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 민주올레⑬]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노량진길⑦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옛 노량진경찰서(현 동작경찰서) - ⑤가톨릭노동청년회 - ⑥노량진 컵밥거리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
 

함석헌 선생의 글 사육신공원 입구 육교 앞 벽면에는 함석헌 선생의 글이 새겨져 있다.
▲ 함석헌 선생의 글 사육신공원 입구 육교 앞 벽면에는 함석헌 선생의 글이 새겨져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노량진 컵밥거리 앞에 놓여 있는 육교를 건너면 바로 '사육신공원'이 기다리고 있다. 사육신공원을 탐방하기에 앞서 공원 입구 벽면에 있는 함석헌 선생(1901~1989)의 글을 음미하는 일을 빠뜨리면 안 된다.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 그렇지만 세조의 피바람 뒤에 우리는 '의(義)'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 이것도 고난의 뜻이지 않을까. '고난 뒤엔 배울 것이 있다.'"

위 글은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에 나오는 대목이다. '의(義)', '의로운 삶'의 중요성을 압축적으로 강조하고 있어 읽기만 해도 숙연해진다. 함석헌 선생은 1960, 1970년대 재야 민주화운동의 지도자 중 한 분이었다.

ad

박근혜 정부 시절(2014) 총리 후보로 지명된 문창극은 자신이 장로로 있는 교회 강연에서 '일제의 식민지배도, 남북 분단도 다 하나님의 뜻이다, 너희들은 게으르고 자립심도 부족하고 남에게 신세지는 거 좋아하는 민족이니 시련이 필요하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는 거다'라는 식으로 우리 민족을 비하한 사실이 밝혀져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인 적이 있다.

그때 당황한 문창극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을 희석시켜보려고 함석헌 선생을 엉뚱하게 끌어들이려고 했다. 사람들은 어이없어 했다. '고난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 불의에 맞선 저항을 강조'했던 함석헌이 어찌 '하나님의 섭리라며 저항을 거부하고 순종을 강조'했던 문창극과 같을 수 있겠는가.

'사육신'인가, '사칠신'인가 
 

사육신묘 사육신공원 안에는 사육신묘가 있다.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의 묘 6기에 김문기의 묘가 더 있다.
▲ 사육신묘 사육신공원 안에는 사육신묘가 있다.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의 묘 6기에 김문기의 묘가 더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사육신공원은 사육신묘와 사당인 의절사(儀節祠), 전시공간인 '사육신 역사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 시원한 숲과 한강 조망대도 갖추고 있어 노량진 일대의 취업준비생과 학원생들에게는 아늑한 휴식 공간 역할도 한다.

그런데 사육신공원을 방문하는 이들은 곧 당혹감에 빠진다. 사육신묘의 무덤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모신 6기가 아니라 김문기의 묘가 추가된 7기라는 점, 의절사에도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는 점 때문이리라. 주변을 둘러봐도 이에 대한 뚜렷한 설명도 보이지 않는다. 기껏 안내판에 "본래 이 묘역에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그후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허묘도 함께 추봉하였다"라는 구절만 있을 뿐이다.

사정은 이렇다. 1977년 서울시가 사육신묘 성역화 사업을 시작할 즈음에 김문기 집안인 '김녕김씨 종친회'와 일부 학자가 가세하여 '사육신이 잘못됐다, 사육신 중 유응부가 김문기로 바뀌어야 한다'고 문제제기 하면서 바로잡길 요구했다. 이에 곤란한 상황에 처한 서울시가 문교부를 통해 국사편찬위원회에 사실 여부를 가려달라고 의뢰한다.

국사편찬위원회 "김문기가 세조 때 가려진 6신"

그 결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가 세조 때 가려진 6신이며, 김문기는 도진무로서 박팽년과 모의할 때 군사를 동원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충의공 김문기를 현창하여야 한다"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 사항'이 나온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사항을 새겨놓은 동판 사육신공원 옆에는 김녕김씨충의공파대종회관(백촌빌딩)이 있다. 그 옆에는 충의공김문기사육신현창비가 있고, 바로 그 현창비 옆에 이 동판이 새겨져 있다. 권력에 굴종한 최영희 위원장과 이병도 위원 등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명단도 볼 수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사항을 새겨놓은 동판 사육신공원 옆에는 김녕김씨충의공파대종회관(백촌빌딩)이 있다. 그 옆에는 충의공김문기사육신현창비가 있고, 바로 그 현창비 옆에 이 동판이 새겨져 있다. 권력에 굴종한 최영희 위원장과 이병도 위원 등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명단도 볼 수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그렇다면 "김문기가 세조 때 가려진 6신"이라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견해는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세조 때는 사육신을 비롯해 '단종복위운동'에 나섰던 인물들은 하나같이 충신이 아니라 '난신'이었다.

심지어 세조가 주도한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때 살해된 김종서, 황보인, 조극관, 민신 등도 난신이었다. 따라서 세조 때 사육신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근거로 삼은 세조실록에 따르더라도 1456년의 '단종복위운동'에 나선 인물들의 거명 순서는 일률적이지 않다. 유응부가 포함되든 김문기가 포함되든 특별히 6명을 구분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육신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곳은 세조실록과 같은 정사(正史)가 아니라, 생육신의 한 명인 남효온의 <추강집>이다. 그것도 성종 때 남긴 책이지만 발간하지도 못하다가 그의 외증손 유홍이 선조 때 처음 발간(1576)했다. 이들 육신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도 <육신전>이 포함된 <추강집>이 나온 이후인 선조 9년(1576)의 일이다.

더군다나 김문기는 1456년의 '단종복위운동'에 관련된 인물 중 유일하게 관련 사실을 부인한 인물이었다. <세조실록>의 기사(세조 2년, 1456)를 보면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였으나, 오직 김문기(金文起)만이 (공초(供招)에) 불복(不服)하였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운동이 실패하자 끝내 당당한 모습조차 보여주지 못했던 인물이 바로 김문기였다.          

권력에 굴복해 역사를 왜곡한 사람들

사정이 이러니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이 그대로 수용될 리가 없었다. 우선 서울시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학술적으로 내린 결정에 따라 처리하고자 하나 '사육신묘'라는 명칭 하에서는 처리할 수 없"다고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1) 김문기 선생을 육신묘역에 봉안할 것인지 여부와 유응부 선생의 계속 봉안 여부, 2)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한 인사들에 대하여 앞으로 육신묘역에 봉안해 줄 것을 요청해올 경우 이에 대한 대책과 사육신묘역의 명칭 문제"를 검토해달라고 재질의 형식을 빌려 문화공보부장관에게 요청한다.

이에 문화공보부는 국사편찬위원회에 의뢰해 "김문기를 사육신묘에 허묘로 봉안함이 타당하다, 유응부는 현상대로 존치함이 타당하다,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하여 희생된 인사들을 충신사 또는 충신단으로 하여 그 위패를 봉안하는 것도 타당하다"는 입장을 전달한다. 사육신묘를 정비하면서 김문기의 묘가 추가된 사정이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역사를 왜곡한 사람들

반면, 충의공 김문기를 배출한 김녕김씨 (충의공파) 종친회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사항이 나오자 신속하게 움직인다. 종친회관을 사육신공원 옆으로 옮기고 '충의공김문기사육신현창비'를 세웠다. 또한 그 옆에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사항을 동판으로 구체적으로 새겨 놓는다. '가문의 영광'에 걸맞은 대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어도 문제는 정리될 수 없었다. 유응부의 천녕유씨 종친회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고, 이어 (사)사육신현창회에서도 들고 일어났다. 언론에서는 '1977년 당시 권력자였던 김모씨의 압력에 굴복해 사육신까지 조작하려 한다'는 의혹보도와 함께 사육신논쟁이 일어났다. 언론에 등장한 권력자 김모씨는 1979년 독재자 박정희를 저격한 '10.26 사건'의 주역이었던 김재규였다. 김재규는 김녕김씨 종친회 회장도 지낸 인물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결국 1982년에 이르러 "종래 사육신을 변경한 적이 없다"고 한 발 뺀다. 그런데 누가 봐도 비겁한 모습이었다. 이미 관련 당사자가 사망한 이후임에도 권력에 굴종했던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보다 책임 회피용 변명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그런 비겁한 행태는 지금까지도 사육신논쟁을 멈추지 않게 하는 뿌리이고, 사육신 문중 사이의 갈등을 계속 조장하는 원천이다.
  

사육신논쟁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82. 11. 15) 권력에 굴종한 국사편찬위원회의 행보 때문에 사육신공원 정비사업은 큰 혼란에 빠졌으며,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 사육신논쟁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82. 11. 15) 권력에 굴종한 국사편찬위원회의 행보 때문에 사육신공원 정비사업은 큰 혼란에 빠졌으며,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사실 김녕 김씨들의 '사육신 포함 작전'은 1977년이 처음은 아니었다. 정조 11년(1787) <일성록>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예조가 아뢰기를 '봉산(鳳山)의 충의위(忠義衛) 김광엽(金光曄)의 상언에, '11대조인 고(故) 판서 김문기(金文起)는 명절(名節)이 모두 육신전(六臣傳)에 실려 있으니, 육신사(六臣祠)에 추가 배향하거나 혹 자손들이 사는 고향에 사당을 세워 주소서' 하였습니다. 무술년(1778, 정조2)에 증시를 한 것도 드러내어 장려하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육신사에 추가 배향하는 것은 결코 오늘날 의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당을 세워 받드는 것도 조정에서 지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여, 그대로 따랐다.


조선시대 정조 때도 김녕김씨 집안의 김광엽이라는 인물이 달성(대구)에 있는 '육신사'에 '추가 배향'해 달라는 요청을 조정에 했지만, 거절당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사육신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나은 블랙 코미디

예전에 한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김녕김씨 종친회 발 '사육신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도 본질적으로 이와 유사하다. 단종복위운동 과정에서 죽은 인물이 사육신만 있는 것이 아닐 텐데, 후세에 사육신만 기억되다 보니 '사육신 못지않게 훌륭한 인물' 김문기를 조상으로 두고 있는 김념김씨 후손들로서는 은근히 열불이 났을 법도 하다.  

그렇다고 '가문의 영광'을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것도 권력을 이용해 역사를 왜곡하려 한다는 것은 불의에 맞서 단종복위운동에 나섰던 김문기 선생의 정신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미 조선 정조 때 <세조실록> <육신전> 등을 검토하면서 단종의 장릉 정단에 배향할 '어정배식록'을 편정하면서 김문기는 조극관, 민신과 더불어 '삼중신'의 한 명으로 정리된 바 있다. 그때도 사육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응부를 포함한 그 사육신 그대로였다.

사육신 유응부의 수난, 가문의 힘이 너무 약해서?

유응부는 사육신 중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유응부를 제외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은 모두 집현전 학사 출신의 문신이다. 유응부만 유독 무장 출신이다. 더군다나 유응부 집안의 본관은 천녕(川寧)(지금의 여주)인데, 천녕유씨는 전국에 지금도 5000명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김녕김씨 집안의 공세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기계(杞溪)유씨 집안의 공세에도 맞서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기계유씨 집안에서 1965년에 뒤늦게 유응부를 기계유씨 족보(을사보) 본보에 올린 것이다. 인터넷에서 유응부를 치면 본관이 '기계 혹은 천녕'이라고 나오기도 하고, 기계(지금의 포항)라고만 나오기도 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정조의 시문집 <홍재전서>에 단종의 장릉 정단에 배향할 32인을 정할 때 이야기가 나오는데, 유응부의 본관을 천녕으로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순조 11년(1811)에는 처음으로 예조에서 유응부의 종형제 유응두의 7세손 유대근을 봉사손으로 지정했고, 1820년대 초 예조에서 발급된 <봉사손 결정입안문서>와 1904년에 발급된 <봉사손 입안문서>도 천녕유씨 문중이 보관하고 있다. 그런데도 동작구청이 설치한 사육신공원의 안내 푯말이나 사육신 역사관에는 유응부의 본관을 기계로 표기하고 있다.

사육신공원에서 당하고 있는 사육신 유응부의 수난을 보고 있노라면, 이탈리아의 역사철학자 크로체가 한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말과 소설 <1984>의 저자 조지 오웰의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말의 의미가 저절로 실감난다.     

<단종충신 역사관> vs. <사육신 역사관>

사육신공원에 있는 '사육신 역사관'은 2011년 처음 만들어질 때는 '단종충신 역사관'이었다. 사육신공원에 건립한 역사관을 '단종충신 역사관'으로 이름 붙였던 이유는 1978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하여 희생된 인사들을 충신사 또는 충신단으로 하여 그 위패를 봉안하는 것도 타당하다"라고 한 잘못된 답변과 맥이 닿아 있었다. 
 

<사육신 역사관> 2011년 처음 건립될 때는 <단종충신 역사관>이었다.
▲ <사육신 역사관> 2011년 처음 건립될 때는 <단종충신 역사관>이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곧바로 "사육신 공원에 어떻게 '단종충신 역사관'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단종충신 역사관'은 단종이 묻혀 있는 영월의 장릉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사육신 후손들의 강한 비판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사육신 역사관'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사육신 역사관>의 옛모습.  <단종충신 역사관>으로 되어 있다.
▲ <사육신 역사관>의 옛모습.  <단종충신 역사관>으로 되어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오류투성이의 '동작구 홍보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고

'사육신 역사관' 안으로 들어가면 2층에 역사관이 있고 1층에는 '동작구 홍보관'이 있다. 그런데 이 '동작구 홍보관' 역시 오류투성이다. 일반적으로는 대부분 맞는 이야기에 한두 개의 잘못이 있는 경우인데, 동작구의 연혁을 소개하고 있는 곳을 보면 놀랍게도 한두 개만 맞고 대부분이 사실과 다르게 정리돼 있다.

가령 '1931년 이전 경기도 시흥군 북면, 동면이었음'이라는 부분을 보자. 사실은 동작 지역은 1936년 4월 1일 이전까지도 경기도 시흥군 북면, 동면, 신동면이었다. 1931년은 그 이전과 이후가 구별될 만큼 동작 지역에 특별한 변동이 없었다. 반면, 1936년에 동작지역의 대부분이 경성부에 편입된 큰 변동은 아예 표기조차 돼 있지 않다.

'1943. 6 서울시 영등포구로 명칭변경'이라는 대목도 어처구니없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 당시에 일제는 서울시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고, 경성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1963년 부분도 황당하다. 1963년에 관악출장소가 설치된 일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작 지역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사안이다.

같은 시기 새로 서울에 편입된 사당동을 관할하기 위해 영등포구청이 설치한 출장소는 신동출장소였다. 관악출장소는 동작 지역과 무관한 관악 지역의 신림동, 봉천동 등을 관할하기 위해 설치된 출장소였다.

오류를 지적하면서 고칠 것을 요구해도 동작구청은 예산을 이유로 몇 년째 방치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오류투성이의 동작구 연혁을 담고 있는 '동작구홍보관을 운영하는지는 알 수 없다.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한데도 말이다.

'불의'에 맞서 싸운 사육신의 정신을 계승하려면

'불의(不義)'에 맞서 자신은 물론 집안의 목숨까지 내던지며 싸웠던 사육신이 '가문의 영광'을 위해 역사왜곡도 서슴지 않는 일부 후손들 때문에, 권력에 굴종하는 어용 역사학자들 때문에, 관료주의에 물든 동작구청 때문에 500년을 훌쩍 넘긴 오늘에도 새로운 형태로 수난을 당하고 있다. 그 현장이 바로 사육신공원이다.

'불의(不義)'에 맞서 싸운 사육신의 정신을 칭송하고 제대로 계승하는 게 진정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제 사육신공원을 제대로 정비하는 일을 더이상 뒤로 미뤄서는 안 될 것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7954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옛 노량진경찰서(현 동작경찰서) - ⑤가톨릭노동청년회(현 가톨릭까르딘청년회) - ⑥노량진 컵밥거리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동작 민주올레⑫]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노량진길⑤⑥

동작경찰서에서 한강대교 방면(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대로를 따라 걷는다. 100m 남짓 가면 횡단보도가 나타나는데 그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노량진 컵밥거리가 보인다. 반갑긴 하지만 '동작 민주올레'는 노량진 컵밥거리로 바로 가기 전에 오른쪽 샛길을 통해 가톨릭노동청년회를 먼저 연결됐다가 컵밥거리로 이어진다. 

민주노조와 함께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가톨릭까르딘청년회)

가톨릭노동청년회(아래 가노청)는 도시산업선교회(기독교)와 더불어 1970년대 우리 사회 민주노조운동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종교단체다. 가노청은 원래 명동성당 가톨릭 회관에 있었다. 노량진에 이사 온 것은 2002년이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카페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가톨릭까르딘청년회로 이름을 바꿨다.
  

가톨릭까르딘청년회가 운영하는 카페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이름을 바꾼 가톨릭까르딘청년회는 2002년 이곳 노량진에 새로 자리를 잡았다.
▲ 가톨릭까르딘청년회가 운영하는 카페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이름을 바꾼 가톨릭까르딘청년회는 2002년 이곳 노량진에 새로 자리를 잡았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가노청은 1925년 벨기에에서 창설되는데, 한국의 가노청은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모토를 내걸고 1958년에 결성됐다. 창설자인 조셉 까르딘 주교가 한국에 들어와 명동성당에서 주교 집전 아래 9명의 투사가 선서식과 미사를 봉헌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전한다"

ad

가노청의 초기 활동은 빈민촌 무료진료, 윤락여성 선도, 서독파견 간호원과 광부들을 위한 활동, 가정부 생활실태조사 같은 일이었다. 그 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이르러 산업화와 함께 급증하는 노동청년들을 활동대상으로 각 산업체의 노동조합 결성과 임금인상 등 처우개선 지원 활동, 노동 강좌와 직업여성 실태조사, 노동자들의 인권신장과 복지향상 지원 등을 중심에 놓고 활동하게 된다.

가노청은 1968년 강화도 심도직물 노조 탄압 사건, 1970년 전태일 분신 사건을 겪으면서 노동자의 경제투쟁 지원, 노동인권 개선 활동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강화도 삼도직물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가 가톨릭 신자인 노동자 300여 명이 해고되자 전미카엘 신부가 처음 개입하면서 가노청은 노동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탄압을 받아 위기에 빠지기도 한다.

가노청이 노동자 가운데 자리 잡는 데는 1968년부터 영등포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하면서 '노동자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 푸른 눈의 도요안 신부(1937~2010)가 큰 역할을 했다. 가노청과 도요안 신부는 소모임 지도와 교육활동 등을 통해 지금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이 된 원풍모방 노조(신대방 공장과 노량진 공장)를 민주화시키고 활성화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도요안 신부 장례식 장면 '노동자들의 아버지'로 불린 도요안 신부는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이끈 푸른 눈의 신부였다.
▲ 도요안 신부 장례식 장면 "노동자들의 아버지"로 불린 도요안 신부는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이끈 푸른 눈의 신부였다.
ⓒ 살레시오수녀회

관련사진보기

 
가노청, 1970년대 민주노총의 상징 원풍모방 노조 발전에 큰 기여

원풍모방의 전신인 한국모방 시절인 1972년 '노조 정상화 투쟁'을 통해 민주노조의 기틀을 마련한 원풍모방 노조에는 가노청과 연결된 소모임이 많았다.

1970년 한국모방과 역시 신대방동에 있던 외국인투자업체 세미코어의 가톨릭 신자 12명이 함께 결성한 '무궁화팀'은 최초의 가노청 소모임이었다. 1971년에는 인원이 35명으로 늘어나는 등 규모가 커지고 신대방동 원풍모방 인근 의용촌에서 8명이 투사선서식까지 한다.

이어 예비팀 소나무를 결성하고, 한국모방 내 전체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인 성우회(회장 조화순)도 발족한다. 이들 가노청 관련 소모임은 노조 민주화 과정에서부터 큰 힘을 발휘한다. 가노청이 관여한 세미코어에도 민주노조가 있었다.

1975년부터 원풍모방 노조의 수석부지부장을 맡아 방용석과 함께 노조를 이끌었던 '선한 싸움꾼' 박순희도 가노청의 '투사'였다. 박순희는 현재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맡고 있다.

상생의 거리, 노량진 컵밥거리

가톨릭까르딘청년회가 운영하는 카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뒤로하고 큰 길로 나가면 노량진 컵밥거리의 반대편으로 연결된다.

동작구의 명물 '노량진 컵밥거리'는 원래 노량진역 맞은편에 있었다. 취업준비생과 학원생들이 많은 노량진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돼 자연스럽게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2012년 대선 당시에는 문재인 후보(현 대통령)가 청년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취지로 이곳에서 컵밥으로 식사하는 장면을 연출해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유동인구가 지나치게 많은 노량진역 맞은편 거리의 특성으로 시민의 보행권과 노점상의 생존권이 심각하게 충돌하면서 동작구청과 노점상 간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결국 양측은 지역주민까지 참여하는 가운데 끈질긴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합의에 이르게 되면서 2015년부터 지금의 자리로 이동하게 됐다.
 

노량진 컵밥거리 노량진 컵밥거리는 싼 가격으로 노량진 일대 수험생들의 식사 문제를 해결해주는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 노량진 컵밥거리 노량진 컵밥거리는 싼 가격으로 노량진 일대 수험생들의 식사 문제를 해결해주는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대부분의 지역에서 노점상은 현행법상 불법이지만, 노점상들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여서 노점상들은 불법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불법운영과 단속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이유이다. 다행히 노량진 컵밥거리에서는 동작구청과 노점상이 서로 머리를 맞대면서 '합법'의 길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노량진 컵밥거리는 '상생의 거리'로 불리면서 타 지역에서도 벤치마킹을 하려고 방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동작구임에도 사당동이나 장승배기 방면, 숭실대 입구 등 다른 지역은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을 반복하고 있어 벤치마킹조차 여간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노량진 컵밥거리의 합의 사례를 전국적 모델로 삼을 수 있었으면 한다"라고 자랑하던 이창우 동작구청장이 "동작구의 다른 곳에는 적용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동작구 시민사회에서 구청의 일관성 없는 정책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기도 했지만, 구청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상생의 거리' 노량진 컵밥거리를 만들어낸 성과를 스스로 무색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최근 서울시가 '노점상 합법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노량진 컵밥거리' 사례가 서울시의 주도로 서울시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노량진 학원가의 형성·발전과 노량진 고시촌이 등장

사실 노량진 학원가와 노량진 고시촌의 등장 이야기를 빼놓고 노량진 컵밥거리에 대해 말할 할 수 없다.

노량진 학원가는 1970년대 말 박정희 정권이 도심교통 분산과 면학분위기 조성을 내세워 종로와 광화문 일대의 학원을 도심 밖으로 이전시키는 과정에서 본격 형성됐다.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라는 특성이 반영된 결과다. 처음에는 입시학원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나, 지금은 공무원 시험 대비 학원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입시학원은 대치동을 중심으로 한 강남으로 그 중심지를 옮긴지 오래다. 서울시는 2015년 노량진 학원가를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노량진 공시생(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이 주를 이루는 노량진 고시촌은 동작경찰서 뒤편에 형성되었다. 대개 원룸형의 좁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시생들은 명절도 잊은 채 오직 시험에 합격하는 그날을 생각하며 젊음을 불태우고 있다. 노량진 수험생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 <힘내요 노량진박>(2011, 사이)이 나오기도 했다.
 

<힘내요 노량진박>
노래 : 사이(Sai), 작사 : 사이(Sai), 작곡 : 사이(Sai)
서울의 하늘은 참 맑아
내 추리닝 바지는 꼬질꼬질
나는 왜 고향을 떠나와
차가운 주먹밥을 먹나

흰 벽에 창문을 그려본다
저기 갈매기떼가 날 부르는 것만 같아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한 평짜리 나의 꿈, 나의 우주

힘내요 노량진 박,
당신 아직 젊잖수?
힘냐요 노량진 박,
네버 네버 기브업

힘내요 노량진 박,
당신 꿈이 있잖수?
힘내요 노량진 박,
네버 네버 기브업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자신의 청년 시절을 작은 골방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진취적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길 고대해마지 않는다.

박정희와 박근혜가 살던 곳, 노량진역 건너편

한편,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결정적으로 후퇴시켰던 박정희가 한 때 살던 곳도 이곳 노량진에 있었다.

1955년 7월 광주포병학교 교장에서 인제에 있는 제5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게 된 박정희는 노량진역 맞은편 100m 정도 안쪽에 셋방살이 집을 마련했다. 물론 박정희는 근무지가 강원도 인제이다 보니 육영수와 박근혜 등 그 가족들만 살았고 본인은 두 달에 한 번 꼴로 들렀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 가족의 노량진 거주 시대는 1년이 채 되지 않아 마무리된다. 1956년에 신당동 집을 구입해 이사 갔기 때문이다. 신당동 집은 박정희가 10.26 사건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소유주로 있던 곳이다. 박정희 가족이 살았던 곳은 아마도 지금은 노량진 고시촌 건물이 들어서 있을 가능성이 높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7017





[동작 민주올레⑪]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노량진길④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옛 노량진경찰서(현 동작경찰서) - ⑤컵밥 거리 - ⑥가톨릭노동청년회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동작경찰서 노량진역에서 바라본 동작경찰서. 2006년까지는 노량진경찰서였다.
▲ 동작경찰서 노량진역에서 바라본 동작경찰서. 2006년까지는 노량진경찰서였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노량진역 광장 맞은편에 있는 동작경찰서는 2006년까지 노량진경찰서였다.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이기는커녕 '민중을 향한 몽둥이' 역할을 하던 독재정권 시기 노량진경찰서는 동작구민, 특히 중앙대·숭실대생들에게는 원성의 대상이었다.

중대생들의 '총학생회장 구출 투쟁'에 맞선 노량진경찰서

adad

1990년 5월 29일부터 노량진경찰서 입구에서는 중앙대생들의 연좌농성과 경찰의 강경진압이 반복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특이한 광경은 중앙대 총학생회장 김영진이 전날 노량진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강제 연행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대학가에서 동료 학생의 연행에 대하여 끈질기고 거세게 항의시위를 벌이는 대학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중앙대 학생들은 노량진경찰서 앞에서 연좌농성·화염병시위·평화행진 등을 병행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무려 119명이 연행되는 상황에서도 '총학생회장 구출-전대협 사수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이들의 핵심 전술은 학과별로 돌아가면서 노량진경찰서 앞 연좌농성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여학생들이 머리채를 잡히고 뺨을 맞는 일까지 발생하자 지나가던 시민들은 경찰에 심한 야유를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노량진경찰서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중앙대 학생들의 시위에 강공으로 맞선다. 화염병으로 맞서는 대학생들에 대해서는 구속으로 대응하고, 연좌농성이나 평화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에 대해서는 전원연행으로 맞선다.

노량진경찰서는 경찰서 입구에서 농성하던 중앙대 학생들을 29일에는 69명, 30일에는 25명을 연행하는 등 무려 119명을 연행한다. 급기야 31일 새벽에는 중앙대 학생들이 노량진경찰서 정문초소에 화염병까지 던지는 일로 비화하자, 박진용 학생 등 2명을 '화염병 사용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연행하여 구속하기도 한다.

이때 중앙대 학생들과 노량진경찰서의 항의시위와 경찰의 연행·구속이라는 악순환이 무려 다섯 차례나 반복되었다고 한다.('학생회 간부 구출-강경 진압 악순환', 한겨레신문, 1990. 6. 2) 
 

중앙대 학생들과 노량진경찰서의 대결을 보도한 한겨레신문(1990. 6. 2) 노량진경찰서가 당시 중앙대 총학생회장 김영진을 구속하면서 시작된 중앙대 학생들과 노량진경찰서의 대결은 구출작전과 강경진압이라는 악순환을 5차례나 반복했다.
▲ 중앙대 학생들과 노량진경찰서의 대결을 보도한 한겨레신문(1990. 6. 2) 노량진경찰서가 당시 중앙대 총학생회장 김영진을 구속하면서 시작된 중앙대 학생들과 노량진경찰서의 대결은 구출작전과 강경진압이라는 악순환을 5차례나 반복했다.
ⓒ 한겨레신문

관련사진보기

   
숭실대서 난동을 부린 노량진경찰서 사복 경찰들

이보다 며칠 전인 1990년 5월 24일에는 노량진경찰서 소속 "사복경찰 200여 명이 숭실대 구내로 들어가 학생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돌을 던지고 쇠파이프 등을 휘둘러 건물 유리창 80여 장이 깨지고 교직원 승용차 3대를 부서지게 하는 등 한동안 난동을 부렸다".

경찰은 시위 학생들이 건물로 달아나자 "교문에서 50m 떨어진 과학관으로 쫓아가 사과탄을 던져 넣으며 총장실 대형유리창 4장과 1층 로비의 거울과 괘종시계 등을 부수기도 했다". 노량진경찰서 소속 사복경찰들의 이러한 난동은 하루 전에 이어 이틀째 계속됐다('전경, 숭실대서 난동', 동아일보, 1990. 5. 26).

사건의 발단은 5월 22일 수배 중이던 숭실대 학생 양재봉이 교문 앞에서 경찰에 강제 연행되면서 시작됐다. 학생들은 곧바로 노량진경찰서 소속 백운파출소로 몰려가 화염병을 던지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파출소 유리창이 깨지고 경찰 오토바이 2대가 불타자 경찰은 M16 공포탄을 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키기도 했다. 분이 가시지 않은 경찰은 다음날인 23일과 24일 이틀에 걸쳐 숭실대 교내로 진입하여 '난동'을 부리기에 이르렀다.

결국 조요한 당시 숭실대 총장이 직접 노량진경찰서를 방문해 한만석 서장에게 연행 학생 25명 전원을 석방하라는 요구와 함께 강력히 항의하는 일로 발전한다. 관할 경찰서장은 "기물파손의 95%는 학생들이 한 짓"이라고 거짓 해명한다. 여론이 들끓자 치안본부마저 자체 감찰팀을 동원하여 노량진경찰서를 감찰하겠다고 나서며 사태를 무마한다.

당시 노량진경찰서가 숭실대에서 보여준 보복테러를 벌이는 듯한 행태는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 본연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이는 공권력을 가장하여 '공폭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차라리 조폭 집단의 모습에 어울렸다. 
 

<전경, 숭실대서 난동>(동아일보, 1990. 5. 25) 노량진경찰서 소속 사복경찰들이 보여준 숭실대 난동 사건은 마치 조폭집단의 보복테러 행태와 비슷했다.
▲ <전경, 숭실대서 난동>(동아일보, 1990. 5. 25) 노량진경찰서 소속 사복경찰들이 보여준 숭실대 난동 사건은 마치 조폭집단의 보복테러 행태와 비슷했다.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독재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한 노량진경찰서의 흑역사

노량진경찰서는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인 1966년 영등포경찰서에서 분리돼 만들어졌고, 지금의 자리에는 1967년 건물을 신축하면서 들어섰다. 그러다 보니 노량진경찰서는 출범과 함께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량진경찰서의 흑역사는 경찰서가 시작된 지 불과 몇 개월도 안 되는 1967년 2월 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여성 인권 유린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방동 '서울시립 부녀보호소'에서 158명의 원생들이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때 노량진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출동하는데, 이들이 휘두른 곤봉에 윤아무개씨와 장아무개씨 등 2명이 부상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집단탈출 소동-시립부녀보호소원생들', 경향신문, 1967. 2. 9).

이후에도 노량진경찰서는 1970년에는 235명의 집단탈출을 주도한 황아무개씨를 비롯한 9명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하는 등 '서울시립 부녀보호소'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인권침해 사건을 해결하는 데 나서기보다는 외히려 이를 덮는 데 경찰력을 동원하고 행사한다.
   

서울시립 부녀보호소 집단탈출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경향신문(1967. 2. 9) 노량진경찰서는 여성 인권침해의 상징적인 장소 대방동 <서울시립 부녀보호소>에서 탈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출동하여 서울시의 인권침해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 서울시립 부녀보호소 집단탈출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경향신문(1967. 2. 9) 노량진경찰서는 여성 인권침해의 상징적인 장소 대방동 <서울시립 부녀보호소>에서 탈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출동하여 서울시의 인권침해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 경향신문사

관련사진보기

   
노량진경찰서의 흑역사는 관할구역에 있던 중앙대와 숭실대, 총신대 학생들을 상대로 더 자주 일어났다.

1971년 10월 16일 새벽 이인근 등 중앙대 학생 4명을 시위주동 혐의로 연행해 5일 만에 석방했다는 기사를 시작으로 언론에 등장하는 것만 따져도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은 1973년 숭전대(숭실대의 당시 이름) 학생 600여 명의 반유신투쟁을 진압하면서 최경열 등 3명을 연행한 일, 1974년 반유신투쟁에 나선 김철웅 등 중앙대 학생 3명을 연행하여 구류에 처한 일, 1975년 중앙대생 2명과 숭전대생 2명을 연행한 일 등 계속 됐다. 매년 반유신투쟁에 나선 대학생들에 대한 탄압을 지속적으로 행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노량진경찰서의 흑역사는 1980년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백의 시민들을 학살하고 들어선 전두환 군사정권 때에 그 도를 더한다. 1980년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는 중앙대, 숭전대, 총신대 학생들의 헌신적 활동은 1980년 9월 개강과 함께 채플시간에 계엄해제와 독재타도를 주장하는 유인물을 배포한 숭실대 학생들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노량진경찰서는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고 하는 대학생들의 활동을 차단하기 위해 시위주동 학생들을 잇달아 연행하고 구속하는 것으로 맞선다.

1981년 3월 23일 중앙대 도서관 3층 열람실에서 유인물 배포하며 교내시위를 주도한 박문수, 김증래, 오춘성 등 3명의 학생을 구속하는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5월 7일 마찬가지로 도서관 3층 열람실에서 시위를 주도한 중앙대생 박영권과 이상 등 2명을 구속한 일, 1982년 9월 도서관 4층에서 '학우에게 보내는 글'을 배포하면서 밧줄 시위를 주도한 중앙대생 이근원과 임재선 등 2명을 구속한 일, 같은 해 11월 교내시위를 주도한 중앙대생 김연명을 구속한 일도 다 노량진경찰서가 한 일이다.

1983년부터는 시위가 더 자주 발생함에 따라 구속자도 급증했다. 숭전대에서는 교내시위를 주도한 김상림과 최성남 등 2명(3월), 소유진, 윤석호, 윤성환 등 3명(6월), 배정섭, 배영환 등 2명(11월), 함지호, 이기원, 박재국 등 3명(11월)이 잇달아 구속된다. 중앙대생들도 교내시위를 주도한 윤민탁, 박수일 등 2명(5월)과 이도형, 김민수 등 2명(6월), 기형노, 배정미 등 2명(10월)이 잇달아 구속됐다.

1985년 2.12총선을 앞두고 민정당 동작지구당사 앞에서 '독재타도' '민정당 독재 결사반대' '전두환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횃불시위를 벌이다 연행된 14명도 노량진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구속(3명) 또는 구류 처분을 받았다. 같은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숭전대 조혜란 학생도 노량진 육교 위에서 다시 시위를 벌이다 노량진경찰서에 연행돼 구속됐다.

노량진경찰서의 흑역사는 신대방동에 있던 1970년대 민주노조의 상징 원풍모방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데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 원풍모방 노동자들은 한국모방 시절이던 1972년부터 '노동조합 정상화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9월 노량진경찰서가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역할을 맡아 방용석과 정상범 등 노조 간부 2명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한국모방 노조간부 구속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72. 9. 6) 노량진경찰서는 관할구역에 있던 대표적인 민주노조 원풍모방 노조를 탄압하는 데도 앞장섰다.
▲ 한국모방 노조간부 구속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72. 9. 6) 노량진경찰서는 관할구역에 있던 대표적인 민주노조 원풍모방 노조를 탄압하는 데도 앞장섰다.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1972년 11월 남부경찰서가 새로 생기면서 원풍모방 노조의 관할이 바뀐 관계로 한동안 잠잠했던 노량진경찰서는 1982년에는 검찰과 안기부, 보안사와 구청, 노동부 등 관계자와 함께 '동작구 지역 공동 대책회의'(4. 19)와 '확대지역 노동대책회의'(동작구와 영등포구, 7. 9)에 이종석 당시 노량진경찰서장이 잇달아 참석하여 원풍모방 노조 와해 방안 마련에 앞장서기도 했다.

1986년 '신길동 가두투쟁'과 노량진경찰서

노량진경찰서는 연행된 대학생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1986년 당시 대학생과 노동자가 연대해 전태일 열사 26주기 '신길동 가두시위'(11. 13)를 벌였다. 이날의 시위는 보름 전에 있었던 건대사건(10.28)으로 무려 1276명의 대학생이 구속된 직후였음에도 1000여 명의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시위는 장시간 격렬하게 진행돼 전두환 군사정권에게 큰 충격을 줬다. 더군다나 이들은 전두환 군사정권과 타협해 추진하는 개헌을 기만이라고 규정하고, '전두환 군사정권을 타도하고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민족민주헌법을 제정하자'는 급진적 주장을 내세웠다.  

이에 치안본부로부터 사전에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장이 대기발령 조치까지 당하자 노량진경찰서는 연행한 학생들을 구타하는 등 보복성 가혹행위를 벌이기도 한다. 이 '신길동 가두시위'로 현장에서 연행된 대학생과 노동자 40명 중 37명을 포함하여 총 48명이 구속됐다.
 

1986년 '신길동 가두시위' 소식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1. 14) 노량진경찰서는 '신길동 가두시위'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고 경찰서장이 대기발령 조치를 당하자 연행된 노동자와 대학생들에게 가혹행위를 하기도 하면서 무려 48명을 구속한다.
▲ 1986년 "신길동 가두시위" 소식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1. 14) 노량진경찰서는 "신길동 가두시위"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고 경찰서장이 대기발령 조치를 당하자 연행된 노동자와 대학생들에게 가혹행위를 하기도 하면서 무려 48명을 구속한다.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노량진경찰서 → 동작경찰서, 이름 바꿨지만...

노량진경찰서는 2006년 동작경찰서로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출발했다. 하지만 독재정권 시기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충실히 한 과거의 유산을 여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단적으로, 최근 노량진수산시장 사태에서 수협 측의 강제 철거 시도와 이에 맞서는 시장 상인 간에 발생한 여러 폭력사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동작경찰서가 일방적으로 수협의 편을 들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은 동작경찰서 앞에서 1인 시위와 기자회견, 대중 집회까지 열면서 "동작경찰서는 편파수사를 중단하라"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의 동작경찰서 앞 집회 장면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은 집회를 통해 "동작경찰서가 편파수사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의 동작경찰서 앞 집회 장면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은 집회를 통해 "동작경찰서가 편파수사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이러한 노량진경찰서의 편파수사에 대한 문제제기는 2016년 겨울 이수역 7번 출구 노점단속 과정에서 발생한 구청의 노점상에 대한 집단감금, 집단폭력 사건에서도 나왔다. 노점상 한 명이 노점상 철거과정에서 철거에 동원된 용역에게 집단감금, 집단폭행 당했다고 고소한 사건에 대해 처음 경찰은 '혐의 없음'으로 처리했다가 검사의 재수사 요구에 직면해 일부 용역의 폭력 혐의를 확인해 검사에 보고하지만, 동작구청의 '교사' 여부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수사로 일관하다 결국 '혐의 없음' 처리했던 것이다.     

촛불혁명의 결과 정권이 교체되면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상황에서도 경찰을 신뢰하지 못하는 시민들의 마음은 대단히 착잡할 수밖에 없다. 적폐청산은 역시 정권이 교체되었다고 자동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걸 동작경찰서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동작경찰서가 이제라도 새로운 시대 흐름에 부응하여 '권력이나 자본의 하수인'이 아니라 진정 '민중의 지팡이'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주길 다시 한 번 소망해본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6869





'동작 민주올레」' – <노량진길> 3회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동작경찰서 - ⑤컵밥 거리 - ⑥가톨릭노동청년회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전통 노량진 수산시장을 구경하면서 통로를 지나다 왼쪽에 붙어있는 건물 위 옥상으로 올라가면 1호선 노량진역으로 이어지는 육교가 있다. 이 육교를 지나는 중에 서쪽을 바라보면 철길 옆으로 멀리 '별장식당'이 보인다. 볼록한 언덕 위의 저 자리에 조선시대부터 달빛에 부서지는 파도를 구경할 수 있는 '월파정'이 있었다.

③ 노량진역 광장, 독립운동에서 민주화운동까지 '열망' 표출되던 곳

철도시발지(鐵道始發地) 노량진역
  

철도시발지 표석 노량진역이 1899년 경인선이 처음 개통될 때 처음 출발한 역임을 알리는 표석이다. 노량진 역사 안에 설치되어 있어 전철을 타고 노량진역에서 한강쪽으로 가다가 강을 건너기 직전 오른편에 있는 표석을 볼 수 있다.
▲ 철도시발지 표석 노량진역이 1899년 경인선이 처음 개통될 때 처음 출발한 역임을 알리는 표석이다. 노량진 역사 안에 설치되어 있어 전철을 타고 노량진역에서 한강쪽으로 가다가 강을 건너기 직전 오른편에 있는 표석을 볼 수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노량진역은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처음 개통될 당시 출발역이었다. 개통 당시 노량진역에서 제물포역까지의 길이는 33.2.km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노량진 철도 역사 안에는 鐵道始發地(철도시발지) 표석이 서 있다. 鐵道始發地(철도시발지)는 설치 당시(1975년) 총리였던 김종필의 글씨이고, 표석 설치 취지는 친일 문인 서정주가 쓴 글을 새겼다.

ad

노량진역 광장 벽에도 이곳이 '철도시발지'였음을 짐작케 해주기라도 하듯 철도기관차 부품을 활용한 미술 작품이 설치돼 있다. 노량진역은 1900년 한강철교가 완공되면서 경인선 출발역의 지위를 서대문역(현 이화여고 운동장)으로 넘기게 된다.

개통 당시 노량진에서 인천까지 소요시간은 1시간 40분이었으며, 매일 왕복 2회 운행했다. 평균 시속 19.8km이었음에도 당시 조선인에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쌀 한가마니가 4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으니 운임이 상등석이 1원 50전, 중등석이 80전, 하등석이 40전으로 꽤 비싼 편이었다. 그럼에도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 노량진은 근대에 이르러서도 그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었다.

노량진 3.1만세운동

노량진역 앞에는 아담한 광장이 있다. 시민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는 곳이다. 그런데 이 광장은 일제 강점기 이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관련한 많은 사연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노량진 3.1만세운동을 소요사건으로 보도하고 있는 <매일신보>(1919. 3. 25)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처음에는 3.1만세운동 소식을 전하지 않다가 3월 7일부터 '소요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왜곡 보도하기 시작했다.
▲ 노량진 3.1만세운동을 소요사건으로 보도하고 있는 <매일신보>(1919. 3. 25)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처음에는 3.1만세운동 소식을 전하지 않다가 3월 7일부터 "소요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왜곡 보도하기 시작했다.
ⓒ 한국언론진흥재단

관련사진보기

1919년 일제에 맞선 3.1혁명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지던 무렵, 이곳 노량진에서도 3월 23일 만세 운동이 벌어진다. 노량진 3.1만세운동에 대한 정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매일신보>는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틀 후인 3월 25일 자 <소요사건의 후보>라는 제목의 기사에 "오후 팔시 반경으로부터 구시경까지 삼백여명의 군중이 모여서 소요를 하얏더라"라고 짤막하게 보도했다.

시위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가까운 영등포역 앞과 당산리(지금의 당산역 주변)에서도 동시에 벌어진다. 세 곳에서 동시에 벌어진 이유는 영등포경찰서의 진압 활동에 차질을 주기 위한 시위 주동자들의 전략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일제가 영등포와 당산리에서는 "주모자를 검속하고 진압"하거나 "군대와 경찰이 협력하여 진압"했지만, 노량진에서는 진압되지도 않았고 연행된 사람도 없었다.

당시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시대일보> 같은 언론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처음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당연히 외면했던 <매일신보>는 사건이 계속 확산되지 뒤늦게 '소요사건'으로 보도했다. 일제가 만세운동의 규모나 양상을 의도적으로 축소·왜곡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노량진 3.1만세운동의 규모는 <매일신보>의 보도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3.1혁명 100주년에 우리가 기릴 것은 무엇인가 

동작구 사당동에는 삼일공원이 조성돼 있다. 하지만 이 삼일공원은 100년 전의 3.1운동과는 직접 인연이 있는 곳이 아니다. 1967년 여성독립운동가 최은희가 <동아일보>에 "독립공원 설립을 제안한다"는 칼럼을 쓴 게 계기가 됐다. 이에 박정희는 서울에서 땅값이 가장 싼 곳 중 하나였던 사당동에 독립공원 부지를 지정만 하고 예산 지원은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방치되다가 1990년 중앙정부가 아닌 동작구청이 삼일공원으로 뒤늦게 조성했다.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동작구청이 어설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삼일공원에 기울이는 관심의 절반만이라도 실제 벌어졌던 자랑스러운 역사 '노량진 3.1만세운동'에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해본다.

노량진역 광장에서 만난 경성트로이카의 이관술과 박진홍은

노량진역 광장은 1937년 6월 말 삽을 짊어진 농부로 변장한 경성트로이카의 이관술(1902~1950)과 동지 박진홍(1914~?)이 비밀리에 만난 장소이기도 하다.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에 전시되어 있는 박진홍 독립운동가 박진홍은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에서도 만나볼 수 있으며, 이재유,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박진횽, 이효정 등이 참여한 경성트로이카의 활동은 서대문 형무소 전시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에 전시되어 있는 박진홍 독립운동가 박진홍은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에서도 만나볼 수 있으며, 이재유,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박진횽, 이효정 등이 참여한 경성트로이카의 활동은 서대문 형무소 전시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전설적인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이재유(1905~1944)가 일제에 잡히면서 줄곧 수배 생활을 하던 이관술은 경찰의 감시망이 느슨해지자 조직 재건을 결심하고 서울로 잠입해들어와 영등포에 거쳐를 마련하고 활동을 재개한다(경기도 시흥군에 속했던 영등포 일대는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된다, 경성부는 이 지역을 영등포출장소를 설치해 관리했다).

그는 노량진에 살던 안병춘을 통해 독립운동 중 일제에 잡혀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나온 지 1개월밖에 되지 않은 박진홍과 연결한다. 동덕여고보 사제지간이기도 한 둘은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오랜 만에 만난 감격을 내색조차 하지 않은 채 걸어서 상도리(상도정)를 거쳐 신림에 이르고 다시 번대방리(지금의 신대방동)와 신길리(신길정), 번대방정(현 대방동)을 거쳐 노량진으로 돌아올 때까지 조직재건방침을 비롯한 여러 논의를 거듭한다.
 

이관술 <이관술 1902-1950,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사회평론, 안재성)의 책 표지
▲ 이관술 <이관술 1902-1950,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사회평론, 안재성)의 책 표지
ⓒ 사회평론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이관술의 경성트로이카 조직 재건이라는 야심찬 도전은 또다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노량진에서 박진홍과 헤어진 이관술이 며칠 후 박진홍을 통해 연락한 이복동생 이순금을 여의도에서 만나다가 갑자기 불어난 샛강 때문에 다리를 건너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리면서 극적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때 이관술은 샛강을 헤엄쳐 피신하지만, 이순금은 꼼짝 없이 잡힌 몸이 됐다. 그러면서 이관술이 서울에 잠입한 사실이 일경에 알려지고 말았다. 이관술은 다시 한 번 지방으로 피신해 1년 후 다시 서울에 잠입할 때까지 '고난의 행군'을 거듭해야만 했다.

1985년 2.12총선을 앞둔 대학생들, 노량진서 "민정당 독재 결사반대" 외치다

노량진역 광장 앞에는 2005년까지 노량진역과 건너편을 잇는 육교가 있었다. 독재정권시기 이 육교 위에서도 민주화 시위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철거전의 노량진역 앞 육교 노량진역 앞 육교는 2015년 철거되었다. "35년... 잘 버텨줘서 고마워!"라는 글이 가슴에 와 닿는다. 하지만 노량진역 앞 육교는 35년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 철거전의 노량진역 앞 육교 노량진역 앞 육교는 2015년 철거되었다. "35년... 잘 버텨줘서 고마워!"라는 글이 가슴에 와 닿는다. 하지만 노량진역 앞 육교는 35년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19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서울 남부지구평의회 소속 대학생들(숭실대, 중앙대, 숙대, 단국대, 서울대 등) 수백 명은 노량진경찰서 인근 민정당 동작구지구당 사무실 앞에서 '민정당 독재 결사반대'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횃불 시위를 벌였다. 당시 민정당 동작구지구당 위원장 허청일은 전두환 민정당 총재의 비서실장이기도 했다.

이 시위로 20명이 연행되고 여러 명이 수배되는 일이 벌어졌다. 수배자 중 한 명인 숭실대생 조혜란은 경찰서가 눈앞에 보이는 노량진 육교 위에서 시위를 벌이다 연행되기도 했다. 이 시위로 조혜란(숭실대), 민경남(숙대), 김덕룡(중앙대), 조항오(단국대) 등 4명이 구속됐다.

이러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전통이 동작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진 탓일까. 2000년대 들어 노량진역 광장은 동작 지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상징성을 갖는 곳으로 발전한다. '미군장갑차에 의한 효순이 미선이 두 여중생 압사 사건'(2002) 때부터 시작해 최근의 '4.16 세월호 참사'(2014),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탄핵 정국'(2016~2017) 등 큼지막한 사회적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촛불집회가 열리는 곳이 바로 노량진역 광장이다.
 

노량진역 광장 촛불집회 장면 2017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전국이 들썩일 때 노량진역 광장에서도 동작지역 시민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여러차례 촛불집회를 가졌다.
▲ 노량진역 광장 촛불집회 장면 2017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전국이 들썩일 때 노량진역 광장에서도 동작지역 시민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여러차례 촛불집회를 가졌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5884






'동작 민주올레' – <노량진길> 2회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동작경찰서 - ⑤컵밥 거리 - ⑥가톨릭노동청년회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노량진 삼거리에서 대방동 방향으로 50미터 정도 가면 오른쪽에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들어가는 굴다리가 있다. 이 굴다리를 지나면 노량진 수산시장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지하철 1호선에 내릴 경우 육교를 통해서도 곧바로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건너갈 수 있다.

② 노량진 수산시장의 주인은 누구인가
 

전통 노량진 수산시장 91년 전통의 노량진 수산시장(1927년 처음 의주로에 개설)은 서울시가 개설한 중앙도매시장이지만, 서울시의 직무유기로 수협의 소유로 넘어갈 위기에 처해 있다.
▲ 전통 노량진 수산시장 91년 전통의 노량진 수산시장(1927년 처음 의주로에 개설)은 서울시가 개설한 중앙도매시장이지만, 서울시의 직무유기로 수협의 소유로 넘어갈 위기에 처해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굴다리를 지나 노량진 수산시장에 도달하면 많은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새로 만들어진 시장이 눈앞에 보이지만, 오른쪽을 바라보면 예전부터 운영되던 시장이 그대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ad

신 시장은 수협이 국고보조금 1540억 원까지 받아서 만들었는데, 시장 상인들의 상당수가 신시장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3년째 입주를 거부하고 있어 발생한 현상이다.

여기에 수협이 철거하려고 달려들고 있는 노량진 수산시장 구건물은 서울시가 보존가치가 있다면서 지정한 '서울시 미래유산'이기도 하다. 도대체 노량진 수산시장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새 시장과 구(전통) 시장이 이렇게 장기간 '공존'하면서 갈등하고 있는 걸까?

서울시가 개설한 중앙도매시장이 왜 '수협' 노량진 수산시장?
  

노량진수산시장 신건물 수협은 국고보조금 1540억을 비롯해 총 2243억을 들여 신건물을 지었으나, 도매시장의 특성을 전혀 반영한 채 대형수산마트처럼 지었을 뿐만 아니라, 판매상인에게 배정된 영업점포의 평수가 좁아 상인들이 입주를 거부하는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 노량진수산시장 신건물 수협은 국고보조금 1540억을 비롯해 총 2243억을 들여 신건물을 지었으나, 도매시장의 특성을 전혀 반영한 채 대형수산마트처럼 지었을 뿐만 아니라, 판매상인에게 배정된 영업점포의 평수가 좁아 상인들이 입주를 거부하는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사정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노량진 수산시장의 역사를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노량진 수산시장은 수산물의 원활한 유통과 가격 안정을 위해 서울시가 개설한 91년 전통의 수산물 중앙도매시장이다.

서울시가 개설자라고? 수협이 아니고? 신시장 벽면에 새겨진 '수협 노량진 수산시장'이라는 글씨를 본 사람이라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의아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노량진 수산시장은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아래 농안법)에 따라 서울시가 개설한 '농수산물 중앙도매시장'이다. 중앙도매시장은 노량진 수산물도매시장,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 등 전국에 11개 밖에 없는데, "특별시·광역시·특별자치시 또는 특별자치도가 개설한 농수산물도매시장 중 해당 관할구역 및 그 인접지역에서 도매의 중심이 되는 농수산물도매시장으로서 농림축산식품부령 또는 해양수산부령으로" 엄격히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도매시장은 도매시장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시장'이기 때문에 노량진 수산시장 같은 중앙도매 시장은 애당초 수협이 개설할 수 없는 시장이다.

농안법 상 도매시장의 종류는 중앙도매시장, 지방도매시장(지방시가 개설권자), 농협공판장·수협공판장, 민영도매시장 등 4종류(단계)의 도매시장이 있다. 생산자 협동조합인 수협은 소비자의 이익을 충분히 고려할 수 없는 한계 때문에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세 번째 단계의 '수협공판장'만 개설할 수 있다.

그럼에도 노량진 수산시장이 '수협'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잘못 알려진 것은 개설자인 서울시의 직무유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수협으로부터 부지와 건물을 임대해 노량진 수산시장을 개설했으면서도 개설자로서의 역할을 사실상 포기하고 관리·운영권을 수협의 자회사인 ㈜수협노량진수산 측에 사실상 전부 넘겨 버렸다. 농안법에 따르면 운영권은 ㈜수렵노량진수산에 위탁할 수 있으나, 관리권은 절대 수협에 위탁할 수 없도록 돼 있다.

서울시의 직무유기, 서울시민과 시장 상인들에게 막대한 피해 주고 있어 

서울시는 ㈜수협노량진수산으로부터 무상으로 토지와 건물을 임대한 후, 이를 다시 ㈜수협노량진수산에 관리권과 운영권까지를 포함하여 무상으로 빌려주는 형식의 계약을 매 5년마다 해 수협의 '하수인' 노릇을 해왔다.

이런 서울시의 직무유기를 은폐하는 과정에서 "서울시는 형식적 개설자에 불과하고, 수협이 실질적 개설자다"라는 말이 등장하기도 했다. 마치 '박근혜는 형식적 대통령에 불과했고, 최순실이 실질적 대통령이었다'라는 말을 연상시키는 말이다.

노량진 수산시장 개설자인 서울시의 직무유기는 줄곧 서울시민과 상인들에게 큰 피해를 안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2002년 이래 수협은 매년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120억 원 전후의 금액을 위탁용역비(임대료 등의 명목)로 ㈜수협노량진수산으로부터 이전해 갔고, 그 돈은 고스란히 시장 상인들과 서울시민의 호주머니에서 빠져나갔다.

수협이 2002년 노량진수산시장의 부지와 건물을 인수할 때 은행융자 지원으로 지불한 금액은 약 1503억 원이었다. 당시 수협측의 의뢰를 받아 작성된 한 용역보고서에조차 법인세법 시행령을 근거로 수협중앙회가 받을 수 있는 적정임대수입은 2002년 약 34.5억 원, 2003년 약 31.5억 원, 2004년 29.3억 원이라고 했을 정도니 그동안 노량진 수산시장을 임대하면서 수협이 얼마나 폭리를 취했는지 알 수 있다(<노량진수산시장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토론회> 자료집, 2016. 12. 20, 서울시의회 주최).

그 120억 원 중 상당부분(70억~80억 원 수준)은 서울시의 수익금 또는 수산물 가격 안정을 위해 쓰일 수 있는 부분이었다. "노량진 수산시장의 수산물 값이 생각보다 비싸다"면서 시민들이 뭔가 손해 본 느낌을 갖게 되는 근본 배경에는 이런 비밀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신 건물을 지을 때 나온 국고보조금 1540억 원도 시장 개설자인 서울시를 통해 집행됐다면 고스란히 서울시의 자산이 됐을 테지만, 서울시가 직무유기 하면서 수협을 통해 집행되는 바람에 전부 수협의 자산이 되고 말았다.  
 

서울시 의회 주최 정책토론회(2016. 12. 20) 서울시 의회가 주최한 '노량진 수산시장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도 서울시의 직무유기가 지적되었고, 서울시를 대표해 참석한 송임봉 당시 도시농업과장도 시장개설자로서 서울시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시인하였다. 송임봉은 “노량진수산시장의 개설자인 서울시가 농안법에 근거하여 수협노량진수산(주)을 도매시장 법인으로 지정하여 시장운영 업무를 대행하여 운영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도매시장의 효율적인 관리 및 운영을 위해 수협노량진수산(주)과 별도로 공공출자법인 설립을 추진할 계획이며, 시장 개설자인 서울시가 주도적인 역할 수행을 위해 지분을 높이는 방안도 적극 강구할 예정"이며, “서울시와 중앙정부 간 법률적 해석이 다른 입장이기 때문에 노량진수산시장 현대화사업 갈등 해소를 위한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현명하게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서울시의회 최영수의원, 노량진수산시장 정상화 정책토론회 개최>, 서울신문 2016.12. 21)
▲ 서울시 의회 주최 정책토론회(2016. 12. 20) 서울시 의회가 주최한 "노량진 수산시장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도 서울시의 직무유기가 지적되었고, 서울시를 대표해 참석한 송임봉 당시 도시농업과장도 시장개설자로서 서울시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시인하였다. 송임봉은 “노량진수산시장의 개설자인 서울시가 농안법에 근거하여 수협노량진수산(주)을 도매시장 법인으로 지정하여 시장운영 업무를 대행하여 운영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도매시장의 효율적인 관리 및 운영을 위해 수협노량진수산(주)과 별도로 공공출자법인 설립을 추진할 계획이며, 시장 개설자인 서울시가 주도적인 역할 수행을 위해 지분을 높이는 방안도 적극 강구할 예정"이며, “서울시와 중앙정부 간 법률적 해석이 다른 입장이기 때문에 노량진수산시장 현대화사업 갈등 해소를 위한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현명하게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서울시의회 최영수의원, 노량진수산시장 정상화 정책토론회 개최>, 서울신문 2016.12. 21)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황금알을 낳는 거위', 노량진 수산시장 잔혹사

1927년 이래 서울역 뒤편 의주로에 자리 잡고 있던 수산물 도매시장이 노량진으로 이사 온 것은 1974년이다. 당시 노량진 수산시장 자리에는 서울시가 농어촌개발공사의 자회사인 한국냉장(주)을 대행자로 한 한냉중앙시장(1971. 5. 1)이 있었다. 이 시장은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서울수산도매시장과 서울청과도매시장의 이전조치"(1974. 5. 31)를 발표하면서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흡수됐다.

1970년대부터 '황금알을 낳는 거위', 또는 '황금방석'이라고 불린 노량진 수산시장은 일찍부터 권력자들의 먹잇감이 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전두환의 형 전기환이 '떼돈 욕심'으로 청와대와 서울시를 이용해 재일동포자본을 몰아내고 운영권을 빼앗는다. 전기환의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 사건은 1987년의 6월 민주항쟁 이후 대표적인 5공 비리의 하나로 지목돼 그를 감옥으로 인도한다.
 

전기환의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88. 11. 9) 노량진 수산시장은 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에도 전두환의 형 전기환이 청와대를 등에 업고 서울시에 압력을 넣어 운영권을 강탈한 일이 있었다.
▲ 전기환의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88. 11. 9) 노량진 수산시장은 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에도 전두환의 형 전기환이 청와대를 등에 업고 서울시에 압력을 넣어 운영권을 강탈한 일이 있었다.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현재의 노량진수산시장 사태도 수협의 '떼돈 욕심'이 그 배경이 됐다. 배경이 되었다. 1997년 IMF사태 이후 정부가 추진한 공기업 민영화 방침에 따라 건물과 대지의 주인이던 한국냉장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수협은 노량진 수산시장을 인수한다. 수협의 뒤에는 IMF사태로 위기에 빠진 수협을 구하려는 해수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협의 '떼돈 욕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수협은 새 건물을 지어 시장을 옮긴 후 원 시장 자리에 58층(지하 6층 포함)짜리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리조트를 지으면 대대적인 개발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혔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생존권의 위기에 몰린 시장 상인들의 반발을 사고 만 것이다.

리모델링을 통한 관광명소화 vs. 부동산 개발을 통한 '떼돈 욕심'

시장 상인들은 '노량진수산시장현대화비상대책총연합회'를 결성했다. 그들은 수협이 신시장을 도매시장의 성격에 맞게 짓기보다는 대형마트 형식의 좁고 폐쇄적인 건물로 지은 이유는 부동산 개발을 통한 '떼돈 욕심'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전통 노량진 수산시장을 없앨 게 아니라 '리모델링을 통한 관광명소화'를 추진할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3년 넘게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노량진 수산시장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공청회 장면(2016. 9. 27, 동작구청 5층)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과 시민단체들은 서울시민 5천명의 서명을 받아 서울 시민들의 요구로 서울시가 시민공청회를 개최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 노량진 수산시장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공청회 장면(2016. 9. 27, 동작구청 5층)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과 시민단체들은 서울시민 5천명의 서명을 받아 서울 시민들의 요구로 서울시가 시민공청회를 개최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다만, 촛불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 아래에서도 수협의 초법적 행태와 서울시의 직무유기로 지금까지 온 노량진 수산시장 사태가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지금은 '명도소송'에서 수협이 승리하면서 전통 노량진 수산시장을 지키려는 시장 상인들에 대한 압박이 더 강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노량진수산시장현대화총연합회> 주최 집회 장면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은 자신의 생존권과 노량진 수산시장 운영 정상화, 리모델링을 통한 관광명소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 <노량진수산시장현대화총연합회> 주최 집회 장면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은 자신의 생존권과 노량진 수산시장 운영 정상화, 리모델링을 통한 관광명소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시장 개설자(관리와 운영의 책임자)인 서울시는 부동산 개발을 통한 '떼돈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수협에 끌려 다니면서 사태 해결의 대안을 전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상인들의 요구대로 '리모델링을 통한 관광명소화'가 이뤄져 시장 상인도 살고 노량진 수산시장도 사는 꿈이 실현될 수 있을지, 아니면 다시 한 번 거대자본의 힘이 상인과 시민의 요구를 압도하는 결과로 끝나버릴지 주목된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노량진 수산시장 사태는 적폐세력에 맞서 일찍이 2002년부터 꼬이고 꼬여온 부분을 제대로 풀어 세우기 위한 '비정상의 정상화'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보여주고 있다.  
 

'월파정'(月波亭)을 아시나요?
노량진 수산시장과 경인선 철로 사이에 있는 '별장식당'에서는 조선시대부터 있던 정자 '월파정'(月波亭)의 흔적을 흐릿하게나마 찾아볼 수 있다.

달빛이 물결에 비치는 한강의 경치가 아름다웠던 월파정에서는 정약용 등 조선시대의 많은 문인들이 시와 글을 남겼다.
 
2차 시흥농민봉기(1904)의 주도자 중 한명이었던 하주명이 일본군의 검거를 피해 성대점(상도동에 있던 주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에서 여장(女裝)을 한 후 서울로 피신하려고 숨어들었다 잡힌 곳도 월파정이었다.
 
월파정은 일제 강점기 친일파인 송병준의 소유를 거처 일본인 토목청부업자 아라이 하츠타로에게 넘어간다. 나라가 망했을 때 이런 경치 좋은 정자나 별장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자신의 역사로 보여준다.
 
해방 정국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모집책을 하며 일제의 밀정 역할을 하던 '라바울 마담' 김정순이 미군 상대 사교 댄스장으로 운영하다 비리 혐의로 구속되면서 수도경찰청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별장으로 바뀐다.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식당 이름이 '별장식당'인 이유이다.

한편, 우리는 현 '별장식당'에 '월파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현 노량진 수산시장 자리가 조선시대 때는 물이 찼다 빠지곤 하는 한강변 모래사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5513







'동작 민주올레' – <노량진길> 1회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동작경찰서 - ⑤컵밥 거리 - ⑥가톨릭노동청년회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노량진 삼거리 노량진역 7번출구 앞에서 바라본 노량진 삼거리. 멀리 장승배기가 보인다. 왼쪽에는 1호선 노량진역이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영등포가 나온다.
▲ 노량진 삼거리 노량진역 7번출구 앞에서 바라본 노량진 삼거리. 멀리 장승배기가 보인다. 왼쪽에는 1호선 노량진역이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영등포가 나온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오늘은 '노량진길'을 걸으며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시간이다. '노량진길'에는 노들나루 이래 경인선 철도 개통, 한강인도교 개통 등과 맞물려 교통의 요지 역할을 해온 노량진의 역사가 그대로 반영돼 있다.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라는 이 지역의 특성은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풍부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① 노량진 삼거리에서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다

ad

1. 밤깊은 인도교 비내리는 노량진에
사랑을 아로새긴 그 거리는 여전한데
그 사람은 어디갔나 노량진 삼거리
내마음 우는 이밤 영등포로 떠날까

2. 쓸쓸한 외등도 비에 젖는 삼거리에
사랑을 못잊어서 헤매도는 삼거리에
다시 한번 찾아왔다 노량진 삼거리
내사랑 잠든 이밤 인천으로 떠날까


가수 박일남은 1968년부터 <노량진 삼거리>를 이렇게 노래했지만, 노량진 삼거리는 사랑의 아픔만 있는 곳은 아니다. 노량진 삼거리는 한국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다.

노량진 삼거리는 한강대교 남단에서 노량진역을 지나 영등포로 가는 길과 장승배기에서 내려오는 길이 만나는 곳을 일컫는다. 1982년 상도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한강 인도교를 넘은 사람들은 이 곳 노량진 삼거리까지 와서 장승배기로 방향을 틀 것인가, 아니면 영등포 방향으로 직진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챔피언의 산실, 동아체육관을 기억하시나요?
'노량진길'을 함께 탐방하기 위해서는 노량진역 7번 출구 앞에서 만나는 게 좋다. 일행을 기다리는 중에 바로 뒤편 건물을 주목해보는 것도 좋다. 가구점이 있는 3층 건물인데, 1970, 1980년대 이 건물 2층에는 '동아체육관'이 있었다.
 
동아체육관은 박종팔, 김득구, 유명우를 비롯하여 1970, 1980년대 국민의 사람을 받던 유명 프로권투 선수를 배출한 말 그대로 '챔피언의 산실'이었다. 동아체육관의 관장은 아마추어 국가대표를 거쳐 동양챔피언을 지낸 김현치였다.
 
당시 프로권투는 국민의 사랑을 받는 최고의 스포츠 중 하나였다. 맨몸으로 인생역전을 노리는 가난한 젊은이들은 꿈과 희망을 안고 이곳 동아체육관으로 몰려들었다.
 
한편, 박일남은 <노량진 삼거리>(1968)만이 아니라, 노량진 이야기를 담은 대중가요 <노량진의 밤>(1973)이 인기를 끌었다. <노량진 삼거리>만으로는 실연의 아픔을 달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1. 이슬비가 소리없이 내리던 노량진의 밤
가로 등불도 비에 젖는 한강교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속삭이던
내사랑 순이가 말없이 가버렸네
영원히 잊지 못할 노량진의 밤이여
 
2. 옛 추억을 달래려고 찾아온 노량진의 밤
그때처럼 한강교에 비는 오는데
마음을 주고 받던 주고 받던
내사랑 순이가 다시는 오지 않네
영원히 잊지 못할 노량진의 밤이여


성남고생들 노량진 삼거리로 진출하다

1965년 6월 22일 박정희 군사정권이 일본과 굴욕적 한일협정을 조인하자 성남고 학생들이 "한일협정 비준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다시 시위에 나선 곳이 바로 노량진 삼거리였다.

1964년부터 시작된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6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시위 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이 시작되면서 잠시 주춤했지만, 다음해 6월 22일 한국의 이동원 외무부장관과 일본의 시이나(椎名) 외상 사이에 한일협정이 조인되자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한일간에 협정이 조인된 마당에 이제 국회에서 비준이 되지 않도록 막아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문교부가 학생들의 시위를 대비해 이미 휴교령을 내려놓은 상황이었만, 그게 학생들의 시위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일협정이 조인되는 날인 6월 22일부터 시작된 3일 간의 휴교령이 끝나고 등교한 성남고 학생들은 이틀째인 26일 곧바로 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은 이날 오전과 오후에 걸쳐 두 차례 시위를 벌였다.

이날 오전 삼삼오오 학교를 빠져나온 2학년 학생 400명은 용마산을 넘어 장승배기 아래쪽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곧바로 노량진 삼거리 방면으로 행진을 시작해 출동한 경찰과 대치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1차 시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노량진 삼거리 쪽에 친 경찰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최루탄을 발사하면서 진압에 나선 경찰에 10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고 시위대는 결국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연행을 피한 학생들은 다시 용마산을 넘어 학교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다수의 학생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은 3학년과 1학년을 포함한 1200여 학생들은 오후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남고 학생들의 2차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며 다시 장승배기 아래로 진출했고, 이번에는 경찰의 방어선을 뚫고 노량진 삼거리를 지나 한강인도교(한강대교) 입구까지 진출하여 경찰과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위로 문교부는 성남고에 대해 7월 3일까지 휴교 기간을 연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일협정 비준반대에 나선 성남고 학생들(1965. 6. 26, 동아일보) 4일 전 한일협정이 조인되자 성남고 학생들은 교내시위로는 한계를 느끼고 이날 노량진 삼거리 일대에서 두 차례에 걸쳐 시위를 벌였다.
▲ 한일협정 비준반대에 나선 성남고 학생들(1965. 6. 26, 동아일보) 4일 전 한일협정이 조인되자 성남고 학생들은 교내시위로는 한계를 느끼고 이날 노량진 삼거리 일대에서 두 차례에 걸쳐 시위를 벌였다.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4.19혁명 전야에 일어났던 3.17의거 때는 학교 정문을 나와 지금의 대방역 앞을 거쳐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했던 성남고 학생들이 한일회담 반대운동 때는 반대편인 노량진으로 진출했다는 점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시위 구경하던 한 어린이의 안타까운 죽음

그런데 이날 한 어린이가 시위 진압 차량에 치어 숨지는 안타까운 일도 벌어졌다. 오전의 1차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던 군용트럭이 시위 진압을 끝낸 경찰을 태우고 돌아가던 중 시위를 구경하던 한 어린이를 치어 숨지게 한 것이다.

더군다나 숨진 어린이는 '농아학교'에 다니던 장애인 학생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이 군용트럭은 그것도 모자라 노량진 주민의 우마차까지 반파시키고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당시 시위를 구경하던 인근 주민 600여 명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당 군용트럭은 이미 달아난 뒤였지만, 뒤따라가던 다른 군용트럭을 둘러싸고 욕설과 돌까지 던지며 강력히 항의하게 됐다. 일부 주민들은 그래도 분이 가시지 않자 근처에 있던 교통순경을 상대로 사고 군용트럭을 그대로 보내줬다며 집단폭행하는 일로까지 비화했다.  
 

옥숙희 어린이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1965. 6. 26) 성남고 학생들의 시위를 구경하다 군용트럭에 치어 사망한 옥숙희 어린이(당시 11세)는 서울농아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 옥숙희 어린이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1965. 6. 26) 성남고 학생들의 시위를 구경하다 군용트럭에 치어 사망한 옥숙희 어린이(당시 11세)는 서울농아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노량진 삼거리, '4.19혁명'과 '80년 서울의 봄'이 담겨 있는 곳

노량진 삼거리에 서려 있는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비단 성남고 학생들의 시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남고 학생들의 시위보다 무려 5년이 앞선 1960년 4.19혁명 당일에도 숭실대 학생 40여 명이 노량진 삼거리를 거쳐 시내로 진출했다.

당시에는 상도터널이 개통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출발한 숭실대 학생들은 장승배기를 거쳐 이곳 노량진 삼거리에서 오른쪽을 발향을 틀어 노량진역을 지나 한강대교를 건넜다.

1980년 '서울의 봄' 때도 노량진 삼거리는 다시 한 번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등장한다. 그해 5월 14일, 영등포역을 거쳐 마포대교를 건너 광화문에 진출한 중앙대와 숭실대 학생들이 '계엄해제와 민주화 실현'의 열망을 안은 채 스크럼을 짜고 "계엄령을 해제하라!" "유신잔당 물러가라!" "전두환은 물러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이곳 노량진 삼거리를 휩쓸고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했다. 
 

1980년 민주화의 봄 당시의 동아일보 기사(1980. 5. 15) 5월 14일 중앙대와 숭실대 학생들도 노량진 삼거리를 지나 사진 속의 영등포 시장과 영등포역으로 진출했다. 영등포에서 서울대생과 합류한 시위대는 여의도와 마포를 거쳐 광화문과 서울역까지 진출했다.
▲ 1980년 민주화의 봄 당시의 동아일보 기사(1980. 5. 15) 5월 14일 중앙대와 숭실대 학생들도 노량진 삼거리를 지나 사진 속의 영등포 시장과 영등포역으로 진출했다. 영등포에서 서울대생과 합류한 시위대는 여의도와 마포를 거쳐 광화문과 서울역까지 진출했다.
ⓒ 동아일보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5003






'동작 민주올레' – <대방길> 7회

▶ 코스안내 : ①서울영화초 - ②영등포고 - ③유일한기념관 - ④실미도 사건의 현장 - ⑤캠프 그레이 미군기지 터(미군 502군사정보단) - ⑥서울시립부녀보호소 터 - ⑦공군기념탑 - ⑧숭의여중고 - ⑨성남고 - ⑩서울공고

성남고에서 나와 이제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대방길의 마지막 코스인 서울공업고등학교에 가는 길. 여느 길과 달리 주택가를 관통하는 길이라 색다른 느낌을 준다.

⑩ 독립운동가의 산실, 서울공고

서울공고는 들어서자마자 멀리 보이는 본관만 봐도 예사롭지 않은 학교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939년에 건립된 본관 건물은 서울시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서울공고 본관 건물(서울시 등록문화재) 1899년 관립 상공학교로 시작한 서울공고의 역사는 1939년 대방동 시대를 연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서울공고 본관 건물(서울시 등록문화재) 1899년 관립 상공학교로 시작한 서울공고의 역사는 1939년 대방동 시대를 연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서울공고가 지금의 대방동에 자리 잡는 것은 1939년의 일이다. 하지만 서울공고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99년 명동에 설립된 관립상공학교(4년제)가 그 뿌리이니 가히 '실업교육의 발상지'라고 할만한 학교가 바로 서울공고이다.

ad

관립상공학교는 이후 관립농상공학교로 개편(1904)했다가 1906년 수원농림학교와 선린상업학교로 분리된 후 1907년 관립 공업전습소(2년제)로 개편됐다. 1910년에는 경성공업전습소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22년에 3년제 관립 경성공업학교가 됐다.

서울공고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학교에 걸맞게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박찬익, 김재봉, 김약수, 구영필, 이준태, 권준, 양근환 등이 서울공고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다.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박찬익과 양근환, 권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법무부장과 주화대표단 단장 등을 역임하면서 항일외교의 최전선에 섰던 박찬익(1884~1949)은 공업전습소 학생들과 함께 만든 최초의 공업연구모임 '공업연구회'(1908년 창립)의 1, 2대 회장과 최초의 공업기술지인 <공업계>의 발간인(1909년 발간)이기도 했다.

박찬익은 1910년 경술국치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기반한 독립운동을 벌인 이래 줄곧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아들 박준영도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했다. 
  

서울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 아래 편 왼쪽에서 세번째가 박잔익 선생의 묘다.
▲ 서울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 아래 편 왼쪽에서 세번째가 박잔익 선생의 묘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양근환(1894~1950)은 1913년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을 다닌 인물로 1921년 3.1혁명이후 내선일체와 조선인 참정권 운동을 벌이며 신일본주의를 제창한 국민협회 회장 민원식을 동경 정거장호텔에서 척살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려다 실패한 양근환은 무기징역을 언도받는데, 12년의 감옥생활 끝에 1933년에 출옥했다.

1917년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권준(1895~1959)은 광복회 활동을 거쳐 중국으로 망명한 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의열단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던 그는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중국혁명군 장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등을 역임했다. 1933년 의견 차이로 김원봉과 갈라선 그는 중국군에 복무하다가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다.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김재봉, 이준태, 김약수, 구영필, 오기수, 김임형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1890~1944)과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이준태, 북풍회 출신의 노동운동가 김약수 등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도 서울공고가 배출한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이다. 

이들은 1920년대 일제의 야수와 같은 탄압에 맞서 노동자와 농민 등 기층 민중을 독립운동의 대열로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김재봉과 이준태는 경북 안동 출신인데, 풍산읍 오미마을에는 김재봉 생가(학암고택)와 <근전 김재봉 어록비>가 있다.
  

<김재봉 생가>와 <김재봉 어록비> 김재봉의 고향인 안동시 풍산읍 오미마을에는 김재봉의 생가와 <김재봉 어록비>가 있다. 어록비에 새겨진 "조선독립을 목적하고...."은 김재봉이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했을 때 작성한 이력서에 나와 있는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이라는 문구의 일부이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으면서도 여전한 이념대립으로 있는 그대로의 문구를 표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 <김재봉 생가>와 <김재봉 어록비> 김재봉의 고향인 안동시 풍산읍 오미마을에는 김재봉의 생가와 <김재봉 어록비>가 있다. 어록비에 새겨진 "조선독립을 목적하고...."은 김재봉이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했을 때 작성한 이력서에 나와 있는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이라는 문구의 일부이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으면서도 여전한 이념대립으로 있는 그대로의 문구를 표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약산 김원봉, 이여성과 더불어 '조선의 산과 물과 별과 같이' 살고자 했던 김약수(1892~1964)는 해방 이후 제헌의원에 당선돼 초대 국회부의장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에 적극 나서 친일청산에 앞장섰다. 하지만,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가 6.25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만주와 국내를 넘나들다가 고향 의성에서 비밀독서회를 조직해 활동하다 여러 차레 옥고를 치른 오기수(1892~1959)도 경성공업전습소 출신(1912년 졸업)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다.

박찬익과 더불어 '공업연구회' 회원이기도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도 지낸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구영필(1890~1926)은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의열단 출신이기도 한 구영필은 1922년 만주 길림성 영고탑에 정착했다. 영고탑에서 저명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김사국과 더불어 무산자 교육기관인 대동학원을 운영하는 등 활발한 교육활동을 벌이던 중 구영필은 1926년 김좌진 장군이 군사위원장으로 있던 신민부 별동대원 황덕환에게 피살됐다. 
  

구영필의 죽음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6. 10. 18) 당시에도 구영필은 변절자가 아니라 군정서를 만들고 간도로 이주해오는 조선인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던 인물로 보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구영필의 죽음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6. 10. 18) 당시에도 구영필은 변절자가 아니라 군정서를 만들고 간도로 이주해오는 조선인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던 인물로 보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친일 행위에 대한 응징'이라는 명목이었지만, 뒤늦게 이곳으로 근거지를 옮겨온 민족주의계와 이미 터를 잡고 있던 사회주의계 간의 갈등이 낳은 비극이었다(이 갈등은 1929년 김좌진 필사 사건으로 이어진다).

서울공고 선배들은 1919년 3.1혁명에도 이형영 등이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1930년대 노동현장에 기반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에도 다수가 참여한다. 김임형, 박병윤, 김종천, 류택하 등은 전설적인 혁명가 이재유와 이관술이 이끌던 경성트로이카 그룹과 연계해 경성공업학교 내에 비밀 독서회 '우리학교'를 설립·운영하는 한편, 보성고보의 비밀 독서회 '도나회'를 지도하기도 했다. 

1938년 연행 당시 박병윤은 영등포에 있던 경성방직에 취직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노동운동에도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일재재판기록 '소화13년 형공 제1427호', 국가기록원).

서울공고는 이러한 전통 때문에 해방 정국에서도 좌파가 세력을 형성한 학교로 유명했다고 한다.

민주화운동에도 앞장 선 서울공고 학생들

서울공고 학생들은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나선다. 1959년 3월에는 '교사 몇 사람을 배척하는 이유, 교장 사생활에 대한 해명, 교비의 용도를 밝힐 것, 진학반을 편성할 것' 등 14개항의 요구를 내걸고 2200명 전교생이 등교 거부를 하고 맹휴에 돌입해 결국 승리한다. 서울공고생들은 우리 사회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이미 학원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셈이다.
  

서울공고 학생들의 맹휴 소식을 알리는 경향신문(1959. 3. 5) 서울공고 학생 2,200명은 교장 사생활에 대한 해명, 진학반을 편성할 것 등을 요구하면서 전원 등교거부를 했다.
▲ 서울공고 학생들의 맹휴 소식을 알리는 경향신문(1959. 3. 5) 서울공고 학생 2,200명은 교장 사생활에 대한 해명, 진학반을 편성할 것 등을 요구하면서 전원 등교거부를 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서울공고생들은 4.19혁명 당일에는 학교 측의 저지로 주도적 참여는 하지 못하지만, 20일부터는 육군운동장(용산우체국 뒤편)에서 열린 합동위령제에 학교 측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막힌 교문을 부수고 나가 참여하는 등 시위에 함께한다. 이 과정에서 김길웅을 비롯한 3명의 학생이 중상을 입기도 한다.

언론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1965년에는 휴교령도 내려지고 개강 이틀 만에 다시 휴교령이 연장되는 것으로 보아 서울공고생들은 한일회담반대운동 시위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967년 6.8 부정선거 반대운동 때도 서울공고생들은 "300여 명이 교정에서 성토대회를 개최하고 데모에 돌입"했다고 한다. 유신시절이던 1975년에는 동문들이 70주년행사를 준비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서울공고를 다닌 일본인 동문들과 교류를 시작하는데, 재학생들은 "일본인을 우리의 동문으로 인정할 수 없다"라면서 혈서를 쓰고 플래카드를 거는 등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이때 학생회장이 교사들에게 끌려가자 학생들이 흥분해 담장을 넘어 가두시위까지 벌이기도 한다.

<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전환시대의 논리> 등으로 1970, 1980년대 젊은이들에게 감명을 줬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그 자신도 여러 차례 수난을 당했던 민족의 지성 리영희(1929~2010)도 공립 서울공업학교 출신(1944년 졸)이라는 점을 기억해둘만하다.

본관 뒤편으로 가면 동문회에서 운영하는 '서울공고 역사관'이 있다. 그런데 역사관에 기껏 박찬익 선생만 소개돼 있을 뿐 서울공고생들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전시돼 있지 않은 것은 대단히 아쉬운 대목이다.

동문회에서 '서울공고 역사관'을 대폭 개편하는 결단을 내려준다면 재학생은 물론 동작구 지역 사회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가미카제 특공대로 죽은 스무살 한정실
서울공고 출신 선배 중에 상도동에 살던 한정실은 가미카제 특공대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군 함정에 뛰어들다 죽는다.
 
함경북도 경성이 고향이 고향인 한정실은 1940년 경성공업학교에 진학한 이후 줄곧 수석을 다툴 정도로 수재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집을 학교 인근 상도동으로 옮겨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아들을 뒷받침했다.

그런 한정실이 2년 후 돌연 육군 소년비행병 학교(사이타마현 구마가야)에 입학한다. 한정실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비행사를 꿈궜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가미카제 특공대로 죽은 조선인은 19명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시작이 친일 문학인 서정주가 <마쓰이 오장 송가>라는 유명한 헌시를 바친 인재웅이었고, 그 마지막이 1945년 6월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한정실이었다.
 
사망 당시 한정실의 나이는 우리 나이로 겨우 스물(1926년 생)이었다. 한정실은 식민지 청년으로 어린 나이에 전쟁에 동원되어 전사했다는 점에서 피해자였지만, 가마카제 특공대로 미군 함정에 몸체공격을 감행 했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가해자였다. 가미카제 특공대로 죽은 한정실은 식민지 청년의 비극적 운명을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낭만과 전설의 동작구', 동작FM)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4817




[동작 민주올레]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⑥


「동작 민주올레」 – <대방길> 6회

▶ 코스안내 : ①서울영화초 - ②영등포고 - ③유일한기념관 - ④실미도 사건의 현장 - ⑤캠프 그레이 미군기지 터(미군 502군사정보단) - ⑥서울시립부녀보호소 터 - ⑦공군기념탑 - ⑧숭의여중고 - ⑨성남고 - ⑩서울공고 

숭의여중고를 나와 언덕길을 따라 오르면 성남고등학교가 보인다. 숭의여고가 용마산 동편 자락에 있다면 성남고는 용마산 서편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⑨ 3.17학생의거에 빛나는 성남고생들

자랑스러운 성남고 학생들 
 

성남고생들의 3.17의거 소식을 전하는 언론(동아일보, 1960. 3. 18) 성남고 학생들은 영등포로타리까지 진출하여 시위를 이어나갔다. 경찰은 공포까지 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의 사저의 분위기를 전하는 '당선축하 하객 쇄도'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 성남고생들의 3.17의거 소식을 전하는 언론(동아일보, 1960. 3. 18) 성남고 학생들은 영등포로타리까지 진출하여 시위를 이어나갔다. 경찰은 공포까지 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의 사저의 분위기를 전하는 "당선축하 하객 쇄도"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성남고에는 성남의 자랑 '3.17 의거기념탑'이 있다. '3.17 의거기념탑'은 우리 사회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효시격인 4.19혁명과 관련이 있다.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의 3.15부정선거에 맞서 마산에서 3.15 의거가 일어났을 때, 불과 이틀 후에 서울에서 학교 단위로는 처음으로 항의 시위에 나선 곳이 성남이다.
 
이날 400여 성남고 학생들은 교문을 나서 영등포로터리까지 진출해 "경찰은 자숙하라!" "경찰은 학생 사살사건 책임지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선전물을 뿌리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공포까지 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킨다. 이 와중에 100여 명이 영등포경찰서에 연행되고 이중 3명의 학생은 구류 처분을 받았다. 4.19혁명의 역사에 성남고생들은 확실한 족적을 남긴 셈이다. 
  

3.17의거기념탑 성남고 교문을 들어가자마자 왼편에 있다.
▲ 3.17의거기념탑 성남고 교문을 들어가자마자 왼편에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성남고 학생들의 의거는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시위 다음날 <동아일보>의 '오열 잠동 여부 지검서 내사 착수'라는 기사에는 "검찰은 이 데모 사건이 종래의 어떤 데모와도 달리 경찰을 비난하고 있기 때문에 오열의 잠동 여부를 조사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오열(五列)은 스페인 내전(1936~1939) 당시 파시스트 부대인 프랑코 군의 장군 에밀리오 몰라 비달이 부대를 4열로 편성하여 마드리드로 진격하면서 마드리드 내부에 자신의 지지자들이 제5열로 있다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니까 성남고 학생들의 시위는 간첩이나 북한과 연계된 불순세력의 침투로 발생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근거는 "경찰을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경찰이 이틀 전 마산에서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발포하여 7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의 부상자가 나왔는데, 그런 경찰을 비난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자칫 성남고 학생들은 간첩의 배후조종을 받아 시위에 나선 어리석은 학생들로 전락할 뻔했던 것이다. 이어진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몰락해서 망정이지 성남고 학생들은 자칫 치명적인 위기에 처할 뻔했다('동작 사람들, 4·19혁명에 앞장서다',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
 
4.19혁명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은 이후 1960년대 내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성남고생들을 중심에 세우는 역할을 한다. 
 

3.17 의거 기념비 1993년에 3.17 의거의 주역이었던 성남고18회 동문들이 기존 기념탑 옆에 세웠다. 그런데 최근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철거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남고 총동문회에서 김명수 이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규탄대회를 열기도 했다.
▲ 3.17 의거 기념비 1993년에 3.17 의거의 주역이었던 성남고18회 동문들이 기존 기념탑 옆에 세웠다. 그런데 최근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철거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남고 총동문회에서 김명수 이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규탄대회를 열기도 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성남고생들,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운동에도 앞장서다
 
성남고 학생들은 한일회담 반대 운동에도 선두에 선다. 1964년 5월 데모 학생들의 영장기각에 불만을 품은 공수단 소속 무장군인들의 법원 난입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재학생 1200여 명이 참석하여 '법원침입 군인에 대한 모의재판'을 여는 등 고교생들로서는 처음으로 규탄시위에 나선다.

1965년에는 6월에는 "한일협정 비준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노량진 삼거리와 한강대교 입구까지 진출해 경찰과 대치하기도 한다(이 이야기는 나중에 '노량진길'에서 자세하게 소개할 예정이다).
 
1967년에는 500여 명의 학생들이 투석전을 벌이면서 6.8부정선거규탄 투쟁에 나서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영등포구청까지 진출했다가 1시간 만에 해산한다. 1969년에는 박정희의 장기집권 기도인 삼선개헌에 맞서 개헌반대운동을 벌이다 12일간 휴교령이 떨어지기도 한다.
 
"선생님들 힘내셔요!" 1980년대 교육민주화운동에도 앞장선 성남고생들
 
이러한 성남고생들의 민주화운동 전통은 1980년대에도 이어진다. 1989년 2월 성남고에서는 교사 2명에 대해 교사협의회 활동을 이유로 중학교로 전보발령을 내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3월 6일 1800명 성남고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수업을 거부하고 농성을 벌이면서까지 부당인사 조치 철회를 요구한다. 학생들의 시위는 8일까지 이어진다. 이에 앞서 '성남교육 교사협의회' 소속 교사 23명은 3월 1일부터 부당인사조치 철회와 김윤근 이사장의 퇴진 등 4개항을 요구하면서 여러 날 밤샘 농성을 벌였다. 결국 재단 측은 부당인사 조치를 철회하게 된다.
  

성남고 학생들의 시위 소식을 전하는 언론 기사(1989. 3. 7, 한겨레신문) 성남고 학생들은 교사협의회 활동을 이유로 2명의 교사가 성남중학교로 강제 전보되자 이에 항의하여 수업거부와 농성을 벌였고, 끝내 승리하였다.
▲ 성남고 학생들의 시위 소식을 전하는 언론 기사(1989. 3. 7, 한겨레신문) 성남고 학생들은 교사협의회 활동을 이유로 2명의 교사가 성남중학교로 강제 전보되자 이에 항의하여 수업거부와 농성을 벌였고, 끝내 승리하였다.
ⓒ 한겨레신문

관련사진보기

성남고에는 "교육민주화의 의지를 다짐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성남교육 교사협의회 일동' 이름의 표석이 설치돼 있다.

부끄러운 성남고 설립자들, 원윤수와 김석원
 
그런데 이러한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성남고도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성남고의 설립자는 원윤수(1887~1940)와 김석원(1893~1978)이다. 원윤수는 텅스텐 광산에서 큰돈을 번 광산재벌로 일본군을 위해 쌀 3000석과 군용기 '경기호' 제작에 1000원을 헌납하기도 한 대표적인 친일기업인이다.

김석원은 일본육사를 나와 일제의 만주침략과 중일전쟁에 부역해 '전쟁영웅'으로 미화되면서 '일본군국주의의 화신'으로 불리기도 한 인물이다. 전쟁에서 돌아와서는 전국을 돌며 군사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들이 성남고보를 만든 이유를 동작구청은 <동작구지>(1994)를 통해 "광복의 원동력이 될 인재양성을 위해서는 민족학교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자각"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설립 당시 발행된 <매일신보>를 보면 성남의 교장은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한' 아베 요시오(安倍良夫) 일본군 소장이었고, "이 학교는 육군사관학교의 준비교가 되도록 하는 특성을 가지고 '데뷰'하게 되었다"라고 소개돼 있다.

실제로 성남 출신의 학생들은 일본 육사나 군사학교에 다수 진학하는데, 1943년 한 해만 해도 일본육사(예과)에 3명, 육군유년학교에 3명, 항공학교에 1명, 경리학교에 1명 등 총 8명이 지원한 실정이었다(<매일신보>, 1943. 6. 30). 1944년에 부임한 성남의 2대 교장도 일본인 우지에(氏江富雄)이었다.

지역의 유지와 지방자치단체와 야합하면 역사가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동작구청은 2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러한 역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개정판 발간 계획조차 세우지 않고 있다. 
 
성남고의 아픈 역사는 해방 73주년이 되는 지금에도 성남고 교가에 그대로 남아 있다. 성남고 교가는 설립자인 친일파 원윤수와 김석원을 '원석두님'의 '크신 공덕'을 칭송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먼동이 터오니 온누리 환하도다'라는 가사가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을 칭송하는 뜻을 담고 있다는 의혹까지 나온 상황이다.
  

성남고 교가비 먼동이 트니이 온누리 환하도다 
환한 이강산에 원석두님 나셔서
배움의 길 여시니 크신 공덕 가이 없네 
성남 성남 무궁탄탄 할지어다
▲ 성남고 교가비 먼동이 트니이 온누리 환하도다 환한 이강산에 원석두님 나셔서 배움의 길 여시니 크신 공덕 가이 없네 성남 성남 무궁탄탄 할지어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이렇듯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가사를 담은 '교가비'가 교정에 '당당히' 서 있는 것도 참으로 어색하다(관련 기사 : '일본 천황 찬양 교가, 한국 맞아?'). 성남고에는 2002년까지 설립자 김석원의 흉상이 설치돼 있었으며, 김석원의 무덤은 지금도 교정 안 뒤편에 있다.
 

성남고가 들어서 있는 자리는
성남고는 1938년 이태원에서 성남고등보통학교로 출발했다. 원래는 용산고보로 신청하였으나, 조선총독부에서 학교 명칭 정비방침에 따라 용산중학교가 이미 있는 상황이어서 성남고보로 바꿀 것을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성남고보는 곧 성남중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1941년에 대방동으로 이전했다. 

원래 성남고 운동장이 있던 자리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용마(龍馬)가 우물에서 나와 뒷산으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성남고 뒷산의 이름이 용마산으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 

성남고 자리에는 공민왕 때 문신 서견의 무덤이 있었다. 서견은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은거한 인물인데, 한양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서견의 무덤은 조선총독부의 경성부 정비 방침에 따라 1940년 경기도 의왕(내손동)으로 이장됐다. 인근에 있던 숙종의 여섯 번째 아들 연령군 묘와 연령군의 어머니 명빈(박씨) 묘도 있었는데, 마찬가지 이유로 충남 예산으로 이장됐다.

일제 강점기 성남고 일대는 군사훈련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1942년(5월 21일) 경성제대, 경성의학전문 등 11개 대학과 전문대 학생 5000명이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모의 군사훈련을 한 곳이 바로 성남고 일대였다.

도림리(지금의 신도림동)에 결집하여 경성으로 항하는 서군과 한강인도교 아래 사장에 집결하여 서군의 진격을 저지하러 떠나는 동군은 성남고 뒷산 '83고지'(용마산 정상)를 둘러싸고 치열한 가상 전투를 벌이는데, 이 광경을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까지 나와 직접 참관했다(<매일신보>, 1942. 5. 22).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4749




'동작 민주올레' – <대방길> 5회

▶ 코스안내 : ①서울영화초 - ②영등포고 - ③유일한기념관 - ④실미도 사건의 현장 - ⑤캠프 그레이 미군기지 터(미군 502군사정보단) - ⑥서울시립부녀보호소 터 - ⑦공군기념탑 - ⑧숭의여중고 - ⑨성남고 - ⑩서울공고

공군기념탑을 지나 남쪽으로 더 가면 도로로 끊어진 산등성이를 잇는 오작교가 나온다. 숭의여중고로 가기 위해서는 도로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게 좋다(오작교를 지나 산등성이를 타고 계속 가도 숭의여중고 정문으로 갈 수 있다). 길을 따라 남도학숙을 지나면 숭의여중고가 나온다.

⑧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러낸 숭의여중고
   

숭의 역사관 숭의여고 교정에 있는 '숭의 역사관'에는 권기옥 선생 등 숭의 출신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도 전시되어 있다.
▲ 숭의 역사관 숭의여고 교정에 있는 "숭의 역사관"에는 권기옥 선생 등 숭의 출신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도 전시되어 있다.
ⓒ 최서희

관련사진보기


    
1903년 평양에서 미국 북장로회가 건립한 미션스쿨 숭의여학교로 출발한 숭의는 말 그대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다. 그런 숭의가 대방동에 자리 잡은 것은 개교 100주년에 즈음한 2003년이다.

송죽회 그리고 조선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

ad

숭의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학교로 유명하다. 송죽회(1913, 松竹會)는 숭의여학교 교사와 학생으로 이뤄진 비밀결사조직이었다. 교사 김경희와 황에스터를 비롯하여 졸업생 안정석, 재학생 황신덕, 박현숙, 채광덕, 이마대, 이효덕, 송복신, 김옥석, 최자혜, 서매물 등이 조직원이었다.

송죽회는 망명 지사의 가족을 돕고 독립군의 자금 지원 활동은 물론, 참여자들의 실력함양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중 박현숙은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한 학교를 해방 후 재건한 인물이다.

숭의가 낳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권기옥(1901~1988)은 영화 <암살>의 주인공 안옥윤의 역할 모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녀 역시 송죽회의 조직원이었으며, 조선인 최초의 여성비행사이기도 했다. 숭의여학교 재학 당시 동료들과 함께 3.1혁명에 참여하여 3주간 구류를 살았고, 평양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 체포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권기옥은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1923년 임정의 추천을 받아 윈난 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해 비행사의 꿈을 가꾼다. 권기옥이 비행사가 되기로 한 것은 '비행기술을 배워 조선총독부와 일본에 폭탄을 투하하겠다'는 포부 때문이었다. 그녀는 1925년 중국군의 펑위샹 부대 휘하 공군에서 비행사로 복무한다.

권기옥은 1928년 독립운동가 이상정과 결혼했는데, 이상정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이상화 시인의 친형이기도 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충칭에 있는 장개석의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으로 활약하기도 한다. 1943년에는 김순애, 방순희, 최선엽, 최애림, 최형록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직할 한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해 사교부장(社交部長) 등으로 활동한다.

어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이끌림이 있었던 걸까? 한국 공군의 어머니라고 불릴만한 인물을 배출한 숭의여중고가 33년간 공군본부로 있던 대방동으로 이전한 것은 단순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신기하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권기옥의 묘 묘비 하단의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라"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보훈처는 영화 <암살>이 나온 이후 묘비명문을 교체하였다. 새삼 영화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권기옥의 묘 묘비 하단의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라"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보훈처는 영화 <암살>이 나온 이후 묘비명문을 교체하였다. 새삼 영화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강경애, 식민지 시대 하층 여성을 대변하다

식민지 시대 하층 여성의 대변자 역할을 한 당대 최고의 소설가 강경애(1906~1944)는 숭의여학교에 다니다 중퇴했다.

강경애는 숭의여학교에 다니던 1923년 10월 기숙사 학생들이 주축이 되는 동맹휴교를 주도한다. 추석을 맞아 기숙사 사감이 동료의 묘소 참배마저 우상숭배라며 가로막았다. 학교 측의 지나친 통제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학생들이 "기숙사는 감옥이 아니다"라고 반발하며 동맹휴교로 맞선다. 한 달간 지속된 이 동맹휴교로 기숙사 사감 라진경이 물러나는 대신 강경애 등 4명은 퇴학당한다.

강경애는 식민지 시대 뛰어난 작품 활동에도 불구하고, 대표적인 친일 문학인 노천명의 '고상한 작품'인 <사슴>은 교과서에 등장할 수 있을지언정, 강경애의 식민지 하층 여성이 일제에 맞선 노동운동에 나서는 이야기를 다룬 <인간 문제>나 만주에서 생계를 위해 소금 장수에 나선 한 여성이 겪는 고난과 그 가까이에 있는 항일 독립운동가 이야기가 담긴 <소금> 등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강경애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김좌진 장군(1889~1929)의 암살범 박상실의 배후 인물로 알려진 김봉환(일명 김일성)과 내연관계였다는 소문 때문이 더 컸다. 

문제의 승려 출신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김봉환은 김좌진 암살 사건 직후 김좌진 측의 이붕해에게 살해당한다. 하지만 소문 여부를 떠나 최근 조선족 출신 작가 유순호의 심층 취재에 의하면 김좌진을 암살한 인물 박상실은 김봉환과 무관하며, 박상실은 공산주의자 이복림(본명 공도진, 1907~1937)과 동일 인물이었다고 한다. 민족주의계 독립운동 진영과 사회주의계 독립운동 진영간의 갈등 과정에서 완고한 반공주의자였던 김좌진이 암살당했고, 김봉환 역시 그 희생양이 됐다는 것이다(<만주 항일 파르티잔-잊혀진 독립운동가 허형식>, 선인, 2009).

이복림은 이후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는데,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37년 전사한다. 강경애는 애시당초 김좌진 암살 사건과는 무관했던 것이다.  

만주에서 주로 작품 활동을 한 강경애는 <인간문제> <지하촌> <소금> <원고료 이백원> <어둠> 등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겼다.
   

숭의여교생 맹휴 숭의여고생의 맹휴 소식을 알리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1923. 10. 18)
맹휴를 주도한 강경애는 동료 학생 3명과 함께 제적당한다.
▲ 숭의여교생 맹휴 숭의여고생의 맹휴 소식을 알리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1923. 10. 18) 맹휴를 주도한 강경애는 동료 학생 3명과 함께 제적당한다.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해방 이후에도 민족운동에 나선 숭의여고생들 

해방 이후에도 숭의 학생들은 선배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운동에 나섰다.
 

숭의여고의 한일회담비준반대 투쟁 기사 (경향신문, 1965. 6. 26)
▲ 숭의여고의 한일회담비준반대 투쟁 기사 (경향신문, 1965. 6. 26)
ⓒ 경향신문

관련사진보기



   
숭의여고학생들은 1965년 한일회담반대운동이 계속될 당시 휴교령이 철폐된 6월 26일에 학교 강당에서 1500여 명이 참석해 비준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한다('숭의여고생들 성토', <경향신문>, 1965. 6. 26).
   
1974년 8월 29일 국치일을 맞아서는 시내 경복, 휘문, 중앙 등 11개 학교 학생들과 함께 일본규탄대회를 추진한다. 장충공원과 서울운동장 앞에서 진행하려던 이날의 시위는 경찰과 학교 측의 제지로 1800여 학생들이 뿔뿔히 흩어져 장충체육관 앞에 300명, 퇴계로6가에 200명 정도가 모였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되고, 1천여 학생들은 남산순환도로를 통해 국립극장 쪽으로 나가다가 경찰의 제지망을 뚫지 못하고 학교로 되돌아온다.('중고생 데모 유산', <경향신문>, 1974. 8. 29).

숭의여고에는 숭의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숭의 역사관'이 있는데, 독립운동의 역사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함께 한 숭의여고의 역사는 담겨 있지 않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번대방정에 살던 보통 사람 평전영은....
일제 강점기 철도국 직원으로 번대방정에 살던 평전영(平田榮, 1923년생)은 1945년 3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징역 10월에 처해진다. 평전영의 죄목은 "대동아 전쟁 시기에 사람들의 마음에 혹란을 유발하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안녕 질서에 관한 죄>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당시 판결문(소화19년 형공 제3755호)을 보면 구속되기 5개월 전인 1944년 7월 중순에 경성역 구내 남원 방향 전철수 대기소에서 동료들과 잡담를 나누다가 "우연히 이야기가 큐수 폭격에 미치자"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장개석의 부하로 조선인 중에 김일성이라는 위대한 사람이 있다. 김일성은 일본인, 중국인, 러시아인, 미국인 등 상당수 부하들을 거느리고 옛 의적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김일성은 학력도 있고 덕망도 있다. 김일성은 소련과 연락하면서 일본에 대항하고 있다. 김일성 말에 의하면 미국 비행기는 일본 본토를 폭격하더라도 조선은 폭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조선인은 안심하고 살아도 괜찮다."
 
당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조차 폐간된 상황이었고, 민심이 흉흉한 속에서 오로지 풍문으로 듣는 이야기가 은밀하게 전해지던 시기였다. 당연히 내용은 100% 정확한 정보를 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평전영이 전한 김일성은 장개석 부대에 있던 김홍일 장군의 이미지와 중첩되어 있다.
 
보통 사람 평전영은 이미 창씨개명까지 한 총독부 철도국 직원이었지만, 민족의식은 결코 죽지 않고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민중들은 위와 같은 이야기를 동료에게 전하면서 조선의 해방에 대한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평전영으로부터 이 말을 전해들은 백천흥식(白川興植)은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또 이야기했던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퍼져나가던 끝에 구체적인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어느 시점에 일제 경찰의 귀에도 들어갔다. 결국 평전영과 백천흥식은 일경에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신세가 되었고, 함께 직역 10월에 처해졌다.
 
일제 강점기 막판 1940년대는 마치 1980년대 '유언비어 유포죄'로 구류도 살고 구속도 되고 하던 상황과 대단히 유사했던 것이다.






'동작 민주올레' – <대방길> 4회

▶ 코스안내 : ①서울영화초 - ②영등포고 - ③유일한기념관 - ④실미도 사건의 현장 - ⑤캠프 그레이 미군기지 터(미군 502군사정보단) - ⑥서울시립부녀보호소 터 - ⑦공군기념탑 - ⑧숭의여중고 - ⑨성남고 - ⑩서울공고

ad

이제 서울시립 부녀보호소 터(서울여성플라자)를 뒤로 하고 '공군 기념탑'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방공원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대방공원으로 향하는 서울여성플라자 뒷길의 이름이 특이하고 낯설다. 알마타길.

동작구가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타(알마티)와 교류한 것을 기념해 도로명을 말마타길로 했다고 한다. 카자흐스탄은 우즈베키스탄과 더불어 고려인이 많이 사는 나라다. 봉오동 전투의 항일 영웅 홍범도 장군,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계봉우 등이 지금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중앙공동묘역에 묻혀 있다.  

대방동 주변은 지금도 군부대 시설이 남아있고, 군인 아파트도 있다. 6.25 한국전쟁 이후 공군본부와 해군본부가 자리 잡다보니 군인들도 많이 살았고, 그중에는 한국 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도 여럿 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당시 한강을 제일 먼저 건넌 공수특전단(단장 박치옥)의 대대장이었던 김제민 중령, 1973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주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니 이제 형님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가 쿠데타 모의 혐의로 군복을 벗고 감옥에 가는 '윤필용 설화 사건'의 윤필용(당시 수도경비사령관), 박정희 유신독재의 몰락을 알리는 총성을 울린 '10.26 사건' 당시 박흥주(비서실장)와 더불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박선호(의전과장)도 대방동에 살았다. 군인들이 주도하던 시절 대방동은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동작구청은 잘못된 푯말을 계속 방치하고 있는 걸까?

공원 입구에 도착하니 동작구청이 설치한 안내판이 우리를 맞이한다. 대방동을 소개하는 안내판이다. 동작구청은 '충효길'을 따라 이런 안내판을 여럿 설치해 놓았다. 동작구청은 동작구의 둘레길을 '충효길'이라고 부르는데,  이름부터 구태의연하고 시대에 뒤쳐진 느낌을 준다.   

그런데 설명을 자세히 보니 "일제 때 번대방리라 일컫다가 광복후 대방동으로 부르게 되었다"라고 돼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번대방이라는 명칭은 이미 정조의 화성행차 때에도 확인된다. 조선후기 내내 번대방리로 불리다 1936년 이곳이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행정구역상 번대방정으로 바뀌었고, 해방 이후 대방동이 됐다.

동작구청이 동작구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여러 차례 관련 자료까지 제공하면서 바꿀 것을 요청했음에도 동작구청은 "전문가를 통한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라면서 잘못된 내용을 몇 년째 방치하고 있다. 동작구청이 '충효길'을 따라 설치한 이런 안내판 중 잘못된 부분은 이것 말고도 여럿 더 있다. 
  

동작구청이 설치한 대방동 이야기 푯말 동작구청은 '충효길'을 따라 이런 푯말을 여러개 설치해 놓았는데, 여기 말고도 잘못된 내용을 담은 푯말이 여럿 있다.
▲ 동작구청이 설치한 대방동 이야기 푯말 동작구청은 "충효길"을 따라 이런 푯말을 여러개 설치해 놓았는데, 여기 말고도 잘못된 내용을 담은 푯말이 여럿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⑦ 한국 공군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는 '공군 기념탑'
  

공군 기념탑 대방동에 공군본부가 있었던 사실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 공군 기념탑 대방동에 공군본부가 있었던 사실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대방공원 정상에 오르면 '공군 기념탑'이 있다. 이 일대는 과거 33년 간(1956~1989년) 공군본부가 있던 곳인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공군 기념탑'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공군본부는 1989년(7월 18일) 충남 계룡시의 계룡대로 이전했다.

대한민국 공군의 뿌리를 찾아서

대한민국 공군은 육군과 해군보다 늦은 1949년 10월 1일 창군된다. 이때부터 육·해·공 3군 체제가 성립되는데, 이를 기념해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삼았다. 일부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38선을 처음 돌파한 날인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삼았다고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국군의 날을 처음 정한 1956년 당시까지도 38선을 처음 돌파한 날로 3사단 사령부가 38선을 넘은 10월 2일을 중시했다(<국군의 날은 '현대식 3군 체제' 완성된 날>, <국방일보>, 2017. 9. 10).

현재 공군은 자신의 역사를 1919년 3.1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논의된 비행대 편성 기획과 그에 따라 1920년 미국 윌로우스 비행학교 안에 설립·운영한 한인 비행학교에서 그 뿌리를 찾고 있다. 이때부터 공군이 정식으로 창설된 1949년 10월 1일 직전까지를 공군의 태동기로 설명하고 있음은 대한민국 공군 홈페이지(www.airforce.mil.kr)와 공군박물관(충북 청주시)의 공군 역사관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1995년에 세워진 '공군 기념탑'에서는 비록 6월 민주항쟁 이후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가 한참 진행 중이던 상황이었음에도 공군의 역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부터 찾으려는 새로운 시도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기념탑에 부착돼 있는 설립 취지 동판에는 1949년 10월 1일 이후의 역사만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친일파 김정렬(초대 참모총장) vs. 독립운동가 최용덕(2대 참모총장)

'공군 기념탑'에는 역대 공군참모총장 명단이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국 공군의 성립과정과 그 면모를 알 수 있다.
 

'공군 기념탑'에 새겨진 역대 공군참모총장 동판에는 1대 참모총장 김정렬, 2대 참모총장 최용덕 등의 이름과 재임 기간이 새겨져 있다.
▲ "공군 기념탑"에 새겨진 역대 공군참모총장 동판에는 1대 참모총장 김정렬, 2대 참모총장 최용덕 등의 이름과 재임 기간이 새겨져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초대 공군참모총장 김정렬(1917~1992)은 일제 강점기 일본육군사관학교 항공과(1941)와 아케노 비행학교 갑종과를 졸업(1943)하고 일본군의 비행중대장과 비행전대장으로 일본군 비행기부대를 이끌고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인물이다. 김정렬은 3대 공군참모총장도 지냈다. 5대 참모총장 김창규(1920~ ) 역시 일본육사 항공과를 졸업(1942)한 일본군 대위 출신으로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을 상대로 '맹활약'한 인물이다.

반면, 2대 참모총장 최용덕(1898~1969)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출신이며, 6대 참모총장 김신(1922~2016)은 백범 김구의 둘째 아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특히 최용덕은 한국청년독립단(1919)과 의열단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중국혁명군 항공부대 장교를 거쳐 한국광복군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1943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 공군창설을 건의하고 공군 창설을 추진한 인물이기도 하다. 1946년 7월에 귀국해 난립해 있던 항공 관련 단체의 통합을 주도한 인물도 최용덕이었다. 최용덕은 '한국항공건설협회'를 창립(1946. 8)하여 초대 회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초대 공군사령관에 한국광복군 출신의 최용덕이 아니라 일본군 출신의 김정렬이 임명된 것은 해방 이후 한국군 창설 과정이 일본군과 만주군 중심으로 추진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4대 참모총장 윤자중, '80년 민주화의 봄'이 "월남과 흡사"하다고? 

역대 공군참모총장 중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하는 인물이 더 있다. 바로 14대 참모총장 윤자중(1929~2017)이다.

윤자중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참모총장이었다. 그는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의 정치개입을 결정한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군이 적극적으로 나가서 고쳐야 할 때입니다, 월남과 흡사하며 초기단계입니다, 월남은 학생들이 공산당이었습니다"라고 발언해 '80년 민주화의 봄' 상황을 왜곡하고 전두환을 적극 지지한 인물이다.
 

윤자중 14대 공군참모총장 윤자중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다.
▲ 윤자중 14대 공군참모총장 윤자중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다.
ⓒ 대한민국 공군

관련사진보기

최근에는 한 언론에, 윤자중이 1980년 5월 21일경 수원 비행장 비행사들에게 "공대지 무장을 장착하고 출격 대기를 지시"했다는 증언이 당시 공군 장교의 입을 통해 나와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는 새로 출범할 '5·18 진상조사특위'에서 밝혀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동작 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뿌리 '시흥농민봉기'
시흥농민봉기는 1898년과 1904년 두 차례에 걸쳐 경기도 시흥군에서 발생한 농민봉기를 말한다. 1898년의 1차 봉기는 전임군수 문봉오의 가렴주구와 향리들의 비리에 맞서 일어났고, 1904년의 2차 봉기는 일본의 병참 기지와 경부철도 건설을 위한 역부 강제 모집에 대응하여 역부 모집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이의 중지를 요구하면서 일어났다.
 
남면 집강 성우경 등이 주도하고 시흥군 6개면 42개 동리 전반이 봉기에 참여한 농민봉기에는 당시 경기도 시흥군 하북면에 속해 있던 번대방리 사람들도 함께 한다. 번대방리 사람들은 집강 김회상을 중심으로 봉기에 참여했다.

시흥농민봉기에는 동작구의 다른 지역 사람들도 참여한다. 시흥군 동면에 속해 있던 상도리와 성도화리(지금의 상도동) 사람들, 시흥군 하북면에 속해 있던 고사리(대방동), 우와피리(신대방동) 사람들이 그들이다. 성도화리 집강 신동희, 상도리 두민(頭民, 우두머리 백성) 강희, 번대방리의 집강 김회상, 우와피리 집강 이용 등은 봉기의 주모자 중 하나였다.
 
두 차례의 시흥농민봉기는 각 면과 리의 집강이 주모자가 되어 사발통문으로 향회(민회)를 개최하여 주민의견을 수렴하는 형식을 빌려 각각 수천 명의 참여를 조직했다는 점, 제2차 시흥농민봉기의 경우 일제의 침략에 맞선 시흥 군민의 항일 의식이 강하게 표출된 사건이라는 점, 역부 모집의 부당성을 언론(황성신문)을 통해 대외에 알리고자 하였다는 점 등에서 근대적인 농민 의식의 성장을 엿볼 수 있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동작 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전통은 시흥농민봉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4587





+ Recent posts