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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 축하듸립니다.
    세상의 행복 다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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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배님 - 생일 축하 합니다
    제행무상이라 해도 현재의 삶에 가치가 있습니다
    - 김학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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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m.hani.co.kr/arti/society/rights/684744.html
    홍준표 지사님께 드리는 한 고등학생의 편지

    홍준표 경남 도지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경남 마산의 태봉고등학교 1학년 이현진이라고 합니다.
    지사님께서 무상급식을 폐지하신 후부터 저희들은 꽃피는 봄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어떤 부모님들은 단식을 시작하셨습니다. 부모님과 선생님, 친구들의 걱정 가득한 표정과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를 보다 못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지사님은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고 하셨지요. 굉장히 놀랐습니다. 지사님께도 분명히 학창시절이 있었을 텐데 정말 모범생이셨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저 같은 평범한 학생들은 오로지 공부 하나만을 위해 학교를 다니는 것은 아니거든요. 학생들에게 학교는 그냥 공부하러 가는 곳이 아닌, 삶 전부가 담긴 작은 우주입니다. 만약 어른들께 회사는 일만 해야 하는 곳이라면 어떤 심정일까 궁금해집니다.

    점심시간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대단한 시간인지 잘 모르시는 지사님께 그 시간의 의미를 설명해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학교는 작은 기숙학교라 삼시세끼를 모두 친구와 선생님과 함께합니다. 그래서 저는 최소한 하루 세 번은 즐겁고 행복합니다. 친구와 싸워서 서먹서먹하더라도 고기 한 점을 얹어주면서 화해하고, 특식이 나오는 날은 서로 아옹다옹 뺏어먹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학교생활을 돌아보면, 학교 안에서 가장 뜨겁게 살아있는 공간은 급식소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공간에서만큼은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모두가 ‘똑같이’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사님에게는 우습게 들리시겠지만 밥 먹는 것도 공부입니다. 어릴 때 아는 스님께서, “쌀 한 톨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밥알을 지저분하게 남기지 않는 습관을 기르게 되었습니다. 책상 못지않게 식탁에서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길게 늘어져 속 터지는 배식 줄을 서서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느리게 먹는 친구에게 내 속도를 맞춰가며 배려를 익힙니다. 책상에 앉아서 공부할 힘도 식탁 앞에서 기릅니다. 지사님은 학생들의 공부를 그토록 걱정하신다면서 정작 공부할 힘을 빼앗고 계십니다.
    사람이 한자리에서 음식을 공평하게 나눠 먹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초적인 민주주의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처럼 먹성 좋은 나이에는 매 끼니가 잔치고 축제입니다. 이렇게 뜻깊은 것이 공부가 아니라면 대체 공부란 무엇인가요?

    가난한 아이에게 더 복지 혜택을 준다는 선별복지를 우리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실제로 가난한 당사자도 정말 그렇게 느낄지 생각해보셨는지요. 지사님도 낙인효과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저는 그동안 친구관계에서 적어도 가난 때문에 문제가 생겼던 적은 없습니다. 함께 노는 데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 같이 같은 밥을 먹는데 좀 못살면 어떻고 잘살면 어떤가요. 하지만 무상급식이 사라지면 그것은 더 이상 상관없는 일이 아니게 됩니다. 누구는 가난해서 공짜 밥 먹고 누군 형편이 좋아서 돈 내고 밥 먹고, 이렇게 되면 학교 분위기는 확 바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가난을 식사 때마다 느껴야 하는 아이가 과연 복지 혜택에 감사할까요? 모두가 같은 밥을 먹는 동안에는 가난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선별복지가 시행되는 순간, 대상자는 진짜 가난한 아이가 되어버립니다. 지사님은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복지라고 하시지만, ‘괴롭고 불편한 복지’가 될 게 뻔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평등해야 할 급식소에서 ‘누구 밥은 3200원, 누구 밥은 공짜’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사님. 무상급식을 돌려주세요. 요즘 봄 햇살이 따뜻해서 우리 학교 학생들은 식판을 들고 평상이나 벤치에 앉아서 밥을 먹습니다. 이 평화로운 모습을 지사님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2015년 3월29일.
    이현진 올림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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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4351.html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 ‘죽음학 전도사’ 정현채

    예전에는 서울에도 군데군데 무덤이 흔했다. 내 어릴 적 뒷동산 소나무 숲에도 무덤 세 기가 있었다. 아이들은 학교 화장실에 나온다는 귀신 얘기에 꺅 소리를 지르며 옷도 못 추스른 채 도망갈 만큼 겁이 많았지만, 뒷동산 무덤들을 무서워하진 않았다. 그 시절엔 봉분이 지금보다 컸던 걸까, 우리가 워낙 작아서였을까. 세 개의 무덤을 각자의 레인 삼아 올라타고 누가 더 잘 나가는지 미끄럼 내기를 하며 놀았다. 나중에 자라서 “북망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하는 박두진의 시 <묘지송>을 읽고는 어린 시절 나의 ‘무덤 놀이터’가 떠올라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다.

    그러나 도시재개발과 함께 죽음도 수도권 바깥으로 밀려났다. 무덤이 있던 곳엔 고층아파트가 들어섰고 이제는 아무도 대문에 조등(弔燈)을 달지 않는다. 도시는 번성하고 수명은 늘었지만 사람들은 기를 쓰고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며 산다. 죽을 기미가 보이는 사람들은 황급히 병원 중환자실로 이송되고 호스를 주렁주렁 단 채 기계음과 함께 죽어간다. 죽음은 삶으로부터 격리되어 있고 싸워 이겨야 할 적(敵)이며 공포의 대상이다.

    임종기 환자의 고통만 가중시키는 일들

    죽음이 낯설어진 세상에서 다시 죽음을 생각하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2005년 결성된 한국죽음학회는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라는 표어 아래 ‘잘 죽는 법’을 화두로 제기하고 <한국인의 웰다잉 가이드라인>(2010), <죽음맞이>(2013) 같은 책도 펴냈다. 그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 정현채(60) 교수는 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의사이다. 의대 강의 외에도 전국 방방곡곡 260회 이상 죽음에 대한 강연을 하러 다녀 ‘죽음학의 전도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음 이후엔 무엇이 있을까. 잘 죽기 위해선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난 16일 찾아간 그의 연구실은 병원 본관과 장례식장 사이,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는 아담한 2층 벽돌건물 안에 있었다. 소나무 아래 붉은 벽돌이 봄볕을 받아 따뜻했다.

    1층 그의 연구실 앞에는 ‘간 연구소’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자료로 빽빽한 방 안은 언뜻 보아 여느 연구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일반 의학 서적들과 별도로 나지막한 책꽂이에 죽음과 관련된 서적들이 2단으로 쌓여 있고, 죽음과 관련된 영화 디브이디(DVD)들이 차곡차곡 모아져 있는 걸 제외하고는. 자세히 보니 화이트보드에 이번달치 강연 일정이 촘촘했다. ‘영화를 통한 죽음 이해’, ‘웰빙과 웰다잉’, ‘근사체험’(近死體驗: 죽음의 문턱에 다녀온 체험) 같은 강의 제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구실이라고 해서 ‘죽음연구소’나 ‘웰다잉(Well-dying) 연구소’ 같은 곳에 계실 줄 알았는데 ‘간 연구소’여서 좀 의외였다.(웃음)
    “소화기내과와 같은 건물 3층에 뇌신경센터가 있는데 내가 몇 년 전부터 생각한 것이, 그 입구에 ‘사람은 한번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서 반드시 죽는다’ 이런 간판을 세웠으면 좋겠다는 거다. 아예 병원 입구에 세우면 더 좋고. 내가 강의할 때는 그런 걸 만들어 세우자고 보여주곤 하는데, 실제로 세우면 어떻게 되겠나? 집행부에서 바로 떼 가 버릴걸….(웃음)”

    -그러니 여기다 ‘죽음연구소’ 이렇게 써 붙이면….
    “(손사래 치며) 아이고!(웃음)”

    -의사들부터 그렇게 죽음을 터부시하니, 일반인들은 더더욱 죽음이 낯설고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죽음이 학문의 한 영역이 된 게 언제부터인가?
    “1960년대,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죽음학을 표방하고 처음 강의를 시작한 걸로 안다. 타나토스(thanatos)가 그리스어로 죽음이란 뜻인데 타나톨로지(thanatology)라고 해서…. 일본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생학(死生學) 혹은 생사학(生死學)이라고 불리는데 도쿄대학 같은 데는 ‘사생학연구소’가 따로 있다.”

    -한국죽음학회 이사로 계시는데 학회 구성원들은 어떤 분들인가?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한국학과)가 회장을 맡고 있고 철학, 종교학, 의학, 간호학 등 회원들의 전공이 다양하다.”

    -죽음을 주제로 한 학문간 협동연구라고 할 수 있는데, 종교학과 의학의 만남은 전례가 없는 것 같다.
    “전례가 거의 없을 거다. 의학 하는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보지만 죽음에 대해서 별로 얘기를 안 하고, 종교학이나 철학은 죽음에 대해 얘긴 많이 하지만 실제 죽음을 그렇게 많이 보지는 않으니까. 이론과 현장 사이의 괴리를 좁혀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을 만들자는 게 우리의 지향이다.”

    -요즘 미디어에서 ‘명의’(名醫)에 대한 환상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죽어가는 환자를 어떻게든 살려내는 영웅으로… 환자의 기계장치에서 ‘삐~’ 하고 신호곡선이 끊기다가 다시 ‘뚜뚜뚜~’ 하고 바늘이 움직이면 와! 하면서 감동적인 음악이 좍 깔리고…(웃음) 그런데 그 이후 환자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왕자와 공주의 결혼식 장면에서 끝나는 동화처럼.
    “환자의 사망을 의료의 패배로 여기는 의료진들이 많으니까. 실제로 심폐소생술을 하다가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기도삽관 과정에서 치아가 부러지고 성대나 인두를 다쳐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라도 해서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경우라면 당연히 해야 하지만 임종기 환자한테는 고통만 가중시키는 것이 될 수 있다.”

    -환자 자신은 의사표현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겠다.
    “환자 가족들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을 잃는 걸 자신의 실패로 여긴다. 얼마 전 지방에 있는 어느 의사가 내게 메일을 보냈는데 자기 어머니가 90살에 심근경색이 와서 부랴부랴 앰뷸런스로 옮기고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돌아가셨다고. 그 뒤 후회와 자책감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왜 자책감을 느끼나?
    “빨리 모시지 못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거다. 그래서 내가 다섯 장짜리 긴 답장을 써서 보냈다.”

    -뭐라고 쓰셨나?
    “죽음은 꽉 막힌 돌담 벽이 아니고,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열린 문이라고. 이게 단순히 믿음의 문제가 아니고 이걸 뒷받침해주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있다고. 죽음 근처까지 갔다 온 근사체험이나 삶의 종말체험을 보면 충분한 근거들이 있다고.”

    -사후세계를 믿으시나?
    “내 의대 2년 선배도 똑같은 질문을 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다. ‘그건 실재할 뿐만 아니라 장엄하고도 장대한 세계입니다’라고. 너무나 많은 증거들이 있기 때문에 없다고 말하기 곤란하다.”

    그는 미리 복사해 둔 논문과 자료 몇 편을 우리 일행에게 한 부씩 건넸다.

    2005년 결성 ‘한국죽음학회’ 주도
    죽음 주제 전례없는 학문간 협동
    “환자 사망은 의료 패배 아냐
    죽음은 돌담벽 아닌 열린 문
    장엄하고도 장대한 또다른 세계”
    나이 오십 앞둔 10여년전 관심
    죽음학 연구서 <사후생> 탐독
    “육신 벗어나면 에너지체로 존재
    이 생은 ‘윤회’의 신병훈련소
    삶의 유한성 절감 긍정적 영향”

    죽은 남편을 만난 할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정현채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88년부터 서울대병원에서 내과의사로 많은 환자들을 만나왔다. 그는 여느 의사들처럼 생물학적 죽음관과 실증주의 과학교육에 충실한 의학자였다. 말기암 환자도 많이 봤지만 죽음을 자신과 연결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10여년 전, 나이 오십을 바라보며 문득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쳐들기 전까지는. 왜 딱히 그때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그 몇 해 전이니 그 때문이라 하기 어렵고, 건강에 특별히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종교적 관심은 아니었나?
    “아니다. 종교적 교리나 문화적 전통에 의한 믿음이 아니고, 실제로 팩트가 뭔지, 죽음에 임박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었다. 그때 아내가 내게 선물한 책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쓴 <사후생>(死後生)이라는 책이었다.”

    취리히대학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한 퀴블러 로스 박사는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의 근사체험과 삶의 종말체험을 관찰하고 연구해서 20여권의 저서를 발표한 죽음학 연구의 대가이다.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에 꼽힐 만큼 권위를 인정받는 퀴블러 로스가 근사체험자들의 증언을 분석해 <사후생>에서 주장하는 것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라는 것이었다.

    -근사체험자들이 말하는 게 뭔가?
    “정신과 전문의 김자성 선생이 번역해 소개한 <사후세계의 비밀>(마이클 팀 저)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임종을 앞둔 어떤 할머니가 오랫동안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어느 날 예기치 않게 의식이 돌아와서는, 30년 전 죽은 남편이 아침에 와서 ‘오늘은 저승 갈 날이 아니나 사흘 뒤 떠난다’고 말했다는 거다. 그러곤 할머니를 돌봐주던 간호사의 죽은 남편이 전하는 말이라고, 부부만이 알던 어떤 사실을 이야기해줬다고 한다. 실제로 할머니는 이 말을 남기고 다시 혼수에 빠진 뒤 사흘 뒤 세상을 떠났다.”

    근사체험은 이제 의학의 한 연구 분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권위 있는 의학전문학술지 <랜싯>(Lancet)에 2001년에 실린 연구를 보면 네덜란드의 여러 병원에서 심폐소생술로 다시 살아난 344명을 조사한 결과 이들 중 18%인 62명이 근사체험을 했는데 자신이 죽었다는 인식(50%), 긍정적인 감정(56%), 체외이탈 경험(24%), 밝은 빛과의 교신(23%),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과 친지와의 만남(32%), 자신의 생을 회고함(13%) 등이 공통된 체험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떠나간 사후세계에선 어떤 일이 펼쳐진단 말인가?
    “우리가 죽어서 육신을 벗어나면 진동하는 에너지체로 존재하는데 그 주파수에 따라 비슷한 에너지체끼리 모인다.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에너지체는 그것끼리, 증오와 질투로 살아온 에너지체는 또 그것끼리…. 절대적 심판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에너지체 스스로 천국과 지옥을 만드는 셈이다. 그러나 그 구분은 보상과 징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고 새로운 영적 진화를 도모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윤회를 인정하나?
    “그렇다. 윤회론은 불교나 힌두교의 전유물이 아니고, 미국이나 서구에서 오히려 연구가 더 많이 됐다. 우리는 미국이 건국되기 전부터 얘기를 해왔는데, 연구도 하지 않고 데이터도 없고. 아마 앞으로 미국 가서 윤회로 박사학위 받고 오는 사람도 생길 거다.”

    -거듭되는 윤회에서 그럼, 이 생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아주 빡센 신병훈련소라고 할 수 있다. 비물질계에서는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영혼들이 모이지만 지상에서는 주파수가 전혀 다른 사람들과도 봐야 하고, 그렇게 부딪히는 삶의 경험을 통해서 영적 성장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게 여러 연구자들의 주장이다.”

    -사후세계나 윤회를 인정한다면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컴퓨터가 이리저리 바이러스 먹고 자꾸 오작동하면 아예 리셋(reset)해서 초기값으로 돌려놓고 싶어지지 않나? 누군가가 ‘나는 이 생이 너무 괴롭고 힘들어 빨리 마감하고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을 ‘빡센 신병훈련소’라고 했는데, 그 과제가 힘들다고 그만두는 건, 학교에서 월담해서 뛰어나가는 거랑 똑같다. 그럼 어떻게 되겠나? 다시 들어와서 또 해야지. 초등학교 1학년 때 구구단 외다가 싫다고 나가버리면 다시 돌아와서 처음부터 또 구구단을 평생….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나? 다음 단계 올라가서 인수분해도 배우고 계속 성장을 해나가야 되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감이 확 온다.(웃음)
    인생은 빡센 신병훈련소, 사랑하고 감사하라

    -이런 영적 세계를 과학으로 증명하는 것이 가능할까? 주목할 만한 학술논문들이 나왔다고는 해도 많은 부분은 여전히 신비가들의 주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다 입증할 수 있을까? 현대과학의 적용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오히려 과학자로서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물질계를 측정하는 잣대를 비물질계에 들이대는 건 타당하지 않다.”

    -사람이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로 삶을 산다면 뭐가 달라질까?
    “나 같은 경우엔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우선 삶이 유한하다는 걸 절감하게 되니 늘 만나는 전공의나 자식들한테도 뭐 덕담이라도 한마디 더 해주고 싶어지고. 아침마다 전공의들이 발표를 하는데 어떤 때는 암만 봐도 뭐 별로 잘한 게 없는 거 같은데….(웃음) 꼼꼼히 보면 장점은 늘 있더라.”

    -예를 들면?
    “슬라이드 바탕을 흰색으로 해서 아침에 조는 사람을 적게 했다든가…(웃음) 그리고 주변에 고맙다고 인사해야 하는데 못한 거 있으면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고. 얘기하면 그 사람은 벌써 잊어버린 경우가 흔하지만.(웃음)”

    정현채는 아직 정년이 5년 남았지만 4년 전부터 자신의 연구실 비품이나 자료를 학교의 의학역사문화원에 기증해 오고 있다. 매년 다섯 번 헌혈을 하고 원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강의노트를 복사해준다. 장기기증서약서와 유언장, 자신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 기도삽관이나 연명의료를 하지 말라고 사전의료의향서를 써두었다. 자신의 장례식에서 쓸 음악을 90여곡 모아놓고, 수의 대신 무명 평상복을 입혀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달라는 사전장례의향서도 써 두었다.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이란 책을 쓴 미국 의사 아이라 바이오크는, 죽기 전 해야 할 일 네 가지를 제시한다. ‘사랑해요, 고마워요’라고 말할 것, 용서를 하고 용서를 구할 것, 작별인사를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하기란 쉽지 않다.

    2010년 영국 이코노미스트 산하 연구소가 ‘죽음의 질’을 조사한 것을 보면, 한국은 40개 나라 중 32위로 우간다보다 한 등수 위이다. 1위를 차지한 영국과 비교할 때 한국은 시티(CT)나 엠아르아이(MRI) 같은 고가의 장비는 3~4배나 많으면서 임종기 환자의 진통 완화를 위한 모르핀 사용량은 영국의 10분의 1이다. 전국의 호스피스 병상 수는 900여개에 불과하다.

    -내 가족이 죽음을 맞이할 때 아름다운 임종을 도와주기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은 뭔가?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끝까지 유지되는 감각이 청각과 촉각이다. 의식이 없어 보이더라도 손을 꼭 잡고 할 얘기를 다 하는 게 좋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못다 한 이야기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수의 환자들이 병원 중환자실에서 가족과 격리된 채 임종을 맞는다. 2013년 대통령 직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는 임종기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거부할 수 있도록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권고안을 채택했지만 아직 법안은 국회를 표류하고 있다. 가족과 따뜻한 작별인사라도 하고 떠나려면 죽기 전 해야 할 일이 많다.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이진순 언론학 박사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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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죽음학 전도사’ 정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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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ㅡ 중국 장웨이린 교수의 이순신에 대한 평가와 고백

    조선의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 일본 교수들의 말만 듣고 학술연구회에서 거북선을 처음 보았다. 저런 배가 400여년 전에 있었단 말인가? 나의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학술연구회의 이름은 '이순신'이었다. 일본교수진의 도움으로 책 7권을 하루만에 다 읽고 책을 놓은 뒤.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어디선가 느껴지는 심장소리...

    ㅡ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를 구할수 있는 위인이 있다면 누구일까 물었다. 항우, 제갈공명, 손자, 관우...
    나는 한참동안이나 창문 너머를 바라보다 말했다.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이 나타난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일거라고... 그리고 학생들에게 거북선 사진을 보여주었다.

    모두들 의아해 했다.
    400여 년 전 조선과 일본의 전쟁시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이야말로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나는 여러분께 말한다.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소리가 들렸다.
    조선 수군장수 이순신은 5천 명도 안 되는 군사와 50척도 안 되는 함대를 이끌고 40만 대군의 왜군과 1.300대의 일본함대와 맞서 싸워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모두 승리하여 조선을 구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100년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싸움의 고수들이었고 동아시아 최강의 전력이었다.

    당시 조선 수군은 물고기나 잡고 농사나 짓던 나약한 병사들이었으나 단 1년만에 훈련시켜 40만 대군과 1.300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서 이길 수 있는 군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하다.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 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까지 일본군에 점령되었을 것이다.
    세계 어느 국가도 한 인물의 존재에 따라서 이렇게 역사가 뒤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 거북선을 보라!
    누가 이 배가 40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믿겠는가?
    여러분들은 눈을 떠야 한다.
    나는 1시간 정도 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강의를 끝마칠 수 있었다.

    강의가 끝났을 때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며 기립 박수를 받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 까지...
    내가 처음 이순신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을때 그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ㅡ 장웨이린 교수?

    동북공정의 일환인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일을 맡았다가 이순신 학술회를 시작으로 고구려 역사 편입 작업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는 말한다.
    역사학자가 후세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되는 두 가지 부끄러움이 있다.
    한 가지는 히틀러가 200만 유태인을 죽인 것보다 그 역사를 감추며 숨기는 것,
    또 한 가지는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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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리는 자가 져야 할 의무,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작년 11월 27일부터 올 3월 1일까지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에서 특이한 전시회가 있었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 ‘우당 이회영과 6형제’를 소개하는 전시회였다. 3개월 남짓 전시하는 동안, 1만 명이 넘는 관람자들이 이곳을 찾았다. 전시회를 11월 17일에 시작한 것은 그날이 우당 이회영이 만주 여순에서 순국한 날이기 때문이다. 11월 17일을 떠올리니 ‘을사늑약’을 강제한 ‘중명전’이 겹쳐 떠올랐고, 거기에다 이회영이 을사늑약 파기를 위해 여러모로 구국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그날 그 장소에서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우당 이회영과 6형제들의 헌신

    원래 이 기획은 이 땅에 가진 자들, 보수라 자처하는 이들을 향해 “ ‘참 보수’란 이런 것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구호화하면, 서양의 유식한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라고 할 것이다. 우당 이회영과 6형제들은 임진왜란 이후 정승만 9명이나 배출, ‘삼한갑족’으로 알려진 집안의 후예다. 나라가 망하자 그들은 수만금의 가산을 정리하여 망명,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다. 이들은 안동의 이상룡 등 유생 진신들과 함께 나라 망한 책임을 이국땅의 고통스런 독립운동으로 보답하려고 했다. 만삭의 몸으로 압록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임에도 ‘왜놈’ 치하에 신생아의 호적을 둘 수 없다면서 강을 건넌 안동의 김씨 양반가의 눈물겨운 사연은 지금도 우리의 눈시울을 붉게 한다. 이게 누렸던 자들의 최소한의 책임이요 의무다.

    조선이 망할 때 나라 망한 것을 통탄하며 목숨을 끊은 자가 홍만식, 황현을 제외하고 그 몇이나 되는가. 고려가 조선에 정권을 넘겨줄 때에는 그래도 두문동 72현이 있었지만, 조선조가 왜족인 일본에게 망할 때에는 두문동 72현 같은 노블리스들의 집단적 항거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조는 망해도 더럽게 망했다”고 비아냥거리는 항간의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이 망할 때는 두문동 72인보다 더 많은 76명에게 작위가 수여되었고, 은사금도 많은 관료들에게 주어졌으며, 일제에 의해 재임용된 구한국 관료들은 감지덕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만금의 재산을 처분하고 망명노의 신세로나마 조상이 누렸던 빚을 후손된 자로서 보답하려 했으니 그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아닐까.

    노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일본군은 여순 공략에서만 5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는 노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전승이었지만, 승리하고 돌아오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장군은 일본의 부모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정작 이 전투에서 자기 아들을 희생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자 ‘노기장군만세’를 불렀다. 마오쩌뚱(毛澤東) 역시 그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을 한국전에 참전시켰다. 중국 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안잉을 군관으로 복무시키고자 했으나 마오는 군사경험이 없는 그에게 군관은 불가하다고 했다. 마오안잉이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오는 “중국 인민군 수십만이 죽고 있는데 어찌 내 자식만 살아 돌아오기를 기대하겠는가”라며 그 시신마저 중국으로 옮기지 못하게 하여 예외를 두지 않았다. 이웃의 이야기지만, 울림은 크다.

    한국 역사에도 이런 전범(典範)들이 있다. 가까이는 황현, 홍만식, 민영환 등과 나라 망한 책임을 지고 망명,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은 선진들의 경우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삼국시대 말기에도 있었다. 중국과 한반도 및 일본을 둘러싼 동아시아의 국제상황에서 나당의 동서축과 고구려·백제·돌궐·일본의 남북축 사이에는 혈투가 벌어졌고 나당동맹이 승리했다. 이 승리에는 신라의 지배층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외면할 수 없다. 660년 황산 전투에서 신라의 김유신은 김흠순, 김품일 등의 부장(副將)과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도 백제 계백(階伯)의 5천 결사대를 꺾지 못하고 4전4패했다. 그러나 신라의 부사령관 김흠순은 그의 아들 화랑 반굴(盤屈)을 희생시켰고, 부사령관 김품일 또한 그의 아들 소년 화랑 관창(官昌)을 제물로 바쳤다. 이들 지도자의 자기희생이 황산전투의 승리를 담보했다.

    ‘참 보수’란 이런 것이다

    김유신의 가정교육도 누린 자의 책임과 의무를 보여준다. 백제·고구려의 멸망 후 당(唐)이 한반도를 삼키려 하자 신라는 분연히 일어났다. 임진강 유역의 석문(石門) 전투에서 김유신의 아들 원술이 거느린 부대가 거의 전멸했다. 간신히 살아난 김원술이 부친을 찾아갔지만 김유신은 그를 맞아주지 않았다. ‘임전무퇴’를 실천하지 못하고 생명을 부지한 그를 자식이 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김유신이 죽자 원술은 그의 어머니를 찾았으나 지소 부인 역시 그를 내쳤다. 그 부모의 이같은 정을 끊는 엄한 교훈이 그를 역사에 살아남는 존재로 만들었다. 675년 당나라 이근행(李謹行)이 이끈 20만군이 신라의 매초(매소)성을 공격했을 때 신라는 당의 군마 3만여필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나당간의 반도 안에서 치러진 가장 큰 전투로 당군 20만이 거의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이는 원술이었다. 김유신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가진 자, 누리는 자들의 책임과 의무가 점차 실종되고 있다. 인사청문회에서 볼썽 사나운 꼴들이 이젠 사과 한마디로 무사 통과되고 있다. 서민들에게는 사법적 잣대를 댔을 주민등록법 위반이나 병역미필, 탈세 등이 인사청문 대상자에게는 상습적으로 처벌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이를 보고 있는 백성들은 무엇을 배울까. 지난 정권에서는 대통령부터 국무총리, 상당수의 고위직과 여당대표까지 병역미필로 꼴사나운 모습이었고 ‘보온병’ 망신까지 당했다. 이게 입만 열면 안보를 강조했던 정권의 민낯이었다. ‘안보무능정권’은 필연적이었다. 그런 정권일수록 국민을 향해서는 안보불감증을 질타하고 자신들은 청와대 벙커에 숨는다. 수선을 떨고 또 값비싼 비용을 들이는 안보강화조치보다는 정권에 기식하고 있는 병역미필자를 몇 사람이라도 추방했더라면 안보의식고취에 훨씬 효과적일 것이었다.

    가진 자, 누리는 자들의 의무가 어찌 병역의무에만 국한되겠는가.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가계부채 증가와 노동자들의 아우성이 하늘을 찌를 듯한데, 이 땅의 보수와 가진 자들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 공동체가 붕괴되면 그들의 누림인들 안전할까. 우당 6형제의 살신성인과 자기를 내던짐이 새삼 이 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메시지로 다가서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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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인권침해 뿌리는 빨갱이 탄압논리”
    4년 임기 마친 김동춘 진실화해위 상임위원

    “가해자와 피해자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관계자 1만명의 증언을 읽었죠. 제가 아마 한국에서 가장 많은 증언을 들은 사람 중 하나일 겁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있었던 김동춘(50·사진)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부)는 지난 4년 동안의 활동을 이렇게 회상했다. 진실화해위 출범과 함께 상임위원으로 임명됐던 김 교수는 10일 4년여의 임기를 마쳤다.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사건 1만1025건 가운데 75%(8161건)는 한국전쟁 때 군경에 의해 학살당했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으로, 김 교수가 이를 담당했다. 당시 민간인 학살 규모는 30여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학살 당시, 죽은 사람 수를 세기 위해 가해자들이 귀를 자를 때, 살아남기 위해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던, 귀 잘린 할머니의 모습도 봤다고 했다. 그는 반세기가 지나서야 국가가 진상규명에 나선 것에 대해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희생자와 가해자 모두 숨지기 전이라 아주 늦지 않은 시점에 이뤄져 다행”이라고 평했다.

    김 교수는 한국전쟁기의 학살은 친일문제, 전후 인권침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평했다. 그는 “좌우와 무관하게, 일제 시절 독립운동 경력을 가진 사람 가운데 3분의 2는 친일 경력을 가진 군경의 명령권자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말했다. 학살은 훗날 ‘인권침해의 뿌리’가 됐다. 학살의 주체인 사상 검사와 방첩부대(CIC·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 경찰 사찰계는 ‘빨갱이는 고문하고 죽여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 논리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과거사 정리를 ‘사회적 치유의 과정’이라고 불렀다.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는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정부에 반대하면 이렇게 된다’는 학습효과를 퍼뜨려 우리 사회를 곪게 했습니다. 과거사 정리는 피해자 구제만이 아니라,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 ‘잘못된 행동은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교훈을 통해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는 길입니다.”

    김 교수는 과거사 정리가 ‘일회성 이벤트’가 되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적절한 보상과 전국적 규모의 위령사업, 국민들에게 계속해서 교훈을 줄 ‘과거사연구재단’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학살 현장을 ‘평화교육의 장’으로 보존할 것을 제안했다.

    “한국의 과거사 정리가 한계는 있지만, 돈과 인력을 투입해 스스로 과거사를 정리한 사례는 세계에서 유일합니다. 이런 점을 이명박 정부가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그는 최근 보수 성향의 인물이 진실화해위 위원장으로 임명된 것과 관련해 “그간 진실화해위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도 위원으로 와서, 보고서들에 적힌 사실을 보고 점차 공감하게 되는 걸 지켜봤다”며 “남은 사건을 잘 마무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926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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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 김 정 남 (언론인)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부영이 보낸 편지(2월 23일자 편지에 3월 1일자 추신이 붙은)를 전병용으로부터 내가 받은 것은 1987년 3월 중순이었다. ‘우촌전’(友村前-우촌은 이돈명 변호사가 내게 지어준 아호다)으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실로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해 1월 14일, 서울대 박종철군을 고문치사시킨 범인으로 같은 교도소에 구속되어있는 조한경 경위는 박종철군을 조사하는 조(組)의 반장이기는 했지만 고문행위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고, 또 다른 고문경관 강진규 경사는 다른 반(班)소속으로 그들이 찾고 있던 황 아무개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왔다가 욕조 안에서 박군의 다리 가랑이를 들어주는 보조역할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

    편지는 팔다리가 묶인 박군을 뒤에서 붙잡고 억지로 물을 먹이다가 박군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경관은 따로 있다면서, 그 세 사람의 이름과 직위를 적시하고 있었다. 구속된 두 사람은 사건 후 경찰간부들에 의해 짜여진 각본에 따라 범인으로 지명, 차출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2월 27일, 검사에게 자신들이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 사정과 진짜 고문경관 3명에 대해 진술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사는 “어느 쪽이 유리한지 잘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면서 며칠 후에는 의정부교도소로 이들을 이감시켜 버렸다.

    1986년 5월 3일의 인천사태로 수배 중이던 이부영은 그해 10월 하순 불광동으로 나를 만나러 왔다가 체포되어 그때는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고, 나는 이부영에 대한 도피방조혐의로 전국에 지명수배 중이었다. 전병용 역시 이부영, 장기표 등 5.3인천사태 수배자들에게 편의와 은신처를 제공한 것이 드러나 쫓기고 있는 몸이었다. 전병용은 내게 편지를 전해 준 며칠 뒤 경찰에 체포, 구속되었으니 하마터면 그 편지는 영원히 공중에 뜰 뻔 했던 것이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 바로 박종철의 죽음 이후 그와 관련된 신문보도를 세심히 챙겨 스크랩하고, 이부영의 편지와 인권변호사 그룹 등 제한된 범위 안에서 확인한 정보를 바탕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성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만약 천인공노할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국민이 결코 저 부도덕한 정권의 무리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상황이 바뀌거나 새로운 사실이 입수될 때마다 성명은 수정과 다시쓰기를 수도 없이 거듭했다. 그것이 최종적으로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년 기념 명동성당 미사에서 김승훈 신부에 의해 사제단의 이름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그 성명의 마지막을 나는 이렇게 썼다.

    “이 사건 범인 조작의 진실이 박종철 군 고문살인 진상과 함께 명쾌하게 밝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과연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의 도덕성이 회복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결말이 날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가 진실과 양심, 그리고 인간화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대한 관건이 이 사건에 걸려있다.”

    5월 18일, 명동성당 미사 때 성명서를 읽는 김승훈 신부의 목소리는 크게 떨리고 있었고 절할 때는 제의가 머리를 덮을 정도로 엄숙, 경건했다고 한다. 김승훈 신부는 그 전날 받은 성명을 읽고 또 읽어 글자 수가 3,120자라는 것까지 헤아렸다는 얘기를 나는 뒤에 들었다. 성명을 발표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조심스러웠으면, 그 성명을 쓴 나도 헤아리지 않았던 글자 수까지 헤아렸을까 생각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가슴이 찡하다.

    불의와 기회주의가 승리하는 역사

    최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수사에 참여했던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놓고 정치권과 언론에서 하느니 마느니, 당시의 검찰수사팀이 잘했느니 못했느니 공방이 치열하다. 청문회를 하고 하지 않고는 정치권에서 결정할 일이지만, 과연 사제단의 발표가 없었어도 그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 수 있었을까. 박종철 군에 대한 물고문을 밝혀낸 부검을 결정, 지시한 것도 이들 형사2부 수사팀이 아니라 공안부장 최환이었다. 3명의 살인고문경관 명단을 진술한 2월 27일로부터 사제단의 성명이 발표된 5월 18일까지 그들은 무엇을 했던가. 이후에도 그들의 은폐와 축소는 계속되었을 뿐이다.

    나는 당시의 수사검사가 마치 자신이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정의의 투사인 것처럼 쓴 책을 보고, 거짓과 위선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불의와 기회주의가 승리하는 역사가 어떻게 쓰여지는지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반면에 이 사건의 진실을 빛 속에 드러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부영이 얼마 전 이 나라 정치판에 지쳐서 스스로 정계은퇴를 선언하는 것을 보았다.

    김승훈 신부는 생전에 자신이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할 때마다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는 말로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했다. 우리가 헤쳐온 1990년대와 80년대가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으면 그 말을 달고 살았을까. 거짓과 위선, 불의와 기회주의로 살아온 사람들의 진실도 당신께서는 다 아신다는 말을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그들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있다면 김승훈 신부의 영전에 고해부터 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글쓴이 /김정남
    · 언론인
    · 前 평화신문 편집국장
    · 前 민주일보 논설위원
    · 前 대통령비서실 교문사회수석비서관

    · 저서
    〈이 사람을 보라 -어둠의 시대를 밝힌 사람들-〉두레, 2012
    〈진실, 광장에 서다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정-〉창작과 비평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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