레핀은 고골리에 비견될 만한 리얼리스트이고, 아마도 고골리만큼 심오하게 러시아 민족적인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비평가로서 엄격하기 그지 없었던 스타소프의 입에서 이 정도 극찬이 나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물론 이후에 스타소프는 레핀 앞에서 수도 없이 감탄을 해야 하지만 말이다. 

스타소프의 이러한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가 일기’에서 “ 

- 앞의 배를 끄는 두 사람은 웃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적어도 그림 속의 모두는 울지는 않고 있다. 

자신들의 사회적인 지위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 라고 격찬했다.

“‘좌절하지 않는 노동의 신성함’ 을 묘사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최하층 계급의 사람들을 주제로한 작품을 기획했던 레핀은

이들을 좀더 가까이 보기위해 1870년 여름 볼가강으로 떠났다.

인부들은 육체적인 힘 뿐만이 아니라 개성 넘치는 성격과 평탄치 않은 운명, 순수한 품성으로 레핀을 매혹했다. 

작품 완성전에 시도한 몇 점의 에스키스 작업을 통해 레핀은 보다 더 큰 표현력을 구현하는 테크닉을 탐색했다.

그리고 이 에스키스가 그의 탐색의 귀결이었다.

 

11명의 인부들은 두꺼운 밧줄로 무거운 짐배를 뭍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강과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강하고 선명한 인부들의 실루엣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바로 이와같은 구성이 러시아와 유럽에서 레핀의 명성을 드높인 대작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제작의 토대가 되었다.

 

이 작품은 볼가 강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를 인력으로 끌고 가는 농민들의 고된 모습을 

 

3년에 걸쳐 사실적으로 그려 완성한 것으로 레핀의 리얼리즘 대표작이자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 세부사진

 

레핀이 페테르부르그의 네바강을 산책하다가 배 끄는 장면을 보았을 때 

인부들의 비인간적인 노동에 충격을 받고 이 작품의 구상하게 된다. 

그는 구상을 완성하기 위해서 화구를 들고 볼가강으로 간다. 

내륙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볼가강 유역을 여행하며 그는 그곳에서 배 끄는 인부들의 실상을 접하게 된다.

 

항만 시설이 불충분했던 그 시절 수심이 얕은 곳에서 배는 이렇게 사람들의 힘에 의지해야 했다. 

인부들은 말 그대로 밑바닥의 사람들로 혁명 외에는 아무런 출구가 없어 보이던 혁명 직전의 러시아 민중들이었다. 

레핀은 오랫동안 그들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여러 가지 포즈로 그려본다.

 

레핀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그 주제에 몰두하게 했다. 그러나 그림은 쉽게 완성되지 않았다. 

스타소프가 ‘성숙’이라고 극찬한 새로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3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가 페테르부르그에서 본 것은 도시의 화려함에 대조되는 힘겨운 노동의 비참상 뿐이었지만, 

이제 그를 사로잡은 것은 인부들의 얼굴에 나타난 다양한 삶의 흔적, 그 인간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서사적 인물 배열 

인물들은 고전적인 공식에 의해서 4명, 3명, 3명으로 묶여 화면에 가로로 배열된다. 

이 방식은 고대 그리스 신전을 장식하던 프리즈의 양식에서 차용한 것으로 

그림의 서사성과 기념비성을 강화시켜 준다. 

사실 인물과 배의 실제 크기를 비교해 보면, 이 정도의 수의 사람으로는

그 정도 크기의 배를 끈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한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은 인물들을 앞서 언급대로 

프리즈 식으로 행군 배열한 것에서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적은 수의 인물이지만 그들의 대표성, 

전형성이 충분히 웅변적이라는 것 또한 이 ‘진정성’을 배가 시켜주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이 작품을 보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레핀이 어떻게 인물을 형상화 했는가를 하나 하나 읽어 보는 것이다.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 세부사진

 

카닌의 얼굴 스케치

맨 앞에서 배를 끄는 사람은 인부들 중에서 레핀을 매혹시킨 카닌이다. 

레핀은 여러 가지 모습의 카닌을 그린다. 카닌의 얼굴에서 그는 지혜롭고 강인한 민중적인 현자를 읽어낸다. 

운명은 그를 모질게 다루었지만, 그는 그런 담금질을 견디어 낸 사람만이 갖을 수 있는 내적인 견고함을 갖게 되었다. 

햇볕에 달구어진 이마 아래 깊숙이 자리잡은 두 눈은 화면의 틀을 넘어선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수병 담비

그의 옆에 ‘수병 담비’라는 별명을 가진 인부는 현재의 하중에 엎어질 듯이 힘겨운 포즈로 배를 끌고 있다. 

그의 눈은 배반적인 삶에 저항하는 듯 이글거리고 있다. 

짐승처럼 번쩍거리는 그의 두 눈에는 누적된 분노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의 모습은 한줌의 삭정이만 올려져도 쓰러져 버릴 것 같은 러시아라는 나무꾼의 정면(正面)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레핀은 어느 정도 거리를 취하고 바라보고 있다.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 세부사진

 

소년

중앙 부분에 우리는 뜻밖의 어린 소년을 만나게 된다. 

아직 애티가 가시지 않은 이 소년은 카닌과는 다른 곳을 응시하며 몸을 곧추세운다. 

카닌이 보는 미래와 이 소년이 보는 미래는 아마 다를 것이다.

 

아마 이 소년은 자라 1905년 이후의 러시아 사회의 혁명을 주도하게 될 것이며 

고리키의 ‘어머니’의 그 아들이 될 것이다. 

맨 마지막 인부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다른 인부들에 의해서 끌려가고 있다.

 

풍속에서 역사로

개별 인물의 성격이 심화됨으로써 이 그림은 풍속화를 넘어서게 된다. 

풍속화라는 것이 그 시대의 현재의 삶을 한 단면으로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역사화는 현재에 이르는 과거와 현재가 도달해야 할 미래를 동시에 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비록 ‘볼가강의 배 끌기’라는 풍속화의 주제에서 시작했지만 

주제의 해석에서는 역사화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스타소프가 극찬해 마지 않았던 ‘성숙’이고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숙은 레핀 개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와 더불어 이동파 전체, 러시아 미술 전체가 성숙하게 되고, 19세기의 빛나는 러시아 역사화들이 

이제 줄 지어 세상에 선 보이게 될 날들이 다가오게 되었다. 

양적인 측면에서도 그림의 크기는 풍속화들 보다 두 배 이상 커졌다.

 

이러한 내용적인 성숙과 더불어 형식적인 성숙에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지금 현재의 사건은 눈이 따가운 햇볕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마 춥고 우울한 겨울이 오기 직전의 볼가강을 배경으로 한다면 

노동의 참혹함은 더욱 배가 되었을 것이고 깊은 시대의 질병을 느끼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레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화면의 모든 것들을 자연광 아래에 노출시켜서 햇볕에 부서지게 만들었다. 

이로써 레핀은 아카데미에서 배운 갈색 톤의 칙칙한 느낌의 화면에서 벗어나 

인상주의의 밝은 색채 앞에 화가로서의 자신의 미래를 노출시킨 것이다.

 

이 작품과 더불어 러시아 미술은 인상주의라는 보다 근대적인 양식으로 이행하며 미학 부족증을 해결하게 된다. 

고골리에 비견될 리얼리스트로서 레핀은 톨스토이, 무소르그스키, 그린카, 스타소프, 크람스코이, 수리코프 등 

당대의 문인, 음악가, , 화가, 지식인들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있는 그대로의 인물을 그려낸다. 

초상화 영역에서도 최고의 경지에 올랐던 레핀의 이러한 명징한 리얼리즘은 그로하여금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 ‘쿠르스크 현의 십자가 행렬’, ‘이반 4세’, ‘무하모드 4세에게 편지를 쓰는 카자크들’ 

같은 대작을 낳게 한다.

 

그의 작품은 시대에 충실한 기록으로서 또한 시대를 넘어서는 영원한 예술로서 우리의 앞에 있다. 

 

격변의 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냉정한 리얼리즘의 정신으로 기록하는 예술가들을 꿈꾸어 본다.

 

일리야레핀 그림과 함께 감상하는 볼가강의 뱃사람들

 

 

Portrait of sculptor Mark Matveevich Antokolski. 1866. pencil. 28 X 37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V. E. Repin, the Artist's brother. 1867.  oil on canvas. 

 

68 x 86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Cry of prophet Jeremiah on the Ruins of Jerusalem (on a Bible subject). 1870.

oil on cardboard.  75 x 91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예루살렘 광야에서 선지자 예레미야의 부르짖음

 

 

Portrait of an old woman. 1870. oil on canvas.  87 x 111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a kalmyk. 1871. pencil.   14  x  20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ussian Federation - Moscow)

 

 

 Youth portrait of sculptor Ilya Yakovlevich Ginzburg. 1871. oil on canvas. 

 

25 x 31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A Newspaper Seller in Paris. 1873.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Portrait of the Art Critic Vladimir Stasov. 1873. oil on canvas.

 

63 X 7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Russian Federation - Moscow)

 

 

 

A Fisher Girl. 1874. oil on canvas. 50 X 7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Vera Repina, 1874. oil on canvas. 60 X 7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writer Ivan Sergeyevich Turgenev (1818-1883). 1874, Oil on canvas, 116.5 x 89 cm , 

The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

작가 투르게네프의 초상 (1874) 116.5x89 Oil on canvas

 

예술아카데미 학생이었던 레핀과 투르게네프의 만남은 예술아카데미의 작업실이었고

이때 레핀은 '볼가강의 배끄는 인부들'을 막 완성한 때였다

이들은 레핀이 아카데미 연수생으로 파리에 체류할 때 더욱 가까워 졌는데 물론 초상화를

그리면서 오래 면대하며 이야기와 토론을 하는동안 가까워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늘진 얼굴에서 오히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동자와 반대편 눈동자의 생동감, 

투박한 듯 섬세하게 그려진 손과 고상한 무늬의 의자, 대상의 성격을 하나하나 펼쳐내어 

꾹 꾹 눌러 놓은 듯 한 배경의 붓자국은 투르게네프의 낭만성과 소탈한 성격을 잘 나타내며 

레핀이 이 초상화를 성공적으로 완성하였음을 보여준다.

 

관객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 한 표정과 대 문호의 존재감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이 초상화는 

투르게네프가 파리에 체류하던 시기에 러시아의 거상이자 예술후원가인 트레티야코프의 주문으로 

 

당시 역시 파리에 있던 일리야 레핀에 의해 완성되었다. 

 

 

Scene from balet (study). 1874. oil on cardboard. 29  X 2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Russian Federation - Moscow)​​​​​ 

 

 

Woman playing with Umbrella. 1874. oil on cardboard. 28.5  X  42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Jew praying. 1875.  64  X  80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Portrait of painter Viktor Mikhailovich Vasnetsov. Study for the picture Sadko in the Underwater Kingdom. 

1875. oil on cardboard. 64  X  73.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Sadko in the Underwater Kingdom. oil on cardboard. 17  X  22..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road from Montmartre in Paris. 1875~1876.  oil on  cardboard.  32.5 x 24.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the Artist Vasily Polenov. 1877.  oil on  canvas. 65 x 89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 Peasant with an Evil Eye. 1877. oil on canvas. 60 X 40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사나운 눈빛의 남자  1877년 캔버스에 유채 60x49cm

 

 

Portrait of the historian and archaeologist Ivan Egorovich Zabelin. 1877. 

 

oil on  canvas. 86 x 11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작업 중인 일리아 레핀

 

레핀은 졸업 작품으로 금메달과 함께 3년 간의 여행 경비를 포함한 6년 간의 장학금을 받는다.

이탈리아를 돌아본 후 파리에서 머물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레빈은 파리에서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를 본다. 

많은 화가들이 인상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있었지만 레핀의 작품과 집으로 보낸 편지를 보면 

열렬한 인상주의 추종자는 아니었다. 

 

레핀이 미술사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작품에 심리적인 묘사가 대단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레핀의 작품을 제대로 느끼려면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기치 않은 방문객’은 레핀의 심리 묘사가 화폭에 그대로 펼쳐진 작품이다. 마치 영화의 포스터 같다.

 

레핀이 남긴 초상화는 그 숫자가 대단하다. 

그는 당대의 음악가, 문학가, 과학자 등 수 많은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결코 얼굴만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러운 상태의 모델, 세상과 교유하는 방법이 나타나 있는 진정한 사람을 그렸다.

 

레핀의 초상화 작품 중에는 비제 르브랑처럼 자신의 딸을 그린 초상화가 있다. 

그것도 아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의 모습이 계속 남아 있으니까 좋은 아빠였던 모양. 

 

아내와의 사이에 대해서는 별 기록이 없다. 

아내를 그린 초상화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나쁜 관계는 아니었겠다 싶은데 

나중에 파리로 가서 ‘그의 삶을 사랑’한 나탈리아 라는 여자를 만나 살게 되었을 때 

아내와는 별거 중인 것으로 나온다.

 

레핀과 나탈리아는 상테 페테스부르그에서 기차로 1시간 쯤 떨어진 나탈리아의 집 페나티에서 살면서 

당시 러시아의 엘리트들이 가입한 수요모임을 조직한다. 

14년 뒤 나탈리아가 죽으면서 이 집을 아카데미에 기부하지만 레핀은 

그 뒤로 16년 동안 이 집을 비워주지 않고 산다.

 

말년에 소련 정부는 그를 초청하고자 여러번 그에게 대표단을 보냈지만 

그는 소련으로 돌아가지 않고 핀란드에서 세상을 떠난다. 

또 오른손 쇠약이라는 장애를 입어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다시는 예전과 같은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고 그 때문에 금전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상태로 말년을 지내게 되었다.

 

 

순례자-방랑자들.<1878년 , 캔버스에 유채. 73.3 54cm>

성지 순례길을 떠나고 있는 남루한 집시옷 차림의 두 사람을 

피사체로 담아낸 인물 사진으로 착각할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와 색채에 놀랐다. 

 

전체적으로 다큐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기는 가난한 민중의 연작들 중 하나이다.

 

 

 

In the hut.  1878. oil on  canvas. 36.5 x  29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poet and slavophile Ivan Sergeyevich Aksakov. 1878. oil on canvas.

 

76 x 97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Tsarevna Sophia Alexeevna in the Novodevitchy Convent. 1879.

oil on canvas. 145 X 202 cm.

'황녀 소피아'1879년  캔바스에 유채 201.8x145.3cm

 

1698년 노보제비치 수녀원에 감금된지 일년 뒤의 소피아 알렉세에브나 황녀, 

그녀의 친위대가 처형당하고 시녀 전부가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일리야 레핀(Ilya Repin, 1844-1930) 作 <1698년, 노보제비치 수녀원에 감금된지 일년 뒤의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황녀, 

그녀의 친위대가 처형당하고 시녀 전부가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그림 속에 나타나는 여성들은 크게 세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찬미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다. 

아름다움과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자태, 그 내면에 산재한 고고함이 뭇 사람들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경우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다. 

피카소의 그림이나 샤갈의 그림, 클림트의 그림 등을 보면 사랑하는 직접적인 대상으로의 여성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세 번째는 의인화 된 여성이다. 

신의 대리인으로서, 문학 속 주인공으로서, 현실 속에 포치된 타자적 시각에 의한 여성이다. 

물론 이밖에도 여성은 여러가지 의미로서 그려진다.

 

​그렇다면 그림 속 여자가 가장 고통스럽거나 정말스러울 때는 언제일까? 

그것은 어떠한 연유로 절대적 위치에서 강제로 벗어났을 때 느끼는 분노로 이성을 조절하지 못할 때가 아닐까 싶다. 

장희빈이 그러했고 서태후가 그러했음만 보아도 이는 타당성이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리얼리즘을 논할 때 거론되는 몇 안 되는 동유럽권 화가이자 

19세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독보적인 존재인 일리야 레핀의 그림 소피아 알렉 셰에브나 황녀 정말 무시무시한 표정이다.

 

​무언가 증오에 찬 나머지 붉게 이글거리는 눈은 세상에 대한 분노를 읽어 내게 하고 

꽉 다문 입술은 백 마디 말 보다 강인하게 다가온다. 

자세는 매우 당당하고 심지어 패기마저 넘쳐 보인다. 덤빌테면 덤벼보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 황녀가 처한 당시의 입장은 상당히 불안했다​.

 

​황금빛 의상을 걸치고는 있지만 험악한 표정을 잔뜩 짓고 있는 이 여성은 러시아 표트르 대제

(즉, 러시아 노마노프왕조 제 4대 황제)의 친누나이다. 

그런 그녀가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원래는 표트르와 또 다른 동생 이반과 함께 1682년 러시아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표트르와의 동맹이 깨지면서 불행은 시작되었다.

 

​소피아는 동생에게 대항하려다 실패하면서 결국 감금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일종의 쿠데타가 미수로 그친 셈이었다. 쿠데타의 실패는 곧 동생의 지독한 앙갚음임을 의미했다​.

 

​그림 뒷편을 보면 참수되어 목이 내걸린 병사를 볼 수 있다. 

황녀를 지켜주던 근위병이지만 이미 죽음에 이르렀다. 

대제는 이렇게 누나의 수족들을 눈 앞에서 하나씩 죽여 나갔고 

누나마저 서서히 죽음에 이르도록 평생 수도원에서 놓아주질 않았다​.

 

​이를 기록하는 몸종(그림 왼쪽 뒤)은 어둠 속에서 웅크리듯 앉아 

조심스러운 표정을 보이며 당시의 상황에 어쩔줄 몰라한다. 이는 진실에 관한 두려움이다. 

죽음에 이를 사람이나 이를 보는 사람이나 모두 불안정하긴 매한가지이다​.

 

​이 그림은 권력이라는, 인간이 결코 벗지 못할 굴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한 때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절대 권력자였으나 그녀의 현재는 덧없는 무상함이 감돌 뿐이다. 

또한 그녀의 미래는 대략 짐작해도 결코 밝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일리야 레핀은 이 그림을 통해 역사를 조명하면서도 

 

인간이 가야할 길이 결국 어디로 나 있는지를 일러주려 한다​.

 

 

Alley in the park Kachanovka. 1880. oil on board. 19 x 10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ussian Federation )

 

 

​Portrait of the Artist Nikolay Gay. 188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ussian Federation )

 

 

Portrait of the Author Alexey Pisemsky. 188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Evening party. 1881. oil on canvas. 186 x 116 cm .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ussian Federation )

 

 

Exit of Patriarch Hermogenes. 1881. oil on cardboard. 18.5 x 12.5 cm .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Actress Pelageya Strepetova as Elizaveta.188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ussian Federation )

 

 

Portrait of the Composer Modest Musorgsky. 1881. oil on canvas. 57 X 69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무소르그스키의 초상 (Portrait of the Composer Modest Mussorgsky)  

러시아의 음악가 "무소르그스키'의 초상화. 술에 취한 모습을 그렸다는데... 

 

레핀은 당대 러시아 예술가들의 초상화-인물화를 많이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Portrait of the pianist, conductor and composer Anton Grigorievich Rubinstein. 

1881. oil on canvas. 80 X 62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the Surgeon Nikolay Pirogov. 1881. oil on canvas.  53 X 6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그림 출처 : http://www.abcgalle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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