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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 ‘죽음학 전도사’ 정현채

    예전에는 서울에도 군데군데 무덤이 흔했다. 내 어릴 적 뒷동산 소나무 숲에도 무덤 세 기가 있었다. 아이들은 학교 화장실에 나온다는 귀신 얘기에 꺅 소리를 지르며 옷도 못 추스른 채 도망갈 만큼 겁이 많았지만, 뒷동산 무덤들을 무서워하진 않았다. 그 시절엔 봉분이 지금보다 컸던 걸까, 우리가 워낙 작아서였을까. 세 개의 무덤을 각자의 레인 삼아 올라타고 누가 더 잘 나가는지 미끄럼 내기를 하며 놀았다. 나중에 자라서 “북망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하는 박두진의 시 <묘지송>을 읽고는 어린 시절 나의 ‘무덤 놀이터’가 떠올라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다.

    그러나 도시재개발과 함께 죽음도 수도권 바깥으로 밀려났다. 무덤이 있던 곳엔 고층아파트가 들어섰고 이제는 아무도 대문에 조등(弔燈)을 달지 않는다. 도시는 번성하고 수명은 늘었지만 사람들은 기를 쓰고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며 산다. 죽을 기미가 보이는 사람들은 황급히 병원 중환자실로 이송되고 호스를 주렁주렁 단 채 기계음과 함께 죽어간다. 죽음은 삶으로부터 격리되어 있고 싸워 이겨야 할 적(敵)이며 공포의 대상이다.

    임종기 환자의 고통만 가중시키는 일들

    죽음이 낯설어진 세상에서 다시 죽음을 생각하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2005년 결성된 한국죽음학회는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라는 표어 아래 ‘잘 죽는 법’을 화두로 제기하고 <한국인의 웰다잉 가이드라인>(2010), <죽음맞이>(2013) 같은 책도 펴냈다. 그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 정현채(60) 교수는 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의사이다. 의대 강의 외에도 전국 방방곡곡 260회 이상 죽음에 대한 강연을 하러 다녀 ‘죽음학의 전도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음 이후엔 무엇이 있을까. 잘 죽기 위해선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난 16일 찾아간 그의 연구실은 병원 본관과 장례식장 사이,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는 아담한 2층 벽돌건물 안에 있었다. 소나무 아래 붉은 벽돌이 봄볕을 받아 따뜻했다.

    1층 그의 연구실 앞에는 ‘간 연구소’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자료로 빽빽한 방 안은 언뜻 보아 여느 연구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일반 의학 서적들과 별도로 나지막한 책꽂이에 죽음과 관련된 서적들이 2단으로 쌓여 있고, 죽음과 관련된 영화 디브이디(DVD)들이 차곡차곡 모아져 있는 걸 제외하고는. 자세히 보니 화이트보드에 이번달치 강연 일정이 촘촘했다. ‘영화를 통한 죽음 이해’, ‘웰빙과 웰다잉’, ‘근사체험’(近死體驗: 죽음의 문턱에 다녀온 체험) 같은 강의 제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구실이라고 해서 ‘죽음연구소’나 ‘웰다잉(Well-dying) 연구소’ 같은 곳에 계실 줄 알았는데 ‘간 연구소’여서 좀 의외였다.(웃음)
    “소화기내과와 같은 건물 3층에 뇌신경센터가 있는데 내가 몇 년 전부터 생각한 것이, 그 입구에 ‘사람은 한번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서 반드시 죽는다’ 이런 간판을 세웠으면 좋겠다는 거다. 아예 병원 입구에 세우면 더 좋고. 내가 강의할 때는 그런 걸 만들어 세우자고 보여주곤 하는데, 실제로 세우면 어떻게 되겠나? 집행부에서 바로 떼 가 버릴걸….(웃음)”

    -그러니 여기다 ‘죽음연구소’ 이렇게 써 붙이면….
    “(손사래 치며) 아이고!(웃음)”

    -의사들부터 그렇게 죽음을 터부시하니, 일반인들은 더더욱 죽음이 낯설고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죽음이 학문의 한 영역이 된 게 언제부터인가?
    “1960년대,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죽음학을 표방하고 처음 강의를 시작한 걸로 안다. 타나토스(thanatos)가 그리스어로 죽음이란 뜻인데 타나톨로지(thanatology)라고 해서…. 일본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생학(死生學) 혹은 생사학(生死學)이라고 불리는데 도쿄대학 같은 데는 ‘사생학연구소’가 따로 있다.”

    -한국죽음학회 이사로 계시는데 학회 구성원들은 어떤 분들인가?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한국학과)가 회장을 맡고 있고 철학, 종교학, 의학, 간호학 등 회원들의 전공이 다양하다.”

    -죽음을 주제로 한 학문간 협동연구라고 할 수 있는데, 종교학과 의학의 만남은 전례가 없는 것 같다.
    “전례가 거의 없을 거다. 의학 하는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보지만 죽음에 대해서 별로 얘기를 안 하고, 종교학이나 철학은 죽음에 대해 얘긴 많이 하지만 실제 죽음을 그렇게 많이 보지는 않으니까. 이론과 현장 사이의 괴리를 좁혀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을 만들자는 게 우리의 지향이다.”

    -요즘 미디어에서 ‘명의’(名醫)에 대한 환상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죽어가는 환자를 어떻게든 살려내는 영웅으로… 환자의 기계장치에서 ‘삐~’ 하고 신호곡선이 끊기다가 다시 ‘뚜뚜뚜~’ 하고 바늘이 움직이면 와! 하면서 감동적인 음악이 좍 깔리고…(웃음) 그런데 그 이후 환자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왕자와 공주의 결혼식 장면에서 끝나는 동화처럼.
    “환자의 사망을 의료의 패배로 여기는 의료진들이 많으니까. 실제로 심폐소생술을 하다가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기도삽관 과정에서 치아가 부러지고 성대나 인두를 다쳐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라도 해서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경우라면 당연히 해야 하지만 임종기 환자한테는 고통만 가중시키는 것이 될 수 있다.”

    -환자 자신은 의사표현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겠다.
    “환자 가족들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을 잃는 걸 자신의 실패로 여긴다. 얼마 전 지방에 있는 어느 의사가 내게 메일을 보냈는데 자기 어머니가 90살에 심근경색이 와서 부랴부랴 앰뷸런스로 옮기고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돌아가셨다고. 그 뒤 후회와 자책감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왜 자책감을 느끼나?
    “빨리 모시지 못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거다. 그래서 내가 다섯 장짜리 긴 답장을 써서 보냈다.”

    -뭐라고 쓰셨나?
    “죽음은 꽉 막힌 돌담 벽이 아니고,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열린 문이라고. 이게 단순히 믿음의 문제가 아니고 이걸 뒷받침해주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있다고. 죽음 근처까지 갔다 온 근사체험이나 삶의 종말체험을 보면 충분한 근거들이 있다고.”

    -사후세계를 믿으시나?
    “내 의대 2년 선배도 똑같은 질문을 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다. ‘그건 실재할 뿐만 아니라 장엄하고도 장대한 세계입니다’라고. 너무나 많은 증거들이 있기 때문에 없다고 말하기 곤란하다.”

    그는 미리 복사해 둔 논문과 자료 몇 편을 우리 일행에게 한 부씩 건넸다.

    2005년 결성 ‘한국죽음학회’ 주도
    죽음 주제 전례없는 학문간 협동
    “환자 사망은 의료 패배 아냐
    죽음은 돌담벽 아닌 열린 문
    장엄하고도 장대한 또다른 세계”
    나이 오십 앞둔 10여년전 관심
    죽음학 연구서 <사후생> 탐독
    “육신 벗어나면 에너지체로 존재
    이 생은 ‘윤회’의 신병훈련소
    삶의 유한성 절감 긍정적 영향”

    죽은 남편을 만난 할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정현채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88년부터 서울대병원에서 내과의사로 많은 환자들을 만나왔다. 그는 여느 의사들처럼 생물학적 죽음관과 실증주의 과학교육에 충실한 의학자였다. 말기암 환자도 많이 봤지만 죽음을 자신과 연결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10여년 전, 나이 오십을 바라보며 문득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쳐들기 전까지는. 왜 딱히 그때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그 몇 해 전이니 그 때문이라 하기 어렵고, 건강에 특별히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종교적 관심은 아니었나?
    “아니다. 종교적 교리나 문화적 전통에 의한 믿음이 아니고, 실제로 팩트가 뭔지, 죽음에 임박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었다. 그때 아내가 내게 선물한 책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쓴 <사후생>(死後生)이라는 책이었다.”

    취리히대학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한 퀴블러 로스 박사는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의 근사체험과 삶의 종말체험을 관찰하고 연구해서 20여권의 저서를 발표한 죽음학 연구의 대가이다.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에 꼽힐 만큼 권위를 인정받는 퀴블러 로스가 근사체험자들의 증언을 분석해 <사후생>에서 주장하는 것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라는 것이었다.

    -근사체험자들이 말하는 게 뭔가?
    “정신과 전문의 김자성 선생이 번역해 소개한 <사후세계의 비밀>(마이클 팀 저)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임종을 앞둔 어떤 할머니가 오랫동안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어느 날 예기치 않게 의식이 돌아와서는, 30년 전 죽은 남편이 아침에 와서 ‘오늘은 저승 갈 날이 아니나 사흘 뒤 떠난다’고 말했다는 거다. 그러곤 할머니를 돌봐주던 간호사의 죽은 남편이 전하는 말이라고, 부부만이 알던 어떤 사실을 이야기해줬다고 한다. 실제로 할머니는 이 말을 남기고 다시 혼수에 빠진 뒤 사흘 뒤 세상을 떠났다.”

    근사체험은 이제 의학의 한 연구 분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권위 있는 의학전문학술지 <랜싯>(Lancet)에 2001년에 실린 연구를 보면 네덜란드의 여러 병원에서 심폐소생술로 다시 살아난 344명을 조사한 결과 이들 중 18%인 62명이 근사체험을 했는데 자신이 죽었다는 인식(50%), 긍정적인 감정(56%), 체외이탈 경험(24%), 밝은 빛과의 교신(23%),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과 친지와의 만남(32%), 자신의 생을 회고함(13%) 등이 공통된 체험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떠나간 사후세계에선 어떤 일이 펼쳐진단 말인가?
    “우리가 죽어서 육신을 벗어나면 진동하는 에너지체로 존재하는데 그 주파수에 따라 비슷한 에너지체끼리 모인다.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에너지체는 그것끼리, 증오와 질투로 살아온 에너지체는 또 그것끼리…. 절대적 심판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에너지체 스스로 천국과 지옥을 만드는 셈이다. 그러나 그 구분은 보상과 징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고 새로운 영적 진화를 도모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윤회를 인정하나?
    “그렇다. 윤회론은 불교나 힌두교의 전유물이 아니고, 미국이나 서구에서 오히려 연구가 더 많이 됐다. 우리는 미국이 건국되기 전부터 얘기를 해왔는데, 연구도 하지 않고 데이터도 없고. 아마 앞으로 미국 가서 윤회로 박사학위 받고 오는 사람도 생길 거다.”

    -거듭되는 윤회에서 그럼, 이 생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아주 빡센 신병훈련소라고 할 수 있다. 비물질계에서는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영혼들이 모이지만 지상에서는 주파수가 전혀 다른 사람들과도 봐야 하고, 그렇게 부딪히는 삶의 경험을 통해서 영적 성장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게 여러 연구자들의 주장이다.”

    -사후세계나 윤회를 인정한다면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컴퓨터가 이리저리 바이러스 먹고 자꾸 오작동하면 아예 리셋(reset)해서 초기값으로 돌려놓고 싶어지지 않나? 누군가가 ‘나는 이 생이 너무 괴롭고 힘들어 빨리 마감하고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을 ‘빡센 신병훈련소’라고 했는데, 그 과제가 힘들다고 그만두는 건, 학교에서 월담해서 뛰어나가는 거랑 똑같다. 그럼 어떻게 되겠나? 다시 들어와서 또 해야지. 초등학교 1학년 때 구구단 외다가 싫다고 나가버리면 다시 돌아와서 처음부터 또 구구단을 평생….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나? 다음 단계 올라가서 인수분해도 배우고 계속 성장을 해나가야 되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감이 확 온다.(웃음)
    인생은 빡센 신병훈련소, 사랑하고 감사하라

    -이런 영적 세계를 과학으로 증명하는 것이 가능할까? 주목할 만한 학술논문들이 나왔다고는 해도 많은 부분은 여전히 신비가들의 주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다 입증할 수 있을까? 현대과학의 적용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오히려 과학자로서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물질계를 측정하는 잣대를 비물질계에 들이대는 건 타당하지 않다.”

    -사람이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로 삶을 산다면 뭐가 달라질까?
    “나 같은 경우엔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우선 삶이 유한하다는 걸 절감하게 되니 늘 만나는 전공의나 자식들한테도 뭐 덕담이라도 한마디 더 해주고 싶어지고. 아침마다 전공의들이 발표를 하는데 어떤 때는 암만 봐도 뭐 별로 잘한 게 없는 거 같은데….(웃음) 꼼꼼히 보면 장점은 늘 있더라.”

    -예를 들면?
    “슬라이드 바탕을 흰색으로 해서 아침에 조는 사람을 적게 했다든가…(웃음) 그리고 주변에 고맙다고 인사해야 하는데 못한 거 있으면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고. 얘기하면 그 사람은 벌써 잊어버린 경우가 흔하지만.(웃음)”

    정현채는 아직 정년이 5년 남았지만 4년 전부터 자신의 연구실 비품이나 자료를 학교의 의학역사문화원에 기증해 오고 있다. 매년 다섯 번 헌혈을 하고 원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강의노트를 복사해준다. 장기기증서약서와 유언장, 자신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 기도삽관이나 연명의료를 하지 말라고 사전의료의향서를 써두었다. 자신의 장례식에서 쓸 음악을 90여곡 모아놓고, 수의 대신 무명 평상복을 입혀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달라는 사전장례의향서도 써 두었다.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이란 책을 쓴 미국 의사 아이라 바이오크는, 죽기 전 해야 할 일 네 가지를 제시한다. ‘사랑해요, 고마워요’라고 말할 것, 용서를 하고 용서를 구할 것, 작별인사를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하기란 쉽지 않다.

    2010년 영국 이코노미스트 산하 연구소가 ‘죽음의 질’을 조사한 것을 보면, 한국은 40개 나라 중 32위로 우간다보다 한 등수 위이다. 1위를 차지한 영국과 비교할 때 한국은 시티(CT)나 엠아르아이(MRI) 같은 고가의 장비는 3~4배나 많으면서 임종기 환자의 진통 완화를 위한 모르핀 사용량은 영국의 10분의 1이다. 전국의 호스피스 병상 수는 900여개에 불과하다.

    -내 가족이 죽음을 맞이할 때 아름다운 임종을 도와주기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은 뭔가?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끝까지 유지되는 감각이 청각과 촉각이다. 의식이 없어 보이더라도 손을 꼭 잡고 할 얘기를 다 하는 게 좋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못다 한 이야기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수의 환자들이 병원 중환자실에서 가족과 격리된 채 임종을 맞는다. 2013년 대통령 직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는 임종기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거부할 수 있도록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권고안을 채택했지만 아직 법안은 국회를 표류하고 있다. 가족과 따뜻한 작별인사라도 하고 떠나려면 죽기 전 해야 할 일이 많다.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이진순 언론학 박사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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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죽음학 전도사’ 정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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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ㅡ 중국 장웨이린 교수의 이순신에 대한 평가와 고백

    조선의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 일본 교수들의 말만 듣고 학술연구회에서 거북선을 처음 보았다. 저런 배가 400여년 전에 있었단 말인가? 나의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학술연구회의 이름은 '이순신'이었다. 일본교수진의 도움으로 책 7권을 하루만에 다 읽고 책을 놓은 뒤.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어디선가 느껴지는 심장소리...

    ㅡ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를 구할수 있는 위인이 있다면 누구일까 물었다. 항우, 제갈공명, 손자, 관우...
    나는 한참동안이나 창문 너머를 바라보다 말했다.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이 나타난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일거라고... 그리고 학생들에게 거북선 사진을 보여주었다.

    모두들 의아해 했다.
    400여 년 전 조선과 일본의 전쟁시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이야말로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나는 여러분께 말한다.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소리가 들렸다.
    조선 수군장수 이순신은 5천 명도 안 되는 군사와 50척도 안 되는 함대를 이끌고 40만 대군의 왜군과 1.300대의 일본함대와 맞서 싸워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모두 승리하여 조선을 구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100년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싸움의 고수들이었고 동아시아 최강의 전력이었다.

    당시 조선 수군은 물고기나 잡고 농사나 짓던 나약한 병사들이었으나 단 1년만에 훈련시켜 40만 대군과 1.300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서 이길 수 있는 군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하다.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 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까지 일본군에 점령되었을 것이다.
    세계 어느 국가도 한 인물의 존재에 따라서 이렇게 역사가 뒤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 거북선을 보라!
    누가 이 배가 40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믿겠는가?
    여러분들은 눈을 떠야 한다.
    나는 1시간 정도 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강의를 끝마칠 수 있었다.

    강의가 끝났을 때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며 기립 박수를 받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 까지...
    내가 처음 이순신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을때 그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ㅡ 장웨이린 교수?

    동북공정의 일환인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일을 맡았다가 이순신 학술회를 시작으로 고구려 역사 편입 작업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는 말한다.
    역사학자가 후세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되는 두 가지 부끄러움이 있다.
    한 가지는 히틀러가 200만 유태인을 죽인 것보다 그 역사를 감추며 숨기는 것,
    또 한 가지는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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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리는 자가 져야 할 의무,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작년 11월 27일부터 올 3월 1일까지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에서 특이한 전시회가 있었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 ‘우당 이회영과 6형제’를 소개하는 전시회였다. 3개월 남짓 전시하는 동안, 1만 명이 넘는 관람자들이 이곳을 찾았다. 전시회를 11월 17일에 시작한 것은 그날이 우당 이회영이 만주 여순에서 순국한 날이기 때문이다. 11월 17일을 떠올리니 ‘을사늑약’을 강제한 ‘중명전’이 겹쳐 떠올랐고, 거기에다 이회영이 을사늑약 파기를 위해 여러모로 구국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그날 그 장소에서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우당 이회영과 6형제들의 헌신

    원래 이 기획은 이 땅에 가진 자들, 보수라 자처하는 이들을 향해 “ ‘참 보수’란 이런 것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구호화하면, 서양의 유식한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라고 할 것이다. 우당 이회영과 6형제들은 임진왜란 이후 정승만 9명이나 배출, ‘삼한갑족’으로 알려진 집안의 후예다. 나라가 망하자 그들은 수만금의 가산을 정리하여 망명,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다. 이들은 안동의 이상룡 등 유생 진신들과 함께 나라 망한 책임을 이국땅의 고통스런 독립운동으로 보답하려고 했다. 만삭의 몸으로 압록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임에도 ‘왜놈’ 치하에 신생아의 호적을 둘 수 없다면서 강을 건넌 안동의 김씨 양반가의 눈물겨운 사연은 지금도 우리의 눈시울을 붉게 한다. 이게 누렸던 자들의 최소한의 책임이요 의무다.

    조선이 망할 때 나라 망한 것을 통탄하며 목숨을 끊은 자가 홍만식, 황현을 제외하고 그 몇이나 되는가. 고려가 조선에 정권을 넘겨줄 때에는 그래도 두문동 72현이 있었지만, 조선조가 왜족인 일본에게 망할 때에는 두문동 72현 같은 노블리스들의 집단적 항거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조는 망해도 더럽게 망했다”고 비아냥거리는 항간의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이 망할 때는 두문동 72인보다 더 많은 76명에게 작위가 수여되었고, 은사금도 많은 관료들에게 주어졌으며, 일제에 의해 재임용된 구한국 관료들은 감지덕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만금의 재산을 처분하고 망명노의 신세로나마 조상이 누렸던 빚을 후손된 자로서 보답하려 했으니 그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아닐까.

    노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일본군은 여순 공략에서만 5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는 노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전승이었지만, 승리하고 돌아오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장군은 일본의 부모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정작 이 전투에서 자기 아들을 희생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자 ‘노기장군만세’를 불렀다. 마오쩌뚱(毛澤東) 역시 그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을 한국전에 참전시켰다. 중국 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안잉을 군관으로 복무시키고자 했으나 마오는 군사경험이 없는 그에게 군관은 불가하다고 했다. 마오안잉이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오는 “중국 인민군 수십만이 죽고 있는데 어찌 내 자식만 살아 돌아오기를 기대하겠는가”라며 그 시신마저 중국으로 옮기지 못하게 하여 예외를 두지 않았다. 이웃의 이야기지만, 울림은 크다.

    한국 역사에도 이런 전범(典範)들이 있다. 가까이는 황현, 홍만식, 민영환 등과 나라 망한 책임을 지고 망명,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은 선진들의 경우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삼국시대 말기에도 있었다. 중국과 한반도 및 일본을 둘러싼 동아시아의 국제상황에서 나당의 동서축과 고구려·백제·돌궐·일본의 남북축 사이에는 혈투가 벌어졌고 나당동맹이 승리했다. 이 승리에는 신라의 지배층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외면할 수 없다. 660년 황산 전투에서 신라의 김유신은 김흠순, 김품일 등의 부장(副將)과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도 백제 계백(階伯)의 5천 결사대를 꺾지 못하고 4전4패했다. 그러나 신라의 부사령관 김흠순은 그의 아들 화랑 반굴(盤屈)을 희생시켰고, 부사령관 김품일 또한 그의 아들 소년 화랑 관창(官昌)을 제물로 바쳤다. 이들 지도자의 자기희생이 황산전투의 승리를 담보했다.

    ‘참 보수’란 이런 것이다

    김유신의 가정교육도 누린 자의 책임과 의무를 보여준다. 백제·고구려의 멸망 후 당(唐)이 한반도를 삼키려 하자 신라는 분연히 일어났다. 임진강 유역의 석문(石門) 전투에서 김유신의 아들 원술이 거느린 부대가 거의 전멸했다. 간신히 살아난 김원술이 부친을 찾아갔지만 김유신은 그를 맞아주지 않았다. ‘임전무퇴’를 실천하지 못하고 생명을 부지한 그를 자식이 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김유신이 죽자 원술은 그의 어머니를 찾았으나 지소 부인 역시 그를 내쳤다. 그 부모의 이같은 정을 끊는 엄한 교훈이 그를 역사에 살아남는 존재로 만들었다. 675년 당나라 이근행(李謹行)이 이끈 20만군이 신라의 매초(매소)성을 공격했을 때 신라는 당의 군마 3만여필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나당간의 반도 안에서 치러진 가장 큰 전투로 당군 20만이 거의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이는 원술이었다. 김유신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가진 자, 누리는 자들의 책임과 의무가 점차 실종되고 있다. 인사청문회에서 볼썽 사나운 꼴들이 이젠 사과 한마디로 무사 통과되고 있다. 서민들에게는 사법적 잣대를 댔을 주민등록법 위반이나 병역미필, 탈세 등이 인사청문 대상자에게는 상습적으로 처벌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이를 보고 있는 백성들은 무엇을 배울까. 지난 정권에서는 대통령부터 국무총리, 상당수의 고위직과 여당대표까지 병역미필로 꼴사나운 모습이었고 ‘보온병’ 망신까지 당했다. 이게 입만 열면 안보를 강조했던 정권의 민낯이었다. ‘안보무능정권’은 필연적이었다. 그런 정권일수록 국민을 향해서는 안보불감증을 질타하고 자신들은 청와대 벙커에 숨는다. 수선을 떨고 또 값비싼 비용을 들이는 안보강화조치보다는 정권에 기식하고 있는 병역미필자를 몇 사람이라도 추방했더라면 안보의식고취에 훨씬 효과적일 것이었다.

    가진 자, 누리는 자들의 의무가 어찌 병역의무에만 국한되겠는가.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가계부채 증가와 노동자들의 아우성이 하늘을 찌를 듯한데, 이 땅의 보수와 가진 자들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 공동체가 붕괴되면 그들의 누림인들 안전할까. 우당 6형제의 살신성인과 자기를 내던짐이 새삼 이 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메시지로 다가서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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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인권침해 뿌리는 빨갱이 탄압논리”
    4년 임기 마친 김동춘 진실화해위 상임위원

    “가해자와 피해자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관계자 1만명의 증언을 읽었죠. 제가 아마 한국에서 가장 많은 증언을 들은 사람 중 하나일 겁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있었던 김동춘(50·사진)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부)는 지난 4년 동안의 활동을 이렇게 회상했다. 진실화해위 출범과 함께 상임위원으로 임명됐던 김 교수는 10일 4년여의 임기를 마쳤다.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사건 1만1025건 가운데 75%(8161건)는 한국전쟁 때 군경에 의해 학살당했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으로, 김 교수가 이를 담당했다. 당시 민간인 학살 규모는 30여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학살 당시, 죽은 사람 수를 세기 위해 가해자들이 귀를 자를 때, 살아남기 위해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던, 귀 잘린 할머니의 모습도 봤다고 했다. 그는 반세기가 지나서야 국가가 진상규명에 나선 것에 대해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희생자와 가해자 모두 숨지기 전이라 아주 늦지 않은 시점에 이뤄져 다행”이라고 평했다.

    김 교수는 한국전쟁기의 학살은 친일문제, 전후 인권침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평했다. 그는 “좌우와 무관하게, 일제 시절 독립운동 경력을 가진 사람 가운데 3분의 2는 친일 경력을 가진 군경의 명령권자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말했다. 학살은 훗날 ‘인권침해의 뿌리’가 됐다. 학살의 주체인 사상 검사와 방첩부대(CIC·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 경찰 사찰계는 ‘빨갱이는 고문하고 죽여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 논리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과거사 정리를 ‘사회적 치유의 과정’이라고 불렀다.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는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정부에 반대하면 이렇게 된다’는 학습효과를 퍼뜨려 우리 사회를 곪게 했습니다. 과거사 정리는 피해자 구제만이 아니라,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 ‘잘못된 행동은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교훈을 통해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는 길입니다.”

    김 교수는 과거사 정리가 ‘일회성 이벤트’가 되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적절한 보상과 전국적 규모의 위령사업, 국민들에게 계속해서 교훈을 줄 ‘과거사연구재단’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학살 현장을 ‘평화교육의 장’으로 보존할 것을 제안했다.

    “한국의 과거사 정리가 한계는 있지만, 돈과 인력을 투입해 스스로 과거사를 정리한 사례는 세계에서 유일합니다. 이런 점을 이명박 정부가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그는 최근 보수 성향의 인물이 진실화해위 위원장으로 임명된 것과 관련해 “그간 진실화해위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도 위원으로 와서, 보고서들에 적힌 사실을 보고 점차 공감하게 되는 걸 지켜봤다”며 “남은 사건을 잘 마무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926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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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 김 정 남 (언론인)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부영이 보낸 편지(2월 23일자 편지에 3월 1일자 추신이 붙은)를 전병용으로부터 내가 받은 것은 1987년 3월 중순이었다. ‘우촌전’(友村前-우촌은 이돈명 변호사가 내게 지어준 아호다)으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실로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해 1월 14일, 서울대 박종철군을 고문치사시킨 범인으로 같은 교도소에 구속되어있는 조한경 경위는 박종철군을 조사하는 조(組)의 반장이기는 했지만 고문행위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고, 또 다른 고문경관 강진규 경사는 다른 반(班)소속으로 그들이 찾고 있던 황 아무개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왔다가 욕조 안에서 박군의 다리 가랑이를 들어주는 보조역할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

    편지는 팔다리가 묶인 박군을 뒤에서 붙잡고 억지로 물을 먹이다가 박군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경관은 따로 있다면서, 그 세 사람의 이름과 직위를 적시하고 있었다. 구속된 두 사람은 사건 후 경찰간부들에 의해 짜여진 각본에 따라 범인으로 지명, 차출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2월 27일, 검사에게 자신들이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 사정과 진짜 고문경관 3명에 대해 진술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사는 “어느 쪽이 유리한지 잘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면서 며칠 후에는 의정부교도소로 이들을 이감시켜 버렸다.

    1986년 5월 3일의 인천사태로 수배 중이던 이부영은 그해 10월 하순 불광동으로 나를 만나러 왔다가 체포되어 그때는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고, 나는 이부영에 대한 도피방조혐의로 전국에 지명수배 중이었다. 전병용 역시 이부영, 장기표 등 5.3인천사태 수배자들에게 편의와 은신처를 제공한 것이 드러나 쫓기고 있는 몸이었다. 전병용은 내게 편지를 전해 준 며칠 뒤 경찰에 체포, 구속되었으니 하마터면 그 편지는 영원히 공중에 뜰 뻔 했던 것이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 바로 박종철의 죽음 이후 그와 관련된 신문보도를 세심히 챙겨 스크랩하고, 이부영의 편지와 인권변호사 그룹 등 제한된 범위 안에서 확인한 정보를 바탕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성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만약 천인공노할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국민이 결코 저 부도덕한 정권의 무리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상황이 바뀌거나 새로운 사실이 입수될 때마다 성명은 수정과 다시쓰기를 수도 없이 거듭했다. 그것이 최종적으로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년 기념 명동성당 미사에서 김승훈 신부에 의해 사제단의 이름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그 성명의 마지막을 나는 이렇게 썼다.

    “이 사건 범인 조작의 진실이 박종철 군 고문살인 진상과 함께 명쾌하게 밝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과연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의 도덕성이 회복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결말이 날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가 진실과 양심, 그리고 인간화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대한 관건이 이 사건에 걸려있다.”

    5월 18일, 명동성당 미사 때 성명서를 읽는 김승훈 신부의 목소리는 크게 떨리고 있었고 절할 때는 제의가 머리를 덮을 정도로 엄숙, 경건했다고 한다. 김승훈 신부는 그 전날 받은 성명을 읽고 또 읽어 글자 수가 3,120자라는 것까지 헤아렸다는 얘기를 나는 뒤에 들었다. 성명을 발표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조심스러웠으면, 그 성명을 쓴 나도 헤아리지 않았던 글자 수까지 헤아렸을까 생각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가슴이 찡하다.

    불의와 기회주의가 승리하는 역사

    최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수사에 참여했던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놓고 정치권과 언론에서 하느니 마느니, 당시의 검찰수사팀이 잘했느니 못했느니 공방이 치열하다. 청문회를 하고 하지 않고는 정치권에서 결정할 일이지만, 과연 사제단의 발표가 없었어도 그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 수 있었을까. 박종철 군에 대한 물고문을 밝혀낸 부검을 결정, 지시한 것도 이들 형사2부 수사팀이 아니라 공안부장 최환이었다. 3명의 살인고문경관 명단을 진술한 2월 27일로부터 사제단의 성명이 발표된 5월 18일까지 그들은 무엇을 했던가. 이후에도 그들의 은폐와 축소는 계속되었을 뿐이다.

    나는 당시의 수사검사가 마치 자신이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정의의 투사인 것처럼 쓴 책을 보고, 거짓과 위선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불의와 기회주의가 승리하는 역사가 어떻게 쓰여지는지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반면에 이 사건의 진실을 빛 속에 드러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부영이 얼마 전 이 나라 정치판에 지쳐서 스스로 정계은퇴를 선언하는 것을 보았다.

    김승훈 신부는 생전에 자신이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할 때마다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는 말로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했다. 우리가 헤쳐온 1990년대와 80년대가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으면 그 말을 달고 살았을까. 거짓과 위선, 불의와 기회주의로 살아온 사람들의 진실도 당신께서는 다 아신다는 말을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그들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있다면 김승훈 신부의 영전에 고해부터 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글쓴이 /김정남
    · 언론인
    · 前 평화신문 편집국장
    · 前 민주일보 논설위원
    · 前 대통령비서실 교문사회수석비서관

    · 저서
    〈이 사람을 보라 -어둠의 시대를 밝힌 사람들-〉두레, 2012
    〈진실, 광장에 서다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정-〉창작과 비평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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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친구 구충서, 그리고 김진의 '5.16 예찬' /
    "박정희가 키운" <중앙> 김진, 무식하면 입 다물라 /

    김수진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http://blog.joins.com/dima0306/12215436


    내 친구 구충서

    1974년 3월 하순 어느 날 저녁 나는 고교시절부터 깊은 친교를 나눠 오던 벗 구충서와 무교동의 한 막걸리 집에 마주앉았다. 당시 우리는 대학에 입학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햇병아리 신입생이었다. 고교시절부터 10월유신에 대해 강한 저항의식을 표출해 왔던 충서는 그날 유신철폐 민주화투쟁에 가담하게 되었다며 내게 동참을 권유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거절했다.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이를 위해 공부하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궁색한 논리를 피력하면서. "너는 투쟁해라. 나는 공부하마." 나의 이 말에 충서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약 보름 후 충서는 소위 민청학련 사건 최연소 가담자로 체포되었고 열아홉 어린 나이에 12년형을 언도 받고 복역했다. 그해 겨울 육영수 여사 서거에 따른 특사조치로 충서는 대부분의 다른 가담자들과 함께 출옥했지만 그의 정신 상태는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고초도 감내하기 힘들었지만 자신으로 인해 파탄 난 집안 모습에 그는 크게 충격 받았다. 광주에서 견실한 자영업을 하던 부모의 사업은 풍비박산이 나 있었다.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체에 근무하던 형은 직장에서 쫓겨나 실업자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제 정신을 갖고 살 수 있었겠는가.

    충서의 정신장애는 갈수록 악화해서 다른 선배들처럼 민주화투쟁에 다시 뛰어들 수도 없었다. 그런 벗을 두고 나는 유학길에 올랐다. 군부독재에 저항해서 민주화를 쟁취해 낸 처절한 투쟁이 국내에서 계속되는 동안 나는 외국에서 편안한 유학생활을 영위했다. 1991년 귀국한 나는 충서를 찾아 볼 겨를 없이 쫓기듯 시간강사 생활을 꾸려갔다.

    1995년 3월 이화여대에 정식으로 자리를 잡고 나서 나는 비로소 충서를 찾을 생각을 했다. 두 명의 다른 벗들과 힘을 합쳐 마침내 충서 형님을 찾아냈고 그 형님을 통해 충서가 전라도 깊은 산 속에 있는 정신병자를 격리수용해 놓은 기도원에 갇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사이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형님은 아파트 경비원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동생을 그런 곳에 방치해 두었냐고 따져 물을 상황이 아님이 여실했다.

    산속 기도원에서 만난 친구의 모습은 처참했다. 열아홉 훤칠했던 체격과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했던 눈빛, 당당한 기상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나이는 불과 마흔인데 머리는 하얗게 새었고 어깨는 구부정한 채 초점 없는 눈빛과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며 앞뒤가 전혀 안 맞는 말을 지껄여대는 친구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나는 무엇으로도 갚을 길 없는 빚을 친구에게 졌다는 것을 그 순간 절감했다.

    이때 이후 충서는 옛 벗들의 도움에 의지해서 살아오고 있다. 그는 여전히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며 외부와 사실상 단절된 삶을 지속하고 있다.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과 박정희

    나는 왜 내 친구 구충서의 삶을 공개할 결심을 했는가. 5.16 50주년을 맞아 보수언론들이 경쟁적으로 게재한 특집기사를 나는 읽었다. 보수적 지식층과 논객들이 5.16을 혁명으로 미화하고,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찬양하고, 급기야 5.16과 박정희가 한국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는 궤변을 읽으며 나는 내 친구의 삶을 떠올렸고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견딜 수 없어 이 글을 쓸 마음을 먹었다. 37년 전 '투쟁'의 가시밭길에 동참하라는 친구의 제의를 거절하고 '공부'라는 안락한 길을 택했던 내가 용기 있게 '투쟁'의 길에 나섰던 내 친구를, 그리고 내 친구와 함께 투쟁의 길에 나섰던 무수한 '구충서'들을 모욕하고 매도하는 글들에 도저히 침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많은 구역질나는 글들 중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의 글(5월 16일자 칼럼 '나를 키운 박정희'-편집자주)을 선택해서 비판의 글을 쓴다. 선택의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한국 보수 언론을 대표하는 대표적 논객이 쓴 글의 논리 전개가 지극히 조야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와 한국 정치사에 대한 그릇된 지식과 편견으로 가득 차 있어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선택했을 뿐이다.

    그에 의하면 그가 취재한 박정희의 '부하'들은 오직 박정희의 '청렴과 애국심'만 강조하더란다. 그에게 김태촌과 같은 조직폭력배 보스의 '부하'들을 취재해 보라 묻고 싶다. 보스의 지시로 자행한 무수한 폭력과 살인, 그리고 갈취행각을 과연 그들이 증언하겠는가. 그의 글을 읽으면 '부하'들의 증언이 어느 결에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증언'으로 바뀐다. 김진 논설위원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구충서'들에게 박정희에 관해 물어 본 적 있나.

    그가 서술하는 '공동체'는 오늘날 민주적 공화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공동체라기보다 오히려 파시스트들이 주창했던 유기체적 전체주의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 그가 묘사하는 공동체적 인간 박정희는 히틀러, 무솔리니, 김일성 같은 전체주의자에 더 가깝다는 말이다.

    "내가 발견한 김일성은 공동체적 인간이었다... 인류 문명의 진보와 공동체 발전에 개인의 궤적을 합일시키는 공동체적 인간이었다...그런 인간의 대표적인 사람이 김일성이었다. 그런 김일성이 나의 세계관을 바꾸어 놓았다."

    김 논설위원의 글에서 박정희를 김일성으로 바꾼 표현이다. 노동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김일성 주체사상 찬양 글귀와 무엇이 다른가. 김일성 대신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바꾸어 넣어 읽어 보라. 1930년대 파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당시 이들이 주창했던 소위 Lebensraum(레벤슈라움,나치의 '생존권역' 개념-편집자주) 이념과 무엇이 다른가.

    그에 의하면 "1960~70년대 한국의 공동체 발전은 안보와 가난의 극복, 그리고 경제발전이었(지) 민주주의는 그 시대의 과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묻는다. 이승만 독재 타도 투쟁에 나섰다 고귀한 목숨을 희생시키고 4.19 민주묘역에 잠들어 있는 민주열사들은 시대적 요구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이었나. 유신독재에 맞서 싸우다 희생된 무수한 '구충서'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에 분연히 맞서 싸웠던 70년대 언론인들 역시 정신 나간 자들이었나.

    그는 나아가 "박정희 개발독재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시초였다"고 강변한다. 그의 논리는 한국 근대화의 기초를 닦아 주었던 것이 일제 식민통치였다는 일본 극우 세력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이제 우리는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을 열어 준 일본에 크게 감사해야 할 판이다. 무엇보다 일제는 '위대한 공동체적(혹은 전체주의적) 인간 박정희(혹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를 교육시켜 주지 않았나.

    그는 "민주주의라는 건 경제개발로 중산층이 형성되어야만 가능"하단다. 오늘날 민주화의 물결이 히말라야 산록을 거슬러 올라 네팔과 부탄을 민주화시키고 또 중동의 빈국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 예멘 등을 휩쓸고 있다는 것을 대 언론인 김진이 정말 모르고서 하는 말인가. 민주화 투쟁에 나선 국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있는 리비아의 카다피가 40여 년 전 쿠데타로 권력을 쥔 다음 소위 '녹색혁명'을 확산시켰을 때 서방의 일부 언론과 학자들은 그를 '근대화 엘리트'로 칭송한 바 있었다. 그러나 카다피는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잔혹한 독재자일 뿐이다. 그가 아무리 텐트에 기거하면서 '청렴'을 가장해 왔고 또 진정 '인민을 위한' 통치를 해 왔다고 큰 소리 치더라도 말이다.

    박정희나 카다피처럼 평생 독재자 노릇을 하려 했던 자들에게 '청렴'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가소로운 얘기다. 죽을 때까지 나라 전체가 자기 소유일 것으로 믿는 자들이 왜 7년 임기를 채우면 권좌를 넘겨줘야 할 자들처럼 째째하게 푼돈을 모으느라 혈안이 되겠는가.

    "쿠데타-혁명도 제대로 구별 못하는 김진이 언론인?

    박정희와 유신독재체제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아 호의호식"해 온 '박정의의 부하들'의 위선에 찬 증언에 기대어 역사를 왜곡하고 민주인사를 능멸하는 김 논설위원에게 분노를 넘어 차라리 연민을 느낀다. 그가 영합하려는 대상이 역사도 아니고 진실도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눈으로 볼 때 권력 획득을 목전에 둔 것처럼 보이는 박정희의 딸이야말로 그가 진정 영합하고 또 비호하고 싶은 대상이리라.

    "박정희 소장을 비껴간 헌병대 총탄에 감사한다"는 김 논설위원의 언급에 대응해서 "대통령 박정희를 비껴가지 않은 그의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감사한다"는 말을 나는 결코 하고 싶지 않다. 내 눈에는 김재규 역시 독재자 박정희의 부하일 뿐이다.

    그러나 경제학을 전공해서 쿠데타와 혁명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김진 논설위원에게 정치학자로서 이것 하나만은 정확하게 가르쳐주고자 한다. 1789년 프랑스 인민들이 궐기해서 부르봉 왕조를 붕괴시킨 것은 '혁명'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브뤼메르 18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무력을 앞세워 총재 정부를 붕괴시킨 것은 '쿠데타'였다. 마찬가지로 1960년 4월 한국 인민들이 궐기해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혁명'이었고, 그 결과 수립된 제2공화국을 박정희 소장을 우두머리로 한 군인들이 무력으로 전복시킨 것은 '쿠데타'였다.

    무식하면 입을 다물고 있으면 본전은 한다. 알면서도 글을 썼다면 언론인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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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유명해진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2015년도 서울 대학교 신입생 입학식
    축사 전문입니다

    기성세대인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큰 것 같습니다
    .......................................

    서울대 입학식 축사
    (소비자아동학부 김난도 교수)

    안녕하십니까,
    저는 생활과학대학 소비자아동학부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김난도입니다.
    평교수인 제가 이렇게 귀한 자리에서 축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기회를 주신 총장님과 선배 교수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1963년 3월 2일에 태어났습니다.
    3월 2일요. 그렇습니다.
    오늘이 제 생일입니다.

    어릴 때는 내 생일이 싫었습니다.
    학년이 새로 시작되는 날이라 제대로 생일잔치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늘이 제일 좋습니다.
    1년 365일 중에 아무 날이나 생일로 고를 수 있다고 한다면 이제는 주저하지 않고 오늘 3월 2일을 고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선생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일 아침에 전국의 학생들이 모여 일제히 새 학년을 시작한다는데, 선생에게 그보다 더 어울리는 생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사주팔자 같은 것은 믿지 않지만, 그래도 생일만큼은 선생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직업이 천직이라고 여길 수 있으니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을 가르치게 될 선생으로서 축하와 당부의 말씀을 함께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53번의 생일 중에서 제가 제일 행복했던 날은 1982년의 오늘이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해 입학식을 치르는 날이었습니다.

    그때는 저 아래 대운동장에서 입학식을 했는데 날씨가 아주 추웠습니다.
    바람은 눈물이 나도록 차가웠지만,
    가슴은 터질 것처럼 뜨거웠습니다.
    나보다 더 흥분하신 어머니의 표정을 보며 평생 처음 효도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잠시 후 입학식이 끝나거든 뒤에 앉아 계신 어머니, 아버지에게 꼭 진심을 담아 감사하다고 말씀드리십시오.
    앞으로 기회가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꼭 하십시오.

    사실 저희 동기들의 대학생활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나라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잠시 희망을 가졌던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가 군홧발로 처참하게 짓밟혔습니다.
    참담한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뜬 대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의 미래를 꿈꾸는 것은 사치 정도가 아니라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순전한 무사유의 범죄였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엄혹하고 처절한 시기를 저희는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대가 지금보다 더 행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회는 많았기 때문입니다.
    졸업을 하면 어디든 일자리를 골라서 갈 수 있었습니다.
    어떤 영역이든 조금만 진지하게 계속하면 나름 전문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 세대가 더 총명하거나 열심히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대의 행운이었습니다.
    1960년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가 되지 않던 대한민국이 지금 3만 달러에 육박하기까지,
    단군 이래 가장 높은 성장을 누리는 30년 동안 우리는 청춘을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젊은 세대가 힘들다고 합니다. 좋은 데 취직하는 것이 어렵고,
    제때 결혼하는 것이 어렵고,
    제대로 된 방 한 칸 마련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유사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졌다고 하는 이 세대가 말이지요.

    물론 이것은 시대적 변화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누릴 수 없게 됐습니다.
    성장의 시대에서 침체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경제와 인구의 구조가 변화하면서
    그 많았던 기회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좌절하게 하는 것은 단지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실업률이 올라간다는 점 때문만은 아닙니다.
    경기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었지만 전 국민이 금반지를 꺼내모으며 재기를 꿈꿨던 때도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기침체가 영구히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서,
    이 나라가 난국을 타개할 변화의 역량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절망이 정녕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얼마 전 인기 있었던 웹툰드라마 <미생>에 ‘사업놀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진짜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고 그저 열심히 하는 흉내만 내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드라마에서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은 나라의 분열을 걱정한다면서 실은 자기 재선을 위해 국민을 이념으로 지역으로 갈라놓고 갈등을 이용하는‘정파놀이’를,
    관료들은 공익을 도모한다면서 실은 자기 예산과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나라의 시스템을 비효율로 몰아넣는‘규제놀이’를,
    대기업은 국가경제에 이바지한다면서 단가 후려치기, 사람·기술 빼앗기 등 각종 불공정한 관행으로 시장을 황폐화시키는 ‘갑질놀이’를,
    일부 고용주들은 취업난을 악용해 ‘열정페이’ 다 뭐다 해서 청년 구직자의 노동을 약탈하는 ‘착취놀이’를,
    저를 비롯한 교수들은 이러한 현실적 문제를 수수방관하며 자기 연구 실적만 채우는‘논문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이 교착상태를 풀어낼 리더십은 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좋은 날에 답답한 얘기를 꺼내 미안합니다.
    저는 오늘의 축사를 준비하면서 새로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여러분에게 어떤 아름다운 축원을 해줘야 할까 많이 고민했습니다.
    긴 고민 끝에 저는 듣기 좋은 덕담보다는 여러분이 앞으로 맞닥뜨려야 할 엄혹한 도전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분발을 당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이 소중한 기회를 막연한 인사말로 채우기에는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따끔한 각성을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선생이 할 일이기도 하니까요.

    지금 여러분이 헤쳐나가야 할 두 가지 도전과제가 있습니다.
    나라 안의 도전과 나라 밖의도전입니다.
    먼저 나라 안의 사정을 살펴보면, 가장 걱정되는 것은 ‘세대이기주의’입니다.

    영화 <국제시장>에 이런 대사가 있었습니다.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게 참 다행이라고”요.

    하지만 지금의 기성세대가 나중에 오늘을 뒤돌아볼 때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현재의 경제·고용·복지 등 담론의 줄기를 보면 나중에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가 아니라 우리 자식이 겪게 해서 참 다행”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높은 자의 책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말은 어느 언론인의 표현을 빌리면
    ‘세니오르 오블리주(senior oblige)’,
    즉 나이 든 자의 책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젊은 자들은 나이든 자들과 경쟁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기성세대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원과 정보와 인맥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단지 경쟁의 상대가 아니라,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희망의 불씨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투자하고, 양보하고, 그들의 미숙함을 배려하지 않는 사회에 내일은 없습니다.
    청년들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나라 밖의 도전은 더욱 심상치 않습니다.
    작년 여름 저는 연구를 위해 일본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도쿄에 들를 때마다 혐한 시위대를 만났습니다.
    지하철에 붙어 있는 잡지광고며 기사들의 상당 부분이 한국을 폄훼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일본은 다시 유치에 성공한 올림픽 준비에 들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또 지난 겨울에는 중국에 다녀왔습니다.
    갈 때마다 놀랍도록 변하는 곳이지만, 어느새 우리보다 훌쩍 앞선 나라가 돼 있었습니다.
    흔히 중국을 짝퉁의 나라 정도로 낮춰 보는 경향이 있는데,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중국은 압도적 1위의 외환보유국이고, 이미 우주정거장, 항공모함, 비행기, 고속철도를 자체 기술로 만들어내는 나라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중국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고도성장을 계속해나갈 것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중국에서 가장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 또래 젊은 세대의 열정입니다.
    흔히‘쥬링허우’라고 부르는 중국의 90년대생들은 제2의 마윈, 제2의 레이쥔을 꿈꾸며 밤새워 도전의 열기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중국의 대학생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합니다.
    ‘개미굴’이라는 10평 남짓한 아파트에 십여 명의 학생이 함께 기거하면서 해만 뜨면 도서관으로 뛰어나가 하루종일 공부하다가 돌아옵니다.
    우리는 중국 인구의 1/27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중국에 뒤지지 않으려면 27배 정도 열심히 노력해야 할 텐데,
    지금은 중국이 27배 더 노력하는 형국입니다.

    우리를 침략해 식민지로 삼았던 나라에선 증오의 감정이 커지고 있고,
    우리와 바다를 맞대고 있는 나라가
    한순간에 세계 최강국으로 자라났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경험에서 배우고,
    현명한 자는 역사에서 배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역사적 전환점을 맞고 있습니다.
    결국 저는 여러분에게 희망을 겁니다.

    단군 이래 최고의 역량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우리 젊은 세대가 교착상태에 빠진 나라에 새로운 모멘텀을 부여할 세계적인 인재로 성장해주기를 간곡히 바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주십시오.
    제가 대학시절을 돌이켜 생각할 때 후회되는 일이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웠던 것은 역시 치열하게 공부하지 못한 것입니다.

    스펙이 아니라 지성의 성장을 위해,
    좋은 직업이 아니라 조국의 미래를 위해,
    혼신을 다해 공부하십시요.

    그러기 위해서 다시 공동체를 이야기할 때입니다.
    나 자신만의 이익이 아니라 여러분이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할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이타정신을,
    여러분은 이 교정에서 배워나가기 바랍니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선함’을 가슴에 품고 개인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을 때,
    인류와 나라와 학교와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성장이 서로 접점을 찾아 만개할 수 있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8848미터를 자랑하는 에베레스트 산입니다.
    여기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이 세계에서 가장높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제일 높겠습니까?

    답은, 히말라야 산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이유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히말라야 산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레스트 산이 만약 바다 한가운데 혼자 있었다면 높아봐야 한라산이나 후지산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 산은 세계의 지붕이라는 티베트 고원의 거봉들과 어깨를 맞대고 있습니다.
    그 준령에서 한 뼘만 더 높으면 바로 세계 최고의 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나라를, 우리 학교를 히말라야 산맥으로 함께 키워나갑시다.
    바다 위에서 혼자 높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 가야 할 사회적 약자들과 우리 공동체를 함께 생각하는,
    선하고 책임 있는 인재로 성장해야 합니다.

    당신이 여기 앉아 있기 위해 탈락시킨 누군가를 생각하십시오.
    당신은 승리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채무자입니다.
    선함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우리 공동체를 히말라야 산맥처럼 만들고 나서,
    자신이 한 뼘만 더 성장할 수 있다면,
    그때 당신은 바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학생들이여,
    선해지십시오, 성장하십시오.
    당신이 희망입니다.
    감사합니다.

    2015년 3월 2일
    김 난 도
  • profile
    "데이터 28만 건과 씨름... 원세훈 유죄에 감개무량"
    [인터뷰] 권혜진 <뉴스타파> 데이터저널리즘연구소장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지난 9일 항소심에서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원 전 원장을 비롯한 국정원은 2012년 대선 당시 온라인에 야당 후보를 비판하고 정부·여당을 찬양하는 글을 올리는 등 여론 조작에 가담했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데는 <뉴스타파>와 데이터저널리즘의 공이 크다.

    <뉴스타파>는 지난 2013년 3월 국정원 직원이 여론조작에 사용한 트위터 계정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후 실제 여론 조작 활동을 한 트위터 계정을 발견해 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이 사실임을 밝혀냈다. 그 필두에 권혜진 데이터저널리즘연구소장이 있었다. 특히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해 권혜진 소장은 "굉장히 의미 있고 분수령을 이루는 보도였다"고 자평했다.

    권 소장은 10일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2개월간 트위터 계정 간 관계와 각 계정의 소셜미디어 활동을 분석했다"고 말했다. 최기훈 기자등 여러 취재기자와 연구소 팀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을 밝히기 위해 28만 건이 넘는 데이터와 씨름했다. 권 소장은 "분석한 데이터의 90%는 버리고 10%만 쓴다는 생각으로 작업한다"고 전했다. 이처럼 데이터를 수집해 분석하고 그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찾아 보도하는 것이 데이터저널리즘이다.

    이 밖에도 <뉴스타파>는 '조세피난처 한국인 명단 공개', '원전 비리 고발' 등 데이터저널리즘을 활용해 진실을 알렸다. 권 소장은 "우리는 가급적 데이터를 공유·개방하려고 한다"라면서 "다른 언론사가 우리 데이터를 활용해 후속보도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권 소장은 "각 매체에도 (데이터저널리즘을 전문으로 하는) 팀이 만들어지길 바란다"면서 "<뉴스타파>가 전체 언론사의 데이터 인프라를 튼튼히 하는데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국정원 대선 개입 폭로는 데이터저널리즘에 굉장한 의미"

    -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어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경우 취재 현장이 데이터였다. 가려진 데이터 더미에서 진실을 발견할 수 없었더라면 놓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트위터 계정 간 관계와 소설미디어 활동 등을 분석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보도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현장을 취재하고, 가려진 데이터 더미에서 진실을 발견해내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데이터저널리즘 역사에서 굉장히 의미 있고 분수령을 이루는 보도가 아니었나 자평한다. (판결소식을 듣고) 감개무량했다."

    - 의혹을 사실로 밝혀낸 그 과정이 궁금하다.
    "두 달 정도 매달렸다. 트위터 상에서 (국정원 직원들이 대선 개입) 활동을 했다는 의혹은 있는데 구체적인 물증이 없었다. 그리고 이미 트위터 계정이 삭제된 상태였다. 데이터를 수집해 네트워크 분석을 해보면 뭔가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트위터 데이터를 저장하고 있는 곳을 알아봤는데 국내에선 얻기 힘들었다."

    - 정치적 상황 때문에 국내 업체들이 데이터 제공을 꺼려했나.
    "그런 면이 있다. (국내 업체들이) 우리에게 트위터 데이터를 제공하기엔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해외에서 구하기로 했다. 삭제된 계정의 데이터가 남아있는 사이트에서 크롤링(분산 저장되어 있는 데이터를 수집하여 검색 대상의 색인으로 포함하는 기술) 했다. 크롤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외부 개발자도 섭외했다. 그렇게 28만 건 이상의 트위터 데이터를 수집했다."

    - 결과물을 받아들였을 때 '드디어 잡아냈다'는 기분이었을 것 같다.
    "네 가지 기준을 갖고 (선거 개입 활동) 의혹이 있는 계정인지 판단했다. 첫째 국정원 여직원 사건 당시에 일제히 활동 정지 또는 삭제된 계정, 둘째 대선 후보가 확정되던 시점에 우후죽순으로 생긴 계정, 셋째 비슷한 소셜 미디어 활동 패턴을 보이는 계정, 넷째 정부를 찬양하거나 야당을 비판하는 내용을 게시한 계정. 이 기준들로 수집한 계정과 그 계정이 올린 맨션들, 각 계정들이 리트윗한 내역들을 데이터 마이닝(방대한 양의 데이터에서 유의미한 정보를 추출)했다.

    분석 결과 최소 10개 이상의 계정 그룹이 조직적으로 활동한 정황이 보여 정부에 이에 대해 해명해 달라고 보도했다. 데이터 연구를 하는 학자라면 (의혹이) 확실하다고 장담할 수 없어 고민했겠지만 언론은 의혹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데이터를 공개하면 (언론사들이) 그것을 더 참고해서 보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한 것은 어찌 보면 상당히 단순한 분석이었다."

    "국내 언론 데이터 구축 없어... 기자들이 맨땅에 헤딩할 수밖에"

    - 데이터저널리즘 작업은 기본 지식이 없으면 힘들지 않나.
    "그래서 한 언론사에 두 명 정도는 그 일(데이터 저널리즘)만 전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 전문 인력을 꾸릴 때는 당장 결과물이 나오지 않더라도 그 일만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어느 기자든지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게 언론사 내부에 데이터베이스를 갖춰 놓을 필요가 있다. 이완구 총리 후보자 검증 관련해서 그 중요성을 느꼈다. 2002년 '차떼기 사건' 당시 이 후보자가 5천만 원을 받았는데, 비슷한 시기에 타워 팰리스를 구입했다. 데이터팀 최윤원 기자는 '자금을 구입에 쓴 것은 아닐까'를 검증하기 위해 과거 재산 공개 데이터를 분석했다.

    1993년 이후의 고위 공직자들 재산은 공개돼 있지만, 상당수가 이미지 파일이어서 검색이 어렵다. 미리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해놨기 때문에 빠른 데이터 분석이 가능했다. 그래서 이제는 데이터를 쌓는 작업을 미리 해놓는다. 하지만 이런 작업이 돼 있는 언론사가 국내에 별로 없다. 해외처럼 공동으로 데이터저널리즘을 지원할 수 있는 단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개별 기자들이 맨땅에 헤딩하듯이 데이터 분석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 어떤 사람이 데이터저널리즘에 적합한가.
    "오랫동안 언론사에서 지낸 경험에 비춰봤을 때 취재를 잘 하는 사람이 데이터저널리즘도 잘 한다. 현장 취재는 잘 못하고 데이터저널리즘만 잘 하는 사람을 전담 배치하는 건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다."

    - 가장 중요한 건 기자의 감인가.
    "꼼꼼한 건 필요하다. 데이터를 다룰 때 정확하고 꼼꼼해야 한다. 우리팀 김강민 기자가 트위터 분석을 맡아 고생했다. 그만 확인해도 된다고 해도 그는 혹시 실수가 있을까 싶어 끊임없이 확인하고 점검했다. 데이터 분석 시간을 100이라고 하면 50은 이런 오류를 검증하는 시간이다."

    - 그렇다면 데이터저널리즘 전문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데이터저널리즘을 하기 위해선 데이터가 있어야 하지 않나. 우리나라에선 분석에 필요한 데이터를 얻기 힘들다. 해외에 있는 데이터셋(특정 주제별 데이터들의 집합)을 가져와 시각화하고 분석해야 한다. 데이터를 구하기 어려울 때는 여러 곳에서 취재하고 그 정보를 입력해 만든다. 4대강 사업과 관련해서 데이터를 수집하는데 사업을 수주한 업체들의 자료 전부를 복사하고 입력한 적이 있다. 그 중 정말 일부가 보도된다. (내게 필요한) 데이터의 검색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인비져블 소스(드러나지 않은 데이터), 정보공개 청구 등을 적극 이용하고 취재원을 파악해서 데이터를 구하는 것이 작업의 반이다."

    "탐사보도가 저널리즘의 한 축을 담당할 것"

    - <뉴스타파>가 '조세피난처 한국인 명단 공개'보도로 많이 알려졌는데.
    "'조세피난처 한국인 명단 공개'야말로 진정한 데이터 프로젝트였다. 전체 데이터만 200기가바이트가 넘었고 파일 수가 200만 개에 달했다. 전재국(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씨 이름이 발견된 곳은 여권을 복사한 사진 파일이었다. 사진 파일을 검색하려면 문자인식이 돼야 한다. 문자 인식과 데이터베이스 만드는 작업을 전 세계 탐사보도 매체의 데이터 저널리스트들이 만들었다.

    20년 넘게 (데이터저널리즘을) 연구한 입장에서 이 같은 멋진 데이터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어 감사했다. 비영리탐사보도 쪽에 있지 않았으면 어떻게 이런 데이터를 만져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데이터 간의 상관관계를 밝혀내지 못해 보도하지 못한 적도 있나.
    "많다. 그래서 언론사에 데이터저널리즘 전문 인력을 갖추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데이터를 분석하면 전체의 90%는 버리고 10%만 쓴다는 생각으로 작업한다. 처음 가설과 (분석 결과가) 다른 경우가 많다. 그 정도의 각오는 필요하다."

    - 사전적 정의 외에 개인적으로 데이터저널리즘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면.
    "데이터에 중점을 두느냐, 저널리즘에 중점을 두느냐가 중요하다. <가디언>의 데이터 에디터를 하는 사이먼 로저스는 데이터저널리즘을 저널리즘이라고 이야기한다. 데이터저널리스트는 저널리스트로 데이터라는 현장에서 취재활동을 하고 분석을 통해 보도한다. 즉 중점을 저널리즘에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 특정 기업이나 정치세력을 대변하는 언론이 데이터저널리즘을 활용할 때 사실 왜곡의 우려가 있지 않나.
    "로 데이터(가공되지 않은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팩트 자체를 틀리게 쓰지 않는 이상 왜곡할 가능성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또한 데이터셋이 더 커지면 사실이 왜곡될 문제 소지가 적다."

    - <동아일보>에서 <뉴스타파>로 옮겼는데 지면 위주 뉴스에 한계를 느꼈나.
    "그런 건 아니다. 뉴스 산업에서 미디어 비즈니스와 저널리즘이 양립할 수 있는 시점은 지났다. 직장을 옮기기로 결정한 때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시점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언론사에 온 이유가 미디어 비즈니스를 하고 싶었기 때문인지 저널리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인지 고민했다. 고민의 답을 내리기 어려웠지만 미디어 비즈니스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또 <프로퍼블리카>를 보고 결심했다. <프로퍼블리카>는 해외 주요 언론사에 있던 시니어 기자들이 모여서 탐사보도매체를 만든 형태다. 특종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만 <프로퍼블리카>라는 존재가 언론 생태계의 선순환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비영리탐사보도매체가 저널리즘을 담당하는 한 축이라고 판단했다. 그 토대를 닦고 경험을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옮기기로 했다."

    - 앞으로의 데이터저널리즘과 <뉴스타파>의 역할은.
    "<뉴스타파>가 데이터저널리즘을 앞서가긴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훨씬 더 데이터저널리즘을 잘 할 수 있는 곳들이 생겨날 것이고, 각 매체에서도 그런 팀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오리지널 데이터(원본 데이터)를 생산하고 싶다. <뉴스타파>의 이런 노력이 전체 언론 생태계의 데이터 인프라를 튼튼히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81269&CMPT_CD=SEARCH
    www.ohmynews.com  
    진행 = 이주연 기자정리 = <오마이뉴스> 대학생 인턴 21기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지난 9일 항소심에서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원 전 원장을 비롯한 국정원은 2012년 대선 당시 온라인에 야당 후보를 비판하고 정부·여당을 찬양하는 글을 올리는 등 여론 조작에 가담했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데는 <뉴스타파>와 데이터저널리즘의 공이 크다. <뉴스타파>는 지난 2013년 3월 국정원 직원이 여론조작에 사용한 트위터 계정이 있다고 보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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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미안해"..김상환 부장판사 '친형' 연락피한 이유 알고보니
    친형 국정원 고위간부 출신..오해 피하려 사건배당 후 접촉 자제

    [뉴스토마토 조승희기자]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대선개입 혐의를 유죄로 판단하고 징역 3년 선고와 함께 법정 구속한 김상환(49·사법연수원 20기·사진) 부장판사의 친형이 국정원 고위간부 출신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김 부장판사의 친형은 국정원 고위 간부 출신으로 지난해 초까지 현직에서 활동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지난해 9월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을 배당받은 이후 외부와의 접촉을 자제해왔고, 친형의 전화 연락도 받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다.
    김 부장판사가 지난 9일 판결 선고에 앞서 "한 사람의 죄와 벌을 다룬 형사재판은 끝없은 숙고, 고민을 요구한다. 재판부는 알 수 없는 고독을 느끼기도 한다"며 소회를 밝힌 것도 이같은 배경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그는 또 "재판부는 헌법과 법률이 요구하는 바와 증거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성을 다해 탐구하려고 진지한 노력을 다했다"면서 "지금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재판부가 한시도 긴장을 놓지 않고 성의껏 고민해 내린 결론을 지금부터 담담하게 얘기하려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선고를 내리기 몇 주 전 김 부장판사는 이런 사정을 아는 법조계 지인에게 고뇌를 털어놓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판결문에는 우리나라 최고 정보기관인 국정원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과 그에 따른 긴 충고도 적혔다.
    그는 원 전 원장과 함께 기소된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이 재판 중에 했던 말을 언급하며 "피고인이 한 말에서 받은 강한 울림을 우리 재판부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군은 전쟁을 준비하는 기관이지만 국정원은 지금 현재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취지의 말이었다"고 전했다.
    이어 "문제된 특정 사이버 활동만이 관련 법률에 반함을 명백하게 지적함으로써 국정원의 헌신과 노력이 본연의 업무수행을 위해서만 집중되도록 해 장차 국민의 더욱 든든한 신뢰를 얻길 바라는 것에서 비롯됐음을 밝힌다"고 판결의 취지를 강조했다.
    국정원이 자기 성찰을 위해 2007년 발간한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보고서를 인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보고서에는 '정치에 대한 국가정보기관의 개입은 국가권력과 정책에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는 과정을 왜곡함으로써 민주주의 근본을 무력화하는 것', '중립을 지켜야 할 정보기관의 불법적인 선거개입은 자신의 존립 근거를 스스로 훼손하고 민주주의 사회의 최고 주권자인 국민 위에 군림하는 행위'라는 내용 등이 담겼다.
    김 부장판사는 또 논어 위정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해 공격한다면 이것은 손해가 될 뿐이라고 했다"며 "나와 다른 쪽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배척한다면 결국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攻乎異端 斯害也已·공호이단 사해야이)"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출처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534881
    www.news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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