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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리는 자가 져야 할 의무,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작년 11월 27일부터 올 3월 1일까지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에서 특이한 전시회가 있었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 ‘우당 이회영과 6형제’를 소개하는 전시회였다. 3개월 남짓 전시하는 동안, 1만 명이 넘는 관람자들이 이곳을 찾았다. 전시회를 11월 17일에 시작한 것은 그날이 우당 이회영이 만주 여순에서 순국한 날이기 때문이다. 11월 17일을 떠올리니 ‘을사늑약’을 강제한 ‘중명전’이 겹쳐 떠올랐고, 거기에다 이회영이 을사늑약 파기를 위해 여러모로 구국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그날 그 장소에서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우당 이회영과 6형제들의 헌신

    원래 이 기획은 이 땅에 가진 자들, 보수라 자처하는 이들을 향해 “ ‘참 보수’란 이런 것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구호화하면, 서양의 유식한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라고 할 것이다. 우당 이회영과 6형제들은 임진왜란 이후 정승만 9명이나 배출, ‘삼한갑족’으로 알려진 집안의 후예다. 나라가 망하자 그들은 수만금의 가산을 정리하여 망명,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다. 이들은 안동의 이상룡 등 유생 진신들과 함께 나라 망한 책임을 이국땅의 고통스런 독립운동으로 보답하려고 했다. 만삭의 몸으로 압록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임에도 ‘왜놈’ 치하에 신생아의 호적을 둘 수 없다면서 강을 건넌 안동의 김씨 양반가의 눈물겨운 사연은 지금도 우리의 눈시울을 붉게 한다. 이게 누렸던 자들의 최소한의 책임이요 의무다.

    조선이 망할 때 나라 망한 것을 통탄하며 목숨을 끊은 자가 홍만식, 황현을 제외하고 그 몇이나 되는가. 고려가 조선에 정권을 넘겨줄 때에는 그래도 두문동 72현이 있었지만, 조선조가 왜족인 일본에게 망할 때에는 두문동 72현 같은 노블리스들의 집단적 항거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조는 망해도 더럽게 망했다”고 비아냥거리는 항간의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이 망할 때는 두문동 72인보다 더 많은 76명에게 작위가 수여되었고, 은사금도 많은 관료들에게 주어졌으며, 일제에 의해 재임용된 구한국 관료들은 감지덕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만금의 재산을 처분하고 망명노의 신세로나마 조상이 누렸던 빚을 후손된 자로서 보답하려 했으니 그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아닐까.

    노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일본군은 여순 공략에서만 5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는 노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전승이었지만, 승리하고 돌아오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장군은 일본의 부모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정작 이 전투에서 자기 아들을 희생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자 ‘노기장군만세’를 불렀다. 마오쩌뚱(毛澤東) 역시 그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을 한국전에 참전시켰다. 중국 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안잉을 군관으로 복무시키고자 했으나 마오는 군사경험이 없는 그에게 군관은 불가하다고 했다. 마오안잉이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오는 “중국 인민군 수십만이 죽고 있는데 어찌 내 자식만 살아 돌아오기를 기대하겠는가”라며 그 시신마저 중국으로 옮기지 못하게 하여 예외를 두지 않았다. 이웃의 이야기지만, 울림은 크다.

    한국 역사에도 이런 전범(典範)들이 있다. 가까이는 황현, 홍만식, 민영환 등과 나라 망한 책임을 지고 망명,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은 선진들의 경우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삼국시대 말기에도 있었다. 중국과 한반도 및 일본을 둘러싼 동아시아의 국제상황에서 나당의 동서축과 고구려·백제·돌궐·일본의 남북축 사이에는 혈투가 벌어졌고 나당동맹이 승리했다. 이 승리에는 신라의 지배층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외면할 수 없다. 660년 황산 전투에서 신라의 김유신은 김흠순, 김품일 등의 부장(副將)과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도 백제 계백(階伯)의 5천 결사대를 꺾지 못하고 4전4패했다. 그러나 신라의 부사령관 김흠순은 그의 아들 화랑 반굴(盤屈)을 희생시켰고, 부사령관 김품일 또한 그의 아들 소년 화랑 관창(官昌)을 제물로 바쳤다. 이들 지도자의 자기희생이 황산전투의 승리를 담보했다.

    ‘참 보수’란 이런 것이다

    김유신의 가정교육도 누린 자의 책임과 의무를 보여준다. 백제·고구려의 멸망 후 당(唐)이 한반도를 삼키려 하자 신라는 분연히 일어났다. 임진강 유역의 석문(石門) 전투에서 김유신의 아들 원술이 거느린 부대가 거의 전멸했다. 간신히 살아난 김원술이 부친을 찾아갔지만 김유신은 그를 맞아주지 않았다. ‘임전무퇴’를 실천하지 못하고 생명을 부지한 그를 자식이 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김유신이 죽자 원술은 그의 어머니를 찾았으나 지소 부인 역시 그를 내쳤다. 그 부모의 이같은 정을 끊는 엄한 교훈이 그를 역사에 살아남는 존재로 만들었다. 675년 당나라 이근행(李謹行)이 이끈 20만군이 신라의 매초(매소)성을 공격했을 때 신라는 당의 군마 3만여필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나당간의 반도 안에서 치러진 가장 큰 전투로 당군 20만이 거의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이는 원술이었다. 김유신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가진 자, 누리는 자들의 책임과 의무가 점차 실종되고 있다. 인사청문회에서 볼썽 사나운 꼴들이 이젠 사과 한마디로 무사 통과되고 있다. 서민들에게는 사법적 잣대를 댔을 주민등록법 위반이나 병역미필, 탈세 등이 인사청문 대상자에게는 상습적으로 처벌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이를 보고 있는 백성들은 무엇을 배울까. 지난 정권에서는 대통령부터 국무총리, 상당수의 고위직과 여당대표까지 병역미필로 꼴사나운 모습이었고 ‘보온병’ 망신까지 당했다. 이게 입만 열면 안보를 강조했던 정권의 민낯이었다. ‘안보무능정권’은 필연적이었다. 그런 정권일수록 국민을 향해서는 안보불감증을 질타하고 자신들은 청와대 벙커에 숨는다. 수선을 떨고 또 값비싼 비용을 들이는 안보강화조치보다는 정권에 기식하고 있는 병역미필자를 몇 사람이라도 추방했더라면 안보의식고취에 훨씬 효과적일 것이었다.

    가진 자, 누리는 자들의 의무가 어찌 병역의무에만 국한되겠는가.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가계부채 증가와 노동자들의 아우성이 하늘을 찌를 듯한데, 이 땅의 보수와 가진 자들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 공동체가 붕괴되면 그들의 누림인들 안전할까. 우당 6형제의 살신성인과 자기를 내던짐이 새삼 이 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메시지로 다가서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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