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조차 없는 대방동 '여성 인권유린' 현장

[동작 민주올레]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③



지난 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 기자말

「동작 민주올레」 – <대방길> 3회

▶ 코스안내
: ①서울영화초 - ②영등포고 - ③유일한기념관 - ④실미도 사건의 현장 - ⑤'캠프 그레이' 미군기지 터(미군 '502 군사정보단') - ⑥서울시립부녀보호소 터 - ⑦공군기념탑 - ⑧숭의여중고 - ⑨성남고 - ⑩서울공고
  
자랑스러움과 아픔의 역사가 한 자리에 서려 있는 유한양행 앞을 떠나 이제 대방역 건너편으로 가야 한다. 노량진에서 영등포로 향하는 대로를 따라 가다가 횡단보도를 하나 건넌 후 대방역까지 마저 가면 우리의 새로운 목적지 미군기지 '캠프 그레이' 터가 기다리고 있다.

⑤ '캠프 그레이' 미군기지터 <대방동 수용소>
 

'스페이스 살림' 조감도 미군기지 '캠프 그레이'가 있던 자리(대방역 맞은편)는 서울시의 '스페이스 살림'이 들어서기 위한 공사가 한 참 진행 중이다.
▲ "스페이스 살림" 조감도 미군기지 "캠프 그레이"가 있던 자리(대방역 맞은편)는 서울시의 "스페이스 살림"이 들어서기 위한 공사가 한 참 진행 중이다.
ⓒ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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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도착해보면 미군기지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한때 동작구민들의 텃밭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이곳은 '여성‧가족의 메카'를 지향하는 '스페이스 살림'이 들어서기 위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바로 그 공사 현장이 2007년까지 미군기지 '캠프 그레이'가 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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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이곳에 처음 들어선 '캠프 그레이'는 표면상 물류기지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미군 '502 군사정보단'의 비밀스러운 첩보활동 공간이었다. '502 군사정보단'에서 일한 마이클 리가 쓴 < CIA요원 마이클 리 >(조갑제닷컴, 2015)에 따르면, 해당 부대는 "A(알파), B(브라보), C(찰리), 3개 중대로 편성"돼 있었는데, 마이클 리가 속해 있던 "알파중대는 한미 합동으로 북한 귀순병, 귀순민간인, 자수간첩, 채포간첩, 송환어부들을 상대로 심문 작업을 했"고, "브라보중대는 미군 단독으로 방첩활동을 했으며, 찰리 중대는 미군 단독으로 대북공작 활동을 주 임무로 했"다고 한다.

당시 미군은 <한미양해각서 미8군 G2 정보훈령 I-65>에 따라 대공 수사, 대공 정보활동을 주도적으로 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활동에 따른 비용도 미국 정부가 지출했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미군이 주도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돼 있었는데, 이 같은 상황은 1974년 미국이 한국 정부에 권한을 이양할 때까지 계속됐던 것으로 보인다.

마이클 리의 증언에 따르면 '502 군사정보단'은 김일성 밀사 황태성 사건, 실미도 사건 등 크고 작은 대공 사건에 개입했다고 한다. 황태성은 '박정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로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친구이기도 했다. 5.16 쿠데타 직후 김일성의 밀사로 내려와 흑석동에 거처를 만들고 박정희와 접촉을 시도하던 중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그런데 미국에 즉시 알리지 않아 한미간에 갈등요인으로 작용하는데, 중앙정보부가 신변 인도를 거부하면서 결국 시내 반도호텔로 출장 가서 조사했다고 한다. '실미도 사건'은 실미도 부대원들이 마침 대방동까지 진출한 관계로 이를 직접 파악한 마이클 리가 곧바로 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월남자와 귀순자 그리고 간첩의 숙소 <대방동 수용소>

한편,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누르기 위해 기획된 김만철씨 일가 귀순사건(1987)의 김만철 가족과 대한항공 폭파사건(1987)의 김현희도 <대방동 수용소>를 거쳐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모아 진행된 '2.7 범국민추도회' 다음날인 1987년 2월 8일 늦은 밤에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김만철씨 일가를 태운 차량이 취재 기자들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도착한 곳도, 다음날 시내 관광을 위해 출발한 곳도 바로 이곳 <대방동 수용소>였다.
  

김만철씨 일가 '귀순'을 알리는 언론보도(동아일보, 1987. 2. 9)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고 싶다던 김만철씨 일가 11명은 당국의 설득이 주효해 1987년 2월 8일 김포공항으로 입국하여 기자회견을 한 후 <대방동 수용소>로 이동하였다. 이들의 '귀순' 소식은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국민적 항의와 관련된 기사를 덮어버렸다. 신문 왼편 구석에 몰린 "추도회관련 40명선 구속방침"이라는 기사가 보인다.
▲ 김만철씨 일가 "귀순"을 알리는 언론보도(동아일보, 1987. 2. 9)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고 싶다던 김만철씨 일가 11명은 당국의 설득이 주효해 1987년 2월 8일 김포공항으로 입국하여 기자회견을 한 후 <대방동 수용소>로 이동하였다. 이들의 "귀순" 소식은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국민적 항의와 관련된 기사를 덮어버렸다. 신문 왼편 구석에 몰린 "추도회관련 40명선 구속방침"이라는 기사가 보인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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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귀순한 유기향씨 일가족 8명도 대방동에 있던 '월남자 및 귀순자 수용소'에 수용됐다는 증언(<귀순가족 인정받고 싶어오>, 동아일보, 1994. 5. 9)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방동 수용소> 역시 (언제까지인지 알 수 없으나) 미군 '502 군사정보단'이 개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적 국제질서가 새롭게 형성되는 국면에서 자주적인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힘 있게 밀고 나갈 주체역량 형성에 실패한 우리는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아픈 현대사를 감내해야 했다. 그 부산물의 하나가 주한미군과 미군기지라고 할 수 있는데, '캠프 그레이'는 단순한 미군기지를 넘어 미군의 비밀 첩보활동 공간이었던 셈이다.

'캠프 그레이'는 2002년 11월 '살인미군 한국법정 처벌을 요구하는 대한민국 대학생들' 30여 명의 화염병(40여 개) 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해 6월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효순이 미선이 사건'으로 기소된 두 미군 병사(운전병과 관제병)가 미군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데 따른 항의의 뜻이었다.

⑥ 여성인권의 아픈 역사 '서울시립 부녀보호소' 터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이 운영하는 서울여성플라자는 "여성·가족의 소통과 공유 공간"으로 2002년에 개관했다. 2층에는 성평등도서관 여기(여성이 기록하고 여성을 기억하는 공간)도 있다.
  

서울여성플라자(대방동) '서울시립 부녀보호소'가 있던 자리에는 서울여성플라자가 들어서 있다.
▲ 서울여성플라자(대방동) "서울시립 부녀보호소"가 있던 자리에는 서울여성플라자가 들어서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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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곳은 여성플라자가 들어서기 전 오갈 데 없는 부랑 여성, 성매매 여성을 일시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시가 설치·운영하는 '서울시립 부녀보호소'가 있던 자리였다.

5.16군사쿠데타 직후인 1961년 '사회정화' 차원에서 중구 주자동 남산자락에 처음 들어선 '서울시립 부녀보호소'가 대방동으로 이사 온 것은 군사정권의 '교외이전 방침'에 따른 1963년의 일이었다. 1998년에 강남구 수서동으로 이전하면서 대방동 시대를 마감한다.

'서울시립 부녀보호소'는 군사정권 시절 여성 인권침해의 대표적 공간으로 악명을 떨친다. 1968년에는 속칭 '종삼'으로 불리던 종로3가 일대의 홍등가를 철거하는 일명 '나비작전'이 벌어지면서 72명의 성매매 여성들이 대방동 시립부녀보호소에 수용된 것이 대표적이다.

거처가 없다는 이유로 무조건 강제 수용하는 것 자체부터 인권침해였다. 더군다나 한 번 수용되면 "6개월 동안 면회도 되지 않고 일체 외출도 못한 채 기술교육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교도소에 가는 것보다 더 싫어"했다(<교도소보다 싫어>, 경향신문, 1977. 8. 13).

1970년 전후에는 정원 300명의 두 배가 넘는 600여 명이 수용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대방동 시립부녀보호소 입소생들이 시설을 탈출하려고 집단으로 소동을 일으켰다'는 언론 기사가 거의 매년 등장한다.

가령, 시립부녀보호소가 대방동으로 이전해 온 1963년 11월에 "152명의 입소생 중 131명이 밤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틈을 타서 건물 벽을 뚫고 4미터 높이 철조망에 담요를 덮은 뒤 넘어가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1970년에도 235명이 집단탈출을 시도하는데, 주동자 9명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는 언론 보도도 보인다.

영화 <서산 개척단>과 '서울시립 부녀보호소'

대방동 '서울시립 부녀보호소'는 최근 상영된 영화 <서산 개척단>으로 다시 한 번 관심의 대상이 된다. '서산 개척단'(대한청소년개척단) 역시 쿠데타 세력이 '사회정화' 차원에서 전국의 청년들을 강제 동원하여 충남 서산에서 간척사업을 벌이던 기관이다.

그런데 수용된 젊은이들의 탈출 시도가 잇따르자 '결혼을 통한 안착'을 추진하면서 대방동 시립 부녀보호소의 젊은 여성들이 그 상대로 강제 동원된다. 물론 당시 언론은 "새 삶의 터전"을 만드는 젊은이들의 미담으로 기사화한다(<큰 절로 고독과 결별 – 서산 개척단의 60쌍 합동결혼식>, 동아일보, 1963. 5. 1).

하지만 이들 젊은 여성들은 서산에 도착하자마자 운동장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 옆에 설 것을 요구받아 짝을 이룬 후 얼마 후 합동결혼식의 신부가 됐다고 한다. 이것이 미담이 될 수 있는 여지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었다.
  

 시민회관에서 치러진 합동결혼식<2차>(경향신문, 1964. 11. 24)  '서울 시립부녀보호소' 수용 여성들이 '서산개척단' 젊은이들과 한 강제 합동결혼식을 당시 언론에서는 '갱생'으로 미화해서 보도했다. 시립 부녀보호소 출신 여성 225명이 신부로 참석한 이날의 합동결혼식은 당시 서울시장 윤치영의 주례로 치러졌다.
▲ 시민회관에서 치러진 합동결혼식<2차>(경향신문, 1964. 11. 24)  "서울 시립부녀보호소" 수용 여성들이 "서산개척단" 젊은이들과 한 강제 합동결혼식을 당시 언론에서는 "갱생"으로 미화해서 보도했다. 시립 부녀보호소 출신 여성 225명이 신부로 참석한 이날의 합동결혼식은 당시 서울시장 윤치영의 주례로 치러졌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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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여성 인권 유린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서울여성플라자에 이곳이 '서울시립 부녀보호소'가 있던 곳임을 알리는 표석하나 설치돼 있지 않은 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4409




독립운동가 유일한과 실미도 사건, 대방동에서 만나다

[동작 민주올레]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②


지난 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기자말

「동작 민주올레」 - <대방길>
▶ 코스안내 : ①서울영화초 - ②영등포고 - ③유일한기념관 - ④실미도 사건의 현장 - ⑤캠프 그레이 미군기지 터(미군 502군사정보단) - ⑥서울시립부녀보호소 터 - ⑦공군기념탑 - ⑧숭의여중고 - ⑨성남고 - ⑩서울공고

③ 참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 유일한 선생과 '유일한기념관'

영등포고등학교 후문으로 나와 남북으로 난 언덕길을 따라 북쪽으로 내려가면 유한양행 빌딩이 금방 나타난다.

유한양행 빌딩 1층으로 들어가면 유일한기념관이 있다. 유한양행의 창업자로 참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의 삶을 산 유일한 박사(1895~1971)를 기리는 공간이다. 평생 소박한 삶을 살았던 유일한의 정신을 반영하여 기념관도 소박하게 만들어져 있다.
  

유일한기념관 대방동 유한양행 빌딩 1층에는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 선생을 기리는 유일한기념관이 있다.
▲ 유일한기념관 대방동 유한양행 빌딩 1층에는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 선생을 기리는 유일한기념관이 있다.
ⓒ 양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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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양행의 설립자(1926)인 유일한은 1991년 중앙대에서 주는 '참기업인상'의 1회 수상자로 선정되는 등 참기업인의 표상으로 통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천한 인물이자 1969년 기업의 제일선에서 은퇴할 때는 혈연관계가 없는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넘김으로써 전문경영인 시대의 서막을 연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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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4대 경영세습이 일반화돼 있는 한국의 기업문화에서 보기 드문 인물이다. 기념관에는 유일한의 이러한 기업가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어록'도 전시돼 있다.

유일한은 독립운동가의 삶을 산 인물이기도 하다. 1904년 10살의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 유일한은 1909년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세운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한 후 최연소로 졸업했다. 미시간대에 재학 중이던 1919년에는 3·1혁명이 일어나자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의 작성은 물론 대회장에서 직접 낭독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유일한은 1941년 4월 해외 독립운동단체들이 공동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해외한족대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는데, 대회 결과 창설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집행부 위원에 선임돼 독립운동자금 조성에도 크게 기여한다.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으로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미 육군전략처(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1945년에는 50이 넘은 나이임에도 OSS의 후방교란 작전인 냅코작전(NAPKO Project)에 1조 조장으로 한반도에 파견되기 위한 특수군사훈련까지 받지만, 일본의 패망으로 실행에는 이르지 못한다. 유일한기념관에는 선생의 이러한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5년에 추서된 건국훈장 독립장이 전시돼 있다. 
  

고 유일한 선생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독립장 유일한 선생은 참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 고 유일한 선생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독립장 유일한 선생은 참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 양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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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은 교육가이기도 했다.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부천 소사공장 내)를 시작으로, 1957년에는 고려공과학원(대방동)을 설립·운영하는데, 이 학교는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로 발전한다.

이때 유일한은 개인 소유주식을 각종 장학기금으로 출연하는 등의 방식으로 자본의 사회 환원에도 힘쓴다. 유일한기념관은 교육가로서 선생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원 유한양행 건물 '정초' 1926년에 설립된 유한양행은 종로2가와 신문로 시대를 거쳐 1961년에 대방동으로 이전하였다. 이전 당시에는 현 유한양행빌딩 서쪽의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에 있었다.
▲ 원 유한양행 건물 "정초" 1926년에 설립된 유한양행은 종로2가와 신문로 시대를 거쳐 1961년에 대방동으로 이전하였다. 이전 당시에는 현 유한양행빌딩 서쪽의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에 있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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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실미도 사건'의 현장 유한양행 앞

유한양행빌딩 앞 인도에는 이곳이 <실미도 사건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동판이 설치되어 있다. 실미도 사건은 우리나라 최초로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실미도>(2003)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미도 사건(1971. 8. 23)의 마지막 격전지가 대방동 유한양행 앞이었다는 사실은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실미도부대(684부대)는 1968년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침투한 '1·21 사건'이 발단이 돼 그해 4월 실미도에서 창설된 특수부대였다. 형식적으로는 공군 소속이었지만, 사실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가 만들고 지원한 부대였다.

북한의 124부대원 31명이 청와대 500m 지점까지 침투한 '1·21 사건'은 28명이 사살되고 1명이 생포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2명은 북으로 탈주). 하지만 우리 측에서도 30명의 사망자와 5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생포된 김신조가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라고 말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한 실미도부대는 그래서 북한의 124부대와 똑같이 31명으로 구성되었다.

대방동에서 멈춘 실미도부대
  

영화 <실미도>의 포스터 1971년 8월 23일 발생한 실미도사건은 영화화한 영화 <실미도>는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 영화 <실미도>의 포스터 1971년 8월 23일 발생한 실미도사건은 영화화한 영화 <실미도>는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 시네마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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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듬해 미국의 베트남전 군사개입 회피 구상 등이 담긴 닉슨독트린이 발표되고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가 시작되면서 실미도부대에 위기가 닥쳐온다. 졸지에 박정희 군사정권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것이다.

이 와중에 부대원들에게 지급돼야 할 부식비마저 중간에 누군가 떼어먹는 일까지 발생하고, '국가기밀을 염려하여 처단될 것'이라는 소문마저 돈다.

결국 부대원 24명(31명 중 7명은 여러 사건·사고로 이미 사망한 상황)은 기간병 14명을 사살하고 폭동을 일으킨다. 이들은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따지자!"라면서 인천을 거쳐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하다 대방동로타리를 지나면서 군경과 마지막 격전을 치른다.

이때 운전병 김종철이 복부 관통상을 당하면서 유한양행 앞 가로수를 들이받는데, 이때 수류탄이 터지면서 6명을 제외한 전원이 사망한다. 살아남은 2명도 병원에서 곧 사망하고, 4명은 군사재판을 통해 총살형에 처해진다.
  

'실미도사건 현장' 동판 서울시는 인권의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상징적인 장소에 이를 알리는 동판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실미도사건 현장'을 알리는 동판은 당시의 유한양행 건물(현 유한양행 건물 서편 2층짜리 건물) 앞이 아니라, 현 유한양행 빌딩 앞 인도에 설치되어 있다.
▲ "실미도사건 현장" 동판 서울시는 인권의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상징적인 장소에 이를 알리는 동판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실미도사건 현장"을 알리는 동판은 당시의 유한양행 건물(현 유한양행 건물 서편 2층짜리 건물) 앞이 아니라, 현 유한양행 빌딩 앞 인도에 설치되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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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분단의 희생양 실미도부대원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실미도 사건'이 터지자 처음에는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라고 거짓 발표한다. 버스승객의 증언을 통해 곧 북한의 무장공비가 아니라 한국군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번에는 '군 특수범의 난동'이라고 또다시 거짓 발표한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김일성 제거를 목적으로 한 실미도부대의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미군이 주도한 켈로(kelo)부대로 시작된 북파공작원의 역사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기 전까지 무려 1만1000명을 넘어섰고, 이 중 7726명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남이나 북이나 분단 상황에서 정권안보를 위해 애꿎은 시민들이 이렇게 희생되고 있었던 것이다.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4339





지난 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기자말

「동작 민주올레」 – <대방길>
▶ 코스안내 : ①서울영화초 - ②영등포고 - ③유일한기념관 - ④실미도 사건의 현장 - ⑤캠프 그레이 미군기지 터(미군 502군사정보단) - ⑥서울시립부녀보호소 터 - ⑦공군기념탑 - ⑧숭의여중고 - ⑨성남고 - ⑩서울공고
 

서울의 동작구에 속해 있는 대방동은 원래 번댕이라 불리던 마을이었다. 현 대방초등학교 자리(행정구역상 지금은 영등포구 신길동)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 둘레에 마을이 형성되어 번댕이라고 불렀고 한자로는 '울타리 번'자와 '못 당'자를 써서 樊塘里(번당리)라고 했다. 이어 조선 후기에 들어와 번대방리(番大坊里)로 불리다 경기도 시흥군에 속해 있던 이 지역이 1936년에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번대방정(町)으로 바뀌었고, 해방 후 대방동이 되었다.

①「혼혈아 학교」로 출발한 서울영화초, '다문화 시대'를 생각하다
 

영화초등학교 입구 영화초등학교는 1962년 개교 당시 국내 유일의 「혼혈아 학교」였다.
▲ 영화초등학교 입구 영화초등학교는 1962년 개교 당시 국내 유일의 「혼혈아 학교」였다.
ⓒ 양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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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길 탐방은 서울영화초등학교에서 시작한다. 영화초가 있는 동네는 예전에는 높은절이(高寺里)라 불렀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재편 당시 번대방리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1962년에 설립된 영화초는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영등포중학교 교실을 빌려 개교한 영화초는 출범 당시 전국 유일의 「혼혈아 학교」로 일종의 특수학교였다. 영화초의 뿌리는 1958년 미군의 원조로 이태원에 세워진 「유엔 성자학원」이다. 「유엔 성자학원」이 경영난에 봉착하자 서울시가 이를 인수하여 대방동에 정식으로 세운 학교가 바로 영화초였다. 6·25한국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하면서 참전한 외국군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교육할 기관의 필요 때문에 탄생한 학교였던 것이다. 

그러나 63명의 어린이로 시작한 영화초는 출범부터 '혼혈아'들을 격리 교육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64년 9월부터 일반학교로 전환하여 대방동, 노량진동 학생들이 대거 편입해 들어오게 되면서 특수학교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배움의 이색지대"(동아일보, 1962. 11. 3) 영화초등학교는 개교 당시부터 '혼혈아 학교'라는 특성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 "배움의 이색지대"(동아일보, 1962. 11. 3) 영화초등학교는 개교 당시부터 "혼혈아 학교"라는 특성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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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학교가 출범할 당시 동아일보는 「배움의 이색지대」(1962. 11. 3)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지나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외부사람들의 호기심과 「이상한 눈초리」를 가장 싫어한다. 비록 선의의 손길일망정 외부와 접촉을 꺼리는 반면 자기들끼리의 친화와 단결은 대단하다"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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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권 외의 혼혈아」(1963. 3. 20)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우리들을 잘 보살펴주든지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무관심해 달라. 제발 놀리지는 말아 달라. 순진하게 자라고 싶다』는 열두 살짜리 혼혈아의 호소(?)는 이들의 공통된 심리인 것 같다"고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우리 사회가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을지, 해당 어린이들이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런 영화초의 역사는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되돌아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초 개교 당시 전국의 '혼혈아'는 5천여 명(보사부 등록 기준 1,500여 명)이었지만, 대부분 초등교육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대개 외국에 입양되는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혼혈아 학교」였던 영화초 앞에서 1960년대 당시 우리에게 너무 부족했고 지금도 여전히 부족한 소수자에 대한 개방적이고도 포용적인 자세,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열린 자세의 중요성을 새삼 곱씹어 보게 된다.

② 영등포고 학생들, 민주화운동에 나서다
  

영등포고등학교 입구 1959년 개교한 영등포고등학교는 1964년 굴욕적 한일회담반대운동에서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섰다.
▲ 영등포고등학교 입구 1959년 개교한 영등포고등학교는 1964년 굴욕적 한일회담반대운동에서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섰다.
ⓒ 양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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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초 바로 옆에는 영등포중고등학교가 있다. 동작구에 영등포중고가 있는 이유는 이곳에 1973년까지는 영등포구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영등포고 학생들은 5·16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군사정권이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추진하자 한일회담반대운동에 적극 나선다. 1959년 학교가 생긴 지 불과 5년만에 일어난 일이다.

한일회담반대운동(6·3항쟁)은 1964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조속한 한일협정체결방침 천명과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시작됐다. 1965년 굴욕적 한일협정이 체결되고 여당 단독으로 국회비준이 이루어지는 시기까지 이에 맞서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다.

영등포고생들은 한일회담반대운동 초반부터 전면에 나선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생 등 5천여 명이 「사수하자 평화선」, 「일본제국주의를 말살하자」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를 벌이면서 한일회담반대운동이 본격화된다. 4일간 계속된 시위의 마지막 날인 3월 27일에 영등포고생 900여 명이 중앙청 앞 시위에 합류한 사실이 당시 언론에 보도된다.   
   

영등포고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 관련 신문 기사(경향신문, 1964. 3. 27) 1964년 3월 27일 900여 명의 영등포고 학생들은 중앙청 앞까지 진출하여 박정희 군사정권의 굴욕적 한일회담 추진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 영등포고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 관련 신문 기사(경향신문, 1964. 3. 27) 1964년 3월 27일 900여 명의 영등포고 학생들은 중앙청 앞까지 진출하여 박정희 군사정권의 굴욕적 한일회담 추진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 경향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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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고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은 해를 넘긴 1965년에도 계속된다. 문교당국은 영등포고에 대해 3일간(6.22~24)의 휴교 조치도 모자라 학생들의 데모를 막기 위해 여름방학을 20일이나 앞당겨 7월 5일 조기방학을 실시한다. 이에 반발한 영등포고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 한일협정비준반대의 구호를 외치면서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중앙청 쪽으로 행진하다가 경기도청 앞에서 경찰에 의해 동교 3년 이용문 군 등 20여명 전원이 종로서에 연행"되기도 한다. 

영등포생들의 의로운 투쟁의 전통은 1989년 '참교육'을 내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과 이에 대한 징계 파동이 일어났을 때 다시 한 번 힘을 발휘한다. 600여 명의 학생들이 교내 운동장에 모여 농성을 벌이면서 김수환 전교조 분회장에 대한 징계 철회 등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3일 후에는 교사 15명과 영등포고 졸업 서울대생 21명의 농성으로 이어지고, 교사들의 출근 투쟁이 계속되자 결국 교장이 사표를 내기에 이른다.

한신대 학생운동 출신으로 노동운동을 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노동운동가 박태순은 영등포고 24회 졸업생이다. 박태순은 1992년 퇴근길에서 행방불명된다. 10년 만인 2001년에야 새로 만들어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 시흥역에서 의문의 철도사고로 사망하자 신원불명으로 처리되어 용미리 무연고자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경찰이나 보안사 등 당시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다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여전히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면 박태순 의문사 사건에 대해서도 재조사가 이루어질 전망이다.
 

노동운동가 박태순의 묘(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박태순은 영등포고등학교 출신의 노동운동가로 1992년 실종되는데, 20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으로 파주 용미리에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 노동운동가 박태순의 묘(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박태순은 영등포고등학교 출신의 노동운동가로 1992년 실종되는데, 20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으로 파주 용미리에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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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영등포고 교정에 학생들의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조형물조차 없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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